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려타곤(懶驢 坤) 30-5
자욱한 황사가 날리는 황야였다.
얼굴이 새까만 때로 가득한 지저분한 몰골의 갓 열 살도 안되어 보이는 소녀가 그 황야에 외롭게 서 있는 초막 앞에 서 있었다.
"이 아이인가?"
"예, 어르신."
옆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만이 느껴질 뿐 그들의 모습은 뿌연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소녀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만이 들릴 뿐이었다.
"가자."
"이 어르신을 따라가거라. 그곳에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이런 다 찢어진 옷이 아니라 좋은 옷도 입고 편하게 살 수 있단다."
목소리는 그것으로 끝이 나고 장면은 바뀌었다. 어딘지 모를 거대한 건물의 안, 사방이 고요하고 사방은 어둡기만 한 그런 곳이었다.
"연매, 이것을 내가 가지고 가면 그들이 연매를 죽이려 들거야. 같이 도망치자."
누군가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그녀 역시 속삭였다.
"내가 이 자리를 비우면 당신은 도망칠 수 없어요. 먼저 가요. 당신이 힘을 얻으면 날 구하러 와요."
"미안하오. 내가 강해지면---, 반드시 연매를 구하러 오겠오."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한 사람이 떠났다는 것만이 느껴지고 또 다시 장면은 바뀌었다.
자욱한 안개가 산하를 감싸는 새벽이었다.
하얀 소복 차림에 바위 위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산발한 여인은 안개로 보이지 않는 산 아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늙은 노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속을 아프게 파고 들었다.
"성지의 수호를 맡은 자로써 교를 배신하고 외인과 내통하여 성물을 유출시킨 죄 죽음으로써 속죄하라!"
머리 위에는 칙칙한 검은 색의 관을 쓰고 옷도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노인은 불같이 노한 음성으로 소리치고, 얼굴에 검은 두건을 쓰고 윗통을 벗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의 처형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만약 교내에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성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교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고개를 숙인 여자의 목을 향해 내리쳐졌다.
"깡!"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고 처형에 사용될 검은 하늘 높이 솟구치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검은 복면인이 튀어나와 한 자루 검을 들고 성녀의 옆에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잡아라! 멋들 하느냐?! 저 자를 당장 죽여버려라!"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바위를 둘러싸고 있던 다섯 명의 무사들은 두 눈에 혈광을 일으키며 갑자기 튀어나온 불청객을 향해 검과 도를 날리기 시작했다.
일대 육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고 복면을 한 그의 몸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혈선이 하나 둘씩 그어지기 시작했다.
복면인의 실력은 분명히 뛰어난 것이었지만 교의 최정예인 암흑전사단의 고수들을 다섯이나 상대할 실력을 가진 존재는 장로급이상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검은 부러지고 바닥에 넘어진 그의 몸은 넝마처럼 할퀴고 찢기어진 상처로 뒤덮인 혈흔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있는 그의 목 좌우에는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 넘길 것처럼 두 자루의 칼날이 바싹 붙어 있었다.
상처의 고통도 코앞으로 죽음이 다가온 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그의 두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안타까움에 가득 차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여인의 고개는 서서히 들어올려지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드리워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옥 같은 피부에 추수 같은 눈망울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교내의 모든 제자들이 우러러보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복면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 이 남자가 가엾기는 했지만, 이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챙 챙'
그리고 다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아련하게 산밑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산밑에서 누가 싸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절망의 끝에 서 있는 그녀의 고개는 다시 들어올려져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노인과 다른 여섯 명의 무사들의 시선 역시 산밑으로 향했다.
언뜻 언뜻 검은 그림자가 안개 위로 드러났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짙은 안개로 인해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파공음과 호통소리 그리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안개 속에서 한 사람이 튀어 올라와 그녀가 묶여 있는 바위 앞에 내려섰다.
"다---당신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그가 얼마나 격심한 격전을 치렀는지,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긴 옷과 피로 물들은 옷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혈인(血人)이 되어 이곳에 찾아온 마른 몸매에 삼십대 초반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내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는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땅에 박고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후에야 속삭였다.
"다-- 당신은 죄가 없소. 죽지 --- 죽지 마시오. 보란 듯이----,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보통 사람처럼 그렇게 살 권리가 당신에게--- 당신에게도-----."
힘겹게 속삭이듯 말하던 그 사내의 몸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슬픈 눈망울로 눈앞에서 죽어간 남자를 바라보던 여인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이 한마디만을 전해주기 위해 이 남자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도 이제 산 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와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래, 그가 오지 못하면 내가 가면 되는 거야!"
그녀는 소리쳤고, 그녀의 몸을 묶어놓았던 밧줄은 그 순간 조각조각 나서 땅으로 떨어졌다. "막아라! 너는 어디도 갈 수 없다! 이곳에서 죽어야 할 운명이란 말이다!"
검은 장포의 노인은 소리치고 검은 색 일색의 옷을 입고 손에도 검은 색 도를 들고 있는 다섯이 그녀를 둥글게 포위했다.
"비켜요, 난 갈 거예요!"
그녀는 소리치고 그 순간 그녀의 두 손은 백옥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하얀 소수가 천지를 뒤덮으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더니 또 다른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친 황사가 몰아치는 황야의 끝에 서 있는 그 커다란 대장간에는 수천 개의 칼이 벽에 걸려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그 아래 파란 불꽃이 일렁이는 화로와 그 속에 달구어지는 하나의 칼이 있었다.
"정녕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화로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그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여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언제나 이이와 함께 있을 거야. 이대로 죽는다해도 이이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게 될 거야.'
화로를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속의 외침이 분명히 방화련의 마음속으로도 들려왔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는 허리아래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잘라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건네주면서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정말로 행복해서 짓는 미소라는 것을 방화련은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화로 한 가운데 파란 불꽃에 휩싸인 채 둥실 떠올라 달구어지고 있는 칼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녀를 보면서 방화련은 계속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가 다음 순간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과 요란한 고함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그들이 오기 전에 검이 완성되어야겠군요."
여자는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을 방화련은 느낄 수 있었다.
"영원히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오."
남자는 말하면서 여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방화련은 그것이 그들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와 호통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여자는 남자를 밀어내면서 그대로 화로 속에 몸을 던졌다.
'안 돼!'
방화련은 비명을 내질렀다.
화로 속에 몸을 던진 여자가 느끼고 있는 고통이 그대로 방화련에게도 느껴지면서, 온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방화련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끊어졌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다른 인간의 영혼에 동화된 한 자루 붉은 검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검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 황야에 외로이 서 있는 그 외딴 대장간 주위로 수백명의 인간들이 그녀가 사랑했던 단 한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몰려들었다.
그리고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그 검은 갈라지고 갈라지고 갈라졌다.
무려 천개에 달하는 붉은 검의 형태를 띤 광채들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옆을 회전하면서 붉은 검의 폭풍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무너지고 파괴되어 갔다. 몰려든 인간들은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천개의 검으로 갈려져 있던 그녀가 다시 한 자루의 검으로 돌아갔을 때에 살아 있는 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단 한사람뿐이었다.
"약속하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겠소. 지금의 삶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기필코 저주받아 마땅할 물건을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겠소."
검이 된 그녀를 향해 검을 들고 황야 위에 홀로 서 있던 남자는 맹세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서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많은 장면들과 기억들이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떠올랐다. 환생을 거듭하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몸과 환혼경이라 불리는 거울을 얻기 위해 벌이던 일들---. 그녀가 사랑한 추혼검마는 자신의 일이 끝난 후 그 무엇으로도 쪼갤 수 없다던 환혼경을 열 여섯 개의 조각으로 부수는데 성공했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힘으로도 환혼경을 완전히 부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영혼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했지만, 천인천검이라 불리는 영혼의 검이 가진 위력을 알게 된 후세의 사람들은 환혼경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수십 번의 환생을 거듭하면서 계속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다시 태어나도 성녀라 불리는 여인의 삶을 반복해서 살아야 했다. 죽음으로도 천인천검이라 불리는 영혼의 검을 얻으려는 탐욕스런 무리로부터 그녀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방화련의 감겨 있던 두 눈이 살며시 뜨여지고 그녀의 눈에는 가슴에 금빛의 아수라가 새겨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한 무리의 인간들과 그들과 싸우고 있는 한 명의 반나체의 몸에 검은 강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한 인간이 보였다.
방화련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 서 있는 자신이 백초당의 방화련인지 마교의 성녀인지 헷갈렸다.
'나는 누구? 여기 서 있는 나는 누구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마교의 성녀이기도 하고 또한 백초당의 둘째딸 방화련이기도 했다.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한 순간 자신이 백초당의 둘째 딸 방화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생에 자신이 무엇이었건 여기 서 있는 자신은 방화련 이외에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있다간 또 다시 마교로 끌려가서 영혼의 자유를 잃고,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도 계속 자유를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게 되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방화련은 생각을 멈추고 싸우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녀의 영혼과 몸을 구속하는 환혼경은 완성되지 않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자유는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다. 방화련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앞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이유도 알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상
꿈속의 꿈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거짓
여기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여기 있기 때문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
진실한 것은
오직 하나 마음뿐
원하고 바라고 또 바래서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기나긴 꿈
시작도 기억 못하고
끝도 기억 못해
끝없는 꿈을
계속 꾸고 있을 뿐---
나 이제 이 꿈이 싫어
이 꿈을 끝내고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방화련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여 다만 뿌연 그림자로만 보이던 칠호와 암흑천사라 불리는 모두의 동작이 한순간 멈추어졌다.
어느새 방화련은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든 상태였다.
'푸--욱'
한 자루의 비수가 자루만 남기고 방화련의 가슴으로 박혀들었고, 그녀는 온 세상을 비웃는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시간은 멈춰지고, 그녀가 옆으로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 모여 있던 모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돼----!"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감사 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