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김밥
오늘은 김밥 이야기입니다.
나이든 기성세대에게는 소풍을 기억나게 하는 음식이지요. 요즘이야 김밥천국에서 언제든 쉽게 사먹을 수 있는 저렴한 대용식이 되었지만, 40여 년 전에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별식이었습니다.
소풍, 운동회 등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에는 김밥 도시락과 사이다가 꼭 있어야 하는 줄 알았었지요. 소풍 가는 날이면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셨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소풍 가는 날 아침 집안에 퍼진 고소한 참기름 냄새는 안 그래도 설레는 어린 마음을 더 행복하게 해 주었지요. 그래서 김밥은 제게 행복한 음식입니다. 먹을 때도 즐겁지만 만드는 동안 냄새만으로도 행복한 음식이지요.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저를 찾아 경북 예천까지 내려온 아내와 오후를 함께 보내던 날 만들어 먹은 음식도 김밥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재료를 사 들고 자취하던 조그만 방, 요즘 고시원만한 방에서 둘이 함께 김밥을 말았었지요. 주방도 없는 방에서 전기밥솥 하나로 밥도 짓고, 시금치도 데치고, 햄도 볶아서 김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때 아내는 음식 만드는 것이 많이 서툴렀지요. 결혼 후에 아내가 실토했습니다. 그 김밥이 직접 만들어 본 첫 음식이었다고. 그래도 참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요. 이래저래 김밥은 제게 참 행복한 음식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시금치, 당근, 단무지, 햄, 계란, 우엉 이렇게 여섯 가지를 속으로 넣은 아주 기본적인 김밥 말입니다. 순서를 잘 맞추면 1시간에 완성할 수 있지요. 먼저 밥을 짓고, 시금치를 데칠 물을 불에 올리고, 물이 끓는 사이에 당근을 채 썹니다. 물이 끓으면 시금치를 데칩니다. 그 다음엔 프라이팬에 당근 볶고, 햄 볶고, 계란 부칠 때쯤이면 밥이 다 되지요. 뜨거운 밥에 참기름과 소금을 넣어 섞고, 포장된 단무지와 우엉을 꺼내 놓으면 재료 준비 끝. 말기만 하면 됩니다.
요즘은 김밥을 만들 때 열 줄을 만듭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판매하는 김밥 재료가 열 줄에 맞춰져 있는 까닭이지요. 저희 집 밥솥이 12인분 용량인데 김밥으로 만들 땐 열 줄에 딱 맞습니다. 김밥용 김도 10장 포장이고, 묶어서 판매하는 단무지와 우엉조림도 딱 열 줄 양이지요. 시금치도 한 단을 데치면 같은 양입니다. 계란은 지단으로 부치면 두께가 얇아서 김밥을 썰었을 때 빈약해 보이지요. 저는 계란말이로 만들어서 두툼하게 넣는 걸 좋아합니다. 계란 8개로 계란말이를 만들면 양이 딱 맞습니다. 이렇게 준비해서 만들고 나면 남는 재료 하나 없이 열 줄의 김밥이 완성되지요. 저희 네 식구 두 끼 식사가 될 양입니다.
김밥을 만드는 방법은 참 많지요. 참치를 넣어도 고소하고 예전 엄마처럼 햄 대신에 쇠고기를 볶아서 넣으면 맛이 훨씬 고상해집니다. 집마다 만드는 방법이 다르고, 사람마다 좋아하는 맛이 다르지요. 그래도 모두 김밥입니다. 어떤 것이 더 좋거나 맛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누군가와 함께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 재료를 손질하고 정성껏 말아서 만드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한 김밥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면서 국정 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듣고 있지요. 유신 시절에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국정 교과서로 역사를 공부했던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 봅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때문이라고 믿어야 했던 그 교육이 올바른 거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90년대 중반에 탈북한 탈북자 한 사람에게서 들었던 주체사상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에게 이렇게 물었지요. 주체사상이 뭐냐고. 저는 주체사상을 잘 모르지만 북한에서 대학까지 공부한 사람이니 뭐라고 설명하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중심'이라는 사상인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북한에서 공부한 사람이 그렇게 모를 수 있느냐고 반문했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대학까지 모든 학교에서 주체사상 과목은 가장 중요한 과목이다. 다른 과목 점수가 아무리 좋아도 주체사상 점수가 좋지 않으면 좋은 학교에 갈 수 없다. 그래서 시험 때마다 내용을 달달 외우는데, 시험이 끝나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다."고 말입니다. 국정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게 되면 우리 학생들은 북한 학생들이 주체사상을 배우듯 우리 역사를 시험용으로만 공부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아이들에게서 역사를 배울 기회를 빼앗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가을이 깊어갑니다. 단풍도 절정을 지나고 있네요. 더 추워지기 전에 김밥 도시락 만들어서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올바른 김밥이 아니라 행복한 김밥 싸 들고 말이죠.
강북성북교육희망넷 이철우 회원의 글입니다.
<이 글은 서울교육희망넷 소식지에 소소한 일상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