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존재하였다.
중국땅에서 바라보는 天池의 장관은 어떤 아침을 연상케 한다.
천지를 넘어가면 낙토로 이루어진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산허리를 휘감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듯 하다.
누구든 반겨주기에 그것은 아침과 같으며 장엄한 자연의 숨결이 멎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상으로 충만되어 있으므로 그곳은 동방예의지국의 아침이 되나보다.
2000년 7월 24일
오랫동안 공들여오던 백두산 등정의 길에 올랐다.
8년이란 긴 세월을 거듭 포개며 기다렸으니 가슴 벅찬 만도 하다.
만리장성도 함께 탐방하는 4박 5일간의 일정이 잡혔다. 백두회란 모임이 있다.
백두산 등정을 위해 모인 동호인끼리의 친목계이다.
그러니 필자가 8년전 폐암으로 경대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사경을 헤메고 있을 무렵 병문안을 온 지인들이 병원 인근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의기가 투합해서 결성된 모임이다.
결성동기가 본인 때문이었으므로 남달리 애착을 둔 모임이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백두산 관광코스가 막혀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열린 것이란 가정하에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회원 거의가 바둑애호가였으므로 백두산 정상에서 한판의 바둑을 엮어 보는데 그 여흥이 있었다.
호연지기가 가미된 셈이다.
-백두산 정상 대국-
과연 가슴 설렐만하다. 백옥의 광채를 지닌 백과 진주의 색깔을 담은 흑이 황금빛의 반상에 과연 어떤 모형을 그려 낼 것인지 자못 흥미진진하다.
-출발의 순간-
무언가 큰일을 너무 쉽게 처리하는 듯한 기분을 잠시 느꼈다.
오후 2시 김해공항 출국수속은 동행한 가이드의 안내로 예정된 코스를 밟았다.
CA 항공기 편으로 북경을 향해 하늘을 갈랐다.
백두산으로 가는 막이 오른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늘을 날아서 북경을 간다-
옛날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오가던 수천리 위험한 뱃길을 단숨에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하늘이라 그런지 더욱 진한 격세지감이 다가섰다.
-북경도착-
대국의 국제공항다웠다. 엄청난 규모의 공항청사다.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장비와 시설에 페인트색채가 선명하다.
안내표지판이 한자로 되어 있어 간략한 안내는 스스로 인지가 되었다.
화장실 내부통로가 [ㄴ]자 스타일인 우리나라보다 한번 더 꺽이는 [ㄷ]자 스타일이다.
장막이 한 겹 더 있는 셈이었다.
비록 사소한 장면이지만 竹의 장막이란 용어와 대조가 되는 것 같아 베일속에 갇히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일행은 국제선에서 국내선으로 이동하였다.
북경 현지가이드가 나와서 우리를 도왔다.
처음 딛는 공산주의 국가 땅이다.
바깥 풍경이 몹시 보고 싶었다.
더웠다.
우리 나라보다 조금 더 덥다.
피부에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으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자제하였다.
대열에서 멀리 이탈하지 못하고 공항주변의 풍경을 슬금슬금 곁눈질 하는게 고작이었다.
- CA 항공기 국내선 탑승-
연길행이다.
드디어 백두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제선 보다 기내환경이 열악하다.
쾌적한 탑승분위기 하고는 거리가 멀다.
에어컨이 잘 듣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조차 바보처럼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견뎌야 했다.
자, 지금부터 중국의 전통적인 인내심을 배워야 되나보다.
덥고 좁은 좌석공간이다.
기내식사가 나왔다.
때가 맞지 않다.
억지로 먹었다.
사육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양계장 닭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失笑를 머금었다.
-저녁 무렵 연길 도착-
1시간 정도 연착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후 2시에 김해를 출발하여 저녁에 연길에 도착한 셈이다.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한 대지, 공항청사위에 [연길]이라고 대형으로 쓰여진 우리나라 글자의 네온싸인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잠시나마 향수병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와 동일 문화권이 여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아직 저녁 노을이 남아 있는 공항활주로다.
넓었다.
검붉은 잿빛 하늘과 맛 닿아 있는 이국만리의 평원광야다.
옛날 고구려의 기상을 처음 대하는 듯 하다.
현지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로 숙소인 대우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연길에는 주민의 60 %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말씨는 북한 말씨와 억양이 비슷하다.
몇 일전 장마로 거리가 물에 잠겼다고 한다.
도로의 가장거리가 쓰레기더미로 지저분하였다.
자연적으로 없어 질 때까지 그대로 두나보다.
저녁식사 후 그 자리에서 현지연예인들의 가요열창을 들었다.
거의가 평상시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그대로다.
무대에서 연예인과 관광객들이 한바탕 춤을 추기도 했다.
연길에서는 TV 방송도 우리나라의 KBS가 그대로 방송되고 있었다.
연길에서 보는 9시 뉴스는 혹시나 부끄러운 내용이 나올까봐 계면쩍기까지 하였다.
이것도 애국심의 발로라고 해도 좋을는지.....
(옳은 반성은 능력이다. 잘못된 것을 자기 탓이라고 반성할 줄 아는 능력이 아쉽다.)이련만......
백두산 등정의 첫날밤이다.
여독을 그냥 잠으로 풀기에는 주변환경이 너무 異國的이다.
일행 중 몇몇 사람이 마음이 맞아 가이드를 대동하고 인근 포장마차를 찾았다.
중국에 여행을 가면 위험하니 야간의 외출을 삼가하라는 코멘트는 일반적인 주의사항에 불과하다.
외국인이 야간출입이 불편한 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다. 단지 여흥의 정도가 지나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분수를 지키라는 뜻이다.
십여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우리나라 포장마차 스타일 주점이다.
현지산 고랑주 2 병과 이것 저것 눈에 띄는 안주 몇가지를 주문하고 가격을 체크해 보니 매우 싸다.
술값이 우리나라의 20 % 수준이었다.
아낙네의 정성이 담긴 안주가 속속 식탁에 올랐다.
선조의 고향은 원래 평안도이었는데 이 곳으로 넘어와서 3 대째 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文盲의 표가 역력하다.
그러나 마음씨는 순박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어느 한 취객이 다소 소란을 피운 대가로 약간의 금전을 더 지불하려고 하니 한사코 사양하는 것이 아닌가.
술잔이 몇순배 돌고나니 장소가 장소인 만큼 자연 역사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거나한 취기를 잡고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어제 공항에 마중 나왔던 그 버스편으로 백두산을 향했다.
5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한다.
사실 여기오기 전 고국에서 가장 염려했던 코스가 바로 여기다.
5시간 정도의 비포장도로라고 하였으니 걱정이 될수 밖에.....
그러나 실제와 보니 그것은 杞憂에 불과 하였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풍경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도로사정 또한 50 % 정도는 이미 포장되어 있었고 나머지도 띄엄띄엄 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아침 6시경이었는데 벌써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일년 뒤에는 경쾌한 포장도로로 백두산을 향해 마음껏 달릴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중에 토목공사 감리를 맡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차창 밖으로 진행되고 있는 포장공사 현장의 기술수준을 물어보니 공정이 우리보다 더욱 견고한 것 같다는 답변이었다.
백두산 가는 길은 나무가 울창하다.
식물들의 천국이란 말이 실감이 간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림이다.
살아 있는 전봇대를 그냥 산에 잇대어 세워 놓은 듯한 울창한 산림이다.
만일 길이 없다면 발들여 놓을 틈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곧은 나무들의 전람회를 보고 있는 듯하다.
나무색깔에도 흰빛이 번뜩인다.
그래서 백두산이라고 하였는지......
날씨는 청명하였다.
오늘의 날씨 같으면 天池를 볼수 있지 않겠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답변이 너무 신중하다.
백두산 입구에 가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만치 백두산 정상은 기후의 변화가 심하다는 뜻이었다.
연도에는 옥수수 밭이 즐비하다.
몇 십리 연속이다.
저 많은 양을 어떻게 수확하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이 길을 걸어서 백두산까지 갔다고 하니, 가히 大長程을 연상키에 족하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백두산이 가까워 올수록 날씨는 더욱 청명하다.
하늘이 바다보다 더욱 짙은 색깔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만일 누가 어떤 일에 대해서 내마음의 眞僞여부를 묻는다면 맑게 개인날, 백두산 하늘을 보면 알 것이라고 답변하고 싶다.
드디어 백두산입구에 도착했다.
장백폭포가는 길과 갈림길이다.
군인인 듯한 두 사람이 입구를 기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백두산 천지를 볼수 있다는 낭보를 얻었다.
기후청명의 행운을 잡은 것이다.
3 일만에 처음이라는 것이다.
선물중의 진선물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지프차 탑승순서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지프차로 天池입구까지 간다고 한다.
최신형 차로 성능이 좋아 보였다.
일행은 그대로 지프차에 분승하였다.
장백폭포 입구에서 백두산 천지 입구까지는 20대 정도의 지프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도로포장은 되어 있었으나 급커브 경사길의 연속이다.
대부분이 젊은 기사들이 운전하고 있었는데 한결같은 난폭운전에 오금이 절였다.
10 여분 정도의 곡예운전 끝에 天池입구에 닿았다.
여기서는 도보로 10분 정도 좀 가파른 오르막이다.
갑자기 기온이 차다.
긴소매를 입어야될 정도다.
능선에 가려 天池가 서서히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 이를 어쩌면 좋으랴!
드디어 천지와 인간이 만난다.
아무 거리낌 없이 천지를 향해 사람이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눈길이 天池와 맞닿은 것이다.
가슴이 방망이 질 한 것은 비단 나 혼자 뿐만은 아니었으랴.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들뜬 분위기다.
사진으로 보던 天池와는 분명히 틀린다.
색채가 선명하게 살아있다.
天池는 살아 있는 숨결이다.
天池를 둘러싼 角이져 어울린 산등성, 용솟음치는 듯한 산허리를 둥글게 안고 있는 天池는 또 하나의 하늘이다.
하늘과 마주보는 또 하나의 하늘-!
그렇다. 이것은 햇살의 반란이요. 재창조의 神話이다.
30분간의 자유시간이 허용되었다.
대부분 기념촬영에 할애되었다.
天池를 등에 두고 바라보는 만주벌판......
광활하다. 대단한 장관이다. 산으로 이루어진 바다....
청명한 날씨인데도 산과 산 사이의 계곡에 안개가 자욱하다.
저걸보고 남이 장군은 戰雲이 감도는 腥塵을 연상하였던가, 백마타고 오는 초인의 말발굽 소리가 터질 것 같기도 하다.
가이드의 재촉으로 지프차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장백폭포쪽으로 향하였다.
장백폭포를 품고 있는 계곡 또한 장엄하다.
깍아지른 듯한 구릿빛 산등선에 찬란한 대형 角石이 얹힌 듯하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맞은편 산릉선엔 구름의 그늘이 안개를 밀며 춤을 춘다.
장백폭포 옆으로 뜨거운 온천수가 흐른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섭씨 80도라고 한다.
손가락을 넣어보니 뜨겁다.
여기서 일행은 시장기도 있고 하여 온천수로 삶았다고 하는 계란을 사 먹었다.
백두산 천지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식수가 좋지 않다.
다같이 백두산에서 발원되는 물인데 남쪽과 북쪽의 물맛이 다르다고 하니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물맛에 대해서 무언가 傳說이 있음직도 하다.
백두산 기슭에서 이틀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코스는 일송정 해란강 그리고 윤동주 시인 기념관등이며 오후에는 두만강을 돌아 저녁 항공기편으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는 바쁜 스케줄이다.
해란강을 끼고 달리면서 일송정은 멀리서 그 위치만을 확인하는데 그쳤고 대성중학교에서는 안내양의 친절한 설명에 감화되어 기념관 방명록에 서명까지 하였다.
오후에 두만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흐린 날씨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오늘 같은 기후로는 백두산 천지를 보기란 어려울것이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에겐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듯 하다.
두만강은 북한과 접경이다.
또 가슴이 설레었다.
몽매에도 그려마지 않던 두만강 푸른물이 아니던가.
그러나 잠시후 두만강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던 두만강은 듣던 그대로 인근공장의 폐수로 오염에 찌든지 오래다.
공장의 대형하수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현지 주민들의 생활환경 또한 열악하기 그지 없다.
그렇다고 해서 古典美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도무지 발전의 소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책이 없는 환경임을 느끼게 했다.
강 건너 보이는 북한 땅엔 人跡이 드물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哨所만 보일 따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간간이 떨어지는 무심한 빗방울만이 시야를 가릴 따름이었다.
-연길공항-
가이드와의 이별이 아쉽다.
현지주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해서 더욱 그런 모양이다.
저녁 무렵 북경에 도착하니 또 다른 현지 가이드가 공항청사까지 나와있었다.
갓 스물을 넘긴 듯한 중국아가씨인데 한국말에 능통하였다.
간혹 했던 말을 한번 더 연달아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미모가 뛰어나서 그것 또한 애교로 봐줌직했다.
북경의 중심가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불편함이 없었고 음식도 그런데로 괜찮았다.
흔히 중국에 가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하니, 출발할때 김치나 고추장 등 밑반찬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는 권유를 하는데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좋지 않다.
그건 이미 옛날 말이다.
김치도 있고 음식 또한 그렇게 역겹지 않았다.
충분히 먹을 만하다.
자칫 그런 말을 따르다간 혼자 별난 사람이 되고 만다.
저녁식사 후 북경의 야경도 한번 살펴 볼겸 현지가이드를 대동하고 1시간 정도 외출길에 올랐다.
영업용 택시 2 대에 분승하였다. 그런데 이건 또 무언가, 택시기사석을 두꺼운 투명플라스틱으로 둘러막아 놓은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택시강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기사석의 보호장치를 하지 않으면 택시 영업허가를 받을수 없다고 한다.
북경이라고 하면 명색이 국제도시인데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만리장성과 같은 과대방어 본능의 현실성인지 아닌면 택시강도 같은 것쯤은 대수롭지 않아서 간단히 대처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옆으로 젖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무덥다.
북경관광은 여름철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백두산코스와 겹치면 여름철을 피할 방법이 없다.
북경은 듣던대로 거대한 분지의 도시다.
버스로 아무리 달려도 산이 보이지 않는다.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였다.
옛날 중국의 황실인 자금성의 입구이기도 하다.
몇만 명이라도 충분히 수용이 될 듯한 넓은 광장이다.
천안문 좌우에 걸린 대형자막이 멀리서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에는 [中華人民共和國萬歲] 우측에는 [世界人民大團結萬歲]이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넉넉한 슬로건임을 느끼게 한다.
-천안문-
역시 역사적인 장소로 기억할 만한 곳이다.
무장한 중국병사들이 곳곳에서 도열하여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유분망한 관광객들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광장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은 듯 하였다.
가이드가 일본관광객들과 한국관광객들의 차별난 점을 재치있게 표현해 주었다.
한국사람들은 몇 명단위로 분산되어 천체대열을 형성하지만 일본사람들은 단체가 전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는 물어보지 않고도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고 하였다.
자금성으로 접어들었다.
바닥이 전부 대리석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리석의 두께가 전부 1m가 넘는다고 한다.
外敵이 땅굴을 파서 성안으로 몰래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 한다.
또, 그 넓은 자금성 내부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이유를 물어보니 刺客이 나무 그늘에 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좌우양쪽에 황족들이 살던 곳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첩첩이 둘러싸인 대리석들의 조형물이다.
대단한 규모이다.
그 옛날 황제가 執政했던 옥좌가 있는곳에 이르니 자금성의 절정이 느껴진다.
좌우에 문무백관이 늘어서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朝貢을 바치러 왔던 약소국들의 使臣이 주눅이 들기에 충분한 규모다.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의 넓이는 그 폭이 52 m 라고 한다.
옛날 무공이 뛰어난 최고수 검객이 날을수 있는 최대의 거리가 50 m 라고 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52 m 가 되었다고 한다.
대단한 발상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다가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지는 것을 맞으며 萬里長城으로 향하였다.
입구에 이르러 비옷으로 갈아입고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만리장성에 가까이 접근했다.
바람이 세차다.
만만찮다.
서서히 그 윤곽이 드러나는 규모를 느끼며 성벽 위에 올랐다.
그러나 무어가 무언지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10 여분정도 더 오르니 드디어 장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루에 올랐다.
이것이 만리장성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지 가닥을 못 잡겠다.
굽이치는 산하의 힘과 굽이도는 장성의 힘이 맞물려 거대한 곡선미를 연출해 내고 있다.
군주들의 고향인가-!
노예들의 갑옷인가-!
이건 도저히 사람의 힘이 아니다.
사람의 힘을 떠난 다른 본능의 힘이다.
축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으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겠는가!
현기증이 난다.
사람의 힘으로 성루를 따라 얼마나 계속해서 걸을수 있을것인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만리장성은 만리가 아니고 일만이천리라고 한다.
돌 위를 하루에 계속해서 200리를 걸을 수 있을지?
그래도 縱走를 하려먼 60일이 걸린다.
이 먼 거리를 공격하고 방어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이 있어야 할 것인지 가히 혀를 내두를 만 하다.
성루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념건배를 하였다.
내려오니 마침 비도 그쳤고 바람도 멎었다.
다음 행선지는 이화원이다.
중국 청나라 말기의 황후 서태후의 별장이라고 한다.
인공호수를 파고 그 흙으로 산을 만들었다.
호숫가에는 별장을 짖고 산에는 호화로룬 정자를 세웠다.
호수의 둘레는 20리이며 깊이는 약 6 m 라고 한다.
멀리 유람선이 보였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가 서태후의 여름별장이라니 만리장성의 빗물이 전부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듯하다.
여름이 송두리째 이화원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느낌이다.
다음날 아침, 북경공항에서 간단한 기념품을 장만하는 것으로 4박 5일간의 중국여행은 마무리가 된다.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하고 북경공항을 떠나오니 무언가 아쉽다.
만일 한번 더 백두산 여행을 오는 기회가 있다면 天池, 장백폭포, 이화원 등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백두회 모임의 여흥이었던 한판의 바둑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백두산 대국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김해에서 출발하여 백두산과 만리장성을 거쳐 다시 김해까지의 긴 여정-
이것이 곧 꿈과 현실이 함께 어우러진 한판의 바둑이었다.
인생이란 원래 원점에서 출발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회귀선상의 희로애락이 아니던가!
天池에서 발원하여 다시 天池로 복원하는 韓民族의 氣像은 분단의 恨을 가슴에 품은 여러 애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2000.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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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카페 게시글
창작 글방
天池와 人間이 만나다.
김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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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2.2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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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꼬박꼬박 적은 글씨에 인형의 치밀함이 엿보는 것 같군요.
이제 백두산은 안 가봐도... 성현 인형이 쓴 이 글 보고 사진만 보면 충분하겠네. 아주 자세하게 썼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