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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성모성지순례 ‘빤 취엔’산 성모당
이해춘 아오스딩
16일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빤 취엔산 성모당을 순례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중간에 교통사고가 있어 지체하다가 성모당 순례지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불어 원래 6km 거리를 도보로 기도하며 순례하도록 되어 있으며 십자가의 길 14처의 성상이 길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차량을 이용하여 성모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높은 산에(해발 1,760m) 위치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 봉사와 헌금으로 현재 순례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성모당에 차량으로 도착하여 보니 많은 중국 신자들이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면서 도보로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신앙심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순례길은 능선을 이용하여 길을 내었는데 양 옆으로는 깊은 계곡이 있고 산모습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를 하셨는데 그 광야를 생각하게 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성모당에 들어가니 안에는 많은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왕 신부님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는데 순례객들이 우리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무릎을 꿇고 미사봉헌을 하는데 우리가 서있는 자세로 미사봉헌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다.
성당 제대는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다. 참고로 빤 취엔산 성모당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자 한다.
‘빤 취엔’산 성모당 소개
1. 루르드와 같은 좋은 위치
성모당은 ‘양취’현 동남쪽의 ‘호우춘샹’의 ‘빤취엔’산 위에 있다. 시 중심에서는 40km 정도의 거리이다.
이 산은 ‘타이항’산맥의 일부인 ‘죠우’산의 북측에 연결되었으며 해발 1760m이다.
성당은 이 산의 뒷산에 지어졌으며, 산을 넘어가면 마치 루르드의 성당이 피레네 산맥의 북쪽에 위치하며 산을 넘으면 스페인의 국경인 것과 같다.
성모당의 사방은 푸른 소나무와 비취색 측백나무가 짙푸르게 들어차 있다. 매년 5월이 되면 황금색 복사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므로 호흡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마치 천국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새벽이면 옅은 안개가 끼어 기묘한 느낌을 주는데 성모당의 주위를 감싸며 도는 것이 마치 자녀들이 어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 같다. 저녁이 되면 찬란한 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성모당의 꼭대기에서 빛나 마치 어머니가 옷깃을 펼쳐 자녀를 불러 모으는 듯하다. 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2. 최초의 성모동굴
슬프고도 수치스러웠던 ‘예의지쟁’은 120여 년의 박해를 초래하게 되었다. 종교박해 중 교우들은 산으로 피난하여 자연 동굴을 하나 발견한다.
이것을 고치고, 가지고 왔던 성모상을 모시게 된다. 그들은 이 동굴에서 기도하였는데 날이 가면서 성모 성지로 형성되게 되었다.
그들은 성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천주 예수에의 신앙을 유지 하였다.
또 사제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양위’현의 리우(알렉산더)를 파견하여 비밀리에 광저우의 요아킴 신부를 모셔와 전교하게 된다.
1806년 가경10년 9월30일 양광총독 ‘나샨쳥’에게 잡히게 된다.
신부님은 3년의 투옥 생활 후 1809년 ‘타이유엔’으로 오게 된다. 1815년 ‘샨시아’교구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사목한 27년간, 성덕이 탁월하여 멀리서도 경모하였다. 교우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기에 신부를 만나길 갈망하는 교우들을 위해 산으로 갔던 것이다.
1843년 9월 21일 ‘치’현에서 선종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은 타이유엔시의 묘지에 모셔졌다.
기존의 동굴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노 교우의 말을 빌리자면 원래 동굴은 현재의 성모당 우측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몇 장의 기와 조각만이 그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십자가 13처 옆의 동굴은 1986년 ‘리우위원’신부의 도안에 따라 ‘홍꼬우’교우들이 자원하여 파낸 것이다. 계획을 복원하여 14처 끝을 성모 동굴로 고침으로써 십자가 길의 완전함과 연속성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였다.
3. 로마식의 건축스타일
성모당의 건축연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三晋名胜>에서는 “1770년에 건축하여 1895년에 대규모의 개축이 있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모당 앞에는 성모정자가 있는데 그 안에는 성모상이 있다.
정자 앞에서 산 입구까지 예수님이 겪으셨던 14처의 십자가 길이 있다.
매년 8월 2일, 8월 15일, 9월 8일 삼대 축일에 미사 참례 인원만도 수만에 이른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1897년 이탈리아인 프란치스코회의 Mgr Gregorius Grassi
(1833.12.13.-1900.7.9.) 주교의 허가가 있었고 로마식의 건축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건축가 루안푸 사람 ‘리요우깡’의 지휘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교는 재임기간 동안 60여 개의 성당을 건축했고 이 건축가가 지은 것도 많았다.
그가 선종한 후에는 성모당 뒤에 묻혔다.
주교는 1900년 7월 9일에 순교하였으며 1946년 복자 품을 받고 2000년 10월 1일에 성인 품에 올랐다. Eugenius Massi (1910-1916) 주교가 타이유엔의 주교로 재임한 기간 성모당의 뒷 건물을 증축했다.
1914년 리친즈, 꾸워홍타이, 꾸워룬징등의 교우들은 봉헌금을 모아 언덕 위에 길을 닦고 기념비를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1783년 성당을 지었고 지금까지 226년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근거는 없다.
19세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지어졌다는 설은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1877년 광쉬3년에 시작하여 화베이에 큰 가뭄이 3년간 들었고 산시에서만 2백만, 타이유엔 교우들도 굶어 죽은 사람이 4천여 명이 되기 때문이다.
4. 고귀한 이름과 품위
성모당의 명칭은 성프란치스코회의 모회인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아시시 근처의 소성당에서 왔다.
라틴어 뽀르지운꼴라portiuncula의 portio는 부분이라는 뜻으로 –uncula는 작다는 의미의 접미사로 합치게 되면 작은 부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이름을 부르게 된 데는 또 다른 신기한 이야기가 있다.
원래 네 분의 수사가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성모님 무덤에서 성물을 가지고 왔는데 교황 리베리우스는 그들에게 명하여 아시시 근처에 작은 성당을 짓도록 하고 그 작은 부분의 성물을 그 안에 두게 하였다. 그리고 큰 성모상을 모셔 제대 위에 두었다.
성당 축성 후 매일 천사가 성모상 주위를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후 조배드리는 사람이 많아 소성당에 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그 사방으로 큰 성당을 지어 올려 성모당이 그 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천사들의 모후’ 성모 대성당 portiuncula 이라고 지었다.
그럼 산시의 이 성당은 왜 이 이름으로 짓게 되었을까?
원래 이탈리아의 이 소성당은 프란치스코 회의 창시자 오상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주 기도하고 묵상하던 곳이다. 성모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기적을 행하셨는데 프란치스코는 성모께 그곳에 와서 기도하고 성체조배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줄 것을 성자께 청하여 주기를 부탁드렸다.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대사를 베풀었는데, 그 뒤 이 특별 대사가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모든 성당까지 미쳤다. 우리의 성모당은 바로 이렇게 고귀한 품위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대사는 8월 1일 정오 12시부터 2일 9시까지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사도신경을 한번, 다시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각각 한 번씩 바쳐야 한다. 본성당의 주보 축일에도 그렇다.
5. 문화혁명 시기의 파괴
성당은 문화 혁명 중에 큰 고난을 겪게 되는데 성당 꼭대기의 십자가부터 성당 천장에 목재며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물건들까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목재로 조각되었던 성모상은 목이 잘려 산골짜기에 버려졌다.
우리 교우들은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아파했다.
깊은 밤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산골짜기를 뒤져 몰래 성모상을 업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산속 동굴 벽을 파고 그곳에 파손된 성모상을 넣어 흙으로 메웠다.
성당이 다시 열리고 리우위원 신부님이 조각가를 불러 수리하여 현재 성모 동굴에 모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성모당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교우들의 성모님을 향한 마음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몰래 산을 타고 올라가 성모님을 경배하고 그들의 고통을 울며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문화 혁명 기간 동안 교우들이 산에 가서 조배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막을 수 없었으며 더욱 열렬해만 갔다. 낮에 못하면 밤에 산을 올라 성모 조배는 멈추지 않았다.
6. 개혁개방 후의 보수
개혁개방 후 모든 교우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여러 차례 정부에 상서를 올려 이곳을 개방하고 보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결국 민심을 알아보고 수리를 허가하였을 뿐 아니라 2만 위엔의 보수비를 지원해 주었다.
1986년 교구는 리지엔탕, 리위원 그리고 꾸워지펀 세 분의 신부님을 파견하여 보수공정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직 주교 서품을 받지 않았던 리지엔탕 신부가 주로 산 위에 살며 감독하였다.
보수공정은 쉽지 않았다. 6km가 넘는 산길에다 좁고 구불구불하여 차도 들어갈 수 없었다.
용수 등 모든 자재들을 6km 밖의 산 아래서 산까지 옮겨야 했으니 어찌 쉬웠겠는가!
교우들은 항상 보수 공사의 어려움을 보면서 마음은 벌써 조급해져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동조하여 노동 봉사를 하고 길을 수리하고 자재를 날랐다.
각 마을의 교우들이 자진해서 동참한 것이다. 위로는 7,80세 할머니부터 아래로는 네다섯 살 아이까지 업고, 고르고, 지고, 안고 하여 노동에 참여하였다. 어떤 4살짜리 여자아이는 책가방으로 모래를 나르다 가방끈이 다 끊겨 나가자 두 조막손으로 모래를 옮겼다.
이렇게 성모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효심을 나타낸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보수 과정 중 적지 않은 기적도 나타났다. 교우 동셩리는 ‘또우루어라사’에서 ‘홍꼬우’까지 오는 동안 큰비를 만났는데, 길이 미끄러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리신부가 자재가 부족하여 공사가 멈추었으니 용감하게 올라와라. 비는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가 명령을 듣고 차를 움직이자 비가 그쳤다.
모래를 실은 차는 무사히 도착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시멘트 면을 갈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한데 산 위에는 물이 없어 사람들도 빗물을 받아 마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성모님께 빌었더니 부슬비를 열흘이나 보내주셔서 사람이 할 일을 대신해 주었고 품질도 최고가 되었다.
길을 닦기 시작한지 25일 만에 완공하고 보수 작업은 2년에 완성하였다. 타이유엔교구 각 성당의 교우들의 도움이 컸다. 성당 보수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더 잘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7. 영광의 봉헌미사
1987년 8월 보수 공사가 완전히 끝이 나 8월 2일 전통의 뽀르지운꼴라 축일 예식을 맞았다.
9월12일 타이유엔교구의 장신 주교와 보수를 맡았던 리지엔탕 등의 신부는 성대한 봉헌미사를 거행하였다.
참례한 교우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20여 년간의 억압에 대한 격정을 가슴에 담고 성모님을 향에 뱉어내고 흥분과 기쁨을 안았다.
성모님께 <성모호칭기도문>을 노래했다. 노래는 50 여가지 존칭과 아름다운 이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몇만의 마음의 동경과 갈망, 찬송과 기도를!
8. 폭발적인 순례
만약 동굴에서부터의 성모 경배를 계산하면 지금까지 216년의 역사가 있다.
타이유엔의 교우뿐만 아니라 다른 교구, 다른 성과 시의 교우들도 찾아와 은혜를 빌고 은혜에 감사했다.
이렇게 봉헌하는 교우는 매년 끝이 없으며 특히 성모의 몇 개 축일, 8월 2일, 8월 15일, 9월 8일에, 5월 성모 성월에는 순례하는 교우가 더욱 폭발적이어서 그 수가 2,3만에 이른다.
오색찬란한 사람들의 물결이 마치 아름다운 용이 6km의 긴 녹색의 산허리를 꿈틀대는 것 같다.
14처 십자가길 마다 노랫소리, 악기 소리, 기도 소리가 산 전체를 울린다.
미사가 시작되면 북과 나팔이 울리고 각 당의 관현악대, 들어 올려진 장엄한 성모님의 가마,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고 매우 열렬한 분위기지만 온화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질서정연하다.
성모당에서는 길이건 성당 내에서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고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론 희색이 만연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심정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상황과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체를 들어 올릴 때, 모든 천사가 경배하고 만민이 숨죽여 예수님의 성체를 우러러 보는 찰나에 흐느낌을 억누르는 소리가 비록 낮기는 하나 들려온다.
이때는 모두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미사봉헌을 마치고 태원으로 들어가 왕신부 동창신부님께서 우리를 점심을 초대하셔서 그곳 식당에 갔더니 성당 회장님을 비롯한 봉사자들 여러분이 우리 일행을 맞아 주셨다.
이식당에서 산서성의 별미를 아주 맛있게 얻어먹고 본당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운영하는 노인 요양원을 들려 그들에게 위로를 하고 나와 교구청 주교좌성당에 들려 성체 조배를하고 성당 내부를 순례하였다.
성당 안은 아주 아름답게 꾸며저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앉아 기도를 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주교좌성당 순례를 마치고 우리일행은 마지막 코스인 신학교와 수녀원을 순례를 하기 위하여 신학교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오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많이 가물었었는데 우리의 성지순례 중에 비가 오는 것은 우리를 반겨주시는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신학교와 수녀원을 순례하고 바로 대련으로 출발하기 위하여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도 비가 많이 내려서 차량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공항에서 밤 10시 30분에 비행기로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중국에 많은 메시지와 중국 신자들의 성모 신심이나 그들의 신앙생활이 보는 관점에서 다르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신앙심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는 신앙으로 인하여 많은 박해를 받기도 하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을 굳게 지켜 이렇게 신앙을 보존하였다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사회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나 자신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보다도 열심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많은 신자들과 현재도 열심한 신자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많은 것을 그들을 통하여 느끼고 저의 마음에 더욱 주님과 성모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도록 번역하여 도와주신 이정은 데레사 자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성모성지 순례기를 쓰도록 허락하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해춘 아오스딩.
태원교구주교좌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