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표 시작 한시간이 지나자 김대중과 이회창, 이인제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은 아예 개표 진행결과 발표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잠시 잠깐 비추어지는 전체 상황 점검 때 보니 권영길에 대한 지지율은 적었다. 너무 적었다. 믿고싶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수치였다.
아직 개표 초반이니까..... 답답해진 몇몇은 인터넷에 들어가 개표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울산은 좀 어때요?"
"아직.... 똑 같아"
우리가 내심 기대를 갖고 있었던 울산에서 마저 권영길에 대한 지지는 낮았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이 밀집해 살고 있다는 북구 양정동에서 45%에 이르는 지지율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에 모두들 잠시 눈빛을 반짝이기는 했지만 전국적 상황은 92년 대통령선거 결과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갖게 했다. 그건 차라리 공포였다.
저녁 9시를 넘기자 사람들은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한숨 섞인 맥주를 마시거나 삼삼오오 모여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혹시 방송사에서 선거본부 표정을 찍으러 올지도 모른다고 만들어놓은 TV시청실과 개표상황판은 사무실 분위기를 더욱 을씬년스럽게 했고 우리들 마음에 비참함을 더했다.
30만 6026표 1. 2%의 참담한 결과가 뎅그러니 우리 앞에 놓였다.
어떻게 해도 도무지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 힘들 것 같은 결과였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권영길 후보와 15-6명 정도의 활동가들만이 여의도 증권가로 출근하는 사무직노동자들에게 대선투쟁을 마무리하는 성명서를 붉은장미 한 송이와 함께 나눠주었다. 핏기가신 얼굴에 희망도 웃음도 한 조각 없이 채 어둠이 빠져나가지 못한 여의도 전철역 입구에 서서 우리 묵묵히 마지막 전투를 수행한다.
눈물이라도 한바탕 쏟고 싶었다. 도대체 대한민국 땅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하고 운동가들이 진보정당을 세우는 것은 진정 닿을 수 없는 꿈일 뿐인가. 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후보를 이다지도 처참하게 외면하고 민중들은 그네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우리들에게 이토록 매몰찬 것일까. 내 지독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원망이 처음으로 격하게 솟았다. 92년 대선 때도 이렇지는 않았고 감옥에 가고 어떤 투쟁에 패배해도 그렇지는 않았는데 그날 아침 우리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바삐 걸음만 재촉하는 노동자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또 당해봐라, 당신네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당신들의 책임이다. 앞으로 5년간 또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그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려면 또 당해봐야 한다.'
저주처럼 원망이 계속 내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막막했다. 당장 무엇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구도 감히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내겐 여전히 진보정당건설은 뚜렷한 희망이었지만 이젠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흩어지고 있었다. 선거가 끝난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국민승리21은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고 사실상 해체되어 있었다. 중앙조직이 이러했으니 지역조직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흥겹지도 않았던 잔치는 끝나고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떻게 이 뒷수습을 할 것인가, 아득하기만 했다.
며칠 뒤 마포 일진빌딩 사무실 계약기간이 다 되어 사무실의 짐을 옮기기 전 이것저것 정리하는 어수선한 와중에 권영길 후보가 상근자들과 마지막으로 간담회를 갖자고 제안을 해 왔다. 사실상의 선거본부 해단식이었다. 초라했다. 무슨무슨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수십 명의 간부들은 거의 찿아 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돌아갈 곳이 있었다. 교수는 대학으로, 노조위원장은 노동조합으로, 명망가는 자신의 이름이 빛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진보정치가 또 한번 좌절해도 진보정당의 희망이 무너져도 어떤 이들은 그다지 크게 상처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진보정당은 시기 상조'라는 말을 하고는 자신들의 '따뜻한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스무 명 남짓한 상근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아무렇게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권영길은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시 일어서 앞으로 가자'고 '감히' 제안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무나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덕담으로 듣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후보였던 사람이, 민주노총의 현직위원장인 사람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를 뚫는 작은 물방울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흘린 지난 몇달 동안의 땀방울이 바위를 뚫는 물방울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냥 지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앞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어쩌면 자신도 의미없는 물방울이 될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각오가 서려 있는 발언이었다.
선거운동 당시 두 번이나 민중후보로 나선 바 있던 백기완 선생과 권영길 후보를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백기완 선생이 보여주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대중선동연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권영길 후보의 부족함을 아쉬워했다. 나 역시 같은 평가였다. 우리처럼 가진 것 없는 처지에서 단 한사람, 후보만이라도 도드라져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거운동기간 내내 '권영길이 아니라 백기완이었다면 어땠을까'하는 가정이 내 머리에 맴돌았던 것도 사실이다. 백기완 선생은 장점이 도드라져 보이고 권영길 후보는 단점이 먼저 보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초라한 해단식 자리에서의 발언 이후 권영길에 대한 내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여전히 현직 민주노총위원장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은 그때 역시 민주노총위원장 자리는 운동진영 내에서는 명예와 힘을 의미했다. 아무도 민주노총을 무시할 수 없었고 누구도 민주노총위원장을 홀대하지 못했다. 어떤 문제를 사회적의제로 여론화시키고 관심사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름만 걸어주더라도 민주노총의 참여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50만명이 넘는 조합원이 있고, 대한민국 어떤 단체에도 뒤지지 않을 조직력과 활동력을 민주노총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며 96년 노동법 총파업으로 국민적 인지도와 지지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선거이후 많은 이들이 자기 자리로 미련 없이 돌아섰을 때 사람들은 권영길도 '후보'자를 떼고 '위원장'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 좋은 민주노총위원장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실패 가능성이 훨씬 큰 험한 길로 함께 들어서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놀랐다.
희망의 불씨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30만6천여 표의 작으나 소중한 부름에 응답을 해야 한다면 그건 후보인 권영길이었고 그는 조용히 그 부름에 답을 한 것이었다.
5년전, 백기완선생이 먼저 저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대산 기슭에서 장작을 패는 모습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자!'는 사자후를 토해냈더라면 오늘 우리는 더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영길의 담담한 연설을 들으면서 나는 5년전 '전투적 민중정당'이란 이름으로 꿈꾸었던 진보정당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나만이 아니라 그 자리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희망을 하나씩 품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권영길은 그때 절망에서 희망을 건져낼 유일한 사람이었다.
초라한 해단식이 있은 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는, 겨울비가 우울하게 쏟아지던 어느 날 우리들은 짐을 싸들고 삼선교 허름한 교회교육관 건물로 패잔병처럼 옮겨갔다. 곳곳에 나눠주고 헐값에 매각했는데도 주인 없는 책상은 아직도 30여 개나 남아 있었다.
쓸 사람보다 많은 책상과 의자가 그토록 부담이고 우울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일단 전국연합으로 복귀했다. 전국연합 정치부장이었던 나는 국민승리21을 해산하고 독자정당 작업은 원점에서 다시 논의한다는 전국연합의 11월 말 임시 대의원대회결정에 따라 일단 전국연합으로 원대복귀 했지만 진보정당건설을 사실상 포기한 그곳에 내가 더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비록 전망이 보이지 않을 지라도 '진보정당건설'을 자기과제로 삼고 있는 곳이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다.
3월 전국연합 정기대의원 대회가 끝난 뒤 나는 전국연합에 사표를 냈다. 최규엽 위원장과 김두수 국장도 전국연합을 떠나 국민승리21에 몸을 실었다. 험로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내가 하고픈 일이기에 즐거움 넘치는 길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다하다 안되면 실컷 울고 말지라도 아예 포기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나만이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대선패배의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희망이 없는 시대, 스스로 희망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규모 정규전에서 패했지만 게릴라전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 '국민승리21'이라는 낡은 배를 지켜 진보정당건설의 희망을 띄우려던 이들은 '진보정당건설'이외에는 어떤 탈출구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절망만 가득한 98년을 함께 한 민주노동당운동의 개척자들이었다.
나는 우리 당 운동의 초라했던 날들을 '상근자'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동지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 훗날 당사(黨史)를 적게 될 때 우리당이 이들을 먼저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들의 이름과 간단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최규엽 - 당시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이었으며 선거기간에도 국민승리21 정책위원장을 맡아 일했었다. 국민승리21 해산 결정등에 반발하여 전국연합을 나와 진보정당건설에 나서겠다며 국민승리21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운동경력이 말해 주듯 활동력이 뛰어나고 이론적 퐁부함도 탁월하여 몇 권의 저서, 역서도 있다. 무엇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하는 예리함과 전라북도 사투리의 정감 어린 다정함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친화력도 뛰어나다. 국민승리21이 당 건설을 표방하고 나선 뒤 집행위원장을 맡아 국민승리21에 쏟아지는 온갖 수모와 어려움을 다 겪어내야 했으며 실업대책본부를 마지막까지 총괄 지휘하면서 국민승리21이 민주노동당의 길을 열고 해산할 때까지 최선의 책임을 다했다. 2000년 총선과 2002년 8. 8재보선에 서울 금천구에서 출마했고 현재 당 자주통일위원장으로 통일투쟁을 이끌고 있다.
이상현 - 전노협, 민주노총시절 조직과 쟁의 쪽을 담당했던 노동계 출신. 당시 민주노총에서 파견되어 대표 비서실에서 차장을 맡아 전국을 후보와 함께 돌아다녔다. 대선 이후 민주노총 이갑용 집행부가 파견자들의 원대복귀를 명령하자 몰인정한 처사라며 민주노총조직국장 자리에 사표를 내고 당건설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했다. 자신이 전노협, 민주노총 국민승리21의 조직사업을 하면서 마셔댄 술이 여의도 야외수영장을 채울 정도라고 할을 정도로 조직의 대가이자 술의 대(주)가 이기도 하다. 당 건설을 표방한 국민승리21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현재 당 대변인을 맡아 여러 언론사 기자들을 술독에 담그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96년 날치기 총파업 당시 한국노총과의 여의도 연대집회자리에서 사회 본 일을 민주노총에서 경험한 가장 뿌듯한 일로, 학생운동시절 그를 붙잡아 고문하던 형사가 민주노총 사무실을 관할하는 성북경찰서의 간부로 있었는데 그가 연락해와 이제는 자기를 때려 달며 용서를 빌었던 일을 민주노총에서 경험한 가장 씁쓸한 일로 기억하고 있다. 진보진영내 마라도나를 자임하는 축구광이기도 한 그는 지구당에도 다른 기구보다 먼저 축구부를 설치했다. 2000년 총선에 노원갑에서 출마했다.
최철호 -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그는 국민승리21에서 대선 시절 비서실 차장, 삼선교 시절엔 총무국장을 맡았다. 국민승리21이 초라했던 그 시절에 이미 당원 10만 명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당원모집, 당비납부, 재정관리 등에 쓰이는 CMS 등 각종 사무시스템을 만들고 정착시켰다. 김두수 국장과 함께 종이정당창당을 주도한바 있고 선관위 대상업무와 정당법, 선거법에 두루 능통한 실사구시적 스타일의 기획가이다.
전교조 합법화 뒤 교단으로 돌아갔고 전교조 전임자로 계속 활동중이다. 교사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이유가 최철호 국장 같은 능력 있는 기획가들이 진보정당운동에 나설까봐 보수진영이 걱정한 때문일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논쟁과 정치적 입장이 우선하는 진보진영에서 찿아 보기 힘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이근원 - 92년 대선 때 백기완 선거본부의 울산 책임자였고 97년 대선에서는 중앙기획국장으로 선거에 결합했었다. 지금은 공공연맹으로 통합한 공익노련에서 국민승리21로 파견했었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도 오랜 기간 연맹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민승리21이 당건설의 토대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탁월한 조직력, 기획력을 바탕으로 실업대책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피켓 하나 만드는 일에서부터 정책대안 만드는 일까지 꼼꼼하게 챙겼던 책임감 강한 활동가다. 어렵고 힘들었던 98년 국민승리21의 삼선교시절에 젊은 활동가들에게 많은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던 마음의 의지처이기도 했던 그가 연맹으로 돌아가게 되자 국민승리21이 이제는 끝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가 차지했던 역할이 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뛰어난 친화력, 상황장악력, 조직력, 기획력, 투쟁력, 그리고 '말빨'까지 생각하면 '저런 사람이 우리편인 게 얼마나 큰 다행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런 인간이 보수정당이나 공안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더라면 우리들에게 식은땀 날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도 당밖 공공연맹에서 일하지만 당내 영향력있는 인물중 하나로 손꼽히는 활동가이다. 민주노동당이 건설과정에 이근원에게 진 빚이 적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낚시가 취미이다. 그의 글중 하나를 뒤에 따로 싣는다.
이재영 - 통합 민중당 시절부터 민주노동당까지 끈질기게 진보정당운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다. 당 건설 전망이 전혀 없던 시절에도 '진보정치'라는 간판을 앞세운 단체의 상근자로 사무실을 지켰던 만큼 '걸어다니는 진보정당 운동사'라고 불리울만 하다. 정책생산능력과 글 솜씨가 탁월해 진보정당사에 길이 남을 여러 성명서나 선언문이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다소 상황이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화 시켜 이해하거나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지만 가끔 도를 지나쳐 사태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거나 간단히 대응하는 경우마저 있어 주위를 당황하게도 한다. 이른바 <말>지 '반통일발언'등 몇 번의 필화, 설화 사건을 겪기도 했다. 98년 삼선교 시절에 늘 낙관적으로 당 건설 전망을 내놓으며 주위사람들을 격려했는데 그 이유도 간단했다. 한때는 당을 만들자고 하면서 상근하는 사람이 자기혼자였는데 지금은 15명이 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이없기도 했지만 즐거운 낙관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당 정책국장이다.
송태경 - 제주출신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당 경제정책전문가이다. 아마 19세기 유럽에서 태어났더라면 마르크스, 엥겔스와 친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본론과 마르크스 경제학 분야에서 자기 세계를 굳건하게 세우고 있다. 해마다 <자본론 특강>을 열어 자본론에 대해 강의하고 있을 만큼 자기 이론과 주장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제주에 부인과 아들을 두고 서울로 올라와 사무실 바닥에 침낭하나 깔고 잠자리를 해결하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 국민승리21의 궁핍함을 함께 견뎌냈다. 그 고난의 행군 시점에도 얼굴한번 찌푸리지 않았고 당 건설 과정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97년 대선국면에서 정부가 IMF 차관요청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왔을 때 당시 국민승리21 뿐 아니라 진보진영 대부분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 전혀 몰랐다. 우리 입장을 발표해야 하는데 막상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논평을 쓰기 위해 그에게 찿아 갔을 때 그는 단번에 '나라 망하자는 것이죠, 노동자 다 죽어나갈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그 대답을 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무려 한시간 가까이 그에게서 IMF의 본질, 내부구성과 정책, 다른 나라의 사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그의 강의를 꼼짝없이 들어야 했다. 겨우 일어서면서 나는 확인하듯 물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이거죠?" 논평은 8줄 짜리로 나갔다. 그 일이 있은 뒤 나는 이재영 국장에게서 '송태경의 강의를 끊고 일어서는 방법'에 대해 별도강의를 들어야 했고 그것은 그 뒤 많은 도움이 됐다. 현 당 정책국장으로 활동중이다.
김두수 - 학생운동 시절 80년대 중반의 민정당사 점거투쟁에 참여했으나 구속을 각오한 마음가짐과는 달리 경찰투입의 아수라장에서 공사인부로 가장해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그때는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민주화운동 보상자' 대상에도 오를 자격이 없게 됐단다. 그 뒤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정치 기획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현장을 정리했다. 정한용 전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선거관련 기획자의 역할을 배웠고 그 뒤 친형인 전 남해군수 김두관의 군수선거를 도와 초대군수로 당선시켰다. 98년 지방선거에서도 조승수 전 울산구청장의 당선을 도왔다. 97년 대선에서도 선거전략을 맡았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97년 전국연합 정치국장으로 국민승리21 구성을 위한 초기과정부터 참여했고 대선 이후 최규엽, 박용진과 함께 전국연합에 사표를 내고 진보정당건설을 위한 대장정에 참여했다. 2000년 총선에 일산에서 출마해 8% 대의 의미 있는 득표를 올렸으나 현재는 당 운동의 전면이 아닌 참여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노현기 - 인천지역 노동운동 출신이다. 대선 때 홍보국장을 맡았고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늘 선전편집 쪽에서 일을 해온 그 방면의 베테랑이다. 따라서 대선 때부터 창당시기까지 당원들이 받아본 당원가입원서, 포스터, 각종 홍보물 등이 대부분 그녀의 작품이다. 더불어 우리운동사상 가장 욕을 많이 먹은 홍보작품(?)인 '일어나라 코리아!'도 그녀의 적극적인 엄호아래 채택된 것이다. 선전홍보의 귀재라고 해서 정치감각이 꼭 뛰어난 것은 아니니까.... 삼선교시절 여성동지들과 함께 도시락파를 결성, 검소함을 실천하는 등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으나 홍보물에 돈 아끼는 꼴은 절대보지 못한다. 성격도 직선적이어서 느려터진 국민승리21의 의사결정과 창당준비위 시절의 과잉간섭등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결국 중앙당을 박차고 나갔다. <매일노동뉴스>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현재 부평을지구당 부위원장이다.
최기영 -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임종식씨가 의장이었던 제4기 전대협사무처장 출신이고 한국전력에 입사한 뒤 노조민주화촉진위 활동을 하다 해고되었다. 그 뒤 민주노총조직국에서 일하다가 대선 시기 후보 비서실로 파견되었다. 선거 뒤 역시 민주노총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민승리21에 남아 힘든 시기를 함께 했다. 그의 이력이 좀 독특한 것은 당시만 해도 전대협주류출신들은 진보정당운동 보다는 DJ에 대한 비판적지지가 압도적이었는데 그는 진보정당건설에 매우 열정적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전대협시절 인맥을 통해 정치권 - 재야 - 노동계 등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기획을 세우고 정치적 돌파점을 만드는 데에도 재능이 뛰어나다. 삼선교 시절까지도 계속 권영길의 비서로서 수행·보좌역을 맡았으나 창당 이후엔 기획국장, 기획위원 등의 역할로 변경, 선거 및 당의 주요진로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내놓고 있다. 단점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술이 아주 약한 것이고 둘째는 그런데 무지 많이 마신다는 점이다.
김재운 - 97년 대통령선거 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일하다 국민승리21에 결합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총무·회계쪽 일을 맡았고 삼선교 시절부터 권영길 수행비서 역할도 겸했다. 국민승리21은 대선 당시 졌던 빚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운의 알뜰한 재정운영이 아니었다면 당은 건설도 하기전에 재정파탄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삼선교 시절 그의 주요업무중 하나는 결려오는 빚쟁이들의 독촉전화를 처리하고 사무실로 찿아 온 기획사 측의 대금결재 요구방문을 점잖게 응대해 다음달로 또 그 다음달로 미루는 일이었다. 당시 주급 3만원씩을 받던 우리들은 매주 월요일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그의 손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는 그렇게 한 주를 3만원으로도 살았었다. 지금도 열심히 중앙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황정아 - 국민승리21을 결성한 4단체의 파견자가 아니라 자원봉사 형식으로 결합한 첫 번째 일물로 기억하고 있다. 삼창프라자 시절부터 함께 했으니 상당한 고참이다. 대선 시기에는 기획위원회 일을 맡았고 삼선교 시절부터 조사통계분야에까지 역할을 넓혔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신부가 활동비조차 지급되지 않는 단체에서 일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색 없이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정아는 97년 대통령선거를 주도한 4단체 이외에 많은 정치그룹들이 국민승리21에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경우인데 그가 참여했던 <청년 네트워크 미래>라는 청년단체는 92년 대선 당시 민중후보운동에 참가했던 학생정치그룹의 오비그룹이며 느슨한 형태의 정치조직이기도 하다. 즉, '92년 대선 투쟁의 아이들'이 성장해 사회곳곳에 진출해 있지만 흩어지지 않고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이라는 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꾸준한 모임을 계속하고 있는 단체이다. 전국적으로 이런 단체들은 수십 개에 이르렀다. 87년, 9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고 92년 대선의 역사적 성과이기도 하다. 이 젊은 그룹들은 97년 대선이나 그후 창당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했고 특히 국민승리21이 예비당원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가입하는 등 진보정당운동의 든든한 후비대 역할을 해줬다. 이것만 보아도 92년 백기완 민중후보운동은 97년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면면이 이어지는 역사이고 민주노동당은 97년과 92년 민중후보운동의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현재 황정아는 출산·육아를 위해 중앙당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김창현 - 자원봉사자로 대선에 결합한 전남 광주 출신의 활동가, 광주출신인데다 학생운동도 주류 쪽에서 했기 때문에 DJ 지지가 아닌 권영길과 국민승리21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창당시기까지 계속 정보통신위원회의 일을 맡아 고생했다. 제주 출신 송태경과 함께 삼선교시절 국민승리21 사무실에서 침낭하나로 생활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두고 '진보정당 노숙자'라고 불렀다. 사무실을 옮길 때마다 내부 네트워크공사를 도맡았고 정보화시대에 뒤떨어진 다른 상근자들을 구제하느라 애를 많이 썼다.
오현아 - 역시 자원봉사자로 결합한 광주 전남대 출신의 여성활동가. 김창현과 선후배 사이였지만 서로 전혀 몰랐던 이유는 전남대 비주류소수파에서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야당생활'이 몸에 배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스타일이고 권영길을 제외한 모두에게 친구대하 듯 하는 독특한 말투로 나이 많은 활동가들이 마른하늘 바라보며 울적해하게 하기도 했다. 대선 시기 조직위원회에 소속되어 그 뒤로 계속 조직관리사업을 맡았다. 최근에 지방자치위원회나 노동위원회 등으로 자기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
김해근 - 97년 대선 당시 서울대 학생으로 자원봉사자로 결합했다. 기획위원회에 소속되었으며 대선 때부터 삼선교 시절까지 하루소식지를 제작하고 통신상에서 배포하는 일을 맡았었다. 삼선교 시절 힘든 과정에서도 자원봉사 일을 계속하면서 많은 힘을 다른 이들에게 주었는데 군복무문제를 해결한 뒤 다시 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징역살이하게 된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
**** 이 글을 쓴 게 감옥에서, 대선을 앞둔 2002년 9월쯤이다. 그래서 위 사람들에 대한 이 평가도 그때의 평이다. 조금 덧붙인다면 김해근은 현재 중앙당 인터넷위원회 위원장으로 정당사상(?) 최연소 상집이 되어 멋지게 당 일선에 복귀했고, 김두수는 행자부장관이 된 형을 따라 노무현네 동네로 갔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평가를, 그것도 개인적인 시각에서 쓴 것을 굳이 공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왜곡과 무지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공개하는 데에는 이 동지들이 97년 대선이후 암울했던 시절을 함께 이겨냈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건장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전 중앙당 후원회에 갔을 때 나는 그 넓고 훌륭한 중앙당 사무실을 둘러보고 허름했던 삼선교 교회건물을 떠올리며 얼마나 감개무량했었는지 모른다.
당은 어쨌든 성장하고 있다. 역사는 계속 전진하고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보면서 이 사실을 새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