레닌과 일리야를 비롯한 소회의의 참석자 일곱 명이 대회의장에 들어섰다. 일리야는 난장판 그 자체인 대회의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의자와 기둥에 부딪히지 않게 지팡이로 앞쪽의 사물을 툭툭 건드리며 걷던 그는 솔제니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회의장에 울리자 고개를 돌렸다.
“정 안된다면 붉은 군대가 먼저 움직이고 사후 허가를 받겠습니다! 내 병력을 이동시키겠습니다!”
“누가 무슨 허가를 받는다고?”
솔제니친의 말을 끊은 것은 레닌이었다. 일리야를 제외한 소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상석에 앉은 레닌은 회의장 안쪽을 둘러보았다. 공산당 중앙위원을 비롯한 지도부는 솔제니친을 두려움 반, 분노 반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스클랸스키와 안토노프오브셴코를 비롯한 트로츠키파는 이 상황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지 고민하는 듯했다. 한편, 솔제니친과 바체티스, 카메네프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지휘관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 병력이라고 했소, 솔제니친 사령관 동무?”
그러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물론이고 연립정당의 수뇌부들이 일순 한꺼번에 대회의장에 들어오자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솔제니친은 당당한 표정이었지만, 눈치 빠른 바체티스는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레닌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솔제니친 동무. 묻겠소.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에 ‘동무의 병력’이 있소?”
“저는 저와 함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병사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붉은 군대의 군정권자가 누구요?”
“...군사위원 트로츠키 동무입니다.”
“군령권자는 누구요?”
“최고사령관 바체티스 동무입니다.”
“그렇다면 통수권자는 누구요?”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는 인민의 군대이기에 혁명군사위원회가 통합적인 통수권을 가집니다.”
“그런데 왜 동무의 병력이 있다는 거지?”
레닌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에서 솔제니친에 대한 분노나 안타까움 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기양양하던 위원들도 레닌이 딱히 솔제니친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솔제니친 동무. 내 말 명심하시오. 나나 트로츠키 동무는 어떠한 원색적 비난을 들어도 동무에게 원한을 품지 않소. 그리고 동무가 어떠한 급진적 행위를 하든, 그게 소비에트를 위한 것이란 걸 늘 명심하고 있고.”
솔제니친은 말없이 레닌을 바라보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동무가 아무에게나 비난하며 혁명을 사유화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오. 동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으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소.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솔제니친 동무 자네가 그리도 미워하는 트로츠키 동무와 별반 다르지 않소. 이해하겠소?”
레닌은 그렇게 말하고는 트로츠키를 바라보았다. 트로츠키와 솔제니친 모두 불만을 숨기지 않았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트로츠키 동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군사위원인 동무의 의견을 따르지.”
“솔제니친 동무는 빛나는 군사적 업적과 뛰어난 지략을 가진바, 합동군사참모대학에서 종심돌파이론이라 명명된 군사교리를 완성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딜 봐도 좌천이라 보기 어렵고 오히려 우대에 가까운 인사이동에 회의장 내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솔제니친은 야전사령관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붉은 군대 전체에 종심돌파이론을 적용할 기회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받아들이겠소, 동무?”
“예, 수상 동무. 붉은 군대를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렇군.”
레닌은 그렇게 말하고는 비서가 가져다준 물을 한 컵 마셨다. 그리고는 극소수의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마디만을 지나가듯 했다.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체스는 적당히 두고.”
*
대회의장에서 악셀로드의 정체만 숨긴 채 칸네기서를 제국군 잔당으로, 카플란을 정신이상자로 발표한 일리야는 지팡이를 턱턱 짚으며 회의장을 나섰다. 때마침 트로츠키에게 혼나고 풀 죽어 기둥에 기대어 있던 표트르가 일리야를 발견하고 반색하며 다가왔다.
“아니, 표트르. 왜 판다가 되었습니까?”
“어, 판다는 뭐 음식 이름이오?”
“재작년에 독일 생태학자가 중국에서 발견한 곰인데, 얼굴은 하얀데 눈가만 새까맣게 생겼습니다.”
일리야는 누군가에게 맞아 살짝 멍이 든 듯한 표트르의 눈가를 바라보았다. 이 거한이 대체 누구에게 맞았길래 얼굴이 저렇게 되었는지 일리야는 내심 궁금했다.
“아, 그 블류헤르라는 군인하고 대판 붙었는데, 레닌 동무 오기 전에는 솔제니친하고 다른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가서 반동 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소.”
“그렇습니까.”
일리야는 별걱정 없다는 태도로 느긋하게 걸을 뿐이었다. 며칠 전에 총에 맞는 사람이라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에 표트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블류헤르 콧수염을 다 뽑아버렸는데 기념품으로 가져가실라오?”
일리야는 그 말 결국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트로츠키의 충실한 심복이 회의장 안에서 어떤 난리를 쳤을지 대충 감이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 갈 거요, 형. 오늘 회의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아. 기다리는 사람이 좀 있어서.”
“누구길래….”
표트르가 그렇게 말하던 와중 군용 트럭이 달려와 회의장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샤홉스카야와 조수석에서 내리는 스밀가를 본 일리야는 환하게 웃었다. 코안경을 한번 올려 쓴 스밀가는 일리야와 악수를 했고,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도 피 냄새를 약간 풍기는 샤홉스카야는 표트르를 보고 적수를 만났다는 듯 대치하며 섰다.
“아니, 샤홉스카야 동무. 표트르 동무는 엄연히 당원이니 진정하시오.”
상황을 깨달은 일리야가 이리저리 말하며 수습하려는 순간, 표트르는 갑자기 튜닉의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 콧수염 뭉치를 샤홉스카야에게 건넨 표트르가 씩 웃자, 샤홉스카야도 따라 웃었다. 스밀가와 일리야는 그 광경을 한번 보고는, 서로를 보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서, 혁명군사위원회에서 저를 왜 찾는답니까?”
“붉은 군대 내의 정치위원들을 통제할 조직을 혁명군사위원회 산하로 재편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 군사부위원 유레네프 동무가 지금 정치위원장이랬죠. 어떻게 바뀐답니까?”
“총정치국이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공보정훈 임무를 맡는 정치위원들을 확실하게 일괄 통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마 스밀가 동무도 들었겠지만, 이번에 붉은 군대 사령관들이 월권행위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다행히 실제로 일어나지는 못했지만요.”
“그렇다면 정치위원을 중앙통제해서 붉은 군대를 통제하겠다는 의미인데, 프랑스의 파견위원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도부에서도 격론이 오갔습니다만, 총정치국장을 군사적 식견이 있으며 분파 투쟁에 휘말리지 않는 인사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스밀가는 자신이 급하게 핀란드에서 호출된 이유와 일리야의 발언을 듣고 두 눈을 깜빡였다. 직업적 혁명가를 자칭하는 볼셰비키로써 스밀가 또한 이 정도 암시를 들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게 저입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총정치국장 동무가 되는 겁니다, 스밀가 동무.”
일리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번째 단계도 완료였다.
*
금세 회복된 일리야는 모스크바에 찾아온 블라디미르 볼스키와 전향한 트루도비키들을 환영하는 한편, 2년 뒤에 설립될 전러시아 정치협상회의의 가안을 짜기 시작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참여하는 정당과 정파만 8개였다. 상한 달걀을 한 바구니에 모아놓는다는 목표로 만들어질 전향 트루도비키의 위성정당과 사회혁명당, 사회민주노동당, 공산당, 유대인 노동총연맹과 일부 다른 노동조합, 그리고 레프 체르니가 대표하는 전러시아 아나키스트 연방,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등이었다.
일리야는 자신의 넓지만 친한 사람은 없는 인맥이 이때만큼 도움이 된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의 추가 후보군을 이리저리 떠올려보았다. 그러다 자연스레 정협의 지도부를 맡을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악셀로드가 대놓고 볼셰비키를 적대하였으니, 다른 멘셰비키 원로로 맞불을 놓는 게 맞다고 생각한 일리야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어가며 후보를 찾아보았다. 플레하노프와 자술리치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잉게르만은 볼셰비키를 너무 적대하며 칩거 중이었다.
자연스레 남는 것은 사회혁명당의 전신인 노동해방단의 창립자 중 한 명 남은 레오 데이치였다. 의장 후보로 레오 그리고리예비치 데이치라는 이름을 적은 일리야는 피식 웃었다. 표트르는 트로츠키의 경호원이고,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의 왼팔 안토노프오브셴코 덕에 공존할 수 있었다. 스밀가는 트로츠키와 스탈린과 친분이 있고, 사회혁명당은 대체로 트로츠키와 협력했다. 그리고 데이치는 바로 트로츠키를 이스크라 편집위원으로 올려준 사람이자 과거 트로츠키의 최고의 후원자였다.
‘트로츠키 동무는 성격만 좀 고치면 쉽게 최고지도자가 될 텐데 말이지.’ 일리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피식피식 웃다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그의 뒤통수에 열받은 줄리아의 손이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대낮부터 술 마셨어?”
“아니, 아니야. 차 마셨어. 아니 말로 하지?”
“그러면 방구석에 처박혀서 혼자 웃어대고 불러도 대답 없는 걸 참고 기다리라고?”
일리야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줄리아가 들고 있던 편지를 건네받았다. 미하일 리베르의 편지였다.
*
이바르스 스밀가는 실제로 혁명군사위원회 산하 초대 총정치국장입니다. 실제로 핀란드에 갔었고요. 네. 복선이었습니다.
첫댓글 막고라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고민해봤는데 정말로 그 싸움판이 나면 관련자들은 죄다 좌천이라 전개가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ㅋㅋ
???: 야이 반동노무시끼들아! 내가 t34(미완)를 몰고가서..
저 모든 사람을 끌어안았으면서도 지도자가 되지 못한 트로츠키 너란 남자...
막고라가 없어진게 아쉽지만 표트르는 완벽하게 바보가 됐네요. 완벽하게 어울린다(..)
은퇴 후의 루트가 완전히 바뀌었으니 그때를 기대해보시죠 후후
@렌지파일 왜 기대하라는 말이 걱정하라는 말로 보이는건지 ㄷㄷㄷㄷㄷ
이럼 현대화등이 좀더 빨리 구상되려나요?
사실 여기서나 RP에서나 레닌은 총을 맞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레닌이 좀 더 오래 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만(사인인 뇌일혈이 총상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저는 일단 지금이 완결 각이다 싶어서 원역사대로 23년 1월에 죽였는데(…), 여기선 어찌될 지 궁금하네요. ㅋㅋ
볼셰비키 혁명가들 평균 수명 볼때 70을 넘으면 장수한거라,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을 듯 합니다
@렌지파일 그럼 130살 산 저는 뭔가요? ㅋㅋ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ㅋㅋ 그래도 2세대(1880년이후)니까 장수해야죠 ㅋㅋㅋㅋ 라자르 카가노비치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처럼
@렌지파일 라자르 카가노비치... 많이 들어본 이름이군요.
@카라멜 마끼아또 중국 공산당 간부들도 중간에 숙청당하거나 하는 거 아니면 다들 오래 살더라고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