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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29호 ‘성서통신’에 실린 김교신의 1931년 4월 1일 일기는 함석헌의 뜻밖의 상경을 전하고 있다. 멀리서 벗이 왔으니 반가움이 컸다. 김교신이 단독으로 <성서조선> 편집을 맡은 지 만 일 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함석헌은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1일이면 새 학기가 시작할 때였으니 짬을 내기 어려웠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오산에 있던 함석헌이 갑자기 상경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 날의 김교신의 일기에 ‘본지本誌를 담당한 지 만 일 년에 중대한 위기에 임하였을 때 저가 와서 보고 갔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함석헌의 방문은 이 ‘중대한 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매달 1일에 나오던 <성서조선>은 그 달 6일이 되어서야 발행할 수 있었다.
'중대한 위기'는 무엇이었을까? 김교신은 이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 무렵 그의 일기를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성서조선> 27호 '성서통신'에 실린 1931년 2월 15일 일기에서 김교신은 '근래에 자신의 괴로움과 주위의 고적함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위로 받을 데가 달리 없었다. 주변을 보면 대부분 자신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어서 도리어 위로해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조차 '높으신 이의 눈'으로 보면 작은 것일 뿐이라는 말로 김교신은 그 날 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마친 단락과 그 다음 단락 사이에 김교신의 육필 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성서조선> 27호 원본이 김교신의 서재에서 나온 것이거나 가까운 지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던가 보다. 이 육필일기는 해독하기 어려운데 <김교신 전집 5>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옮겨놓고 있다.
오늘에는 상상키 어려울 정도의 맹렬한 사회주의 청년들과 충돌하다. 저들은 나를 백지답안으로 위협하고, 나에게 맹휴의 주장을 강요하여 오다. 인하여 약 3일간 거의 100명의 폭한들과 싸우다. 단신으로 싸우는 용기에는 스스로 비상함을 느끼다. 드디어 동맹휴학은 나로 하여 중지되다.
<김교신 전집 5>, 부키, 43쪽.
1930년대 초 조선 사회는 사회주의 운동이 맹렬히 끓어오르던 시기였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사회적 불만과 요구를 표출하고 있었다. 양정학교 역시 예외일 수 없었을 터. 하지만 김교신은 사회주의자들의 동맹휴학을 용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움직임을 앞장 서서 반대하는 쪽에 있었는데, 아마도 동맹휴학에 나서려는 100여 명의 학생들을 혼자 맞서게 된 상황이었던 것 같다. 결국 김교신의 반대로 동맹휴학은 중지되었지만 이런 사정이 김교신의 괴로움을 더해 주었을 수 있다. 1932년 일기를 보면 김교신은 양정학교를 사직하는 문제를 두고 깊이 고민하고 있었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교무부장의 만류로 뜻을 돌이킨 일이 있었는데,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이 일에도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가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위기'는 <성서조선>을 향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조선> 28호 ‘성서통신’ 3월 8일의 일기에 이어지는 글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근일에 경외할 만한 선배로부터 온갖 이유를 열거하여 성서조선의 폐간을 충고하는 이가 있다. 동시에 온갖 적성赤誠을 다하여 원조를 제약提約하면서 속간하기를 권면하는 이도 있다. 그 의견의 상위相違는 동과 서가 먼 것 같이 차이差異하나 성서조선을 관심하는 진정과 진리에 향한 의열에 이르러는 갑을이 일반이다. 깊은 감사가 없을 수 없었다.
<성서조선> 28호, 1931. 5.
‘경외할 만한 선배’는 최태용이었다. 그가 온갖 이유를 들어 <성서조선>을 폐간하라고 충고했다는데, 김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경외할 만한 선배’였고, 그의 충고가 <성서조선>에 대한 진정, 진리에 대한 의열의 표현이었기에 이 충고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김교신은 본업이 있는 처지에 홀로 <성서조선> 편집을 맡아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니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가 겪고 있었던 중대한 위기는 이 여러 상황이 중첩된 것이었을 수 있다.
함석헌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거니와, 이 무렵 <성서조선>에 함석헌의 <아모스서 연구>가 수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아모스서 연구>가 발표된 것은 <성서조선> 28․29호(1931년 5, 6월호)였는데, 당시 검열 등 편집 일정상 1931년 5월호의 원고라면 4월 중순 이전에 정리가 되어야 했을 것이고, 이렇게 보면 <아모스서 연구>는 김교신이 당면한 중대한 위기와 시기적으로 겹쳐 있다. 4월 1일 상경한 함석헌이 김교신에게 <아모스서 연구> 원고를 전달하고 갔거나, 혹은 중대한 위기에 처한 김교신을 보고 돌아가 급히 원고를 정리하여 보내왔을 수 있다. <아모스서 연구>는 혼자 <성서조선>을 맡아 비판을 감당하고 있었던 김교신을 향한 함석헌의 전언이 아니었을까. <아모스서 연구>의 첫 대목 ‘야인野人 아모스’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그런데 이 아모스가 드고아 산성의 한 야인이었더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큰 힘이 되는 일이다. 드고아의 목자가 미래 영원의 자유 신앙자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 야인을 세워 자기 진리의 옹호자로 만들었는지 그를 우리는 모른다마는 우리는 이것만을 안다—그는 맹종을 요구하는 교권이나 사람(비록 신자라 하더라도)이 집성한 교회의 명령에 의하여 세운 바가 아니고 전원의 성전에서 실생활을 통하여 체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종교는 그 독특의 것이요 그 말은 지극히 자유롭고 강직하고 소박무식한 중에 투철열렬한 것이 있었으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었기 때문으로 그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고 세상이 도리어 그를 무서워하였다고.
<성서조선> 28호, 1931. 5.
이 글에서 함석헌은 아모스와 제사장 아마샤와의 대립을 ‘야인’ 대 ‘교권 세력’의 대립으로 묘사한다. 아마샤는 아모스를 향해 유대로 가서 거기에서나 예언하지 벧엘에서는 예언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에 맞서 이때 아모스는 자신은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며 목자요 뽕나무를 기르는 자이지만 여호와께서 예언하라고 하였으니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일갈한다. 함석헌이 보기에 ‘야인’ 아모스는 자유 신앙자, 독립 전도자였다. 그는 교권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교회자이기도 했고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서 말했던 프로테스탄트이기도 했다.
그는 일개의 자유 신앙자요 독립 전도자였다. 직접 하나님의 입에서 진리를 받았고 사명을 받았다. 고로 그는 예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예언함은 교회를 위하여 함도 아니요 사회를 위여 함까지도 아니었다. 오직 그에게 명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졌을 뿐이었다. 우리는 개인적 신앙의 철저를 그에게서 본다.
<성서조선> 29호, 1931. 6.
칼하임은 아모스를 가져 삼천 년 전의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과연 적중한 말. 저는 프로테스탄트였다. 하나님의 의를 위한 프로테스탄트. 창일漲溢하는 물질문명의 탁랑濁浪 중에 홀로 감연히 서서 싸우던 용사.
아모스는 오지 않으려나.
하나님의 사람, 의의 사람은 오지 않으려나.
<성서조선> 29호, 1931. 6.
이 독특한 인물 대망론은 함석헌이 후에 쓴 <들사람 얼>(1959)에서 다시 나타난다. <들사람 얼>은 ‘들사람 대망론’을 현대 문명비판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1930년 무렵 함석헌의 관심과도 그대로 이어져 있다.
들사람이란 스스로 제 살을 찢는 자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을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줍시사!
<함석헌 저작집 1>, 한길사, 2009, 42쪽.
함석헌이 아모스를 ‘야인’이라 부르면서 그를 자유 신앙자로, 프로테스탄트로 규정할 때 여기에 김교신과 자기 자신을 아모스의 모습에 겹쳐놓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상상을 좀 보태보자. 1931년 3월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지속할 것인가를 두고 중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초기 동인 몇 사람과 상의했다. 그리고 4월 1일 학기가 시작될 시점에 오산에 있던 함석헌이 예고도 없이 김교신을 방문한다. 함석헌은 품고 왔던 <아모스서 연구> 원고를 꺼내 김교신의 손에 건네준다. 아모스가 야인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느냐고 김교신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두 사람은 김교신의 활인동 집 툇마루에 앉아 서대문 형무소 굴뚝을 말없이 바라보며 울적한 심사를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함석헌을 배웅하기 위해 경성역으로 가야했을 것이고.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로 이제 막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경성 시내를 걸으면서 두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조선의 운명을 가늠해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함석헌은 먼 북쪽의 시골 마을 오산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무교회자로, 자유 신앙자로 홀로 나선 김교신을 마음 깊이 알아준 이, 남들이 보기에 서생의 유희로 보이는 이 일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의 길임을 인정해 준 이, 함석헌이 있어 김교신은 ‘중대한 위기’에도 혼자가 아닐 수 있었으리라.
이 무렵 김교신이 함석헌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는 김교신의 일기에 잘 드러나 있다. 1933년 12월 30일부터 1934년 1월 5일까지 성서연구회 집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에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김교신은 일기에 함석헌의 강의가 충실함을 나흘 내내 거듭 말하면서 ‘우리 중 제1인자은 함석헌’이라 쓰고 있다. 얼마 후 오산학교에 큰 화재가 있었고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사직한다는 말이 들려왔을 때 김교신은 내심 함석헌이 경성으로 와서 <성서조선> 편집을 맡아주기를 바랐으나 결국 오산에 남기로 결정하자 크게 섭섭해 했다. 김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을 대신하여 누군가 <성서조선>을 맡아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함석헌이었다.
한편, 이 무렵 ‘성서통신’은 1931년 3월 22일과 4월 12일 정상훈의 상경을 전하고 있다. 3월 22일 정상훈이 와서 그동안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그칠 줄 몰랐으며, 4월 12일 다시 상경하였을 때는 성서연구회 집회에서 강연하고 그날 밤 9시 다시 귀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상훈의 거듭된 상경도 김교신이 당한 ‘중대한 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김교신은 집안일을 마무리하면 다시 오겠다고 했던 정상훈을 내내 기다렸지만 결국 정상훈은 성서연구회로부터 이탈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