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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지자란 누구인가?
열왕기상 17장 17절~24절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아합의 칼을 비해 엘리야가 보내진 곳은 이방 시돈 땅 사르밧이었습니다. 그는 하필 지지리 가난한 과부집에 보내졌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과부집에 거하는 것은 엄청 불편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가정은 끼니 해결하기도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는 무척 난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 집에 복이 들어오기는커녕 사망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그 가정을 택해서 보내셨는지 어쩌면 엘리야는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과부여인은 아들이 죽자 엘리야에게 원망을 하며 “당신이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여인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라고, 이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은 엘리야애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왔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자기 집에 옴으로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 그 결과로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듯이, 기도자가 환자를 위하여 온 몸을 투신하므로 더욱 더 간절함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소생될 것을 소망하는 행동이였습니다. ‘3’은 하나님의 완전수이므로 세 번 엎드렸다는 것은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선지자 엘리사도 그와 비슷하게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도 아이 위에 올라가 엎드려 간구했더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일곱 번 제치기를 하고 그 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7’이라는 숫자도 하나님의 완전수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아서 3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때도 바울은 그 청년 위에 올라가 기도하자 다시 살아 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동작이 사람을 살려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사도 바울이 죽었던 사람을 살려낸 것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집에 재앙이 닥쳤는데 공교롭게도 자기가 온 이후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이미 숨이 멎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기도해서 그 아이가 살아난다는 확신이 있었을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은 물론 모세도 죽은 아이를 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그는 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 아이의 혼이 다시 몸에 돌아오게 해달라고 구체적이고 명확했습니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에게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혼이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이 구약 역사상 최초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그림자였습니다. 기도를 응답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응답여부를 강요할 수도 재촉할 수도 없습니다. 응답을 하실 수도 있고, 하시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보류를 하시더라도 모두 그분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경우에 따라 엘리야처럼 갈급하여 무모하게 간구할 수 있고 때로는 능력이상의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그 음성을 하나님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혼이 돌아오는 응답 받은 케이스입니다. 그 시대에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에의 절규는 침묵 속에 묻혔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같이 했는데 십자가에서는 외면되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은 경험한 하나님만큼 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단을 아예 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응답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는 우리 하나님과의 소통이고 결과는 주님의 주권입니다. 우리를 알고 우리의 심정을 아시므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응답 받지 못해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은 최선일 것입니다. 우리를 잘 아는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소원은 불 병거를 받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분입니다. 우리가 처해진 것도 그곳일지 모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또 그를 위해 말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자로서, 선지자는 명령, 예언, 계시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며 또 인류에게 행하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의의 전파자로서 죄를 비난하고 그 결과를 예고하며 때때로 선지자들은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영감을 받아 미래를 예고할 수도 있지만 그의 주된 책임은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14. 사자같이 담대한 선지자
잠언 28장 1절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에스겔 3장 9절 내가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어 놓았 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 서 떨지도 말아라."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속담처럼 지은 죄가 있으면 스스로 마음이 조마조마하여진다.
죄는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어 죄지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왠지 사람 앞에 위축되고 신앙인이라면 하나님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진다.
양심에 죄가 있으면 스스로 두려워 쫒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주저함이 없고 담대함이 있다.
사람들 앞에 당당하고 위축됨이 없고 젊은 사자와 같이 대담해진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을 더 찾게 되고 그 구함에 있어서 신념이 강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촛밀같이 녹아내리는 고통과 슬픔이 밀려와도 하나님이 붙드심으로 좌절함이 없다.
화석은 化石이 아니고 火石, 즉 부싯돌이다. 돌이 단단해서 부싯돌이나 칼로 사용했던 돌이다. 이마와 얼굴을 그보다 더 단단한 금강석(다이아몬드)같이 단단하게 만들어 주셨던 금강석은 천연광물중 가장 굳기가 우수하며 광채가 뛰어난 보석이다. 주성분은 탄소이며 분자구조상의 차이로 인해 동일한 원자로 구성된 자연 산물인 흑연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진 보석이다.
이스라엘 족속의 이마와 마음이 굳다는 말씀은 그들의 생각이 고집스럽고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고 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런 일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선지자 에스겔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마음보다 훨씬 더 강하고 간절하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서워 할 것도 없고
두려워 할 이유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이마와 마음이 굳었다’는 표현은 그들이 지극히 완고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족속들의 마음을 빗대어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발로 다져진 길이나 돌밭과 같이 단단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 원인인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지 못하고 도리어 찍힌 나무처럼 본토에서 뽑혀 바벨론으로 추방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담대한 사람은 ‘양심의 소리를 거스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 하면서, 그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으나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 뿐 아니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까지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은 그들의 심성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주셨고,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고 변명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함을 받았던 것도 마음의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그의 신앙양심을 따라 온힘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담대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거스리지 않기 때문 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 입니다.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할수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하지 못하고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며 양심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살아간다면 엉터리 믿음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맞아 싸우러 나가면서 이렇게 확신의 찬 고백을 합니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그리고 다윗은 그를 업신여기고 저주하는 골리앗에게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고 말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할 때 수없이 안 간다고 했던 모세는 사라지고, 백성들을 설득하고, ‘걱정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봐라!’고 웨칩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의 담대함은 자신을 보내신 분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담대함 역시 자기를 이방인에게 보내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에도 천국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며 삶의 순간순간을 담대하게 용기있게 헤쳐나가는 믿음으로 선지자들이 본을 받아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온맘과 정성을 다해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신부의 심저응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5. 사람의 말의 본질
베드로는 ...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말은 자신의 성품과 인격, 가치관, 그리고 본성들이 집약되어 표출되는 것으로 주변 사람에게 신뢰와 긍정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주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뛰어난 재담가는 예나 지금이나 직업인으로 인기를 누린다
인간 활동의 근원으로 몸 안에 간직하고 있는 힘을 에너지라고 한다면 사람이 하는 말도 일종의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머릿속 생각이 입 밖 소리로 나오면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시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고 우주 어디엔가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이라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칼의 상처는 아물어도 말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몽골 속담도 있다. 성경은 “지혜로운 이들의 혀는 지식을 베풀지만 우둔한 자들의 입은 미련함을 내뱉는다”(잠언 15장 2절)고 한다. 무심코 한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희망과 용기를 발견하게 할 수도 있다. ‘침묵은 금’이라는 옛말도 있다.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고언이다.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 현대인들은 무조건 침묵만 할 수는 없으니 말을 하기 전 그 힘과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야 하겠다.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상대에게 희망을 주고 격려하는 말을 한다.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은 질책하고 원망하는 말, 포기하고 핑계 대는 말을 많이 한다.
말 때문에 오래 쌓아온 공든 탑이 한번에 우르르 무너지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실수와 잘못이 말에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혀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떤 이는 말하는 것을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한다. 좋은 열매와 고통의 열매는 전적으로 자신이 뿌린 말의 씨앗 때문이란 것이다.
마 12장 33~35절: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온유하고 선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온유하고 선한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무례하고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이며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킨다”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의 따사로운 말씀 한 마디에 사랑이 영글고, 선생님의 눈물어린 충고의 말씀 한 마디가 학생의 장래를 성공시키는 열쇠가 되며, 정직한 이웃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온정에 꽃을 피우고, 성직자의 말 한마디는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등의 밝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안과 ‘그게 뭐니, 잘 좀해라, 네가 그렇지.’ 등의 말을 사용하는 가족의 삶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말 때문에 사람을 얻게 되고, 사람을 잃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언행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한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도 있고, 무례하고 악한 말 한마디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항상 하나님의 자녀다운 선한 말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므로 항상 은혜롭고 선한 말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16. 선지자란 귀하게 쓰는 사람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면 그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는가 하면 천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습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느냐 아니면 주인이 천하게 쓰느냐, 종류가 아니라 주인의 쓰임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주인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주인이 천하게 쓰는 그릇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은 손님이 올 때나 특별하게 쓰는 그릇이고 천하게 쓰는 그릇은 평소에 편하게 쓰는 그릇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게”라는 단어는 불명예, 수치가 되는 부끄러운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말하는 것처럼 부모를 두고 사람의 타고난 배경이나 부를 가지고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만든 그릇인지, 그릇의 원료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두고 가치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을 다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누군가는 금으로 누군가는 은으로 누군가는 나무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알맞게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쓰임이 다르기에 특징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무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만족함이 없고 더 좋은 배경의 사람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금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소유된 그릇들이 주제넘게 서로를 판단하며 싸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추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순응하고 순종하며 그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귀하고 성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금 그릇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천하게 사용될 수 있고 질그릇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귀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릇의 가치는 금이냐 은이냐 그 원료에 있지 않고 주인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그릇,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은 금도 아니요, 은도 아니요, 정답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깨끗함은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거짓으로부터 깨끗해야 하며 불의로부터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한 그릇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종류의 여러 그릇들과 다르게 구분해둡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쓰심에 합당하는 말은 쓸모 있다는 뜻으로 깨끗한 그릇은 주인에게 꼭 필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므로 깨끗한 그릇은 주인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함은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이므로 기꺼이 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담으려고 그릇을 집어 들었는데 그릇에 음식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면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생은 그릇과 같아서 얼마나 중요한 그릇이냐, 얼마나 준비된 그릇이냐에 따라서 귀한 것이 담겨질 수도 있고 천한 것이 담겨질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에게 필요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금그릇이라고 해서 반드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손에 가까이 있어야 많이 사용되고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인 우리는 우리를 쓰시는 하나님 앞에 과연 얼마나 인정을 받고 사용되고 있습니까?
주인은 그릇을 씻고 닦아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사용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사용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쓰실 만한 그릇을 찾고 계시며 하나님은 자기를 채울 만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할까, 누구를 통해서 역사할까?' 하고 당신을 채울 만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이 사람에게 임했을 때 능력과 기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단 사설과 불신앙과 죄악에서 우리 자신을 구별시키고 항상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는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 죄와 더럽고 추한 것에서 저를 건지시고 저를 구분하셔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불의하다 할지라도 부족하다 할지라도,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말씀 속에서 기도 속에서 깨끗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욥기 8장 5∼7절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昌大)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사람을 쓰시지 않으며 깨끗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또한 시편 24편 3∼5절에서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義)를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자를 구원하여 주시고(욥 22:30). 상을 주시고(시 18:20∼21), 복을 주시고(시 24:3∼5).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사 35:8∼10).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자를 보호해 주시고(사 52:11∼12).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십니다(요 15:2). 하나님은 깨끗한 자를 통해서 기업을 복되게 하시고(행 20:32). 하나님은 깨끗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빌 4:8∼9). 또한 깨끗한 사람은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선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딛 2:14).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Clean Mind),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럽고 추한 마음, 탐욕이 꽉 들어찬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나라까지도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사고방식도 깨끗해야 합니다. 불결한 메시지, 폭력, 부도덕하고 저속한 것, 사악한 것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항상 깨끗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부정부패가 많으냐, 적으냐 하는 청렴도에 따라 나라별로 순위를 정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제일 깨끗한 나라는 핀란드, 두 번째는 덴마크, 세 번째는 스웨덴과 뉴질랜드였습니다. 독일은 열일곱 번째, 일본은 스물세 번째, 중국은 예순세 번째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거짓말을 잘 하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순위를 보면 선진국일수록 정직하고 성실하며, 후진국일수록 부정부패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마흔여덟 번째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서 스포츠를 잘하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먼저 이런 청렴도 순위에서 앞서는 깨끗한 나라가되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 스스로가 이런 부패지수를 낮추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400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부실 기업주들은 부도 직전에 편법 증여를 하는가 하면 회사 재산을 빼먹고 고의 부도를 내어 부도낸 회사를 다시 제3자의 명의로 헐값에 사들이고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을 빼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부실 기업주들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극에 달했나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생활이나 직장생활,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정직하고자 노력하고, ‘하나님, 주께서 함께 하셔서 저를 깨끗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정직과 성실,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생활이 매일, 매달, 매년 발전하고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장승, 목각인형, 동물상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목각 공예사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지역장님이 심방을 오셔서 예배를 드리다가 “우상을 조각하면 안됩니다. 망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망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집사님은 화가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차츰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는 회사가 점점 안되더니 IMF가 터지자 결국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종업원들을 내보내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봉급을 20∼30퍼센트씩 삭감했지만, 대출금 상환이 안되자 집도 빼앗기고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업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과 동업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서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던 목각 공예사는 이제 망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믿음과 희망을 주셔서, 이 집사님은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에 떳떳한 직업을 갖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복받을 만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가구점을 차려야겠다. 가구점은 우상숭배가 아니지.' 그는 기도원에서 내려온 후 목각 공예사를 가구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었습니다. 저를 통해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가구점을 차리고 간절히 기도를 하니까 기적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여기 저기서 주문 전화가 쇄도했습니다. 10개월 만에 회사가 정상으로 회복되고 950여 평의 공장 부지도 새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설비, 가공기술, 생산제품 면에 있어서 국내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최고급 가구점이 되었습니다.
직업도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을 만한 직업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감당치 못할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내 마음과 내 뜻대로, 내가 편한 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8장 6절에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진흙이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만드십니다.
창세기 말씀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습니다(창 2:7). 사람의 근본은 바로 흙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빚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하게 쓰시기에 편하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11장 38절에는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順從)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合當)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堅固)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한두 가지 명령에만 순종하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6장 7절에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吸收)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 1918∼ ) 목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은 우리를 꺼꾸러 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요, 복스럽고 유용하게 우리를 쓰시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쓰시고자 하십니다. 축복을 주셔서 쓰시고, 건강하게 하셔서 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장 중에 붙드셔서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인생을 멋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서 ‘주여, 제가 주의 뜻대로 쓰이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기업에서도 한국 경제에 꼭 필요한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어서는 안될 사람도 있어서 한국 경제를 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도 불행하지만, 더 불행한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남을 비난하는 사람, 공연히 트집을 잡는 사람, 불평과 원망만 하는 사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가 혼란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운동경기 중에서 성경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경기는 야구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야구 경기에서는 어떤 선수든지 간에 경기에 나간 선수들은 모두 감독의 지시에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구 선수들은 경기에 나가면 감독의 얼굴만 쳐다봅니다. 감독이 치라는 사인을 보내면 치고, 달리라는 사인을 보내면 달립니다. 야구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대로만 합니다. 감독의 사인을 받고 그 사인에만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감독을 삼아서 ‘하나님, 저에게 사인하여 주시옵소서. 달려야 합니까, 멈춰야 합니까? 사인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의 사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인을 받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역사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아주 존경을 받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 1875∼1965) 박사는, 『나의 생활과 사상』이라는 책에서 자신은 아프리카 밀림으로 갈 때 하나님을 위해 세 가지를 포기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는 바흐의 음악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둘째, 유명한 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했습니다. 셋째, 연주와 저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위해서 평생 희생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자기가 포기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복과 은총으로 보상해 주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음악을 포기했지만, 바흐협회로부터 열대지방에서도 연주할 수 있는 대형 페달 오르간을 기증받아 계속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의 유명한 대학에서의 강의는 포기했지만, 세계 여러 대학에 명사로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연주와 저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고 했는데, 그가 만약 고국에서 저술을 했으면 책이 많이 팔려봐야 얼마나 팔렸겠습니까? 그러나 아프리카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나의 생활과 사상』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어, 오히려 그가 더 넉넉하게 아프리카 선교 사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면,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하여 주십니다. 물질을 포기하면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인생을 포기하면 인생의 축복을 주시고, 재능을 포기하면 더 좋은 재능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12장 28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면 자손 대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면 자손 대대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도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定)함이 없는 재물(財物)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厚)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事業)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同情)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자기 스스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선한 사업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 (Lev Nikolaev-ich Tolstoi ; 1828∼1910)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최선을 다해 선을 베푸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선을 베푸는 것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하고 길이길이 남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탈무드 시대에 유대인 가정에서는 금요일 저녁(안식일 전)이면 어머니는 반드시 양초에 불을 켜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축복 기도를 받은 아이들은 자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서 자선을 위한 기금으로 상자에 넣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는 가정마다 ‘유대인의 기금'이라는 상자가 있어서,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자선하는 행위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자기가 베풀 수 있는 자선행위를 합니다.
전세계에서 자선을 위해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그런가 하면 돈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민족, 가장 축복을 많이 받은 민족도 유대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 자선하는 사람,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이우경이라는 열네 살짜리 소년이 최연소 합격을 했다고 합니다. 치과 의사인 이 군의 아버지는 남해의 외딴 섬인 소거문도와 하화도 등으로 의료봉사를 떠나면서 당시 초등하고 3학년이었던 이 군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이 군은 아버지에게 치료를 받고 기뻐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그래서 의료 봉사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의학이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간과 가장 밀접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의사의 길을 택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가정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릇은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그 재료가 문제가 아니라 그 그릇이 깨끗한 그릇인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깨끗한 그릇이어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20-21절>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능력을 구하기 전에 목회자로서 거룩함이 중요한 것을 말해 주며 자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21절에 모든 선한 일에 준비 된다고 하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우리들을 쓰실 수 있도록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며 기도로 늘 깨어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할 수 있는 준비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