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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에 카미노를 걷다.
1. 프롤로그
내가 처음 산티아고를 알게 된 것은 1976년 한국무역협회 재직시절 당시 박정희 대통령 특명 사항으로 관민 남미시장조사단을 구성 남미 20여개국을 순방하면서 칠레 수도가 ‘산티아고’라고 알게 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약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번에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알게 되고, 더 정확히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알게 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카미노’를 알고 실천에 옮긴 것은 2023 년, 바로 금년 내 나이 팔십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까 금년 2월 대학 절친 박건삼 시인으로 부터 카미노를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약간의 설명과 함께 가는 친구들이 좋은 동료들이고 이미 나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동의도 받았다는 것이다. 나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에게 화끈하게 예스로 화답하고 원팀을 결성 네명의 동지가 뭉치게 되었다.
세 분들은 대구 경북고 43회(1962년졸) 동기들로 김경한 전 법무부장관, 박건삼 전 SBS 국장, 박수명 기업인 회장 이다.
막상 결정을 하고 보니 여간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마라톤도 하고 산도 오르고 걷기도 꽤 하여 어느정도 자신감도 있었으나 주위 분들의 걱정 어린 눈빛과 혹시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감은 숨길 수 가 없었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나의 최고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두번의 합동훈련도 거뜬히 소화 해 내었다.
2. 카미노로 가는 길
2023년 5월 11 일, 두려움 반 설렘 반 카미노를 향해 터키쉬 에어라인을 탔다.
카미노로 가는 루트는 여러 갈래가 있으나 우리는 포르투갈 두 코스 중 짧은 코스로 정하고 이스탄불을 경유 리스본으로 거의 16시간을 비행하였다.
원래는 <성 야고보>가 걸은 것 처럼 프랑스 ‘생장피에르 포르’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약 800 km를 걷는 것이 대부분이고 지금도 85% 이상이 이 길을 선호하나 우리들은 미지의 포르투갈 루트로 새로운 체험을 하며 산티아고 최종 구간인 ‘뚜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갈리시아 지방의 125km 를 걷기로 정하였다.
순례 길을 사람들은 ‘카미노’라 부른다. 스페인 식 정확한 표기는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El Camino de Santiago)’ 다. 지금은 전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예수 열두 제자 중의 한명인 <성 야고보>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위해 이스라엘에서 지금의 스페인 서북부 ‘산티아고’까지 걸었다. 그러나 그의 복음전파는 결실을 못 거두고 불행히도 헤롯왕에 의해 순교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고 제자들에 의해 무덤이 발견되면서
그의 무덤 위에 ‘산티아고 대 성당’이 세워 졌고 그후 전세계 수 많은 사람들이 <성 야고보>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해 ‘산티아고
대성당’을 찾는 것이다.
3. 파티마의 기적.
우리 일행은 스페인 ‘뚜이’로 이동하기 전날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일박을 하게 되어 있었다.
리스본에서 ‘파티마’로 버스로 이동하는 길 이 곳곳이 막히고 야외 곳곳에는 사람들이 운집하고 야영숙소를 만드는 둥 야단법석 이었다. 마침 5월 12일,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에서 발현한 전날로 그 전야제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각지에서 수십만의 신도들이 모여 드는 것이다.
어렵사리 호텔에 도착 짐도 풀지않고 ‘파티마’ 대성당으로 갔다. 나는 비 기독교인 이어서 인지 성모마리아 발현이 그리 실감이 가지 않았으나 세 사람의 동지들은 철저한 카톨릭 신자들로 경북고 43회 천주교 동아리 모임을 같이 하는 분들이다. 그들이 느끼는 성모 마리아 발현에 대한 느낌은 나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그들은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영세 명으로 호칭하며, 김장관은 모세, 박국장은 프란체스코, 박회장은 스테파노로 불렀다.
촛불을 들고 늘어선 긴 행렬, 성수를 바쳐 들고 기도하는 사람, 무릎을 꿇고 기어서 오는 사람, 이 수많은 사람들이 연출하는 경건한 모습에 나는 감탄을 하며 많은 군중 들 속에서 길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동지들의 뒤를 바짝 따라 ‘파티마성당’ 앞까지 갔고 광장의 예수 십자가상 앞에서는 묵상을 하고 성모 발현의 기적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신의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정말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신께서 예비해 주신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카미노를 걷기 바로 전날 ‘파티마’에서의 성모발현 전야제 참석은 우리들에게 큰 축복이었고 앞으로 산티아고 성당까지 가는 긴 여정이 축복의 길 이 될 것이란 예감에 늦은 저녁 시간 배고픔도 잊게 해 주었다.
사실 성모 발현의 장소는 이곳 말고도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 등 16곳이나 있지만 ‘파티마’는 로마교황청이 직접 검증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적의 발현 장소로 꼽힌다고 한다.
4. 고난의 외로운 길
이제 모든 사전일정들이 끝나고 5월 13 일부터 17일까지, 5일 간 포르투갈 길, 순례길을 걷는 길이다.
스페인 ‘뚜이’에서의 첫 날은 비장하였다, 배낭을 점검하고, 스틱을 챙기고 무슨 전선에 임하는 것같이 완전무장태세로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날씨는 아주 좋았다. 아침엔 우리의 초가을 날씨 마냥 약간 싸늘하였으나 낮에 온도는 25-6도 정도라고 하니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드디어 출발, 첫발이다. 서두를 것도 없고 빨리 걸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더욱이 ‘카미노’ 길은 남과의 경쟁의 길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의 걸음으로 혼자 명상하며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다.
나는 동지들과 보조를 맞추며 나의 페이스를 찾으려고 애썼다. 서울에서의 내 걸음은 시속 4~5km 정도 되며 좀 천천히 걷거나 오르막에서는 시속 3 km 쯤 된다.
우선 걸으니 무엇보다도 그간 찌들고 무료 했던 일상에서 탈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루 25km 이상을 걸을까” 하는 두려움 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맛보는 신기함과 설렘과 달콤함에 두려움 없이 걸을 수가 있었다. 약 10 km걸었을까 사방을 살피니 주변에 동지들이 없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어느새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출발은 같이 하나 걷다 보면 간격들이 생기고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비교적 가는 방향을 중요 지점마다 노란색의 조가비(shell)로 표시하여 그 방향대로 가면 된다.
자연히 혼자 걷는 시간 이 길어지고, 고독해지면서 외로워 지는 것이다. 이 세상 영원이라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영원히 같이 걸을 수도 없는게 ‘카미노’ 길이다.
우리 일정은 5 일간 총 125km 를 걷는 것이다. 하루평균 25km 이상을 걸었고 둘째 날 가장 긴
‘모스’에서 ‘폰테베드라’는 무려 35km를 걸었다. 빠른 걸음의 젊은이들은 30km가 조금 넘는 거리였지만 우리들 걸음으로는 52,000 보가 넘는 35km의 구간으로 가장 어려운 고통의 구간이었다.
‘카미노’의 길은 고독하고 힘 들었지만 지나는 그 풍광들은 참 아름다웠다. 꽃들을 좋아하는 유럽 사람들이라 집집 마다 붉은
장미들이 화사하고 와인 생산지답게 포도밭들도 줄줄이 늘어서 있다. 들판에는 개망초들이 지천으로 하얗게 피어있는 것이
마치 메밀꽃 피는 우리 고향과도 같다.
원래 스페인은 남한보다 면적이 5배나 넓으나 인구는 우리가 5천 2백만명인데 비해 4천 7백만으로 우리나라보다 적고 경제력은 우리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스페인의 농촌은 젊은이들이 떠난 황량하고 쓸쓸한 우리의 농촌의 모습과는 달리 여유롭고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카미노’를 다녀온 사람들이 ‘카미노’길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하는 말이 실감난다.
걷고 또 걷지만은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은 나의 영혼을 맑게 해주고 새로운 활력을 주는 에너지가 되었다.
5. 부엔 카미노 (Buen Camino) 그리고 바르(Bar)
‘카미노’는 전 세계인들이 걷는 순례길이다.
걷다 보면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 남미 등 지구촌 곳곳에서 온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럴 때 서로 인사를 나누는 첫 마디가 먼저 본 사람이 ‘올라’라고 하면 ‘부엔 카미노’라고 화답한다. 굳이 영어로 한다면 ‘Good Way’고, 우리 식으로 하면 ‘좋은 순례여행 되세요’라는 뜻이다. 서로가 순례자임을 알아주고 그 길을 축복 해 주는 것이다. 내가 금번 전 일정을 통해 가장 많이 한 말도 ‘부엔 카미노’이고 이 인사를 함으로써 나도 ’카미노’의 일원임을 확인하게 된다.
‘부엔 카미노’ 를 수 없이 하면서 걷다보면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지난날을 생각해보며 반성도 하고 회한의 마음에 가슴 저리기도 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다, 고희도 이미 넘기고 이제는 내 나이 팔순이다. 그러나 나는 걷고 있다. 남들이 노인네라고 칭할 때 나는 ‘카미노’를 걷고 있으니 얼마나 축복 받는 일이냐. 고난속에서 행복을 찾아 내는 것이 ‘카미노’의 마력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둘째 날 35km를 완주하고 나서이다. 거의 한계에 다다를 만큼 체력을 다 소진하고 고통도 따랐지만 그것을
완수 했을 때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은 어디에다 비교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이 울어 나오는 성취감과 보람,
또 시원한 한 잔의 생맥주 맛은 자금도 잊을 수 가 없다.
혼자 걷게 되다가도 다시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김 형, 고향이 춘천이면 좋으시겠네요. 저도 춘천 지검장으로 2년간 춘천에서 살았습니다.”
모세 장관 애기다. 춘천과의 연고와 추억담으로 우리는 쉽게 공통의 대화를 찾으며 만남의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 하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이렇게 ‘산티아고’를 같이 걸으니 이게 어디 보통의 인연이 아니냐고 공감 하였다.
‘카미노’는 혼자도 갈 수는 있지만 나는 가급적 자유로운 영혼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다면 같이 가기를 권유하고
싶다. ‘카미노’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식사나 휴식시간은 물론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카미노’ 또 다른
기쁨이자 행복이다. 특히 숲 속에서 ‘카미노’ 이정표를 놓쳐 길을 잃었거나, 길을 못 찾거나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때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길을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곳이 ‘바르(Bar)’ 이다. ‘바르’는 스페인 사람들 문화의 축소판이다. 커피와 생맥주 와인을 팔고
‘타파스’같은 간이 음식들을 판매한다. 주민들의 남녀노소가 들려 쉬면서 여가를 찾고 마시고 먹는 것을 즐긴다. 특히나
우리들 순례자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명소다. 걷다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심신을 쉬게 해준다.
또한 이곳에서 ‘크리덴시알(순레자여권)’에 필요한 스탬프를 찍고 이를 받아야만 완주 증명서(졸업장) 를 받을 수 있다. 하루에 3 내지 4곳의 바르를 지나게 되고 또 ‘바르’가 없는 곳에서는 인근 성당에서 스탬프를 받는다.
6. 산티아고 대성당 의 감동
마지막 날 ‘파드론’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까지 오늘은 대망에 그리던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는 날이다. 끝날 이라는 기분인지 배낭이 가볍고 4일간을 힘들게 걸었지만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펄펄 나는 기분이었다.
비교적 가볍게 오늘의 루트 25km 를 완주하고 ‘산티아고’ 시내를 통과 드디어 저녁 무렵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 하였다.
여러감정들이 복받쳐 오른다.
‘카미노’ 길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성취감 과 자신감, 5일간 125km 를 걸으면서도 발가락 하나 다친데 없고 사지가 멀쩡 하다는 안도, 희열과 기쁨을 느끼면서 나는 대성당 광장에 벌렁 누웠다.
눈을 감고 뜨고 싶지 않았다. 오래오래 이순간을 간직하고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싶었다.
도착한 사람들의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 서로 포옹하는 사람, 두 팔벌리며 환호하는 사람. 이런 벅찬 순간에 나도 함께 여기에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그들중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다는 것이 너무 뿌듯하였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는 ‘카미노’ 순례자들을 위한 정오 미사를 드린다. ‘산티아고 성당’은 ‘바티칸’ 보다는 그 규모가 약간 작지만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더욱 크다고 한다. 대성당 보안 경찰이 한 사람씩 체크하고, 한번 미사에 800 명씩만 입장시킨다고 한다. 성당 안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일찍 서둘렀으나 벌써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다.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함께 미사 드린다는 것이 특색이었다. 미사의 형식과 내용은 세계적으로 같다고 한다. 나는 비 기독교인
이고 신부님의 말씀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분위기에 압도 당하고 특히나 거대한 ‘보타푸메이로(대향로)’가 공중을 가로 지르며 그네를 타듯 스윙 하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스윙 할 때 마다 그 향은 성당 안 전체를 휘뿌였게 만들며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서로 부등 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모르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냥 선채로 머리 숙여 기도 드리고, 서울로 돌아가면 가톨릭에 입교할 결심을 하였다.
7. 에필로그
‘카미노’는 누구든지 걸을 수 있다, 간절한 열망과 걸을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해내고 말곘다는 각오만 있다면 누구든지
걸을 수 있다. 나도 인생 팔십에 걸었으니 나이와도 별 상관없이 몸만 단련시키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미노’를 갔다 왔다고 해서 그리 뭐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일을 좀더 많 이 경험 해보고, 고통도 느껴보고,
고독이 어떤 건지 도 직접 체험하면서 혼자 걸으며 느끼는 행복을 찾았다는 것이 작은 수확 일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그 동안의 내 인생 버킷리스트중 하나를 지우게 되었다.
더욱이 좋은 동지들과 함께 여행하며 전우와 같은 인간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더 없이 큰 보람이다. 또 이제는 욕망도
버리고 근심과 걱정도 버리면서 남아 있는 여생을 유유자적 느긋하게 살고싶다.
나는 이 글을 읽어보는 많은 분들에게도 내가 좋아하는 ‘My way’ 의 노랫말처럼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세상의 많은 것을 경험하길 바라고 그런 의미로 ‘ 카미노’에도 한번쯤
도전하길 바란다.
‘카미노’를 다녀온 사람들은 후회가 없다고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양재천에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를 보노라면
‘카미노’길의 눈송이처럼 피어 있던 하얀 개망초 꽃과 그 바람이 새삼 그리워 진다.
‘카미노’ 순례 여정을 끝내던 그 마지막 날 밤, ‘포르투’ 뒷골목의 조그만 ‘파두’ 공연장에서 빨간 드레스에 긴 머리의 여인이
불러주던 애잔한 ‘파두(Fado)’가 오버랩 되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고락을 함께하며 걸어준 경북고 43회 세 분의 동지들에게 감사 드리며 응원해준 주위의 많은 분들에게도 감사 드린다.
인생 팔십 나이에 무탈하게 카미노 길을 완주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끝)
귀국후 35산우회 마지막 북악산 산행
*알림 : 이글은 내년 5월 발간되는 "춘고 백년사"에 실릴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