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리베르 동무.”
일리야는 담배 연기를 내뱉고는 그렇게 말했다. 평소 술·담배를 하지 않는 일리야는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용도로 둘을 이용하고는 했다. 적절한 상황에 이용되면 일리야에게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 불쾌감을 지적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좌절한 상대방은 마음이 무너지고는 했다.
“유대인 노동총연맹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조직으로써 소비에트 러시아의 법체계 안에서 활동할 것입니다. 저는 저에 대한 총격 사건과 유대노총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증언할 것이고요.”
일리야가 말하자 미하일 리베르와 아브람 곳츠는 고개를 떨군 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상황에 실망해서인지, 혹은 일리야의 뒤에서 미제 자동 산탄총을 든 샤홉스카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리야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문서를 리베르 쪽으로 좀 더 밀었다.
“여기 적혀있는 바대로, 저는 여러분과 유대노총의 모든 것을 존중할 겁니다. 유대노총은 유지됩니다. 리베르 동무는 위원장으로 유임됩니다. 물론 종교법에 따라서 각 종교기관의 재산에 대한 일괄 검사 및 등록이 이뤄지겠지만 대놓고 뺏어가고 시나고그를 부수지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저도 유대인이잖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때려 부수자는 지노비에프 동무도 유대인이잖습니까.”
“저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지요. 당중앙에서 유대노총을 옹호하는 건 저뿐입니다. 동무들도 아실 겁니다.”
일리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를 두들겼다.
“여러분으로선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정치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겁니다. 트로츠키 동무나 카메네프 동무를 제외하면 죄다 제 의견에 부정적입니다. 심지어 레닌 동무조차도 부정적입니다. 트로츠키 동무와 카메네프 동무도 그런 의견을 의식해 저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말입니다.”
리베르와 곳츠가 여전히 대답이 없자 일리야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으십니까?”
“아니, 충분히 되었소. 다만 충격을 좀 받아서 그렇소. 우스트랼로프 동무가 말하는 자유는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걸어 다닐 자유였군.”
곳츠가 항의하듯 말하자 일리야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다만 명심하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혁명가의 피 없이 자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볼셰비키의 피만 흘렀습니다.”
독재를 긍정하는 듯한 일리야의 발언에 곳츠와 리베르는 식은땀을 흘렸지만, 곧 일리야의 모든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야는 언제 협박을 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새로운 하수인들을 받아들였다.
*
전향 트루도비키와 유대인 노동총연맹, 그리고 사회민주노동당은 일리야를 지원하고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노골적으로 일리야를 찬양하는 내용은 아니었고 우회적인 수사에 불과했지만, 그러한 수사만으로도 자캅카스 문제를 막 논의할 채비를 하던 공산당 당중앙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직후 일리야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당 지도부의 노선을 철저하게 따를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상주의자 일리야가 기존 지도부와 아무리 사이가 나쁘든 지도부의 권위를 부정한 적은 없었다는 걸 아는 당중앙의 위원들은 내심 찜찜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권력의 핵심은 공산당이었고, 연립정당들이 뭉친다 해도 정권교체가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회민주노동당이 주장한 노총의 강화, 사회혁명당이 주장한 토지의 사회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한 소비에트 강화 등은 통과되고 러시아에 반포되는 과정에서 ‘레닌 인민위원회’의 업적이 되었다. 볼셰비키와 공산당이 다른 줄 아는 러시아인들의 낮은 학업 수준을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공산당이 모든 개혁정책의 기수처럼 지지를 독식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립여당들은 그 과정에서 점점 더 공산당과 밀착한 관계를 중시하는 정당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휴전협정, 휴전협정이 문제군요.”
“핀란드는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에서 언급되지 않은 지역이니 문제가 없었지만, 자캅카스는 다릅니다. 곤란하군요.”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에서 보낸 자캅카스 의회, 즉 세임의 문서에는 스테판 샤우먄과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비롯한 볼셰비키는 물론이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던 멘셰비키 카를로 치헤이제와 같은 거물급 인사들의 서명이 동봉되어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핀란드의 형태로 사회주의자 다수와 개량주의자 일부로 통일전선이 구축된 자캅카스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맞서 민족 갈등을 잠시 접어두고 대항하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은 붕괴 직전으로 러시아의 도움이 있다면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운명이며 각지의 반란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는 러시아 지도부는 문서를 두고 갑론을박에 빠졌다. 남부전선 총사령관이었던 솔제니친과 마찬가지로 남부전선 정치위원이었던 스탈린을 수신자로 온 편지는 누가 봐도 군사적인 개입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독일과의 휴전조약 때문에 자캅카스에 개입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어차피 자캅카스에 지원을 줘봤자 얼마나 주겠습니까. 적당히 목이나 축여 주고, 잘 되면 구슬려서 연방으로 포섭하고 안 되면 입을 닦아버리면 그만입니다.”
“설득하려면 유하게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브레스트 조약 당시 자캅카스를 넘긴 전적이 있습니다. 인제 와서 과한 걸 요구한다면 독립국을 선포해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스탈린과 카튜셰프가 연이어 의견을 내자 모두 어떻게 지원을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의용군의 형태로 지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비공식 지원이면 들켜도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유하게 나가는 문제의 경우, 군사와 외교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자치를 허용하고 장기적으로 사회안전과 통화까지 러시아와 통일하는 쪽으로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도 안토노프오브셴코 동무 덕에 거의 같은 방식을 도입해서 성공했으니까요.”
바레츠노프와 파우코이가 연이어 제안하자 다들 대놓고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용군을 보낸다고 하면 대체로 무장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병력을 보낼 수도 없단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파우코이의 계획안은 이론상으로는 훌륭했지만, 자캅카스 측에서 거부해버린다면 말짱 꽝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의용군 ‘모집’을 위한 선전문을 만들어야겠군요.”
카튜셰프는 교육위원 루나차르스키와 프롤레트쿨트 회장 보그다노프를 보며 말했다. 두 명 또한 카튜셰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캅카스면 고향 근처이니 언제든 내려가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소. 나한테 맡겨주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도와주겠소!”
군사적 분야에서는 주먹질이든 대전략이든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표트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캅카스의 내정 문서를 살펴보던 파우코이는 제르진스키와 귓속말을 나누고는 표트르를 따라 발언을 이어갔다.
“자캅카스의 복잡한 민족 및 정파 구성을 볼 때, 우스트랼로프 동무가 의용군의 정치위원으로서 합류하여 현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우스트랼로프 동무?”
“저는 좋습니다.”
대놓고 좌파와 우파가 내전을 벌이던 핀란드보다는 자캅카스의 사정이 훨씬 나은 것을 아는 우스트랼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캅카스에서 민족주의 세력은 아제르바이잔 쪽에서만 세가 좀 있었고 그런 아제리인 민족주의 세력조차도 여성참정권과 공화주의 등 개혁정책에는 찬동하는 자들이었다. 남의 나라 왕을 모셔오자는 왕당파나, 좌파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던 핀란드 백군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사나 다름없었다.
“다음 안건은 일본의 특사 관련된 안건입니다만, 표트르 동무와 우스트랼로프 동무는 필요하다면 바로 출발할 채비를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의견을 내셔도 좋습니다.”
“흠, 저는 출발하겠습니다. 표트르 동무, 가시죠.”
“그러자고, 형.”
일리야와 표트르는 회의장을 나왔다. 아직은 할 일이 많았다. ‘산탄총을 또 모아봐야겠군.’ 일리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캅카스인들을 어떻게 구워삶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프롤레트쿨트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만들자던 소비에트 러시아 초기 최대의 예술동맹입니다. 아방가르드 예술로 유명합니다.
트로츠키의 왼팔 안토노프오브셴코가 아나키스트와의 협상을 주도한건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양반이 입지를 잃고 나서 흑군-적군 동맹이 깨지고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이 진압되어버립니다.
오늘은 바빠서 좀 짧았네요.. 일본과의 협상 파트는 안 짤렸으니 걱정 마세요!
첫댓글 이번 화는 꽤 늦게 올라왔네요?
+ 야 스탈린. 그런데 캅카스는 니 고향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는거야?
모여라...우스트랼로프의 아래로... 아.. 레닌은 뭔가 눈치챈거 같은데, 레닌의 심중을 모르겠네요 ㄷㄷ
서서히 밝혀집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요..대신 내일 두편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