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명동소학교 4학년 담임선생이었던 한준명 목사는 윤동주의 소학교 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윤동주는 성품이 아주 순했어요. 너무 어질었지. 그래서 잘 울었고······.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하하! 본래 재주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34)
윤동주는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고 강하면서도 따뜻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외유내강적인 품성을 장덕순은 같은 글에서 윤동주를 ‘휴머니스트’라고 하였다.
동주는 깊은 애정과 폭 넓은 이해로 인간을 긍정하면서도 자기는, 회유와 일종의 혐오하면서도 자신을 부정하는 괴벽한 휴머니스트였다. ... ... 나의 兄과 동주는 은진중학교의 동기 동창이다. 나는 형을 졸졸 따라서 동주와도 농도 했다. 형은 왕왕(往往) 나를 귀찮아 했으나 동주는 어느 때나 다정히 나를 감싸주었다. 우애(友愛)있는 휴머니스트였다.35)
유난히 산책을 즐기던 윤동주는 산책길에서 그의 시상을 다듬고 문학적 창작력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산책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윤동주에겐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는 해방구 같은 것이었으며, 내면에 얽힌 갈등과 고뇌들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드리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나를 이끌어 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36)
윤동주의 내면의식은 자아실현을 위한 어두운 현실과의 처절한 자기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좌절을 겪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소명의식에 불타 부정적인 식민현실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성서를 통해 그 실체가 강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윤리와 신앙, 그리고 민족에 현실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 등으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 ‘부끄러움’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부끄러움, 신앙인으로서의 부끄러움, 윤리의식에서 오는 부끄러움 등과 만나게 되고 그것이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끄러움이 시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부끄러움’이 표현되어 있는 시를 뽑아 보면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있다.
①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러운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또 太初의 아침」 일부, 1941년 5월 31일)37)
②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서시」 일부 1941년 11월 20일)
③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길」 일부, 1941년 9월 31일)
④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를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헤는 밤」 일부, 1941년 11월 5일)
⑤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1다.
(「사랑스런 추억」 일부, 1942년 5월 13일)
⑥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참회록」 일부, 1942년 1월 24일)
①의 부끄러움은 아담과 자신을 연결하여 원죄의식이 자신과 연관이 있음을 부끄러움으로 고백하고 있다.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해결 받아야 하는 존재로 시인은 보고 있다.
②는 추호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고자 하는 자신의 결의에 찬 양심선언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부끄러움이란 윤리적인 의식에서 오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적 속죄의식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신 앞에서 원죄를 짊어진 인간의 윤리의식이 부끄러움의 정조로 드러난 시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양심에 묻은 한 점의 티에도 부끄러움과 동시에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말갛게 씻어 내고자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다짐하는 이 시에는 일종의 비장감 같은 것이 서려 있다.
③의 부끄러움도 준엄한 윤리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부끄러움을 안고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사색하는 시인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인생길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을 드러내면서 푸르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④의 부끄러움은 현실에 대하여 무기력한 자신을 돌아보고 자책감을 느끼는 자기반성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⑤는 나그네의 우수와 애수가 깃든 시라고 할 수 있다. 저 하늘은 저리도 높고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지만, 항상 암울한 조국을 생각하면 윤동주로서는 마음이 우울하고 슬펐을 것이다. 비둘기는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창공을 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영역에 한계를 느낀 그로서는 결코 여유 있는 마음을 지닐 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⑥의 부끄러움은 일제의 압력에 위축되고 무기력한 자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의 표현이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밤은 어두운 죄로 인해 보이지 않은 자신의 순수를, 거울은 부끄러움을 걷어 내는 맑은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다.
부끄러움은 보통 내성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응시 · 관조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이 시들에 나타나는 ‘부끄러움’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 중에서 가장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양심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삶의 어려움에 비해 시가 너무 쉽게 씌어진다는 시인의 고백은 상대적으로 그의 삶의 고통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부끄러움’의 진정성을 알게 한다.
위 시들을 대하면 ‘부끄러움’이란 것은 인간이 지닌 일상적인 정서의 하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관한 성찰의 한 양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정직하게 부끄러움에 마주서면 그의 전 존재, 온몸이 반응하게 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기질에서 오는 부끄러움에서 점차 성서적 기원을 둔 부끄러움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준엄한 윤리의식이 된다. 그렇게 정면으로 부끄러움 앞에 마주서 본 경험이 가슴을 찢게 하는 시를 절창(絶唱)으로 토해낼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