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32~51절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비유, 마태복음 25:1~13절의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인 달란트의 비유 공통된 특징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주인과 신랑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두 번째는 주인과 신랑이 반드시 옵니다. 세 번째는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그 일에 대한 칭찬이 있고 책망이 있습니다.
세 비유를 좀 더 자세하게 살피면 주인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종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한 사람은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지만 주인의식 없이 준비 안 하고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하고 악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성경 안에 일명 “비유장”,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3장, 마태복음 25장 등과 같은 곳을 보면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앞의 비유를 뒤의 비유가 발전시켜 줍니다. 때로는 뒤의 비유가 앞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마태복음 25:1~13절이 열 처녀의 비유인데, 이 비유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앞의 열 처녀 비유와 연결되어서 “깨어 있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열 처녀 비유와 같이 달란트 비유도 주인의 부재중인 시기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두 비유는 같이 예수님이 부재중인 시기, 상태에서의 제자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달란트 비유를 살펴보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에 비해서 한 달란트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 달란트라 하여서 절대로 적은 금액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 달란트는 매우 큰 화폐 단위입니다. 6,000데나리온, 일용 노동자 20년 치 연봉입니다. 누가복음 19:11~27절을 보면 한 므나, 100데나리온으로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누가복음 저자와 달리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같이 엄청나게 큰 금액을 주인이 종에게 맡긴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소개된 비유들은 그 이야기 중심이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습니다. 특별히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과 한 달란트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무려 8절입니다. 주연은 한 달란트 받은 자이고, 비중 있는 조연은 주인입니다. 즉, 한 달란트 받은 자와 주인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핵심입니다.
24절을 보면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알았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아람어적인 표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 대해서 “굳은 사람”(엄한 사람, 고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즉, “자기는 별로 노력하지 않고 거두는 사람”, 또는 “자기는 별로 노력하지 않고 종을 수고시켜 얻으려 하는 사람, 이익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런 한 달란트의 주인에 대한 이해는, 주인이 자신에게 준 돈을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듭니다. 이런 주인을 믿고 괜히 다른 곳에 투자했다가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투자하지 않고 땅에 숨기어 버립니다.
26절을 보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목적을 반대하는 자”(마태복음 5:39, 6:13, 13:19, 12:33~42, 16:4) 라는 의미입니다.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를 반대합니다.
“게으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크네로스”입니다. 신약성경에 딱 3번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두 번 사용합니다(로마서 12:11. 빌립보서3:1). 이 말은 어떤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써,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해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유부단한”, 또는 “주저주저하는”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자를 책망합니다. “나를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알았느냐?” 이정도의 사람으로 생각했느냐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 속에서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생각한 그런 주인이 아닙니다. 종을 위해, 자녀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주인이십니다.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오해했습니다. 결국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듣는 행동을 낳습니다. 마태복음 24~25장의 주인이 “갔다”, “왔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심과 다시 오심에 대한 “파루시아” 전제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해한 것처럼 굳은 사람도, 엄한 사람도, 그리고 고약한 사람도 아닙니다. 주인은 자기 종을 섬기는 자입니다.
참된 제자도는 주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즉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달란트 비유는 주인을 제대로 인식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달란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씀하는 내용이 양과 염소의 비유(마태복음 25:31~46)입니다.
30절을 보면 “이 무익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주인을 잘못 인식함으로 충성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또는 주저주저함을 통하여 땅에 한 달란트를 묻었을 때, 찾아오는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두운 곳”은 “게헨나”를 표현합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은 “게헨나”에서 겪을 고통을 표현합니다. “바깥 어두운 곳”, 이 두 가지가 붙을 경우는 하늘나라 잔치와 대조합니다. 당시 연회가 저녁과 밤에 집안 밝은 곳에서 펼쳐진 것과의 대조입니다. 본문 21절의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에서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은 “에이스에르코마이”로서 “들어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게헨나”에 던져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인에 대해 깊고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주인에 대한 이해 없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굳은 사람” 즉,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거두는 사람이거나, 자기는 별로 노력하지 않고 종을 수고시켜 얻으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섬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의 열 처녀 비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깨어 있어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 준비하다”라는 말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제자도는 주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착하고 충성된 제자도의 삶을 영위하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