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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습니다.(시편 63:1-11)
시 63편의 표제가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다윗이 광야에 있을 때에 이 시편을 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윗이 광야에 있었던 때는 사울에게 쫓기던 때와 압살롬에게서 도망치던 때입니다.
광야는 뜨거운 열기로 인하여 물이 없어 메마르고, 건조하고, 황량하고, 먹을 것이 없고, 외롭고, 고독하고 … 매우 삭막한 곳입니다. 따라서 물이 없이 메마르고 황폐한 광야에서 느끼는 목마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광야에서 ‘목마름’은 단지 ‘물이 마시고 싶다.’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에서는 물이 없어 목이 마르면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한 광야에서 다윗이 물이 아닌 주님을 찾았다는 내용을 담은 시가 시 63편입니다. 시 63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읽게 하신 것은 다윗처럼 참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눈물 골짜기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고 주님께 대한 확신을 고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인도하시며,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소해 주시는 시편으로 만나는 복된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다윗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 곧 광야에 있습니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을 때에 광야에 있는 사람은 타는 목마름으로 물을 정신없이 찾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물을 본능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물이 없이 메마르고 황폐한 광야에서 갈망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쫓겨서 광야로 피신했을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서 갈급하듯이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님을 갈망했습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광야에서 다윗은 광야로 인한 목마름보다 주님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컸습니다. 사실 다윗이 광야에 있는 것이 단순히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난을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고난을 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제 영혼과 몸이 ‘주님을’ 갈망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인생의 환란을 만났을 때에 ‘주님을 향한 목마름’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는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만을 갈망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사야 54:1에 보면 이스라엘을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여인)”라고 비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 때문에 징계를 받아 고통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상태를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회복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사야 55:1-3,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하신 것은 물을 얻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포도주와 젖은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을 ‘값없이 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값을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목이 마르면 가서 물을 마셔라!”, “배가 고프면 가서 양식을 사 먹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지 말고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합니까? 3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지, 채워지지도 않는 헛된 것을 위하여 허송세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섬기면서 그들의 삶은 마치 황폐한 광야에서 헐떡이는 짐승과 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지적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피폐해진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대해 피폐해진 데 있으니’, 너희는 삶의 피폐함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삶의’ 갈증과 허기를 해결해주는 대신에 “나의 말을 들어라. 나를 찾으라, 그러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목마름’을 겪었습니다. 이방의 침략을 받고, 가뭄과 기근이 닥치고, 각종 병이 창궐하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서로를 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러자 이스라엘은 삶의 목마름을 위해서 샘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삶의 목마름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하여 샘을 판 것입니다. 바로 이 ‘샘을 파는 일’에 대해 예레미야가 지적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두 가지 악을 범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담아도 다 흘러나가 버리는 터진 웅덩이들을 판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찾아야 할 답은 샘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버린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어디 딴 데 가서 샘을 파본들 어떻게 해결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목마름을 어떤 것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류의 것들을 시도하고 추구합니다. 잠시는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삶이 잠깐 즐거워지고, 골치 아팠던 것들이 없어지고, 삶에 희망이 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샘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샘을 판들, 그것이 물을 줄 리 없습니다. 그것이 갈증을 해결해 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아 갈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결국은 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생명과 죽음이 갈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아 성소로 나아갑니다.
2-3절,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성소는 주의 능력과 영광을 확인하는 곳이고, 주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소에는 제물의 희생(죽음)이 있으며, 그 희생을 근거로 제물 드리는 자의 사죄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에서 주시는 은혜로 성도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성도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1절)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성소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주의 능력과 영광을 보고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의 인자하심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데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홍해 앞에서 죽는다고 소리치는 이스라엘을 홍해를 가르시고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지 않는 것은 언약으로 인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더 낫다고 고백하며 찬송한 것입니다.
이제는 광야에서 다윗이 생명을 구해 주소서 하지 않고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더 좋다고 고백한 다윗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우리가 내 생명보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더 귀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반드시 내 삶의 모든 필요나 내 삶의 모든 가치들보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더 귀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우리에게 있어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변화되어 ‘인생의 목마름’을 ‘주님에 대한 목마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러분! 어떤 사람도 “죽는 것이 유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을 삶보다 더 낫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넘어선 고백을 바울은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결코 죽음은 ‘유익’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목숨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소중한데도 불구하고 생명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목마름’의 원인이 바로 ‘주님께 대한 목마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때에 가능합니다. 바로 물이 없어 목이 타는 광야에서 나는 주님에 대한 목마름으로 죽을 지경이라고 하나님을 찾는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제 다윗은 자기의 문제들을 주께 아뢰고 주님으로부터 해결 받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절,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다윗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5-8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주시는 참 생명은 영혼에 깊은 만족을 줍니다. 이는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밤에 잠들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새벽에 작은 소리로 말씀을 중얼거리며 찬양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를 가까이 따르니”는 ‘나의 영혼이 주께 착 달라붙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듯이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겨드리고 하나가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더 의지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더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더 큰 은혜와 만족과 도우심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도는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같이 고난의 현장을 지나가든, 일상적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침상의 자리에서든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착 달라붙어야 합니다. 이는 생명을 참 생명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묵상해야 합니다.(오늘 주보의 김목사님 사랑편지에 실린 참 그리스도인 찰스 셔어 박사에 관해 이야기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찬양하며, 찬양하면서 더 많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9-11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다윗은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멸하려는 자들은 칼에 맞아 죽어 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 잘해야 땅에 매장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성도가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언약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을 이끌겠다고 맹세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그들을 신실하게 인도하는 일에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으로서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 자랑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기쁨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왕에 대한 확신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짓말하면서 해를 끼치려 한 자들은 부끄러워 입이 막힐 것입니다. ‘입은 막히리로다.’는 찬송하는 무리에 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왕과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찬송하는데 거짓말을 일삼던 자들은 찬송하는 무리에 끼지 못합니다.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윗이 환궁할 때에 입이 막혔을 것입니다. 도망가는 다윗을 향해 저주하던 시므이도 입이 막혔을 것입니다. 그들이 말이 거짓됨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왕과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한 자들과 나라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칼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 같은 세상이지만 이 땅에서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고 인자하심을 받고 찬송을 부른 사람은 마지막에도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이고 거짓말만 하는 사람은 찬송하는 무리에 끼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척’만 하는 사람은 거룩한 백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바깥 어둔 데로 쫓겨나서 슬피 우는 일만 있을 것입니다. 광야 같은 환경이라고 원망하거나 주위 사람만 탓하거나 주님의 인자하심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시각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보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광야(환란)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광야가 다윗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고 만나는 곳이 되었습니다. 광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복이지만, 만일 광야가 우리의 심령을 메마르게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자기의 전 존재 즉 영혼과 육체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다윗이 사모하는 것은 생명(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윗으로 하여금 평생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주제였고 힘이었습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영혼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왕궁에서 쫓겨나 광야를 지나며 여전히 자기 목숨을 찾는 자들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신세지만,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상황도 다윗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궁에 있는가, 광야에 있는가가 아닙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며 주의 오른 손이 붙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도의 삶은 광야에서도 복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들어오라고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모든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거기서 성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고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왕궁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그 인자하심을 누리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은 궁궐이나 빈들이나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복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목마르듯이 찾는 성도는 참으로 복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몸과 영혼이 낫고 흔들리지 않으며, 날마다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채워주려고 하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태복음 25:2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
여러분, 우리는 ‘자기를 돌보는 것’이 절대적 가치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 삶의 진짜 근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정확히 깨닫고, 내 삶의 어떤 문제의 스위치들도 모두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올바로 고백한 후에,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복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