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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론
형이상학, 존재론, 제일철학,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철학과 관계가 있는 용어들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후대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붙여놓은 제목이고, «제일철학»과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사용한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형이상학»은 Andronicos de Rhodes(B.C. 70년경)1)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고, «존재론»은 Christian Wolf(1679~1754)2)와 볼프학파가 철학계에 전파시킨 말이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면, 이러한 명칭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분류, 지식의 분류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지식이라는 말과 학문이란 말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학문(science)이란 말의 어원은 ‘안다’라는 동사(scio)에서 나온 명사이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말하면, 학문이란 말은 지식보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학문이란 말을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앎과 구별하였고 특수한 형태의 앎, 즉 체계적이고 방법적이고 정돈된 앎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학문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앎의 특수한 형태가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지식보다도 더 특수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여하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크게 세 가지, 즉 제작에 관한 지식, 실천적인 지식, 순수 이론적인 지식으로 분류하였고, 순수 이론적인 지식을 또 세 가지, 즉 자연학, 수학, 제일철학으로 분류하였다.
제작에 관한 지식은 시학, 실천적인 지식은 윤리학을 의미하고, 순수 이론적인 지식은 지식자체,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순수 이론적인 지식은 다시 자연학과 같이 독립적인 실체이면서 생성에 종속되는 생성적 존재자 탐구하는 지식, 수학과 같이 생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면서 구체적 실재성을 갖지 않는 관념적인 것을 탐구하는 지식, 제일철학과 같이 독립적인 실체이면서 생성으로부터 독립되어있는 존재 자체, 존재로서의 존재,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탐구하는 지식으로 구별된다. 결국, 제일철학, 신학, 존재론, 형이상학은 모두 이론적인 지시그이 세 번째 단계에 속하는 존재로서의 존재, 존재 자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탐구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1> 제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존재로서 탐구하는 학문>을 «제일철학» 또는 «신학»이라 하였다. 제일철학(prote philosophia: prima philsophia, first philosophy)이라 부른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존재를 존재로서 탐구하는 학문>, 즉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은 <제일 원리들>과 <제일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제일 원리들>과 <제일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은 모든 학문, 모든 철학의 근본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탁월성에 있어서나 권위에 있어서 다른 학문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에 대한 학문은 그 대상의 탁월성에 있어서도 제일이고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있어서도 제일이다. 존재에 대한 학문은 모든 철학의 근본이 되는 근본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존재에 대한 학문을 «제일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일철학»이란 표현에는 그 내용이 되는 «존재»란 말이 없어서 좀 막연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2> 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에 대한 학문을 신학, 신적인 지식, 신적인 학문(theologike episteme; divine science)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신적인 존재들>, 즉 질료가 없는 실체들, 순수 현실태, 제일 동자와 같은 존재들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학»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학»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현실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이러한 초월적인 존재는 창조하고 구원하는 인격신은 아니다. 이와 같이 신학이라는 표현은 제일철학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대한 학문을 지칭하는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라는 말이 없어서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
3> 존재론
Ontologia는 onta(존재하는 것, einai의 분사형)와 logos(법칙, 논리, 학문)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용어이다. Rhdolf Goclenius(1547~1628, 독일의 철학자)가 처음 사용하였고, Johann Clauberg(1622~1665, 독일철학자, 데카르트 학파)도 이 말을 사용하였지만, 17세기에 이르러 볼프와 볼프학파가 세상에 널리 보급하였다. 존재론(Ontologie)이란 말은 <존재에 관한 학문>을 정확하게 표현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ontologie(존재론)이란 말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존재론»이란 말은 경험과는 관계가 없는 선험적인 지식, 존재 관념에 대한 학문이라는 관념론적인 의미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달리 말하면, 이 말은 구체적인 실재를 탐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모호하게 하고, <존재에 관한 학문>이란 뜻을 남용하고 변형시켰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4> 형이상학
«형이상학» (ta biblia meta ta physica: metaphysica, metaphysics)이란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 말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후대의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관련시켜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Andronicos de Rhodes(B.C. 1: 그리스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정리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 중에는 논리학과 자연학에 관한 저술 이외에 제목이 없는 14권이 있었다; 이 14권의 내용은 <존재>에 관한 것이었고, 그 책 속에는 <제일철학>, <신학>, <지혜> (sophia)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Andronicos de Rhodes는 그 책의 성질을 고려하여, 자연학 (ta physica) 다음의 (meta) 책(ta biblia)이라고 생각하였고, «ta (biblia) meta ta physica»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학 다음>이라는 제목은 편집상의 이유 때문에 붙여진 제목인지, 또는 그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자연학을 배운 다음에 배워야 할 책이라는 교육상의 이유 때문에 붙여진 제목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ta (biblia) meta ta physica»란 희랍어는 라틴어로 옮겨졌고, 아리스토텔레스의 14권의 책은 «metaphysica Aristotelis», «libri metaphysicae», «metaphysica»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서, 스콜라 철학자들은 «metaphysica»란 말에 제 이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희랍어의 meta는 시간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이지만, 이들은 이 단순한 장소 부사에게 supra(우월한), trans(넘어선, 초월한)라는 뜻을 부여하였다. 이들은 <존재에 관한 학문>은 당연히 자연학 <다음>(post physicam)이며, 자연학보다 <우월>(supra physicam)하며, 자연학을 <넘어선> (transphysica)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존재자체>는 이론적 지식의 세 번째 단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이론적 지식의 제일단계는 자연을 탐구하는 지식이며, 제 이 단계는 수학을 탐구하는 지식이며, 이러한 자연학적, 수학적 지식을 초월한 다음에, 질료가 없는 존재를 탐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체에 대한 이론은 자연학적인 이론과 수학적인 이론을 넘어서 도달할 수 있는 이론이기 때문에 자연학적이고 수학적인 이론의 <다음>이며, 질료가 없는 존재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자연학과 수학을 <넘어선> 가장 높고 가장 <우월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부적합한 점이 있다. 존재에 관한 학문은 자연학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존재론의 대상은 질료가 없는 존재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에 관한 학문은 실증적인 자연학이나 우주론을 전제로 하면서 자연학이나 우주론 다음에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형이상학이 우주론에 선행하며, 우주론이 일반 형이상학의 연장선상에서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론이 특수 형이상학의 한 분야를 구성하게 된다. 존재론은 실험과학과는 독립적인 학문이지, 자연학을 전제로 하는 학문은 아니다. 더 나아가 존재론의 대상은 비질료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재를 포함한다. 오히려 존재론의 탐구 대상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질료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초월한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존재에 관한 학문>은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을 탐구하는데 머물지 않고, 이러한 현상을 넘어서 존재의 내면적 실재성과 구체적인 풍요성을 끝가지 탐구한다. 그렇다면 결국,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지식에 머물지 않고 경험을 초월하여 탐구하는 학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초경험적인 학문이라는 정의가 적합할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존재자체에 대한 초경험적인 철학이 동양에 소개되었을 때, 일본인 서주(西周)가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미상) 형이상학이란 말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 상(上) 제 12 장에 있는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器라는 말을 응용하여 번역한 말이라 한다.
5> 결론
이와 같이 형이상학이란 명칭도 또 존재론이란 명칭도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이란 용어만이 남용되고 변형되고 그 뜻이 모호한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철학자들은 철학용어를 변형시키고 남용시킨다. <존재에 관한 학문>을 지칭할 때 어떤 용어를 선택하는가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존재론과 형이상학이란 말은 동의어이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하튼 이 학문은 모든 구체적인 실재를 전체적이고 근원적으로 탐구하려는 학문이다. 다만, 동양에서는 «형이상학»이란 말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본서에서도 그냥 형이상학이란 말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제 1 부 특수존재
제 1 절 분유와 구조
▷ 한계(limit), 개별성(individuality), 차원(order), 분유(participation)
경험에 의하면 수많은 존재들이 존재한다. 이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를 제한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한계 때문에 서로 관계를 가지며 전체를 이룬다.3) 여기서 말하는 한계는 미완성, 불완전, 악과 같은 소극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 특수한 양태4)와 같은 적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특수양태란 어떤 것이 완성될 때, 그것이 결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태는 개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양태는 다른 양태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또 이 양태는 그 자체 속에 다른 양태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가지며 다른 양태들의 제한을 받는다.
한계의 의미는 분유5)의 의미를 포함한다. 개별적인 존재는 하나의 특수존재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존재는 개별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완전성을 분유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존재는 이 완전성이 부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소유한다.6) 그러나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가 자신의 방법으로 이 완전성을 소유할 때, 다른 존재들도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이 완전성을 소유할 수 있다. 유한존재는 자신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방법 때문에 자신의 완전성과 동일한 완전성을 분유하는 모든 존재들의 차원의 구분이 되고 그 차원에 소속된다. 이러한 분유는 무엇보다도 존재의 차원으로 나타난다. 많은 존재(Being)들이 실존(Existence)한다. 이들은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 양태에 의해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고 정의된다. 이러한 실재적인 분유가 존재관념의 유비7)의 객관적인 근거이다. 분유는 종적인 결정의 차원으로 다시 나타난다.8) 동일한 종의 수많은 개별자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 특수한 방식으로 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형상적인 완전성을 소유한다. 여기에서 일의적인 종개념들이 형성된다. (즉 종 규정은 하나이며 차이는 종 내에서 이루어진다.) 한계가 분유에 의해서 실제적인 차원에 소속된다는 것이 특수존재의 발전을 결정한다. 특수존재는 자신의 개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속해있는 전체의 차원과 동화하려하고 활동적으로 일치하려한다.9) 특수존재는 이러한 활동의 전개에 의해서 존재 분유의 가치와 종적인 결정의 분유의 가치10)를 표현한다.
제 2 절 유한과 구조
▷ 가능태와 현실태 - 되어질 수 있는 것과 아직 되어지지 않은 것11)
가능태가 추구되어 간다는 것은 존재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며12), 그 정적인 구조와 동적인 구조는 특수 존재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13). 인간의 종적 완전성이라는 것은 가능태가 적합하게 구비되어있는 것을 의미한다.14)
분유를 특수존재의 특징이라고 인정한다면 특수존재 자체는 무엇일까?15) 특수존재는 단순하지 않은 하나의 존재, 하나의 구조를 포함하는 존재이다.16) 특수존재는 존재의 차원에서 모두가 모든 곳에서 절대적인 존재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특수존재는 다수이고, 다수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 이들간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비 절대적인―차이는 있다.
유한존재에게는 존재의 원리, 즉 절대성의 원리도 실재하는 것이며 이것성(Thisness, Thysness, Talité, Quidité), 개별성, 한계성, 대립성, 상대성 등의 원리도 실재하는 원리이다.17) 특수존재는 이 두 가지 원리의 상관관계(co-relation)18) 속에 있다. 두 가지 원리로 구성된 이러한 구조는 실재적이다. 왜냐하면 이 구조의 근본이 되는 두 원리의 특성은 환치될 수도 없고 환원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19) 이것성의 차원, 본질의 차원에도 동일한 상황이 나타난다. 하나의 종에 여러 존재들이 속해있다. 이 존재들은 이 존재들 모두의 동일한 존재의 이것성을 소유하고 있다. 존재의 이것성은 형상적이다.20)
제 3 절 동적 구조
▷ 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종적으로 같다는 말은 같은 의미 망 안에 있다는 것이다.
유한 존재의 활동적인 발전도 위에서 말한 구조와 같은 구조를 포함한다. 특수존재는 자신의 완전성을 활동적으로 지향한다. 특수존재는 이러한 생셩과정에서 자신의 실체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변한다. 특수존재의 발전의 순간들은 많고 이 순간들은 서로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생성되는 존재는 비 실체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동적인 구조는 정적인 차원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우연적인 차원21)이 포함하는 구조도 생성하는 존재가 따라가는 발전의 형상적인 차원만큼이나 복잡하다.22) 우연적인 상관관계는 정신적인 존재에서보다도 질료적인 존재에 더 많다. 질료적인 존재의 실체는 질료․형상적23)으로 구성되지만 정신적인 존재의 실체는 순수한 형상이기 때문이다.24) 동일성으로 귀착되는 실재적인 다양성, 분유에 의한 한계 등과 같은 실재적인 한계성이 있으면 이 차원은 반드시 실재적인 구조를 포함한다. 실재적인 구조는 두 개의 원리의 상관관계 속에 있다. 하나의 원리는 결정의 실재적인 이유이고 다른 원리는 결정가능한 것의 실재적인 원리이다. 전자를 현실태라 하고, 후자를 가능태라 한다. 현실태는 완전성의 원리이고 가능태는 개별화의 원리, 즉 특수한 양태의 이유이다.25) 다시 말하면 존재는 자신이 분유하는 완전성을 특수한 양태에 따라서 소유하며 이러한 특수양태의 이유가 개별화의 원리이다. 현실태는 유사성의 이유이고 가능태는 차이, 한계, 관계의 이유이다. 현실태는 동일한 차원의 분유에 해당되는 명사(名辭)26)들을 결합시킨다. 가능태에서는 이 명사들이 대립하며, 분리되며, 연결은 되지만 동일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27) 현실태의 원리와 가능태의 원리의 실재성은 이 두 원리의 상관관계 속에 있다. 이 두 원리는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 현실태와 가능태 이론은 특수존재의 내적인 합동을 연구하는데 핵심이 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분유 이론에 대한 대답이다. 한계, 개별성, 차원, 분유와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한 존재의 구조, 현실태와 가능태 이론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유한실재의 비 단순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혼동을 일으킬 것이다. 근본적인 개념은 모든 구조가 가능태와 현시태의 상관관계라는 점, 가능태와 현실태의 실재성은 이 둘의 상관관계의 실재성이라는 점이다.28)
제 2 부 존재의 분유와 개인
제 1 절 존재의 통일성, 개체성, 완전성, 공유 불가능성
분유는 자존적인 존재들의 다수성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의 존재만 있다면 그 존재의 실존방법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존재의 완전성은 전체적이고 따라서 분유는 없을 것이다. 모든 특수존재는 하나의 존재,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이며 그 자체로 완성되어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존재이다.29) 특수존재는 자존한다. 특수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완비된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자신의 실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개별성을 공유하거나 양도할 수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공유할 수 없는 개별성을 기체(基體)라 한다.30) 일반적으로 기체를 공유 불가능성(incommunicablity)이라 정의한다. 개별성은 다른 부분들과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 하나의 존재단위,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존재를 의미한다. 공유불가능성(incommunicablity)은 전체성(Totality)에 대한 소극적인 설명이다.31) 스콜라 철학자들은 전체성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기체(suppôt)는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존재(complete being)이다. 기체는 자신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체는 하나의 자존적인 전체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고 스스로 충분한 것이다.32) 통일성이란 그 자체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individuality),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 공유불가능성이며 전체성(Totality)에 속한다.33) 기체의 정의는 존재의 차원의 분유에 적용된 일자의 정의와 같다.
제 2 절 개인과 사물
활동을 관찰하면 한 존재의 자존(subsistance), 즉 기체성34)을 인정하게 된다. 자신의 활동을 제시하는 주체는 존재하는 어떤 것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35) 행동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즉 행동은 기체의 것이다.36) 인간의 자존성은 의식적인 삶에 의해서 나타난다. 의식활동은 숙고이고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스스로 충분하다. 이러한 활동을 인격적인 활동이라 한다. 개인은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이란 정신적 의식적 활동을 하는 하나의 자존적 존재를 말한다. 보에티우스(Boetius 486~525)는 실체적인 개인은 이성적인 본성 속에 있다고 말하였다. 실재적인 개인이란 말은 개별적인 실재성의 원리라는 뜻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전체적이고 자존적인 실재를 의미한다.37) 전체적이고 자존적인 실재는 이성적인 본성을 소유한다. 즉 본성적으로 이성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의식생활에서 이성보다 비이성적인 요소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격성을 감정 생활과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막스 쉘러(Max Scheler)는 인격을 사랑과 연결시킨다. 그는 인격을 가치에 대한 감정적인 지각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요소에 의하여 인격을 정의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형이상학적 요소들은 의식의 소여(所與)38)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태도를 반대하는 이유는 실험과학의 경우와 같이 방법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불가지론39)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리보(Theodule Ribo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격이란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한 명석한 의식을 가지고 그 결과에 따라서 행동하는 개인을 말한다. 이것이 최고 형태의 의식이다.40) 비유적인 의미로는 어떤 사건이나 일의 근원, 토론의 주체, 근거가 되는 원리, 때로는 확실, 때로는 정신이 나타나 있는 것, 단호함, 신뢰 등을 의미한다.41)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말을 철학적인 의미를 갖는 Substance42)로 사용한다. 신학논쟁이 일던 시기, 특히 삼위일체(三位一體) 논쟁이 시작된 4C 이후로 hypostasis라는 단어는 personna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고, ousia(본질․본체․실체)와 구별되었다. 신에게는 세 개의 hypostasis와 하나의 ousia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만이 personna이다.
순수하게 물질적인 유기체는 인격적으로 자존하지 않는다. 이들의 활동은 주변의 압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이 표현하는 자발성은 자유가 아니다. 이들의 작용은 이들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동물과 실물은 그들 자체로 행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격이 아니라 사물, 즉 우주의 지속적인 진화의 요소들이다. 사물의 경우에는 타자와의 구별이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사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체가 아니다. 그러나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상대적인 통일성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들 각자는 하나의 전체로써 반응하고 일정기간동안 자신의 형상을 보전하기 때문이다. 동․식물에게는 희미하게나마 인간의 인격적인 통일성과 자존성의 모습이 있다. 그래서 동․식물을 기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격과 사물을 혼동해서는 안되며 이들을 분리시키는 근본적인 차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들은 다수이다. 존재하는 것들 각각은 모두 하나의 존재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이러한 존재들, 즉 이러한 단위들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가치의 기반 위에서 상관관계를 가지며 결합된다. 하나의 전체는 다수이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다수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따라서 다수성은 통일성의 원리를 전재로 한다.43) 즉 서로 다른 말들을 결합시키고 통일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말들을 유사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를 전재로 한다. 하나의 동일한 측정단위가 여러 말들에 적용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간에는 그것들이 소유하고 있는 통일성의 양태에 따라서 또, 그것들에 적용될 수 있는 척도에 따라서 서로 차이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통일성에 원리는 존재의 유비적인 관념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유비적인 관념은 모든 사물을 유일한 종합으로 귀결시키기 때문이다.44) 또 하나의 집단은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되는 특수한 결정, 종적인 결정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 이런 집단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관념은 일의적이다. 예를 들면 인간 개념과 같은 것이다. 또 집단의 원리는 순전히 우연적이고,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전체는 부차적이면서 우연적이나 예를 들면 돌 더미나 꿈과 같은 것이다.
5월 19일 금요일 노트 없음
통일성은 실제의 차원뿐만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도 있다. 지식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서로 다른 내용들의 연결관계는 이해하는 것이다. 지식에는 동물적이고 유일한 인간의 개념과 같은 논리적인 통일성들이 있다.45) 그러한 논리적인 통일성들을 연속적인 심리활동을 거치면서도 동일한 의미, 즉 논리적인 통일성을 갖는다.46) 이러한 관념들은 판단과 추리와 결합하여 하나의 논리적인 차원을 형성한다.
생성, 존재의 차원에서 자신을 소유하려는 성향
동일성, 자립적 자아와 타자의 현전(present)
자아 의식과 객관적 지식
개념적인 사유의 결과
하나의 특수존재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범주적인 형태에 따라서 발전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가 능동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수존재들의 활동에는 이러한 관계성, 상대성이 어떻게 표현하는가? 형이상학적인 설명의 기초가 되는 것은 존재의 동일성이다. 하나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이며 근본적으로 그 존재 자체에 속해 있다. 하나의 특수존재는 존재의 부분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적인 전체, 그 자체로 실존하는 전체, 실체적으로 완비된 전체, 하나의 자립적인 존재이다. ‘나’라는 특수존재는 내 속에서 능동적으로 나 자신을 소유함녀서 나 자신을 긍정한다.
5월 25일 금요일 노트 없음
실제로 존재의 가치는 나의 밖에 존재하는 존재들 속에도 있다. 왜냐하면 분유는 다수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수존재가 자신을 참으로 알려면 자신의 개별성을 파악하고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한다. 특수존재는 자신이 여러 존재들 중의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특수존재는 실재를 전체 속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서, 즉 존재들의 차원에서 그가 위치한49) 자리에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특수존재가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을 존재로써 파악하는 것은 그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에 서는 것이다.50) 즉 존재들의 차원에 있는 다른 존재들의 존재가치를 분유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도 존재가치를 분유한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모든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특수존재는 전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체는 유일하고 특별한 관점에서 특수존재에게 나타난다.51) 그 특수존재에게는 그 특수존재에게만 의미가 있는 전체의 부분들과 그 특수존재가 만들고 창조하는 전체의 부분들의 관계가 있다. 특수존재는 이러한 가능성에 따라서 우주의 각 관점에서 이러한 전체를 독창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각자의 독창성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 속에 있다.
1) Andronicos de Rhodes(B.C. 70년경) : Peripathos 학파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수집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분류하여 이를 출판하였고, 주석 하였다; 철학 교육은 논리학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음.
2) Christian Wolf(1679~1754) : 독일의 계몽기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제자; Jena 대학과 Leipzig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신학, 철학을 강의하였음; 라틴어 대신 독일어로 강의하였고 독창성보다는 논리성과 체계성을 강조하였고, 독일에서 처음으로 학파를 형성하였다. (볼프학파)
3) 한계(limit)를 가진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련(relation)을 의미하며 관계적, 상대적(relative)이라는 것은 절대적(absolute)이며 무한(unlimited)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양태(mode)는 타자와 구별되는 속성을 의미하며, 자체로서 실재하는 substance와 구분된다.
5) 철학의 기본적인 두 가지 탐구방법은 플라톤의 분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에서 잘 드러난다. 전자가 근본원인을 발견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결과로 드러난 사건들에서 근본원인을 추적하여 올라가는 방법이다.
6) 결함과 한계가 없는 완전(Perfect)과 종적인 완전성(Perfection)은 다르다. 플라톤의 분유에서 개별자가 보편을 불완전하게 분유한다는 것은 수학적인 비율로 일정한 비율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태 속에서 서로 다르게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별자의 분유는 완전한 분유이다. 예를 들자면 나와 너는 모두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이다. 나는 10% 인간을 분유하고 너도 10% 인간을 분유한 것이 아니라 모두 완전하게 인간임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다만 서로의 양태속에서 서로 상이하게 나누어 가지고 있을 뿐이다.
7) 특수존재를 설명하는 데에 유비(analogie)와 분유(participation)라는 방법이 사용된다는 것은 이미 특수존재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포함한다. 유비추리에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드러내는 백분율(proportion)과 비교되는 두 비율을 설명하는 비율(proportionality)을 구분할 수 있다.
8) 분유라는 것은 같은 종 내에서의 차이를 말하며, 종 간의 차별에는 proportion이 존재한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정의는 종차에 의한 설명이다. 종(種)은 상위의 묶음을 류(類)는 상대적으로 하위의 묶음을 말한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에, 동물을 감각과 운동을 가진 동물에, 생물을 생명을 가진 물질에, 물질을 공간을 차지하는 존재로 돌이키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종과 그의 차이에 근원을 두는 설명 방식이다. 그런데 존재보다 더 근원적인 종이 존재하는가? ‘무’라는 것은 존재와의 대립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존재(Being)이지 그 이상의 추구는 불가능하다.
9) Socrates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완성시키려한다. 그러나 저절로 익어가는 식물의 씨앗과는 달리,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인간의 씨앗은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10) 개별자에 선행하는 보편자에게 접근해 가려는 노력
11) 모든 철학은 스스로를 Realist라고 주장한다. Real은 실재하는 것이며 Actual은 현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Real이며 현상은 Actual이지만 Real은 마찬가지이다. 경험론, 관념론 양쪽 모두에게 자신의 입장은 언제나 Real이 된다.
12) 인간이 만약 전적으로 자기라면,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나타날 수 없다. 즉자존재(l'être en soi)와는 달리 대자존재(l'être pour soi)는 자신의 외부를 향하는 의식(conscience)이며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은 '나 아닌 나(alter ego)'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히 제약되어 있다면 자신의 결여를 알아 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제약을 인식한다는 것은 비록 인간에게 무한(infinity)은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그에 대한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형이상학에서는 영원(eternity)라고 한다.
13) 모든 존재는 동적(動的)인 구조를 가지지만 동적인 구조는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정적(靜的)인 구조를 임의로 가정하여 관찰하게 된다.
14) 인간이 가지는 완전성은 결핍과 가능태가 없는 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어의 Act라는 말은 인간의 현실태가 가능태를 실현해 나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안에는 규범의 일부가 이미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 규범의 방식을 따라 행동하게 된다.
15) 일반적인 존재(esse, being)는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본질(essence, what it is)과 현재에 드러난 실존(existence)을 포함한다. 실존(existence)이라는 말은 존재가 밖으로 불거져(ex-) 드러나 있음(-ist)을 의미한다.
16) 복잡하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단순하다는 것은 완전함을 포함한다.
17)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종인 동시에 존재이다. 인간은 종적인 본질을 분유하는 동시에 존재를 분유한다.
18) 상관관계(co-relation)라는 것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없으면 상대방 역시 성립하지 않는 관계를 말한다.
19) 환원(reduction)이라는 것은 분석과 유사한 개념으로 한 개체를 더 단순한 부분들로 나누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두 요소들은 구별은 가능하지만 구분을 불가능하다. 예컨대,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 그리고 그 역할들을 ‘구별’하여 탐구할 수는 있지만 영혼 없는 육체나 육체 없는 영혼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전체로써 파악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관관계(co-relation)는 특히 신체와 영혼, 형상과 질료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20) 질료는 물질적인 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형상적인 것은 미래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태보다 더욱 ‘나’인 것이다. 존재의 이것성이 형상적이라는 말은 결정의 주체가 ‘나’가 아니라 나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1) 종적으로 일의적이라는 말은 서로 동일하다는 말이다. 종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이는 우연적인 차이일 뿐이다. 또한 완전자들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차이의 존재는 불완전을 내포한다.
22) 완전한 신은 단순하며, 복잡한 인간은 불완전하다. 종적인 차원에서의 개별자들의 구분은 없다. 그러나 개별적인(individual) 차원에 이르면 한계(limit)가 드러나고 구분이 가능해진다.
23) 질료․형상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의 전체로서의 나이다. 부분들의 결합이 전제적인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육체적․정신적 기능으로 구별될 뿐이다.
24) 위치나 시간같이 물리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질료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비질료적, 이성적이다. 질료적이라는 것은 한계성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25) 도토리에게 현실태는 도토리 자신이고 도토리의 가능태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토끼의 먹이가 될 수도 있고 도토리 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도토리 안에 내재하는 가능성의 가장 완전한 실현은 참나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토리의 완전태(가장 참된 도토리)이다. 현실태에 있어서는 차이는 있지만 우월은 없다. 그러나 가능태에 있어서는 우열이 존재한다.
26) 여기서 명사(名辭)―term―라는 것은 명사(名詞)와 구분된다. 전자는 후자 뿐 아니라 동사를 포함한 모든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27) «나»의 인간성 실현은 «너»의 인간성 실현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련은 있다.
28) «나»라는 존재의 특수존재는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가 나의 전체인가? «나»에게는 하고싶은 것(목적)이 존재하며 현재의 나를 미래의 나로 이끌어 가는 작용이 생긴다. 이 목적은 어디서 온 것인가? 현재의 «나»에 대한 불만족인가? 아니면 «나»의 안에서 나오는 것인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최초의 것(즉, 이데아, unmoved mover)가 그 근원이 되며, 사르트르, 마르크스에게는 여기에 존재하는 나가 그 근원이 되며, 헤겔에 있어서는 역사의 최후에 완성될 절대정신의 실현(석존의 불국토 역시)에 그 기준에 있다.
29)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내적으로는 완성해 나가야 할 것들이 있지만, 개체로의 완전성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가지고 있다.
30) 실체에 대한 용어들
실체(substance, hypostasis - sub, hy (아래에) + stance, postasis(놓여진 것))
개별성(individuality)과 개인성(personality)
자립성(subsistance)
개별자(suppôt) = 기체(基體)
행동이라는 것은 행동하는 자로써의 기체를 포함하는 말이며, 개별성을 가지는 것은 자립적이다.
31) 어떤 것을 정의함에 있어서 그것이 아닌 것과 대비하여 ‘~이 아니다’의 형식으로 설명하는 방식
32) 예를 들어 분할된 여러 조각의 피자는 전체 피자라는 전체성 속에서 부분의 역할을 담당하므로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되고 부분들이 모일수록 전체는 완전해지며, 분할 될수록 전체의 성질은 감소한다. 이는 수(양)적인 측면에 의한 설명이다. 그러나 인간은 많은 사람이 모이면 더 완전한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개별적인 인간성의 양이 증가하면 인간성 전체가 증가하며, 전체의 양이 감소하면 인간성 전체가 감소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개별자들에게서 인간성이 많이 실현된다면 전체의 양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이 더 발현(presence)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인간성 실현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처음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길이 나중의 사람들에게는 더 쉬운 길이 되는 것처럼 인간성의 실현에도 역시 연대(solidarity)가 존재한다. 이 연대감에 대한 가장 큰 걸림돌은 증오심이다.
“ 나의 앞에 길은 없다. 그러나 내가 지나간 뒤에는 길이 생긴다.”
33) 그러므로 통일성, 불가분성(individuality), 구별성, 공유불가능성은 전체성(Totality)과 동의어의 선상에 있다.
34) ‘~성’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 된다. 추상(abstraction)이라는 말은 추출, 뽑아냄을 의미하며 그 안에 내재하는 것 뿐 아니라, 가능성 속에 있는 것까지를 그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인간성이라 하면 외재하는 인간성이라는 것은 없지만 나와 너의 안에 있는 인간성을 뽑아냄을 의미한다.
35) «나»에는 타자와의 공통적인 측면(보편성)과 타자와의 다른 측면(개별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형이상학에서는 개별성(individuality)의 차원을 넘어서는 분유, 본질 등의 탐구로 나아간다. 또한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윤리의 주제이다.
36) 진리란, 인식론의 입장에서 보면 논리적으로 오류가 없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론자의 입장에서의 존재가 비이성적이라는 것은 인식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것이지 존재를 오류로 돌리지는 못한다. 또한 존재론에 있어서 행동, 사유, 인식은 존재자에 의존한다. 즉, 그것의 주체와 대상이 없으면 이러한 명사(名辭)들은 무의미하다.
37) 중세에 있어서 인격의 의미는 «이성적 기체»로 정의된다.
38) Immediate Date of conscience (매개가 없이 주어져있는 의식의 재료) - 훗설(Husserl)의 현상학에 의하면 내용 없는 의식은 없다. 즉 의식의 작용(Noesis)과 의식의 대상(Noema)은 구분은 가능하나 상호 불가분적이다. (cf. 불교의 심(心), 심소(心所)), 백지상태(tabla rasa - 대패질 된 테이블)에는 어떤 상이 새겨질 때에 비로소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 즉 noesis와 noema가 같이 주어져야 하나의 의식(one consciousness)이 성립한다.
블롱델은 volonté voulante(=expressing expression)와 volonté voulue(expressed expression)를 말한다. 나의 심리 상태에 일어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의지를 일으키는 능동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블롱델에 의하면 이 능동적인 요소는 내가 의도한 바도 아니며, 내 밖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 요소는 과연 어디서 주어진 것인가? 그 대답에 따라 학문의 기반도 달라질 것이다.
39) 불가지론(Agnosisism), 회의주의(Scepticism), 허무주의(Nihilism)
‘인간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에 대한 형이상학의 입장은 그 질문에 이미 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상에 대한 질문, 의심의 상태인 회의주의나 부정의 상태에 있는 허무주의 역시 최초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어떤 불명확한 존재를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가 있다는 확실성(Certitude)은 비록 데카르트의 논의처럼 clear & distinct한 개념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어둠 속에 무엇인가가 있다.’ (오히려 obscure를 포함한다.)
40) 이는 다소 교육적인 의도를 포함하는 정의이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personna를 hypostasis(ὑποστασιꐠ), subsistaant라 한다. personna는 크게 세 가지의 의미 근원을 가지는데, ‘Mask’(가면, 역할), ‘모습, 형태, 행위자‘ 그리고 ’기능, 품위‘이다. 마지막 정의는 Stoa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정의라고 할 수 있다.
Stoa철학자들은 도덕주의, 우주의 혼을 이야기하며, 인간은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우주의 혼의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들이다. (cf. 헤겔의 Geist에 의한 이성의 교지)
41) 스토아 학파에서의 확신, 결단이라는 말은, 인격(기체)에서부터 나온 것만을 의미한다. 자신이 아닌 타자의 영향에 의한 능동성은 확신이나 결단이 아니라 충동이다.
42) cf. under-standing(英), com-prendre(佛)
43) 존재론적 선, 존재론적 악(Ontic good, ontic evil) - 근원적인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자체로 모든 것은 아름답고 선하다. 큰 선을 작은 선을 위해 포기하면 그 차이만큼의 결여가 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형이상학자들은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사형제도는 존재의 생명과 그에 따르는 교훈을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동태복수법(talion)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나 죄를 범한 사람을 동일하게 처벌하지 않고 교도소(교도소(矯導所))에 보내는 이유는 그 말이 나타내는 말 그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더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4) 서로 다른 것들을 서로 다른 자(척도)들을 가지게 된다.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들을 유비하는 데에는 직접적인 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차원간의 건너뜀(transgression)에 의해 각각의 관계만을 남기게 된다.
45) 지식이란 단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며, 전체의 체계 속에서 논리적인 것이다.
46) 철학은 진리에의 탐구이며 진리는 논리적이다. 존재를 논리에 맞출 것이냐, 아니면 논리에 존재를 맞출 것이냐?
47) 성향(tendency)은 충동(desire)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 때 충동이라는 말은 본능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전자를 appetitus, 후자를 volonté라 한다. 의지적인 것은 전자에 지성이 더해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다. 그러므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비 지성적이며 성향이 욕망으로 가리워지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성향을 밝혀내는 데에는 섬세함(subtelty)이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신을 원하는 자연적(본성적)인 성향이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48) 특수존재는 존재로 환치 불가능하다. 즉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나’가 아니다.
49) situated, 처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 속의 상황을 의미한다.
50) 나는 전체가 될 수도 없고, 전제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51) ‘의식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