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六
최여주(崔汝舟) 묘비명(墓碑銘) - 노수신(盧守愼)
최씨(崔氏)는 해주(海州)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시조는 고려 시중(侍中)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교육을 즐거워하여 구재 학당(九齋學堂)을 창설하여 학도들이 매우 많았는데, 학교의 법이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그 당시에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일렀다.
이때부터 대대로 이어받아 공경(公卿)이 줄줄이 나왔다. 조선조로 들어와 최만리(崔萬理)는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ㆍ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최정(崔埥)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으며, 최문손(崔文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최경중(崔瓊中)은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다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을 지내다가 고령으로 품계가 승진되었고 뒤에 참판(參判)의 벼슬이 추증되었는데, 이상이 공의 4대이다. 이효종(李孝宗)공은 공의 외할아버지이다.
공이 태어난 날은 홍치(弘治) 임술년(壬戌年, 1502, 연산군 8)인데, 이름은 여주(汝舟)이고 자는 거천(巨川)이다. 총명하고 영민하여 탁월하게 일찍 성취되었다. 글을 몇 번만 읽으면 곧바로 외워버렸고 글씨가 날아갈 듯하여 옛날의 필법에 핍진하였다.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이미 학문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과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정암이 일찍이 ≪옥화록(玉華錄)≫을 저술하면서 공에 대한 주석에, ‘젊은 나이에 선을 지향한 사람이다.’고 하였으며, 충암이 관청에서 퇴근하면 반드시 말을 보내 공을 맞이하였고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옛날 낙양(洛陽)의 재사(才士)이다.”고 하였는가 하면 공이 더불어 사귀는 사람이 모두 당세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사화(士禍)가 일어났을 때 우연히 연소하다고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그 참혹한 상황을 보고 다시는 과거 공부에 뜻을 기울이지 않았다.
갑오년(甲午年, 1534, 중종 29)에 태학(太學)에 들어갔고, 그 뒤 10년이 되어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을 받아 금오랑(金吾郞)에 임명되었다가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ㆍ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ㆍ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ㆍ성주 목사(星州牧使)ㆍ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ㆍ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ㆍ금천 현감(衿川縣監)ㆍ풍덕 군수(豐德郡守)ㆍ재령 군수(載寧郡守)를 역임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567, 명종 22) 정월 25일에 병환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 금천(衿川) 박달(博達)에 있는 부인의 묘소 옆에 묻히었다.
공은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났다. 참판공이 호랑이에게 물려 위독하였을 때 공이 1년 동안 허리띠를 풀고 취침하지 않으면서 약시중을 들자 병환이 나았다.
3년간 거상(居喪)하면서 슬픔과 공경을 다하였고 진설에 필요한 도구들을 사람들에게 빌리지 않고 공이 모두 손수 준비하였다. 몸이 상해서는 안 될 나이에 더욱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나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았다. 자제들이 번갈아 간하자 담제(禫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여를 타고 돌아와 의원을 찾아갔다. 우애가 지극하였고 피붙이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아 있는 재화가 없었다.
흉금을 비우고 사람을 접하여 한 마디 좋은 말을 들으면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소인의 모함에 많이 빠지기도 하였다. 벼슬에 임해서는 재주가 있는 관리로 하여금 번잡한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성주는 다스리기 어렵다고 호칭될 정도였으므로 휘하의 아전이 거듭 결원(缺員)이 생겼다.
공이 다스린 지 한참 되자 정사를 잘한다는 소문이 매우 났으므로 온 도의 사람들이 공의 능력을 승복하여 큰 책임을 맡겨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여기었으나 결국 상관(上官)에게 용납되지 않아 떠났다. 그러나 집안의 살림을 경영하는 것은 졸렬하여 문서를 보지 않았으므로 세상을 떠난 뒤에 집안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 공이 하늘에서 타고난 바가 본디 이와 같았으니, 공의 기풍을 들어보고 흥기된 바를 대체로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부인 한씨(韓氏)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성군(西城君) 한치인(韓致仁)의 증손이자 참판(參判) 서원군(西原君) 한간(韓僴)의 손녀이며 충의위(忠義衛) 한세륜(韓世倫)의 딸이다. 부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공을 30년간 섬기면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제사, 복식, 손님 접대, 친척을 도와주는 바가 부유한 가문과 비교해 볼 때 다른 바를 사람들이 몰랐으며, 비록 공도 그 내막을 알 수 없었다. 부인은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 11월 23일에 세상을 떠나 아무 연월에 장사를 치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네 명은 일찍 죽었다. 막내아들 최황(崔滉)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판윤(判尹)이 되었다. 판윤이 먼저 풍저창 수(豐儲倉守) 임건(任楗)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낳지 못하였고, 뒤에 선비 허초(許礎)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을 낳았다.
큰아들 최유원(崔有源)은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현감(縣監) 남침(南琛)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 아들 최유제(崔有濟)는 현감(縣監) 이곤형(李坤亨)의 딸에게 들었다. 큰딸은 병사(兵使) 양윤의(梁允義)에게 시집갔는데, 그의 아들 양사홍(梁思洪)은 2남 3녀를 낳았다. 둘째 딸은 현감(縣監) 노대해(盧大海)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노도형(盧道亨)이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판윤이 내가 정직하면서 화려하지 않다고 여기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재촉하였다. 내가 공과 과거를 보아 같은 방(榜)에 합격한 것으로 보면 내가 젊지만 판윤과 인척의 사이로 보면 내가 늙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의리를 돌아볼 때 사양할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름다운 최공은 이미 무엇을 좋아할지 아니, 오직 날마다 노력하였도다. 믿음이 있게 하고 사나운 것을 멀리하니 본받을 만하였고, 하는 바도 있고 지조도 있으니 그것이 장점이었도다. 나라에 도가 있으니 나아가는 것이 이로웠고, 간교한 사람이 합동으로 아부를 하였지만 다행히 사화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도다.
명예의 길을 밟지 않으니 그지없이 평탄하였고, 그 행실이 독실하니 향리에서 칭송되었도다. 그 뜻이 드넓으니 사우(士友)들이 우러러보았고, 만년에 작은 호(號)를 지어 자신을 수렴하니 늙어서 응당 누릴 것이도다. 벼슬에 얽매이긴 하였지만 단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였고, 나태하지도 않고 조급하지도 않으니 윗사람 섬기는 도리를 다했도다.
누차 식량이 떨어져도 고하지 않으니 원망한 적이 없었고, 덕이 있어도 나아갈 길이 막히니 당시에 편당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도다. 수명이 고령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치가 왜 그리 어긋났단 말인가? 천리가 정해지면 보답을 누리는 것은 속일 수 없도다. 아드님이 원대한 곳에 이르렀지만 출세하기 위해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손자는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니 가업이 더욱더 번창할 것이도다.
길지(吉地)가 물을 띠고 있으니 바로 병방(丙方)을 향하였고, 오직 신이 수고하니 칼 두 자루가 모였도다. 백세토록 우러러 받들 것이니 무덤이 영구히 편안할 것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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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載寧郡守。贈資憲大夫吏曹判書崔公墓碑銘。幷序。
崔氏出海州, 其鼻祖, 高麗侍中文憲公冲, 嗜樂學敎育, 刱九齋學堂, 爲徒甚盛, 學法遂昉, 時謂海東夫子。 自是世率相繼, 累公累卿。 入國朝, 有諱萬理, 再第, 集賢殿副提學、江原道觀察使。 諱埥, 禮曹佐郞。 諱文孫, 司憲府監察。 諱瓊, 中進士, 去捷武科, 訓鍊院都正, 以老陞秩, 後贈參判。 此公之四代也。 李公孝宗, 公之外翁也。
公之初度, 弘治壬戌。 諱汝舟, 字巨川。 岐嶷英邁, 卓然早成, 讀書數遍, 輒成誦, 墨跡飄揚, 咄咄逼古法。 才涉弱冠, 已知有所謂學矣, 遊二庵門。 靜菴嘗著《玉華錄》, 註: “公年少向善人”。 冲庵公退, 必遣騎下榻, 每語人, 此古洛陽才子也。 所與交, 盡當世名人。 及士禍起, 偶以少免, 然目其慘也, 不復致意擧業。 甲午, 入上庠。 後十年, 用泮薦除金吾郞, 遷宗廟署直長、宗簿寺主簿、掌苑署掌苑、星州牧、漢城府判官、都摠府都事、衿川縣監、豐德・載寧郡守。 丁卯正月二十五日, 疾終其第。 三月某日, 葬衿川博達原夫人之封域。
公性於孝, 參判公傷虎危劇, 侍藥不解帶就寢者周歲, 乃瘳。 宅三恤, 盡哀盡敬, 應干陳具, 皆自公手, 不暇之人。 至當不毁, 益見骨露, 幾滅性, 不俯權制, 子弟交諫, 近禫始輿還尋醫。 友愛復至, 恤族好施, 無剩財, 虛襟接應, 聞一善言, 傾信不疑, 多爲小人所陷。 至官莅, 乃以材任煩。 星號難理, 屬使荐缺。 攝治經時, 政有聲藉甚, 一道伏其能, 謂當付大任有裕, 竟不容上官去。 然拙營産, 不視簿書。 旣卒, 四壁徒立。 嗚呼! 公之天得固如此, 其所聞風而興起焉者, 蓋亦可想也已。
夫人韓姓, 判中樞府事、西城君諱致仁之曾孫, 參判西原君諱僴之孫, 忠義衛諱世倫之女。 與公同庚, 事之三十載, 未嘗面赤。 家貧, 凡在享祀服食迎賓賑屬, 人視富門, 不知異焉, 雖公亦莫之詳也。 辛亥建子二十三日卒, 某年某月某日葬。 生三男二女: 四夭; 季曰滉, 登文科, 今爲判尹。 先娶豐儲倉守任楗女, 無后。 後配士人許礎女, 有五子: 男長有源, 擧進士, 娶縣監南琛女: 次有濟, 娶縣監李坤亨女。 長適兵使梁允義, 子思洪, 生二男三女: 次適縣監盧大海, 子道亨: 次幼。
判尹誤以守愼爲直而不華者, 袖狀來速銘。 惡! 愼也, 於公爲同榜則少, 於判尹爲附葭則老, 將如之何? 顧義有不可辭, 乃銘。 銘曰:
有美崔公! 旣克知好, 惟日彊也。 近信遠暴, 則可象也。
有爲有操, 寔其長也。 惟邦有道, 利有往也。 群陰合媢, 幸漏網也。 名道弗蹈, 坦而蕩也。 其行慥慥, 稱鄕黨也。 其志浩浩, 士友仰也。
晩收小號, 老膺賞也。 迺累簪帽, 職爲養也。 弗懈弗躁, 盡事上也。 屢空莫告, 曾不怏也。 德塞登造, 時固儻也。 壽嗇期耄, 理胡爽也?
定則食報, 不可罔也。 有胤遠到, 尺不枉也。 孫罔違導, 業彌廣也。 樂丘帶澳, 正丙向也。 惟神所勞, 劍會兩也。 百世瞻掃, 永寧壙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