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 따라, 1
부산 복천동 고분군, 동래향교
경주를 떠나 창원에 있는 집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김해에 있는 친척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봄방학에다가 경주를 떠나서 그런지 학원도 다니지 않아 온종일 시간이 비었다. 그리하여 김해에서 가까운 부산으로 떠나기로 했다. 저번 수로왕릉 일대 답사를 경험 삼아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동래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역 한켠에 동래읍성 해자 단면이 있는 게 보인다. 동래읍성에 도착했단 걸 알려준다. 옆에 작은 전시관도 있는데 시간상 돌아올 때 보기로 하고 서둘러 목적지로 향한다.
(부산 동래읍성 단면도. 확실치 않으나 수안역에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지상으로 나와 복천동 고분군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도되지만, 2km도 안 되는 거리를 걷기엔 조금 아닌 것 같아 운동도 할 겸 열심히 걸어간다. 그렇게 걸어가던 중에 뜻밖의 수확을 얻는다. 우연히 장관청이란 건물을 발견했다. 장관청은 동래읍성의 관아건물 중 하나로 군장관이 쓰던 건물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고 변형이 심해 복원했다고 한다. 읍성 답사 전 우연히 이런 곳을 발견하다니 정말 운이 좋다. 복원한 곳답게 조금 깔끔한 느낌이 난다.
(장관청 입구.)
(장관청 내부. 현판이 모두 파란색인 게 조금 특이하다.)
장관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첫 목적지인 복천동 고분군이 나온다. 약간 낡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잔디로 뒤덮인 구릉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산비탈을 따라 구릉이 이어지고 멀리 박물관과 읍성이 보인다. 뒤로는 부산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여기 복천동 고분군도 저번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봉분은 없고 관이 나온 곳을 키가 작은 나무로 둘러쳐 놓았다. 이렇다 보니 구릉 전체가 하나의 고분같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 고분군의 경주 고분군을 제외하곤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고분군으로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곳이다. 9,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대부분 철기류인 것이 특이하다. 부산이라면 분명 낙동강을 끼고 있는 만큼 철기왕국인 가야의 영토였을 터, 그렇다면 여긴 아마 변한 시절, 작은 소국 중 하나의 주된 곳이었을 것이다. 경주를 떠나 김해 쪽에서 머무르니 가야유물과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 같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끝에 다다르면 둥근 돔형태 지붕 안에 발굴 당시 모습을 재연해놓은 장소가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전경. 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해 놓았다. 멀리 전시관인 둥근 돔이 보인다.)
(부드러운 능선이 아름다운 고분군.)
(전시관 내 재연된 모습.)
(복천동 고분군과 조회를 이루는 부산의 모습. 날씨가 조금 더 맑았다면 좋았을 텐데.)
(오른쪽이 복천박물관, 중앙이 동래읍성이다.)
고분군에서 이제 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은 마치 지구라트처럼 육중한 모습이다. 분명 고분군과 관련이 있을 텐데 정확한 건축의도는 모르겠다. 박물관 가는 길에는 '영보단(永報檀)'이라 쓰인 작은 비석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이 비는 1909년, 정부에서 호적대장을 거둬들이려 하자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대장이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우려해 동래지역 13개 면의 호적대장을 모아 이곳에 불태운 후 단을 쌓아 영보단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15년 일본으로부터 우리 것을 지켜내자는 다짐을 하며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탈로부터 우리 것을 지켜내고자 했던 의지를 알 수 있는 뜻깊은 유적이다.
(영보단비. 작지만, 그 의미만큼은 큰 비석이다.)
복천박물관 안으로 이제 들어간다. 복천박물관은 복천동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을 바탕으로 세워진 박물관이다. 박물관도 그렇고 정말 대성동 고분군과 닮은 점이 많다. 안은 토기파편 같은 유물부터 각종 장신구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청동방울, 금동관 등이 출토되어 이곳 복천동 일대에 상당한 힘을 가진 소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번 대성동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별로 없어서 혼자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중간에 있는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만든 당시 옷을 입고 혼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쩐지 의성 금성산 고분군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제 어딜 가든 전에 갔던 곳의 추억이 떠오른다. 고분군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박물관이었다.
(청동기 시대 유물.)
(독무덤. 전형적인 고대 우리나라 유물이다.)
(가야 영향권이었던 걸 증명해주는 가야토기.)
(어쩐지 국립경주박물관이 생각나는 오리 모양토기.)
(우수한 철기문화를 알게 해주는 판갑옷.)
(가지방울.)
(당시 이곳의 영향력을 알려주는 금동관.)
박물관 옆에는 동래읍성 역사관이 있다. 안에는 동래읍성의 역사와 함께 동래읍성 모형을 전시해놓았다. 일본으로부터 방어가 필요한 지역이었던 곳인 만큼 그 어느 곳보다 웅장한 읍성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곳은 뒤로 보이는 북쪽 산을 따라 나 있는 성벽 일부 뿐이다. 지나친 욕심일 수 있겠지만, 평지 쪽의 성곽도 여기처럼 복원했으면 하는 미련이 남는다.
(동래읍성 모형. 지금까지 갔던 읍성 중 가장 큰 규모인 것 같다.)
원래는 동래읍성을 봐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읍성 끝에 있는 향교를 놓치게 되니 일단 읍성을 제쳐놓고 향교로 향한다. 동래향교는 조선 초기, 국가 교육진흥책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임진왜란 불탄 이후 여러 차례 옮긴 끝에 여기로 왔다고 한다. 동래향교는 또한, 다른 곳과 달리 명륜당과 대성전이 일직선이 아닌 조금 비켜서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열심히 걸어 도착하니 향교는 행사 준비인지 공사 중인지 조금 어수선했다. 명륜당 뒤쪽 대성전 구역까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으니 한 분께서 나오셔서 대성전 안까지 문을 열어 주신다. 게다가 옆의 동재, 서재까지 열어주신다. 이렇게 자세히 향교 안쪽을 살핀 적이 있었던가! 사실상 몰래 들어간 언양향교 대성전을 제외하면 대성전을 들어가는 것도 처음인데 무척 궁금했던 대성전 안까지 볼 수 있다니! 친절한 그분께 연거푸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것 때문인지 평소에는 조금 설렁설렁 봤던 안내문도 꼼꼼히 읽게 된다. 동재에는 대성전에 모셔진 분에 대한 설명이 서재에는 향교에서 제를 지낼 때 제사상과 예복, 그와 관련된 설명이 같이 있다. 대성전은커녕 공개 자체를 꺼리는 향교나 서원이 많은데 이렇게 동재, 서재도 하나의 전시관으로 활용한 모습이 어리둥절하면서도 고맙다. 특히 정말로 궁금했던 대성전 안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만약 내가 읍성 본다고 놓쳤으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놓칠 뻔한 하마비.)
(동래향교 정문.)
(행사 준비 중인지 조금 어수선한 명륜당 주변.)
(명룬당 앞 화사석.)
(역대 부사들의 흥학비.)
(동래향교 대성전. 대성전을 이렇게 당당히(?) 볼 수 있다니!)
(대성전 안. 중앙에 공자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멍석이 있는 걸로 보아 창고도 겸하는 것 같다.)
(위패(?). 양쪽에 모셔져 있다.)
(향교 동재.)
(동재 안은 향교에 모셔진 분에 대한 설명이 있다.)
(향교 서재.)
(서재에는 제사상과 예복에 관련된 것들로 꾸며져 있다.)
동래항교에서 동래읍성 가는 길에는 긴 설명이 있는 비가 있는데 일성관에 관한 설명이다. 일성관은 원래 서당으로 쓰이던 건물을 일제강점기 문화계몽운동과 청년집합소로 쓸 수 있는 근대식 회관이다. 당시 회관을 지으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가 심했고 끝내 모금 운동을 통해 낙성식을 했으나 그마져도 일본의 방해가 있었다 한다. 이후 일성관은 도서관으로 쓰이다가 도로확장에 따라 철거되었다고 한다. 철거하지 말고 어디 이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영보비에 이어 다시 항일정신을 느끼며 길을 떠난다.
(일성관에 관한 비석.)
이제 동래읍성으로 향한다. 부드러운 능선이 아름다웠던 복천동 고분군과 너무나 값진 경험을 하게 해준 동래향교를 기억하며. 점점 가팔라지는 길을 걷는다.
-여정- (2014. 2. 25. 火)
수안역→→ 장관청→→ 복천동 고분군→ 영보비→ 복천박물관→ 동래읍성 역사관→→ 동래향교→ 일성관 비-----→ (동래읍성은 후에...)
새롭게 펼쳐라!
羅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