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신사(神社)와 자치회의 갈등
永井 徹
1.
나는 20년 전에 지금 사는 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곳은 15년 전, I시에 합병되었다. 재작년부터 2년간 나는 우리 마을의 자치회 임원을 했다. 그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치회는 신사의 업무, 즉 神主를 불러 신전에서 거행하는 의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봉찬회라는 단체가 맡아서 한다. 그러나 그 행사의 준비와 마무리는 자치회를 구성하는 각 반에서 해마다 당번제로 돌아가며 수행한다. 15년 전이었을 것이다. 봉찬회의 임원을 겸하고 있던 촌장이, “이대로 1년에 네 번 하는 신사의 제사를 봉찬회만으로는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신사의 가을 제전을 자치회가 중심이 되어 실행위원회를 만들고 치르도록 규례를 바꾸었다.
그때부터 가을 행사를 자치회가 주최하고, 봉찬회나 크고 작은 봉사단체와 청년회, 장년회, 노인회 등이 협력하여 진행해오고 있다. 정교분리 정책에 따라, 자치회는 신사에 관여하지 않도록 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이벤트를 하는 야외 부스의 배치(청년회가 중심이나 자치회도 협력해야 함), 경내의 무대 설치(소학교 6학년 여학생이 무녀가 되어 춤도 추고, 추첨을 진행함) 등을 해야 한다.
즉 신사의 가을 제전에서 제사는 맡지 않으나, 그 이외의 일은 자치회와 실행위원회가 협력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자치회로서는 제사를 맡지 않으니 신사종교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고 핑계댈 수 있으며, 지역주민의 축제이니 자치회가 운영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주민도 많다. 그러나 분명히 자치회는 헌법이 정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규범을 위반하고 있다.
2.
2년간 나는 자치회에서 평의원(平議員)으로 일했는데,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수년 전, 같은 반에 사는 봉찬회장이 장례식에 함께 다녀오며, 봉찬회에 들도록 권유했다. “저는 크리스천이라 안 돼요.” 라고 분명히 거절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새로운 부스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자치회가 세대당 월 1천엔씩 11년간 갹출하도록 의결하여, 그때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그런 나를, 자치회 임원이 되면, 싫어도 신사의 제전에 참여할 것이라 생각하여, 일부 사람들이 추천한 것이다. “다른 분이 없어서….”, “지역을 위해서….”라는 말에 나는 평의원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3.
임원을 하다보니, 신사의 가을 제전 문제로 놀랄 일이 꽤 있었다. 하나는 제전 둘째 날, 신사 경내에서 제전비(기부라는 명목으로 강제)를 낸 사람을 대상으로 추첨이 행해지는데, 상위 경품은 자치회와 봉찬회의 임원을 했던 사람들이 당첨되도록 뒤에서 조작을 해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행사기간 동안 청년회와 장년회가 경내에서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치고 먹고 마시는데, 그 비용을 제전비에서 지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비용이 제전비 전체의 3분의 1로, 약 100만 엔이 되었다. 이는 회계보고할 때 내가 질문하여 밝혀진 사실이다. 이렇게 제전의 속내가 불투명하고 '대충 적당 편의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다.
4.
작년에는 자치회 중에서 우리 반이 24년 만에 신사의 당번이 되었다. 신사는 연 4회 중요한 행사를 치른다. 당번이 되면 마을사람 전원이 나와서, 신사의 잡초제거, 청소, 깃발 세우기, 떡 준비 등 의식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에서 정리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 반장을 중심으로 전원이 함께 힘을 보탠다.
반이 모임을 가질 때, 나는 이렇게 질문을 했다.
“종교나 사상이 다른 사람은 참여하기 꺼려지는데, 왜 반 전체가 참여하도록 하는가?”
하고 질문하자, 나를 평의원에 추천했던 봉찬회 사람이, “그건 안 돼! 지금까지 반 전체가 협력하여 당번을 해왔어. 그것이 싫으면 나가!”라고 분명히 말했다. 너무나 당돌하고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 협박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고 무엇을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생각 끝에 수일 후 자치회장에게 전화로, “저는 크리스천이어서, 신도(神道)의 제사 의식을 위한 준비나 도움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엄격한 규칙에도 예로부터 ‘운영의 묘’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이번 당번 문제로 봉찬회 회장님과 상담하고 싶습니다.” 하고 부탁했다. 그러자 봉찬회장이 답을 보내주었다.
“임원으로서 의견을 말하면, 저 개인보다는 반 전체가 모이는 자리에서 토론하는 게 좋겠습니다.”
의외로 약간 배려를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 11월에, 전국무교회 집회가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하는 과제를 안고 참가했다. 내가 얻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를 용서했고, 너는 나의 것이 되었다. 큰 파도가 와도 너는 휩쓸려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격려의 소리였다.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돌아왔다.
그 후 우리 집에도 제전 준비를 위한 일 분담을 위해, 신사에 모이라는 회람판이 도착했다. 나는 가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행사준비를 위한 자세한 일정과 업무 내용, 담당자 발표가 있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들었다. 나의 전화가 효력이 있었는지, 업무분담표에 담당자 개인 이름이 다소 있긴 했으나, 대부분 ‘전원’이라고 기록하여, 다소 배려를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5.
제전 당일 아침, 우리 반 주민들은 신사에 깃발을 세우는 등 분주했다. 나는 자치회 임원으로서 별도 업무가 있어, 의식을 위한 준비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반장이 내가 안 나왔다고 욕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나오라 말하는 건 무리다. 강제하면 마을 인심이 분열될 것이다. 특정 종교에 동조하는 것은 헌법 위반일 뿐 아니라, 과거의 국가주의로 몰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위험!”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어느 날 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가!”라고 화를 냈던 사람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역 축제의 협력을 거부할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슬쩍 말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났고 걱정한 만큼 미움도 받지 않았다.
6.
올해는 코로나로 행사가 중지되고, 당번 반도 아니어서 조용히 지나갔다. 이웃 하마마쯔시에서는 하마마쯔성서집회의 미조구치(溝口) 선생이 자치회와 신도(神道)의 문제로 시당국과 재판까지 벌였다. 결국 시가 사죄하고 화해하는 걸로 끝이 났다. 우리 시에서도 그 일을 전해 들었는지, 재판 투쟁을 하고 싸우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마마쯔의 다른 지역에 살면서 ‘9조의 회’ 회원인 한 여성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고민을 품은 사람이 전국에는 얼마나 많을까?
오늘날은 각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주위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되, 때로는 용감하게 태도를 확실히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간 무교회 2020년 가을호에서>
첫댓글 전국민이 신사를 찾아가고, 신도(神道)를 믿는 일본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엿볼 수 있는 글이어서 옮겨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새삼 감사하게 되네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는 모습이 참 아름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