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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에 고요한 분위기가 흐른다. 나무 판자로 이루어진 집에 오랜만에 장로 여럿이 모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이색적인 여행자 한 명이 피비린내 나는 여인을 등에 안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여행자의 아름다운 미성이 울린다.
“도와주십시오, 촌장님.”
몇몇은 그 말을 들으며 여행자의 검을 바라보고 계속 흠칫, 흠칫 놀라고 있었고 또 몇몇은 진땀을
흘리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리 동쪽 끝에 있어 다른 지역과의 왕래가 없어 고립된
마을이라 해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마음은 있었다. 오히려 나가지 않아 때묻지 않은 인심좋은
마음씨가 그들 마을 주민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하물며 장로들인 그들은 어쩌겠는가.
그들도 측은한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나도 되도록 자네를 도와주고 싶네. 현자 도글레우스 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신 초월자(超越者)시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 분은 산 속에 은거하시길 좋아하셔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네.”
현재 플로도라 마을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초를 먹이자 티샤나는 조금 진정이 된 상태다. 사우나 땀
빼듯이 흘리던 피는 조금 응고되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고, 현재 마법으로 몸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저것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응급 약초가 워낙 귀한 것이라 마음대로 쓸 수도 없고,
더불어 약에만 기대는 것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 분이 계신 위치라도 알 수 없습니까?”
장로들은 불안한 기색으로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고 한참을 계속 그러자 그들의 대표격인 촌장이
직접 나서서 말했다.
“자네가 그 청광검(淸光劍)의 주인인 이상 우리는 자네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 다만 자
네의 심성이 궁금할 뿐이야. 자네는 현자를 만나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인가?”
다시 말해, 현자를 대하는 데에 있어 다른 흑심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예.”
“그렇다면, 자네가 표하는 단 하나의 이유란 무엇인가?”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조금만 더 있다면 티샤나의 봉해진 상처가 다시 터질 우려가
있었다. 약초 따위로 처리될 병이 아니었으므로. 저 멀리 중앙 대륙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현자
도글레우스라면 그 연유를 알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 촌장은 그의 자격을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저의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지금은 깨달았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연륜이 있어 보이는 촌장은 사야 뒤에 두 팔을 모으고 진정 주문을 외우고 있는 티샤나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 시선에는 사야의 청광검도 같이 포함되었다. 구전으로만 들었던 청광검. 그것이 무엇인가.
혼란스러운 중앙 대륙에 연인과 같이 홀연히 나타나 모든 악을 수습하고 대륙의 패자가 된 영웅의
애검이 아니던가. 지금은 비록 의문의 패퇴를 겪고 있지만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음유시인들의 입에
의해 미화되고 시화되어 오르내리는,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이 아닌가. 지금 전설이 눈 앞에 있다.
“지금… 자네는 쫓기고 있다 들었네.”
“…예.”
얼티밋로어 성에서 최대한 방어해보겠다는 친우 히베린 칼마린의 서신은 동쪽으로 떠나기 전, 그러니까
몇 달 전에 받은 것이었다. 방어에 실패하고 성은 정적의 손에 넘어갔는지, 히베린의 생사는 무사한
건지 알 새도 없이 곧바로 적의 추격에 시달렸다. 그것이 없었다면 한 달이면 족히 도착했을 이 마을은
지체되고 지체되어 노을이 지는 오늘에야 도착했다. 따라붙은 추격자는 물리쳤지만 곧 새로운 추격대가
편성될 것이다. 그리고, 목적지를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은 이 마을을 노릴 것이다.
“자네가 목적을 이룬다면 바로 이 곳을 떠날 텐가? 혹은 이루지 못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박차고
일어설 것인가?”
“제 업보이니 추격자들은 도글레우스님을 찾든 말든 물리쳐 드리겠습니다.”
다른 장로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사야의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외지고, 고립되어 자급자족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지만 최소한의 정보 창구는 열어 두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정보통은 중앙 대륙의 정세나, 대륙의 큰 이슈 등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
중에는 사야의 소식이 대단히 많았다.
“좋은 자세군. 해가 될 것은 없을 것 같으이.”
계속 말이 없던 늙은 장로가 지껄였다. 노인은 예지력에 신통하여 마을의 대사를 결정할 때 보통 그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것은 꼭 들어맞았다. 그런 노인이 찬성의 뜻을 표하자
다른 장로들도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어도 둘을 꼭 도와주고 싶었으나 현자의 거처가 외부에
공개될 가능성에 고민하고 있었던 차였다.
“흐으…욱!”
지속적으로 주문을 외고 있던 티샤나가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마법에 집중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부작용이 온 셈이다.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려놓은 것은 바로 다름아닌, 찢어죽일 듯한 고통의
재발이었다.
“아니….”
“이럴수가!”
증상이 다시 나타나고, 흡사 티샤나가 피에 젖은 혈인(血人)처럼 신음소리와 함께 피분수를 뿜어내자
장로들이 놀라 경악성을 질렀다. 얼티밋로어 성에서의 전투에서 이름 모를 독극물에 중독된 티샤나의
증상이었다. 독극물이 혈도를 타고 내려가, 내장을 녹여버리고 모든 신경을 뒤틀어버리는 끔찍한
극독(劇毒). 독에 중독되었으니 그 병명이 있어야 할 법한데 당시 의원 그 누구도 병명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증상이 더욱 심해져 생명의 위태로워지자, 내장이 더 이상 녹아내리지 않게 복잡하게
마법을 건 뒤 친우이자 참모, 우군이었던 히베린 칼마린의 조언으로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
플로도라에서만 나는 영초(靈草)가 파괴를 막아주는 시간은 단 세 시간 남짓 했다. 죽음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고통이란 놈이 고개를 빼꼼히 들어 여인의 몸을 무참히 괴롭혔다. 이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광경이었다.
“이런… 촌장님!”
사야가 다급하게 외치자 촌장의 표정이 암담해지다가, 슬퍼지다가, 다시 굳건해졌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도 빠르게 움직였다.
“좋네. 내 그 분의 거처를 알려주겠네. 만나는 것은 그 분의 원하심이겠지만, 만나지 못한다 해도
아직 포기하지는 말게. 시간이 없네. 어서 따라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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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2개의 프롤로그 중 1화의 일부분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 이해 힌트를 드리자면, 프롤로그 제목의 의미를
유심히 생각해보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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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쌈박하네요. 담편 기대.
감사합니다..!
잘보았소~
감사합니다아.
피를 토하네요.. 힘들겠다...'-';; 잘봤어요~!
쿡.. 그런거죠, 뭐.. 초반부터 힘들게 잡아놔서 많이 괴로워요, 티샤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