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만 해도 축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아프리카는 86년 모로코가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이후 2002 한일월드컵까지 매 대회 토너먼트 진출팀을 배출하며 세계 축구에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한일 월드컵에서 '연쇄 살인범' 엘 하지 디우프를 앞세운 세네갈이 8강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것을 기억하는 축구팬들이라면 이제 제 2의 세네갈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코트디부아르(영어명 아이보리 코스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국은 1960년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 르샹피오나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의 정기적인 소집에 성공하며 2년 전 돌풍을 일으켰던 세네갈과 유사하게 최근 코트디부아르의 전력 상승에는 유럽파들의 가세가 좋은 힘이 됐다. 세네갈에 엘 하지 디우프가 있다면 코트디부아르에는 지난시즌 르샹피오나의 마르세유를 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고 이번 시즌 첼시로 이적한 디디에 드로바(사진)가 있다.
물론 아직 코트디부아르의 업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현재 세계순위 58위인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축구협회 창설 이후 199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외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으며 월드컵 본선에도 아직까지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카메룬, 이집트라는 만만치 않은 팀들과 함께 속한 아프리카 지역예선 3조에서 3승 1패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단순히 경기 결과뿐 아니라 다득점과 최소 실점에서 모두 조 1위를 하며 내용에서도 알찬 모습이다. 지난 7월 3조의 최대 강적인 카메룬과의 원정경기에서는 0-2로 패하며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9월 5일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벌어진 세네갈과의 친선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행의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다.
지난 3월 앙리 미셸이 감독으로 부임한 것도 코트디부아르엔 힘이 된다. 현역시절 프랑스 대표팀의 주장을 역임하며 58회의 A매치에 출전한 미셸은 1984년부터 4년간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 카메룬, 모로코, 튀니지의 지휘봉을 잡으며 아프리카 축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아프리카 축구에 대한 경험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젊은 선수들의 재능 발견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검은 대륙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여름 320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아프리카 축구 사상 최고액을 경신한 드로바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2002년 말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후 현재까지 A매치 15경기에서 10골을 넣고 있는 드로바가 올해 기록한 골만 6골이다. 드로바와 01년부터 벨기에 주필러리그의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고 있는 안더레흐트의 미드필더/공격수 아뤼나 댕당이 이루는 코트디부아르의 투톱은 이미 아프리카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전 대표팀 주장으로 선임된 르샹피오나 오세르의 보나벤투르 칼루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서 두 차례, 르샹피오나에서 한차례 시즌 10골을 기록한 만만치 않은 득점력의 보유자이다. 세 선수는 모두 빠르기와 기술을 겸비했고 미드필드와 공격, 중앙과 측면을 오갈 수 있어 상호 간의 유기적인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슈퍼이글스' 나이리아로 대표되는 아프리카 축구는 그동안 공격에 비해 수비가 취약하다는 평을 받았고 이는 메이저대회에서 결정적인 순간 이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년전 세네갈은 골키퍼 토니 실바, 수비의 알리우 시세와 페르디낭 콜리, 미드필드의 파페 부마 디오처럼 수준급의 수비력을 지닌 선수들이 요소에 배치되어 이러한 한계를 넘을 수 있었다. 코트디부아르의 돌풍이 기대되는 것도 공격뿐 아니라 수비에도 좋은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아스날 수비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급부상하며 주전으로 도약한 콜로 투레와 르샹피오나 마르세유의 주전 수비수 압둘라예 메이테가 버티고 있는 코트디부아르의 수비진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대표팀에서는 아비 투레라는 이름으로 뛰고 있는 투레는 중앙 수비뿐 아니라 우측 풀백으로도 기용이 가능하며 프랑스 대표팀 발탁에 미련이 있던 메이테는 코트디부아르의 월드컵 참가가 결코 꿈이 아니라는 판단에 지난 6월 시작된 지역예선부터 대표팀에 힘을 보태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발전 가능성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의 자매결연 구단으로 알려진 주필러리그 베베레의 1군에 현재 무려 15명의 코트디부아르 선수가 뛰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모두 베베레가 전 프랑스 대표인 장 마르 귈리우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는 코트디부아르의 ASEC라는 클럽과 산하 유소년 팀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선수들이다. 현재 아스날에서 뛰고 있는 투레는 ASEC에서 베베레을 거치지 않고 2002년 바로 아스날로 직행한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국가의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나은 지원을 대표팀에 해주고 있는 자크 아누마 축구협회장의 존재도 전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 월드컵의 꿈을 앞당긴 것으로 평가받는 앙리 미셸 감독의 영입에도 아누마 회장의 역할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카메룬에게 당한 1패가 오히려 팀원들에게 자극이 될 것이라며 예선 통과를 자신하고 있는 미셸 감독의 말이 현실화될 것인지, 우리는 2년 후 월드컵이 열리는 독일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