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인터넷 사전으로 검색해 보니 설명이 제법 길었다. ‘일정한 표적으로 삼기 위하여 개인, 단체, 관직 따위 이름을 나무, 뼈, 뿔, 수정, 돌, 금 따위에 새겨 문서에 찍도록 만든 물건’으로 나왔다. 나라의 중요한 일에 찍어주는 도장을 국새(國璽)라고 한다. 얼마 전 그 국새가 입방아에 올랐다. 전통기법으로 금 도장 잘 만든다는 사람에게 국새를 의뢰했더니 엉터리로 만들었다.
도장은 뿌리 깊은 동양문화의 산물이다. 도장 이전 증표는 거울이었다. 고주몽도 그랬고 옛이야기에는 서로가 지닌 깨진 거울을 맞춰보며 상대를 확인했다. 서양에서는 펜으로 휘갈겨주는 사인이 일반적이다. 도장을 찍어주거나 사인을 해주는 사람은 시혜자고, 도장 찍은 문서나 사인 쪽지를 받는 사람은 수혜자 입장이다. 계약논리에서 보자면 시혜자는 갑이고 수혜자는 을이 아닌가.
도장은 종류가 다양하다. 앞선 언급한 국새도 있지만 막도장도 있다. 잡다한 일에 두루 쓰이는 막도장이다. 인감이라 하여 당사자임을 관공서나 거래처에 미리 신고해둔 도장도 있다. 군사정부 비리를 캐던 청문회서 도장을 제대로 찍어야지라고 호령하던 어느 국회의원은 나중 자기가 찍은 도장으로 감옥 가 고생했다. 도장 때문에 일이 잘 풀린 경우보다 일이 꼬인 경우가 많지 싶다.
도장은 서로 못 믿는 문화의 산물이다. 불신시대일수록 사람은 도장을 절대 신봉한다. 왕조시대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암행어사 마패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하소연을 해결해준다는 국민권익위원회 관인 정도 될까. 현실로 와야겠지만 반부패 청렴사회가 완성된다면 진정 도장이나 사인이 필요 없는 사회일 것이다. 영수증이나 대면결재에서 카드나 전자결재로 바뀜은 과도기이려나.
도장밥은 붉기에 인주(印朱)다. 붉은색의 도장밥은 액운을 맞아달라는 부적과 같은 색상으로 여겨진다. 요즈음 스탬프는 청색잉크가 널리 쓰인다. 제작기법이 복잡하지 않은 모양인데 잉크가 닳지 않고 계속 나오는 만년도장도 보았다. 나는 도장 한 개로 삼십년 가까이 쓰고 있다. 대학 졸업 시 후배 학번이 선배 학번에게 선물로 파 준 막도장으로 지금까지 탈 없이 잘 쓰고 있다.
이런 도장보다 더 확실한 도장이 있다. 몸으로 찍어주는 손도장과 눈도장이 있다. 나는 아직 발가락도장까지는 찍어볼 위인은 못 되었다. 손도장과 눈도장은 쓰이는 상황이 각기 다르다. 손도장은 찍기가 어쩐지 좀 찜찜했다. 십대후반 주민등록증을 낼 때 지문을 채취 당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지은 죄, 지을 죄 없다면 내 유전자를 국가가 등록 보관해 주기에 순순히 응해주었다.
눈도장은 손도장과 다르다. 눈으로 찍어주는 도장이다. 붉은 도장밥이 들 일 없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다. 눈도장의 사전적인 뜻은 눈짓으로 허락을 얻어 내는 일이나 또는 상대편의 눈에 띄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강제성이 전제된 손도장인 반면 자발성에 출발한 눈도장이다. 눈도장이 순수하다할지라도 아무한테나 헤퍼서는 곤란하다. 감당할만한 상황이나 사물에 찍어주어야 한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교실에 먼저 들려본다. 아이들은 책상위에 걸터앉아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거나 구석에 모여 웅성거린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교실 앞에 서서 책을 펼쳐보아도 아이들은 좀체 달라질 기미가 없다. 점심시간에 복도나 교실바닥 흘려진 휴지를 허리 굽혀 주워도 아이들은 본 체 만 체다. 내가 먼저 아이들 앞에 다가가 눈도장을 찍으려 해도 눈이 맞질 않아 안타깝다.
한 장 남은 달력이 뎅그렁한 섣달이었다. 낙엽은 어디론가 쏠려가고 교정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었다. 마음과 몸이 바쁜 때였다. 교과수업 말고도 정기고사 문항출제, 생활기록부 기록, 도서정리 업무 등으로 바쁘게 보낸 하루였다. 내 근무학교와 이웃한 고교에서 친선배구시합이 있어 선수 아닌 주제에도 들려야 했다. 나는 금 밖에 서서 잠시 눈도장을 찍고 왔다. 1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