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調와 詩의 차이 -
<時調는 무엇이
어떻게 왜 詩와 다른가?>
海月 채 현 병 회장
[1] 時調는 詩가
될 수 있어도, 詩는 時調가 될 수 없다.
[2] 詩는 어린 나이에도 명시를 지을 수 있어도, 時調는 어린 나이에 명시조를 지을 수 없다.
* 그 까닭은 시조는 학문과 연륜, 경륜이 쌓아져야 비로서 명시조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림과 서예 비교 / 그림에 대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은 젊어서도 명화를 그릴수 있지만, 서예는 아무리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젊어서는
명필이 될 수 없다고 한다. 詩와 時調도 이와 같다.
[3] 時調 속에는 ‘理想國家(社會) 건설’이라는 큰 그림이 있다.
시조는 太平盛世 氣像의 원류이다. 예부터 윗자리의 재상으로부터 아랫자리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뜻이 높고 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지어 불러서 그
뜻을 나타내고 이를 통하여 마음을 펼쳤다. 시조는 風流와 詩想과 영혼이 서로 어우러져 陰陽의 相生, 子音의 淸濁, 高低의 音韻이 법도를 넘지
않아 사람의 뜻을 바르게 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時調를 ‘君子의 正音’이라 하였다.
[4] 時調는 起承轉結이 뚜렷한 우리 고유의 定型詩이다. 따라서 起承轉結의 묘미를 잘 살린 시조시가 좋은 시조이다. 그리고 3장 6구
12소절의 형식에서 벗어난 시조는 좋은 시조라 할 수 없다.
* 初章 / 3 4, 3 4 ---起
(前句,內句) (後句,外句)
* 中章 / 3 4, 3 4 --承
(前句,內句) (後句,外句)
* 終章 / 3 5, 4 3 ---轉, 結
(前句,內句) (後句,外句)
[5] 時調는 모두
이미 정해진 곡조에 얹어 부르는 노랫말이나, 詩는 일부만 노랫말로 쓰인다.
* 時調는
노랫말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틀이 있어야 하고, 율격이 살아나야 한다.
[6] 時調의 韻律性
시조가 7~8백 년의 장구한 세월을 두고 모든 詩歌에서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민족성에 맞는 형식과 언어성에 알맞는
韻律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문학은 운율과 表裏一體의 혈연을 맺어가며 발전해 온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운율은 음악적인 리듬과 혼연히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시조는 漢詩나 英詩와 같이 韻脚法은 없지만, 唱과 연계하여 音數律을 소중한 생명으로 삼고, 反復法, 對偶法등을 잘 활용하여 ‘말의 뜻’과
‘말의 勢’와 ‘말의 취향’에 따라 강약을 조화하여 그 韻致를 돋구어야 한다.
[7] 時調의 音樂的 衝動
시조를 읽어보면 음악적인 충동을 느끼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음악적 충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조는 그 내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拙作에 불과하다.
① 鷺山 이은상(1903~1982) 선생의 시조를 읽다 보면, 거기에서 작가의 예술적 소양을 발견하게 되어 그대로 노래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絶唱이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② 이와 반대로 新詩의 영향을 너무 받아들인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의 작품에서는 그 작품 내용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음악적인
感興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노래로 부르고 싶은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다.
외오 두고두고
그리워 하든 그대
다만 믿어오기
고운 그 맘이려니
이제야 보는 얼굴도
맘과 다름 없고나
絶唱의 시조를
지으려면 時調
本然의 자세를 지켜
修辭나 음율이
모두 민족성과 언어성에
부합하는 韻調를
띄워야 할 것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