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의 아들
염 상 섭
1
“아, 누구시라구. 언제 건네오셨에요?”
“네에……그런데 용히 예까지 오셨군요. 이 댁에 계서요?”
“어떻게 내지(內地)루 가게 될까 하구, 한 보름 전에 피난민 틈에 끼어 건너는 왔는데 차표두 살 가망이 없구…… 그건 고사하구 다시는 안동〔安東縣〕으루 돌아가는 수가 없군요.”
“왜, 아직은 아침저녁 두 번씩은 통행시키는가 본데요.”
“그건 조선 양반 말이죠. 우리는 증명서를 얻는 재주가 있어야지요. 큰일 났에요. 누가 이렬 줄야 알았습니까? 옷 한 벌 걸친 채, 어린애 기저귀 하나 안 가지고 나선 것이 벌써 반달이나 넘습니다그려!”
“어어, 그거 걱정이군요.”
“글쎄 십 분 이십 분이면 건너실 것을, 다리 하나 격해서 뻔히 바라보면서 이 지경이니 말라 죽겠에요. 집에서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났는지 누가 알겠에요.”
옆집 일본 여자의 조카딸인지 조카며느리인지가 안동서 건너왔다가 길이 막혀서 못 가고 있다는 말은 안집 주인댁에서 들은 말이지마는 부엌 뒷문 밖에서 빨래를 널고 섰던 아내가 일본말로 이렇게 수작하는 소리에 홍규는,
‘누구길래, 알던 사람인가?’
하며, 보던 신문을 놓고 일어나서 부엌 쪽 유리창을 내어다보았다.
‘흐흥……저 여자가……?’
하고 홍규는 혼자 코웃음을 쳤다. 안동에서 며칠 전까지도, 여기 건너온 지가 반달 짝이나 된다니까 며칠 전까지는 아니겠지마는, 어쨌든지 몇 해 동안을 두고 자기 집 앞을 아침저녁으로 지나다니던 그 여자다. 무슨 두드러진 일이 있어서 ‘그 여자’라는 것은 아니나, 언제 보나 머리치장이 야단스럽게 화려하고 하루에 몇 차례나 하는지 모를 솜씨 있는 화장이 남의 눈에 띄기 때문에, 정말 미장원을 경영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나, 동리에서는 미장원 여자, 미장원 여자 하고 불렀던 것이다.
홍규의 코웃음 속에는, 피난해 온 바로 옆집에서 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의외라는 뜻도 있겠지마는, 그 여자의 부엌방석¹ 같은 퍼머넌트 머리와 분기 없는 까칫한 얼굴이 딴사람같이 보인 때문이기도 한 것이었다.
“안동서 온, 옆집 조카딸이라는 거, 바루 그 미장원 여자야.”
뒤미처 들어온 아내는 낯선 고장에 와서 무료한 판에 무슨 희한한 일이나 발견한 듯이 웃는다.¨
“그렇구먼. 헌데 언제부터 그렇게 자별하게 인사를 하게 되었던구?”
홍규는 신문에서 눈도 아니 떼고 대꾸를 한다. 이 사람은 국경을 넘어온 후 요새 며칠 동안 못 보았던 밀린 신문을 얻어 보기에 갈급이 난 것이다.
“예 온지 사흘 나흘이 돼도 옆집 식구란 어른 애 할 것 없이 코빼기두 볼 수 없더니 지금 별안간 뒤에서 톡 튀어 나오며 말을 붙이는군요.”
사실 옆집 일인들은 조석이야 끓여 먹겠지마는 하루 온종일 또드락 소리도 없고 드나드는 기척도 아니 냈다. 앞문에 붙인 김모(金某)라는 문패는 접수 가옥(接收家屋)의 선취권(先取權)을 표시하는 것일 것이요, 동시에 이 집은 이 시가(市街)의 어느 집에나 써 붙인 카렌스키 돔(조선인의 집)이란 확적한 표시도 되는 것이겠지마는, 그래도 캄푸라주²의 효과가 적을까 보아서 문설주에는 어느 때 보나 벌써 후락해진 태극기와 소련의 붉은 깃발이 좌우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위진(防衛陣)을 쳐놓고도 그 속에 들어엎디어 있는 ‘야마도다마시이’³는 ‘다다미’ 바닥에 오그라붙어서 발발 떨다가는 신새벽에 부엌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어디 가 모여서 숨어 있는지, 날이 저물어야 하나 둘씩 기어들어오곤 하였다.
“그 옷 꼴 허구, 미장원 미인두 다아 녹았더군.”
아내는 신문에 골독한 남편에게 말을 걸기가 안된 듯이 혼잣말처럼 하며 경대 앞에 가서 앉는다. 두 발을 모아서 옆으로 비스듬히 내어밀고, 처진 배를 모시듯이 하며 앉는 것을 보면 몸 풀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왜, 그녀가 조선 사람이라지 않았나? 남편이 조선 사람이라든가…….”
홍규는 비로소 신문에서 얼굴을 든다. 홍규는 그 여자가 한 동리에서 살았다는 것보다도, 노상 안면이 있다는 것보다도 미인이라는 것보다도, 내외간 누구인지 조선 사람이라는 데에 은연중 관심이 있기 때문에 아내의 말대꾸도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야 세계가 뒤끓고 허리가 두 동강이 잘린 조국이 남북에서 펄펄 뛰는 이 판에 동리 집 일본 여자 하나쯤 숨을 몬다기로 아랑곳도 없는 일이다.
“글쎄에, 그런가 보다는 말두 있었지마는, 그렇지두 않은가 봐요. 조선 여자 같으면 아무려니 그럴라구. 아까두 일본 갈 차표를 사게 될까 해서 왔다는데…….”
“그거 모르지. 이 험난한 세상에 남편이 오지를 못하구 꽃 같은 계집을 왜 내세웠을구…….”
“하하하. 꽃 같은! 오래간만에 생각지도 않은 데서 만나니 매우 반갑기두 하시겠죠.”
아내는 거울 속에서 입을 빼쭉해 보이며 말을 가로채서 웃다가, 자기 역시 얼마쯤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면서도, 처지가 이렇게 뒤바뀐 것이 고소하고 유쾌하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안동서야 허구한 날 아니 만나는 날이 없구, 올에는 아이 밴 덕에 나가보지두 않았지만, 몇몇 해를 두구 방공 연습에 함께 나가구 해야, 나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두 않구 그렇게 쌀쌀하던 것이. 제가 아쉬니까 죽었던 어머니나 살아 온 것처럼 반색을 하고 뛰어나와서 안동 소식을 묻겠지. 헌데 일본 사람들은 우리보다두 아주 깜깜인가 봐요. 안동서들은 맞아죽지나 않았느냐고 열고가 나서 물으며 목이 칵칵 메어 우는 걸 보니 그래두 안됐겠죠.”
“흠……울어? 지금 일본 사람야 눈물밖에 아무런 표현 수단도 자기 위안도 없겠지마는, 운다는 것을 보면 가짜가 아닌 게 분명하군. 단 일본 여자쯤야 이 사품에 대단히 철교를 넘어설 생의두 못할 것이요, 예전에 쌀쌀히 굴던 것 역시 가증스러워 그렇다기 보다도 일본 사람과 살고 일녀 행세를 하여왔으니까 제 밑천 드러날까 봐 조선 사람 교제를 피하느라구 그런가 했더니…….”
“섭섭하시겠습니다!”
아내는 또 실없는 소리를 한다. 안동 있을 제 언젠가 그 여자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하니까 홍규는 눈이 커대지며,
“응? 조선 사람야? 조선 사람야!”
하고 몇 번이나 뇌까리다가 “그 아깝군!” 하며 입맛을 다신 일이 있은 후로는 그 여자 이야기가 나면 늘 놀리는 것이었다.
“그 왜 사람이 실없어. 조선 여자가 아니었으니 섭섭하기커녕 다행하지 않은가.”
“만일 조선 여자였더면 어떻게 될구? 그것두 친일파 반역자루 몰리거나, 무리루 못살게 떼어놓거나 하진 않겠죠?”
아내는 머리빗은 자리를 치우며 묻는다.
“그야 국제결혼이 어디는 없나마는 그 심보가, 조선 사람인 것을 속여가면서 사는 그 심보가 괘씸하단 말이지.”
“하니까 어쩌면 남편 따라서 일본으루 가려구 차표 사러 왔던 게로군. 그야 자식까지 났으니까 지금 와서야 허는 수 없겠지.”
아내는 이번에는 미장원 미인을 또다시 조선 여자로 금을 그어버린 소리를 한다.
“하는 수 없겠지. 하지만 인제는 지나간 일이지마는, 세상에 아무리 눈에 차는 사내가 없기루 하필 일본놈과 살더람. 그년의 배짱을 알 수가 없어.¨
“그것두 제 팔자지…… 왜 미인을 뺏겨서 배가 아프시다는 거요?”
아내는 또다시 실없는 소리로 웃어버렸으나, 해방 이후로 한층 더 흥분되기 쉽고, 신문을 보다가도 비분강개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는 홍규는, 그래도 미장원 여자가 미운 듯이 말을 또 잇는다.
“조선 사람이 일본 여자와 사는 것과도 또 다르거든. 그나마 일본 여성을 모독이나 하는 듯이 얼마나 아니꼽게 여기고 시기하는지 아우? 흑인종이 백인종의 부녀자를 범하면 린치〔私刑〕를 하지마는, 일본의 해외 발전의 선봉대가 갈보라는 것은 까맣게 잊은 듯이 조선 사람인 경우에는 입으로라도 린치를 하거든. 인제는 지나간 일이지마는 동족의 남자가 얼마나 놈들에게 부대끼고 악착한 꼴을 당하였던가를 생각하면, 아무러기로 그놈들에게 시집을 가더람? 못된 년들이야!”
“이렇거나 저렇거나 피차에 좋을 일은 아니죠.”
아내는 인제야 남편이 그 여자가 조선 사람이라나 보더란 말에 놀라고 아까워하고 미친년이라고 욕을 하고 하던 본뜻을 안 것 같았다.
“제 민족의 피를 깨끗이 지니겠다는 결벽쯤은 있어서 안 될 일 없겠지마는 하필 일본놈에게뿐이리오…… 요새 서울서 오는 신문을 보면 야단인가 보더군. 머리를 브라운으로 물들이구 뾰족구두에 댄스홀로 질번질번하구…….”
“어이, 젊은 양반이, 내 이런 완고는! 걱정 고만해두서요.”
하고 아내는 핀잔을 주다가,
“사랑은 국경이 없다지 않습니까. 젊어서 한때 놀라구 내버려두시구려.”
하며 깔깔 웃어버 린다.
“흥, 이거 큰일 났군. 우리 마누라마저 놀아나는 판이로구나!”
홍규도 하는 수 없이 껄껄 웃어버리고 말려니까,
“왜? 로스키⁴한테 업혀 갈까 봐 겁이 나슈?”
하고 아내도 지지 않는다.
“로스키가 업어가다니, 그런 도섭스런 소리 마슈…….”
안집 애기씨가 들어오다가 듣고 말참견을 하면서,
“우리를 해방해준 감사한 붉은 군대에 대한 실례지요.”
하고 웃으며 한마디 곁들인다. 이 부인 말은 웃으며 던지는 말이나 결코 웃음의 소리만도 아닌 것 같다. 남편이 도 인민위원회에도 다니지마는, 자기 자신도 여성동맹에 드나드느니만치 중간에 엉거주춤한 홍규 내외와는 주심⁵이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저런 안전 보장이 있지 않은가.”
홍규는 바깥방의, 길로 난 유리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약간 웃는 듯이 입귀를 처뜨리고 웃는다. 유리창 가운데 칸에는 역시 붉은 잉크로 쓴 ‘카렌스키 돔’이 붙어 있다.
“참, 난 처음 와서 집집마다 저것이 붙었기에 ‘붉은 군대 만세'라든지 ‘붉은 군대를 환영한다’는 의미인가 보다 하였더니 알고보니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었군. 그런 실례의 말이 어디 있겠어요.”
홍규의 아내의 이 말에 주인댁은 눈동자를 똑바로 세우고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선 사람의 집이라 하였기로, 어디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야 씌었나요.”
하고 탄한다.
“그럼 조선 사람의 집이니 들어오라는 뜻인가요?”
홍규댁은 깔깔 웃는다. 그다지 꼬장꼬장한 성미도 아니지마는 인제야 첫 아이를 밴 젊은 색시니만치 곧이곧솔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의 집을 접수를 해서 조선 사람들이 들고 보니 구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아요.”
“아무렇기로 로서아 병정은 내정 돌입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 광고쯤 되니 내가 사령관 같으면 내 부하는 결코 그렇지 않으니 떼어버리라고 노발대발할 일 아녜요.”
“그렇게 말하면 그렇기두 하지만, 내가 듣지 못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피해는 여기 시내에서는 별루 없는 세음 아녜요. 거기에는 일본 여자의 서비스가 좋았던 덕두 있었겠고 국제간시청(國際間視廳)이라든지 특히 미군과의 우열을 다투는 자제심이라든지 하는 미묘한 관계도 있겠지마는…….”
홍규는 주인댁의 감정을 상할까 보아서 그런지, 얼른 이렇게 휘갑을 쳐버렸다.
2
“용서하십쇼.”
속으로 들이 거는 듯한 조심성스러운 목소리가 부엌 뒷문에서 난다. 묻지 않아도 옆집 주인이다. 그러지 않아도 저녁밥 뒤에 놀러 온 안집 부부와, 이 사람 이야기를 지금 막 하고 난 끝이다.
이 사람은 이웃에서 숙면인 안집 주인을 거쳐서 자기의 소청을 먼저 전달해놓고 때맞추어 온 모양이다.
그동안 홍규는 드나드는 길에 두서너 번 만날 적마다 굽실하고 인사하는 것을 받았기에 안면이 아주 없는 터도 아니었다. 해방 전까지는 무슨 청부업의 거간 노릇인지: 했다 하지마는, 아무렇든지 관리나 그런 따위 꼬장꼬장한 축은 아니요, 때가 때라 그렇게 보이려는 조심성도 있겠지마는 나이 한 사십 된 온유한 위인이었다.
“처음 뵈옵는데 불시에 찾아와 뵙고 이런 무리한 청을 여쭙기느 대단 죄송합니다마는…….”
10년 가까이 회사에 다녔어야 고원 첩지밖에 못 받아본 홍규는, 속만은 제 아무리 살았어도 일본 사람에게 이렇게 공대를 받아보기는 생전 처음이다.
“……대강 여기 계신 가네기 상께도 말씀을 여쭈어두었습니다마는, 제 질녀가 요새 안동서 건너와 있습죠. 그 조카사위애로 말씀하면 어엿한 조선 사람, 원적이 바루 경상남도 동래(東萊)올시다…….”
가네기 〔金城〕란 안집 친구의 한 달 전까지 쓰던 창씨거니와, 홍규는 벌써 이 친구에게 듣고 실상은 미장원 미인 내외의 국적이 소문이나 추측과는 뒤바뀌어버린 것이 의외였다.
“그래 조카따님은 일본 태생이시구?”
“네. 그 애야 부모가 다 분명히…….”
하고 하야시는 웃어버린다.
“그런데 조카사위 되는 사람은 왜 어엿한 조선 사람, 조선에 어엿한 원적을 두고 이때껏 일본 사람 행세를 하여왔더란 말씀요?”
홍규는 하야시의 입내를 내어서 ‘어엿한’이란 말을 두 번이나 힘을 주어 뇌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조의 의미가 섞인 것은 아니었다.
“네. 별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닙죠. 여남은 살 때 제 어른이 작고를 하니까 대로 물릴 자식도 아니요, 어린것을 큰댁네에게 맡기고 나설 사정도 못 되어 나가사키 〔長崎〕로 데려다가 저의 외조부의 민적에다가 일시 방편으로 넣은 것이라서 장성한 뒤에도 내내 그대로 행세를 해버린 거죠.”
하고 말을 끊다가,
“이것은 우리끼리 말씀입니다마는 그때 시절에는 그편 이 영 해롭지 않고 더구나 이런 데 나와서는 가봉(加俸)이니 배급(配給)이니 이로운 점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하하하.”
하고, 그런 점은 관대히 보아달라는 뜻으로 웃어버린다.
홍규는 잠자코 말았다. 자식이 장성하면 제 겨레를 밝히려 들고 아비 성을 따르려 들 것인데, 가봉 푼이나 일계 배급(日系配給)에 팔려서 제 아비 성도 찾으려 들지 않았더냐고 한마디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나 그 대신에,
“그래 인제는 자기 성을 찾겠다나요?”
하고 물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으니까 찾으려 들겠죠. 다만 제 모가 저기 있으니까 우선은 그리 가려 들지 모르죠마는…… 그러나 그놈의 원자탄에 어찌 되었는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나부터도 여기 귀화해서 안온히 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주저앉고 싶습니다.”
하고 하야시는 제 신세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또 하하하……하고 웃는다.
결국은 안동에 가는 길이 있거든 조카사위를 데려다줄 수 없겠느냐는 청이다. 조카사위가 조선 사람 교제도 없었거니와 조선인회와는 연락이 닿지를 않고 보니, 별안간 조선 사람이로라 하고 나설 수도 없는 터요, 섣불리 하다가는 조선 사람에게 뭇매에 맞아 죽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이다. 조카딸을 보내자니 전같이 피난민 떼가 몰려다닐 때도 반 목숨은 내놓고 나서는 모험이거니와, 요행히 넘겨놓아도 사지(死地)에 들여보내는 것이니 자식새끼 알라 제발 세 목숨을 살려지이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이다.
홍규는 눈을 내리깔고 어느 때까지 잠자코 앉았다. 하야시의 눈이 자기의 입만 뱌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근실근실한 듯 거북하건마는 선뜻 대답이 아니 나왔다. 자기가 입 한 번만 벌리면 조선인회의 피난민 증명서를 얻어주어서 당장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자신이 있다거나, 정 하면 누구누구 친구를 끼고 통행 증명서에 로서아 장교의 사인 하나쯤 얻어낼 수도 있으려니 하는 실제 문제보다도 이 일에 아랑곳을 하겠느냐 말겠느냐는 것을 생각하기에 시간이 걸렸다.
아내도 초조한 듯이 쳐다본다. 친구 내외도 쳐다본다. 모든 사람의 눈이 승낙을 하라고 재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홍규는 점점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런 거북한 청을 받게 되었나 하는 불쾌보다도 그 마쓰노라고 하는 청년이 나는 마지못해 창씨한 마쓰노가 아니요, 진짜 마쓰노요 하고 바로 서서는 어깻짓을 하고 돌아서서는 속으로 고개를 움츠러뜨리며 살아왔을 그 꼴이 머 리에 떠올라와서 불쾌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규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내일 건너가보죠. 어차피에 남겨두고 온 내 짐도 찾아와야 할 거니까 잘되면 그 길에 데려다드리리다.”
하야시는 이마가 다다미에 쓸려 벗겨지도록 몇 번을 엎드렸는지 몰랐다.
“무엇보다도 애가 씌는 것은 동리에서나 친구들 사이나 대강 짐작들은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조선 사람 편에서 미워할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측에서도 탐탁히 여겨주지 않고 만인(滿人)도 좋아 않고…….”
홍규는 그런 사정은 다 안다는 듯이 하야시의 말허리를 자르며, 자기 말을 잇달았다.
“그러기에 힘써보마는 말이요, 그런 경우에 제일 무서운 것이 중국 사람이지마는 일본 사람이면 일본 사람으로서 끝끝내 버티고 일본인회에서 탐탁히 가꾸어준다면 나 역 아랑곳할 필요가 없겠지요. 허나 결국에는 내 동족 아닙니까! 그것도 정치적 의미로 소위 친일파니 민족 반역자니 하면 낸들 별도리 있겠나요마는 이것이야 단순히 가정 문제요 가정 형편으로 자초부터 그리 된 거
니까 이 기회에 바로잡아놓는 것이 좋겠죠.”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황송합니다.”
하야시는 허둥허둥 인사를 하고 이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가족에게 알리려고 일어선다.
“그럼 부인이 전할 말이 있거든 하라고 하슈. 나두 안면은 있지마는 그래야 저편서도 안심하고 따라나설 거니까…….”
“네, 그럽죠. 죄송합니다마는 편지를 한 장 전해주십쇼. 황송합니다.”
홍규가 하야시를 보내고 돌아와 앉으려니까,
“그이 언젠가 시 공서(市公署)에서 만나봤대죠? 그 담배 사단 적이던가……?”
하고 아내가 말을 붙인다.
“음. 아무튼지 그 도장 하나 찍기에 이틀을 두고 시 공서와 연초장 조합 사이를 눈구덩이를 세 차롄가 네 차례를 왕복하였는데, 보기에 딱하던지 한동네 산대서 그랬던지, 그자가 가로맡아서 주임도 없는 책상에서 도장을 꺼내가지고 딱딱 찍어주더군. 화가 한참 치미던 판에 어찌나 시원하던지…… 그 후에는 길가에서 만나면 피차에 고개를 끄덕해주는 정도로 안면은 있었지.”
“사람이 좀 꺼떡대구 주짜를 빼는 모양이더군요.”
“게다가 좀 헐렁헐렁하고 덥쩍하는 위인인 모양이나 호인은 호인야.”
“그러고 보면 아주 인연이 없는 것두 아니로구먼. 그 사람 역시 제가 조선 사람이거니 하는 생각이 있으니까 조선 사람끼리의 편의를 보아준 것이겠구.”
하고 주인도 잘되었다는 말눈치다.
“그 담배 사단으로 해서 저 어른은 엉엉 울기까지 하셨는데 그걸 피어드렸으니 이런 때 그 공을 갚아야지.”
“그까짓 걸로 논지가 아니지마는…….”
하고 홍규는 그때 일이 아직도 잊혀지지를 않는지,
“고놈, 담배 조합 놈 지금쯤은 어찌 됐을구?”
하고, 입을 꽉 다물고 눈을 치뜬다.
“아니 담배 사단 때문에 우시다니 정말 우셨에요?”
안집 부인이 아내를 돌려다본다.
“우셔두 이만저만 우셔요…….”
하고, 아내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혼자 깔깔 웃다가,
“흑흑 느껴 우시면서 아이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두 모르는 것을 가지구 인력으루 허는 노릇인지, 날더러 자식을 낳더라두 아예 사내자식은 낳지 말라구 내게다 화풀이를 하시는군요.”
“에에?…….”
웃음 반 탄식 반, 섞인 소리를 하며 주인 젊은 부부는 뒷말을 재촉하듯이 고개를 내민다.
“작년 겨울에 양곡회사를 그만두시구 저리 옮기시지 않으셨에요. 그러니까 이때까지 타시던 담배의 직장 배급을 ‘도나리 구미’⁶로 옮겨다가 등록을 해놓았는데, 두 달이 가도록 소식이 없구 그 비싼 야미 담배루 사시니 참다못해 조합으로 알아보러 가셨더니 표가 시 공서에서 넘어오지를 않았다 하죠. 시 공서에서는 두 달 전에 넘겼다 하지요. 옥신각신 왔다 갔다 하시다가 이틀 만에야
조합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수속이 틀렸다고 젖혀놓았다는 담배표가 이삼백 장이나 나왔는데 그것이 모두 조선 사람의 것이더라는군요.”
“헤에…… 결국 조선 사람 몫을 돌려빼서 야미로 넘겨 먹었던 게군요.”
“여부가 있나. 고놈들 괘씸하기라니!”
홍규가 아직도 분한 낯빛으로 말을 받는다.
“그러니 내 말이 어째 이 속에는 일본 사람의 수속 틀린 것은 한 장도 없더냐? 일본 사람의 표가 이렇게 모였던들 ‘도나리 구미’를 통해서 통지를 해주었을 것이 아니냐? 이만한 분량이 야미로 아니 나갔다는 증거로 장부를 보여달라, 야미로 내보냈다면 우리는 너희들에게 오 배 내지 십 배씩 주고 사먹은 세음이 아니냐? 하고 따지니 싸움이 될 수밖에. 그래도 도매상에 가서 철저히 조사를 해보겠다니까 찔끔하는 기색이던데……지낸 일이지마는 연이 불망자― 미지유야지.”
“그래, 조사해보았나?”
“말이 그렇지. 조사를 하기로 바로 대어줄 놈도 없거니와 유치장 귀신이나 되게! 그놈이 그놈 아닌가!”
“그래서 우셨에요.”
주인아기씨가 놀리듯이 웃는다.
“값싼 눈물이지만 화가 나면 울기도 하는 거죠. 하하하. 그 사품에 담배를 한 일주일쯤 끊어보았지.”
“어떻게 쌈을 하셨던지, 화가 난다고 온종일을 끙끙 앓으시다가 약주를 잡숫고 나시더니 남부끄러운 줄두 모르시구 엉엉 우시면서 자식은 애초에 날 생각두 말라는 호령이시군요. 죽은 뒤에 물려줄 것이라고는 가난과 굴욕과 압박밖에 없는 신세가 무엇하자고 자식을 바라느냐고 종주먹을 대고 생트집이시군요.”
홍규 아내는 이렇게 말을 맺고 자기 배를 슬며시 내려다본다.
“오죽 분하셔야 그러셨겠에요. 허지만 인제는 아들 낳으세요. 네 활개를 치고 옥동자를 낳아드리세요.”
축복하듯이 이런 소리를 단숨에 하는 주인댁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도 하였다. 임부는 참 그렇다는 듯이 그 축수가 고맙다는 듯이 방그레 웃으며 남편을 쳐다보니까 홍규도 웃어 보이다가,
“글쎄요. 싹수가 아직도 네 활개 치구 아들 날 시절이 돌아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고 낯빛이 다시 흐려진다.
“그거 무슨 소린가. 그래두 일장기 밑에서 안 낳으니 좋지 않은가! 두구 보게, 인제 자네 집 중시조 나올 테니!”
하고 주인은 껄껄 웃는다.
“딸이거든 해방자라 짓고 아들이거든 건국(建國)이라고 이름을 집쇼그려.”
주인댁의 발론이다.
“해방자라는 ‘자’ 자는 왜놈의 잔재야. 해방호라 하지. 해방호 건국호 하하하…….”
웃음으로 끝을 막고 주인부부가 일어서려니까 부엌문 밖에서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로,
“계서요?”
하고 찾는다.
“또 왔습니다. 늦게 미안합니다.”
하야시가 앞을 서고, 조카딸이, 깨끗한 몸빼 치장으로 보자기에 싼 것을 들고 들어온다. 가지고 온 옷은 없다더니 빌려 입었는지 아침에 볼 때와는 딴사람이 되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조카딸은 가슴속에서 봉투를 꺼내서 두 손으로 받들어드리며,
“편지까지 전해주십사기는 너무 죄송합니다마는, 주인이 많은 사람이라, 안심하고 지시하시는 대로 하라고 쓴 것입니다.”
하고 생긋 웃는다.
전에 원광으로 볼 때는 화장 관계도 있었겠지마는, 여염집 여자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미용사나 음식점의 직업 부인 같은 코케티브한 인상이 있었는데 이렇게 청초하게 차린 것을 보니, 사정과 경우가 그래서 그렇기도 하겠지마는 퍽 안존하고 야무져 보였다. 콧대가 바로 서고 눈동자가 맑은 것도 마음이 컴컴치 않은 것을 알겠다.
언제나 일어설 수 있게 세간은 다 팔겠지마는 여기서 시세 나갈 것은 생각하여서 댁의 짐 가져오시는 길에 함께 건너다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과 인사를 남겨놓고, 두 사람은 가버렸다. 일본 사람의 집에는 아직도 전에 받은 배급 과자가 있던지 보자에 싼 비스킷 상자를 내놓는 것을 홍규는 역정을 내며 퇴하였으나 일본 예절로 처음 찾아오는 인사지, 다른 뜻은 없다고 애걸을 하며 놓고 갔다. 그러지 않아도 홍규는 자기 볼일을 보러 가는 길에 데려다주마고 까놓고 말을 하고 조금도 생색을 내자는 것도 아니요 생색 낼 필요도 없는 일인데 그러한 것을 받는 것이 께름칙하였으나 유난스럽게 또다시 쫓아 보내고 부산을 떠는 것도 싫어서 내버려두었다.
3
8월 15일 후에 이 거리의 일본 집 쳐놓고 앞문에 첩을 박지 않은 집이 없지마는 마쓰노 집의 뒷문을 가까스로 찾아 들어가니, 마주 내달아 나온 마쓰노는 하도 의외의 사람인 데에 겁을 집어먹은 듯이 벙벙히 섰다. 털북숭이가 된 검은 진 앉은 얼굴에는 충혈된 두 눈만 공포와 경계에 살기가 어려서 빈틈없이 반짝인다. 그 눈은 네가 적이냐 내 편이냐고 쉴 새 없이 묻는 것 같았다.
홍규는 냉정히 한참 간색(看色)을 하고 나서 저편의 긴장을 늦구어주려고 짐 짓 미소를 띠어 보였다.
“나 신의주서 왔소이다…….”
홍규는 물론 조선말로 붙였다. 마쓰노는 잠깐 풀렸던 표정에 다시 무장을 하면서 무슨 말을 꺼내려 하였으나 목이 말라서 그런지, 조선말이 서툴러서 선뜻 나오지를 않는지, 입만 쫑긋쫑긋하고는 머리를 작게 흔든다. 피로와 긴장이 뒤섞여서 머릿속이 혼탁해지는 눈치다.
“부인이 신의주서, 바로 내 옆집에 계신 관계로…….”
“네, 네, 그러세요. 실례했습니다. 올러오셔요.”
채 다 듣지도 않고 소리를 친다. 거센 경상도 악센트나 분명한 조선말이다.
방에 들어와 마주 앉으니 잔뜩 긴장하였던 끝이라, 맥이 풀리고 피로가 일시에 오는 모양이었다.
“부인 편지가 예 있소이다.” :
“네?…….”
허겁을 하고 받아 든 그의 손은 떨렸다. 개개풀려서 금시로 영채를 잃은 몽릉한 눈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이런 고마우실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어라고 인사 말씀을 사뢰어야 좋을지…… 저희들 살리려고 하느님이 지시하신 것입니다.”
편지를 보고 난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랫동안 말을 아니 써서 그런지 말이 길어지면 역시 서투르다.
“그래, 혼자슈?”
“네. 아이 보는 계집애가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 가버렸죠. 그런데 어떻게 건너가게 될까요?”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듯이 반갑기도 하고 국경을 건너간다는 것이 겁도 나서 무엇에 쫓겨가는 사람처럼 눈이 휘등그레서 숙설숙설 묻는다.
“민회에서 피난민증만 주면, 이따라두 건너갑시다그려 .”
“민회에서 줄까요? 그러지 않아도 민회에를 갔다가 시 공서에 다니던 친굴 안 만나란 법도 없구 만나면 전에는 그렇게 지냈으니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겠에요…….”
점점 더 병적으르 강박관념에 부대끼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이 뒤틀려진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 해 무얼 하우. 다만 한 가지 분명히 들어야 할 것은 조선으로 가겠느냐 일본으로 갈 생각이냐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는 말이오. 한때 방편으로 이랬다 저랬다 할 세상도 아니요, 그래서는 나도 이러고 다닌 보람이 없을 거니까……보람이 없다기보다도 나 역시 공연한 의심을 사고 믓매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홍규는 좀 더 단단히 이르고 싶으나 원체 기가 질리고 저려하니 더 뼈지게 말이 아니 나왔다.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이렇다 저렇다가 있겠습니까. 이걸 보십쇼.”
마쓰노는 테이블로 가서 문패와 손으로 그린 종이 태극기를 들고 나온다.
문패에는 조준식이라고 서투른 모필 글씨로 씌었다.
“이것을 내걸려고 써놓고, 기도 만들었습니다마는 동리 사람이 보면, 공연히 자극만 주어서 미움이나 사게 되어 무슨 욕을 볼지도 몰라서 이때껏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제는 조준식이지 마쓰노는 아닙니다. 저두 똥만 든 버러지는 아니겠거든 생각이야 없겠습니까. 팔자가 기구해서 그랬든지 부모님의 잘못이든지……부모님의 탓이야 하겠습니까마는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된 바에야 불시에 임의로 어찌하는 수도 없어서 무슨 기회든지 오기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버지 성을 찾겠다는 일념이야 사내 자식으로 태어나가지고 어째 없었겠습니까!”
그는 피로해 그런지, 서러워서 그런지 목소리가 차츰차츰 졸아 들어갔다.
“알았소, 알았소. 그 맘을 잃지 마슈. 그러면 길게 이야기할 새 없으니 조선인회에 다녀올 동안 짐을 추려서 팔 것은 팔구…….”
“그동안 대강 정리는 해놨습니다마는, 요새는 어디 만인이 사가길 합니까. 일본 사람 물건은 못 사게 하는지 안 사 갑니다.”
“그러면 가지고 건너가서 처분할 것은 처분해도 좋지만 그래두 이걸 다 끌고야 갈 수 없으니, 자아 우선 저 기를 내붙이구 문패두 내달구려. 조선 사람의 집 물건이면야 말없지 않수.”
“참, 그럴까 봅니다. 몇 시간 후면 떠날 텐데 일본 놈들이 미워하면 어떻고 싫어하면 상관있나요.”
“글쎄 그런 생각부터 버리란 말요. 일본 놈 위해 삽디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일본 놈이 어쩌거나 아랑곳이 뭐란 말요! 그래두 아직 고생을 덜 한 게로구려.”
홍규는 정신을 차리라고 몰아세웠다.
“잘, 잘못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본시 제 맘이 약해서…… 그저 동리 간 소리 없이 살던 면에 못 이겨서…….”
조준식으로 돌아간 마쓰노는 절을 몇 번이나 하며 사과를 하였다.
홍규가 조선인회에 들러서 피난민증을 만들어가지고 다시 와보니, 아닌 게 아니라 얼마 만에 열렸는지 앞문이 열리고 종이에 그린 태극기가 유리창에 붙었다. 문패도 내어걸렸다.
‘넝마 하나를 팔려 해도 태극기가 보호를 해주고 신용을 세워주게 되었고나!’
홍규는 감개무량하였다.
조준식이는 새 기운이 난 듯이 짐을 묶고 점심을 사들이고 달구지를 불러오고 펄펄 뛰며 부리나케 드나들었다. 홍규라는 뒷배가 있어 든든하고 국경을 마음 놓고 건너게 되고 생사를 모르던 처자를 만나게 되어서도 그렇겠지마는 장기(長崎)로 갈까 동래로 갈까, 여전히 마쓰노로 행세를 할 것인가 조가의 성을 찾게 되는가…… 하고 혼자 방황하며 지향을 못하다가 인제는 한길이, 환이 보이는 한길이 툭 터진 것 같고, 마음이 한 곬으로 딱 잡히고 나니 살 희망의 빛과 힘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을 든든히 깨닫는 것이었다.
4
아래윗집 이 뒤꼍에서 화덕에 밥을 짓다가 달구지가 온다는 안집댁의 선통을 듣고 두 여자는 뒷문으로 나가보았다.
“아, 어쩌면!”
옆집 조카딸은, 저만치서 홍규 뒤에 따라오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렇게도 애절하던 일이 거짓말처럼 손쉽게 해결된 것 이 꿈인 듯하여 도리어 얼이 빠져서 잠깐은 멀거니 섰다가,
“이 은혜를 무얼루 갚아드리면 좋아요!”
하고 남편에게로 뛰어가기 전에 홍규댁 의 손을 붙들고 울어버린다.
“천만에! 어서 가보슈.”
옆집 조카딸은, 남편 앞으로 가더니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런지. 눈물 어린 눈으로 맥맥히 마주 쳐다만 보다가 피차에 하는 소리가.
“얼굴이 못 되었구려.”
하는 위로뿐이었다.
그날 저녁 후에 준식이 내외는 함께 나란히 와서 홍규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홍규도 위로와 격려의 인사말 외에 그 이상 더 잔소리는 아니하였다.
이튿날부터 준식이는 하루 한 번씩은 홍규를 찾아와서 조선 사정도 묻고 신문도 보고 하는 양이 새 세상의 새 지식에 주려하는 눈치였다.
“거리의 책사에를 들러보니까 요새 조선 글은 받침이 왼통 달라지고 어째 그리 어려워졌습니까. 어려서 배우던 반절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던 데요.”
이런 소리를 하여가며 책 고비에 끼인 조선 역사책을 빌려가고 하는 것을 보고 홍규는 속으로 기특하게도 생각하였다.
홍규는 우연한 인연으로 잘못하면 민족을 배반할 뻔한 청년 하나를 붙들어주었다는 것이 잘되었다는 생각밖에, 그 이상 더 이 청년을 어떻게 돌보아줄 힘도 없거니와 일일이 아랑곳을 할 묘리도 없어서 다시는 이러니저러니, 이래라저래라 총찰 비슷한 말은 일체 입 밖에 내지를 않았으나, 저 하는 양이 정말 제 밑천을 찾겠다고 애를 쓰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다지 힘드는 일은 아니었지마는 어쨌든지 자기의 주선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겨주어서 갱생을 시켜놓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으니만치, 인제는 너 될 대로 되려무나 하고 냉담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박정하다는, 아끼는 마음도 한구석에 있었다.
“나두 내 코가 석 자지마는 그래 조군은 장차 어떻게 할 작정요?”
하루는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준식이 내외의 살림 의논을 자청하여 꺼냈다.
“글쎄요…… 난 선생님만 믿고 선생님 하라시는 대로 할까 하는데요·…·?”
연상약한 처지지만 준식이는 어느덧 홍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낸들 가도 오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앉았는데 별수 있소. 난 요새 거리에 나가면 일본 사람들이 예서 제서 장작들을 패는 것을 보고, 그놈을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불현듯이 드는데…….”
하고 홍규는 웃어 보이나, 아주 웃음의 말만도 아닌 것 같다.
“그걸 어떻게 하셔요. 보기에는 쉬울 것 같애두 안 해보던 일…… 일본놈은 막다른 골목이니까 할 수 없이 체면이고 뭐고 집어치고 나서겠지마는, 독립이니 건국이니 하는 이 판에 아무러면 장작을 패러 다닐까요.”
준식이는 고개를 내어두른다.
“보안대에나 들어가서 총대를 메고 나서야만 건국 사업에 보탬이 되는 것일까. 그 소위 한 자리 해보겠다는 그런 생각부터 집어지우자는 것이오. 더구나 조군은 아직 취직이 이를 것 같기두 하니 우리 맞붙들고 실지 노동을 해보는 것도 갱생 제일보라는 의미로 좋은 체험일 것 같은데?”
홍규는 달래듯이 웃어 보인다.
“글쎄요…….”
하고 준식이는 망설이다가,
“선생님이 하신다면야 그야 따라나서 보죠.”
하고 마지못해 결심의 빛을 보인다.
“그럼 자아, 해보자구. 톱 하나만 사구, 도끼는 안집에 큼직한 놈이 하나 있으니까 그걸 좀 빌기루 하구, 하나만 더 사면 될 거요…… 그래두 밑천이 돈 천 원 들걸.”
“하지만 나는 얼마쯤 자신이 있어도 선생님야 한 이틀? 고작 사흘은 배겨 내실까?”
“사흘 배겨내면 문제없지. 중학교 선생질 하던 문학사가 다 할라구.”
친구의 집에를 가보니까 제국대학 철학과를 나온 중경 중학교 교우가 품삯 받고 장작을 패더란 말에 준식이는 좀더 마음이 솔깃해지는 기색이다.
“고놈들이 악바리거든! 일본 놈들이기에 이제까지 입었던 세비로⁷나 모닝을 벗어던지고 도끼를 들고 나서거든. 동둑에를 나가보면 그리 늙지도 않은 동리의 선달(先達)님이 곰방 담뱃대를 물고 아랫배를 문지르며 빙빙 도니 이 비싼 쌀에 무엇으로 배를 두들기겠느냐 말야. 보지 않아도 젊은 놈은 물론이요, 늙은 아내 딸년까지 눈이 벌게서 야미 시장으로 헤맬 것은 뻔한 노릇이지…….”
홍규는 말을 내놓으면 자기도 모르게 격앙해졌다.
“그것은 고사하고 밥통을 들고 거리로 헤매는 피난민을 붙들어다가 장작을 패게 하면 하루에 반 마차만 해도 사오십 원, 한 마차면 백 원 돈 아니오. 전재민 구제소에 톱과 도끼를 몇 벌 장만 해놓고 장작 팰 사람은 여기에 신입을 하게 해서 주선을 한다면 그 아니 좋겠소마는, 시키지를 않는지 하려 들지를 않는지 어지중간에 일본 놈은 밉다 밉다 하면서 그런 직장, 그런 일거리까지라도 멀거니 앉아서 뺏기는구려.”
“딴은 그렇군요.”
“그뿐이오? 사실 말이지 우리만 해도 한 푼 나올˙데는 없고 세간 나부랭이나 팔아가지고 온 잔돈 냥을 곶감 꼬치 빼먹듯 먹고민 앉었으니 날이나 추워지면 큰일 아니오.”
“그러지 않아도 저의 내외두 마주 앉으면 그 걱정예요. 그럼 어서 나가보시죠. 톱 하나에 얼마나 할지.”
마주잡이 큰 톱이지마는 쓰던 것인데 7백 원 달라 하고 도끼 한 자루에 백 원이 넘었다.
톱을 사들이고 도끼를 벼려 오고 하는 것을 보고 아낙네들은 눈이 커대졌다.
“병이나 나시면 객지에서 어쩌려구. 아무러면 입에 거미줄 칠까요.”
아내는 한사코 말렸으나, 홍규는 코웃음을 칠 뿐이다. 이 무명의 이상가, 거리의 강개가(慷槪家)는 실익(實益)은 어쨌든지 간에 단 하루라도 실행을 해보자는 데에 열중을 하였고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 하는 모양이었다.
이튿날 두 청년이 연장들을 메고 벤또를 차고 나서니까 아내들은,
“짜장 피난민이 되셨구려.”
하고 금시로 영락해진 꼴을 본 것처럼 덜 좋아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생활의 불안이 덜린 것 같아서 믿음성스럽고 든든한 마음도 들었다.
첫날의 벌이는 종일 걸려서 75원, 홍규는 35원 차지하고 40원은 준식이 몫으로 하였다. 첫날 경험으로 보면 조심조심하여 한 까닭도 있겠지마는 그리 고달플 것도 없었다.
준식이댁도 홍규 집에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며 무어나 일을 시켜달라고 조르며, 눈에 띄는 대로 거들려고 하는 모양이다.
“저렇게 배가 내려 붙었는데 빨래는 무리세요. 이리 주시구 좀 쉬세요.”
홍규댁이 해산 전에, 밀린 빨래를 대강 치우려고 한 통 담가놓은 것을 가로맡으려 하였으나, 홍규댁은 아주 모르던 터도 아니요, 단 세 식구가 아이보기까지 두고 살던 사람을 이것저것 시키기가 거북하였다.
“좀 어떤 듯하거돈 곧 알려주세요. 할 줄은 몰라도 부엌 일은 해 드릴게요.”
해산구원도 맡으마는 말이다. 안집 아기씨는 이 말을 듣더니, 잘못하면 자기가 맡을 판인데 잘되었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암, 으레 그렇지. 무얼 그렇게 사혐8을 하서요. 지금 웬만한 집에서는 모두들 일녀를 식모로 데려다 쓰는데 기위 저의 목숨 살려주었겠다…….”
하여 사폐 볼 것 없이 부릴 만큼 부리라고 충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전 생각은 집어치우더라도 이제 와서는 남편이 그야말로 어엿한 같은 조선 사람인데, 남편의 체면을 생각하기로 함부로 부리기는 거북하였다. 또 저편이 붙임성 있이 굴고 일본 사람이라는 관념은 잊은 듯이 인제는 남편 자식 따라 조선의 흙이 되려는 각오로 나선 양을 보면, 얼마쯤 아껴주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막상 해산을 하게 되니 얼마 동안 손을 빌지 않을 수가 없고 큰 도움도 되었다. 원체 밤 들어서부터 산기가 동한지라 10시부터는 통행 엄금이요, 세상이 수선수선한 이때에 산파를 부르러 가기도 어렵고 산파가 나서기도 무서워할 것 같아 밝기까지 기다리자는 의논인데, 주인댁은 물론이요, 하야시의 댁내까지 와서 아무러면 여자 셋이 그걸 못하겠느냐고 밤을 돌려가며 새워서 동틀 머리에는 순산을 시켜놓았다. 돈으로 계교할 것은 아니나 주사 한 대에 몇 백 원 몇 천 원 하는 판에 피난민이 돈 천 원이나 굳힌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5
“어디 태극 깃발 아래에서 난 첫애기 좀 보자!”
주인댁은 첫 국밥을 지어 들고 들어와서 새판으로 아기를 들여다보며 이런 소리를 한다.
옆방 다다미 위에 손깍지를 베고 번듯이 드러누웠던 홍규의 입가에는 미소가 저절로 피어 올라왔다.
‘태극 깃발 아래서 난 첫애기’! 그 말이 듣기에 무던히 좋았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다는 실감이 스며나는 것같이 그 말을 속으로 씹어보는 것이었다.
오늘은 간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고 집안일을 보살펴주어야 하겠기에 나무 패는 벌이도 하루 쉬기로 하였다.
“이 머리통 좀 봐! 얼굴은 네 살 먹은 우리 집 놈보다두 클라…… 저런 조고만 어머니가 배급 쌀에 양을 곯리면서 어쩌면 이런 큰 애기를 낳았단 말요. ……어쨌든 큰 애 쓰셨소. 김씨 댁에 큰 공 이루셨소.”
산모는 먹던 밥술을 멈추고 웃음으로 인사 대꾸를 하며 아이를 돌려다보았다. 애어머니가 되었다. 남부럽지 않은 탐스런 아들을 낳아놓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희한한 일같이 생각이 들면서 느긋한 행복감이 온몸을 푸근히 싸주는 듯싶다.
이마 선이 널따란 부글부글한 커다란 얼굴을 하얀 새 이불 속에 포근히 파묻고 누운 것을 보고 볼수록 방 안이 다 휜한 것 같다.
“아무튼지 때맞추어 잘 났다. 머리통만 해두 대통령 감이다. ……벌써부터 무얼 먹겠다구 입을 오물오물하나? 건국아아 어어디! 쩼쩼. 건국아아 너어 꾸.”
마치 백날이나 지낸 아이 어르듯 한다. 낳은 지 한 시간밖에 아니 된 아이를 가지고 벌써 이름이나 지은 듯이 천연덕스럽게 ‘건국아! 건국아!’ 하고 부르는 것이 우스워서 내외가 이 방 저 방에서 웃으려니까,
“선생님 안 주무세요? 하두 좋으세서 주무실 수도 없겠죠마는, 인제두 아들 낳지 말라구 주정하시겠서요?”
하고 콧살을 째긋한다.
“주정은커녕 인제는 마누라를 업고 다닐 지경입니다마는 그런 오금은 두었다가 박으십쇼.”
“왜요?”
“좀 더 두구 봐야죠.”
“다아 팔아두 내 땅이라구 아무러면 이보다 더 못 될 리야 있겠습니까요.”
“그럼 이번에는 건국이를 낳았으니, 요담에는 홍국(興國) 이나 또 하나 날까.”
“대체 바쁘시긴! 하하…….”
6
산모는 한 이레에 벌써 몸을 추스르고 잔시중은 들리지 않았지마는, 별안간 옆집이 떠나게 되어서 거의 와서 사다시피 하고 해산구원을 하여주던 준식이댁이 멀리 떨어져가는 것은 당장 아쉬웠다.
홍규는 아침에 나올 제 오늘이 한 이레라는 말을 들었기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준식 이 와는 헤어져서 장거리에 들러, 고기를 한 근 사 들고 오려니까, 금방 헤어졌던 준식이가 어느 틈에 이삿짐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홍규는 깜짝 놀랐다.
“웬일요?”
“글쎄 지금 들어와보니, 오늘로 들 사람이 있으니 ×정 창고로 들어가고 집을 내라는 통지가 있었다나요. 그래 내 짐을 마침 이렇게 내 실어놓았기에 하여간 우선 끌어다 놓으려는데요…… 야단났습니다.”
준식이는 짐차의 채를 든 채 이렇게 설명을 하고 혀를 쳇 하고 찬다.
“그거 불시에 큰 곤란이로군. 요새 일본 사람들은 한데로 모으니까 별수는 없지만 그래 조군두 그리 따라갈 테란 말요?”
“그럼 어쩝니까. 졸지에 무슨 도리가 있어야죠.”
“내게 산고만 없어도 어떻게 함께 지내겠지만…….”
“천만에요. 그렇지 않아두 장 나부렁 이는 댁으로 옮겨놓았다는데 이 짐을 다 끌고 세 식구가 어느 틈을 비집구 댁으루 들어갑니까. 그런대로 잠깐 끼어 지내다가 선생님 떠나실 제 저희도 따라나설 작정입니다.”
“하여간 가서 물계를 보고 오구려.”
집에 들어와 보니 저녁은 준식이댁이 안쳐놓고 갔다고 하나 아내가 부엌에 내려와 있고 이 방 저 방에는 옆집 세간이 늘비하게 널려있다.
“별안간 난리를 겪었에요. 세간은 꾸역꾸역 들어오구 준식이댁두 몸은 고달픈데 거산을 하게 되니까 그렇겠지만, 뾰루퉁해서 말두 시원히 안 하구…… 갈 제는 시집 잘못 와서 이 고생 한다구 또 쪽쪽 울다가 갔답니다.”
"사정야 그렇지만 시집 탓이야 할 거 있나? 일본 사람으로 태어난 탓, 전쟁에 진 탓, 조선 사람을 못살게 군 탓, 이 탓 저 탓을 생각하면 조선 사람에게 시집온 덕 보고 있는 줄은 모르구!”
홍규는 준식이댁을 단순히 일본 여자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민족적으로 피침한 소리가 털끝만치라도 귓가를 스치면 가만있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것들을 자꾸 옆집에서 주구 갔는데, 그 마누라한테는 아이 받아준 손씻이두 이때껏 못했기에, 갈 적에 이것저것 얼러서 얼마간 주려 했지만 얼마를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있어요?”
“얼마간 주어야지. 지금 일본 사람 물건은 파두 사두 못하게 하니까 돈이 좀 나올까 하고 그러는 게지.”
“아네요. 몸뚱어리만 나가라니까 큰 세간은 움직이는 수 없지마는 잗단 거야 저이두 못 가져갈 바에야 이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주고 간다는 거예요.”
“그러나저러나 이걸 짊어지구 38선을 넘을 것도 아니요…….”
“갈 제 팔아도 그 값이야 빠지지. 물건들이 얌전하고 길이 들어 맘에 맞어요. 짐 뺏기구 세간 버리구 쫓겨나니 여자 마음에 어떻겠에요. 그 마누라두 자꾸 흑흑 느껴 울겠지.”
“그 역 하는 수 없지. 우리 아버님은 일본놈에게 집을 뺏기시고 할아버지 상청을 모시고 길로 나앉으실 지경이었다우.”
“헤에, 그런 난리를 겪으셨에요?”
“난리면 좋게. 고리대금업자에게 피를 빨리는, 말하자면 그 역시 총칼 없는 난리였지.”
아내가 무슨 뜻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여 멍하니 얼이 빠져 앉았는 것을 보고 말을 얼른 돌렸다.
“그건 고사하고 저 사람을 곳간 속으로 보내는 것은 안되었어. 전과 달라서 인제는 어엿한 조선 사람인데 또다시 일본 사람 행세를 하고 그 틈에 들어가게 하는 것도 안되었구…….”
“그러지 않아도 여편네 생각에는 다시 조선 사람 되었다구 잘된 것이 무어냐는 말눈치예요. 장작이나 패구 창고 속에 들어갈 바에야 일본 가서 어엿하게 제 집 속에서 살지 무엇 하자고 여기 있겠느냐는 폭백⁹ 예요.”
“흐…….”
“게다가 본이름으로 고치고 태도가 돌변하니까, 내외간두 설면 해지구 아저씨 집 식구 역시 덜 좋아하는 눈치인지…….”
“그러기두 쉽지. 하지만 그 역시 허는 수 없지 않은가.”
“저러다가 헤어지자는 문제가 일어나지나 않을지.”
“그런대두 허는 수 없지.”
“그건 고사하구, 공은 모르구 까닭 없이 칭원이나 하지 않을지 몰라요.”
“청원? 허허허. 이 세상에 유인자제해서 제 애비나 제 조상 찾고 제 나라 찾게 하는 일도 있던감.”
“아랑곳 말고 어서 저희는 저희대루 일본이구 어디구 가서, 맘대루 살래면 그만 아녜요.”
해산 끝에 신경이 예민해진 아내는 뒤숭숭한 주위가 모두 성이 가신 눈치다.
“용서하셔요.”
아내가 막 부엌으로 나서려니까 하야시가 어둠컴컴한 부엌 속으로 들어선다.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습니다…….”
“천만에요. 이번엔 부인께서 너무 애를 써주셔서…….”
아내도 인사를 하였다.
하야시는 떠나는 인사를 온 것이었다. 남편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애어미는 방으로 들어와서 돈을 봉투에 넣어 들고 나왔다가, 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봉투를 내밀었다.
“아까 부인께 드릴 것인데, 실례죠만 좀 갖다드려주세요.”
“아네요. 천만에…….”
겸연쩍어서 주저주저하면서도 하야시는 손을 내밀고 말았다. 받고 보니 열적기도 하고 자기 신세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지 눈물이 쭈루룩 흐르는 것이 방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불 빛에 번질번질 비치었다. 그는 고개를 외로 꼬고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허리만 굽실굽실하며 어서 빠져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홍규댁은 문밖까지 배웅을 아니 나갈 수가 없어서 따라나서니 하야시는 꾸부리고 돌아서서 목이 칵칵 막히며 어깨를 들먹거리고 깍깍 소리를 죽여 운다. 홍규댁도 여자 마음에 가엾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무어라고 말을 붙이는 수도 없고. 그대로 들어오자니 인사를 하다 말고 들어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창피하여하는 것을 덜미에서 보고 섰을 수도 없는 망단한 처지였다.
“아니, 이거 별꼴을 다 보여드렸습니다. 실례했습니다.”
하야시는 간신히 울음을 참고 고개를 들어 살던 집을 다시 한 번 건너다보고는 또 한 번 굽실하다가 눈 어린 홍규댁이 눈물이 글썽하여 동정하는 소리로,
“그리 언찌않아하시지 마세요. 사람이 살자면…….”
하고 위로하는 말을 듣자 또다시 눈물이 터지는 것을 이를 악물고 도망하듯 달아나버 렸다.
7
아까 사온 고기를 재고 술을 사다놓고 하며 기다려도 준식이는 아니 오고 말았다.
“고단한데 먼 길에 올 리 없에요. 어서 잡숫죠.”
그런 속으로, 가게 내버려두어서 심술이 났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아내의 말을 들으니 그도 그럴듯하였다.
준식이는 이튿날 아침에 일 가는 길에 들러주어서 함께 나섰다.
“어떻습디까?”
“어떻고 말고 한구석에 끼어서 하룻밤 드새고 빠져나왔으니까 모르죠. 관부 연락선 삼등을 포개놓은 셈쯤 되더군요.”
준식이는 말을 끊다가 한마디 덧붙인다.
“새삼스럽게 할 말도 아니지마는 전쟁이란 참말 무서운 거예요. 질 쌈은 애당초에 허지를 말든지.”
“질 줄 알고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져주는 쌈꾼도 있어야 숨을 돌리는 사람두 있는 거요…….”
말인즉슨 옳고 탄할 용기도 없으나 준식이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다.
마주 서서 쓱싹쓱싹 일을 하면서도 하루 온종일 준식이는 말이 없었다.
준식이의 침울은 나날이 무거워갔다. 얼굴에는 오뇌의 그림자가 덮이고 눈에는 절망의 빚이 어리었다.
그렇다고 무엇에나 대들고 분풀이라도 시원히 해보겠다는 결기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요, 만사가 무심한 모양이다. 안동에서 떠나오던 날 같은 그런 희망과 활기에 찬 기백도, 그 후 얼마 동안 무어나 알려 들고 해보려고 덤비던 열심도 스러져버렸다.
‘짜장 이혼 문제가 일어난 게로군. 내소박인가?’
홍규는 못마땅한 김에 혼자 코웃음을 치면서도 약간의 동정은 없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다시 조선 사람이 되어보아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무 패기와 곳간 구석이니까 실망을 하였다는 것인가?’
‘아무리 삼십여 년 동안 골수를 쏙 빼놓아 등신만 남았기로 인제야 나이 30도 못 된 놈이!’
하고 홍규는 정신이 반짝 나게, 소리를 한번 버럭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요새 몸이 좀 괴로운 모양이지?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요.”
하고 말을 걸었다.
“별로 어디가 아픈 데는 없어두 그저 심란하구, 살기가 괴로운 생각만 듭니 다그려 .”
준식이는 가벼운 한숨을 쉰다.
“가다가다 그런 때가 있지. 차차 가을빛이 짙어지니까 젊은이의 감상(感傷) 이라는 거로군.”
하고 홍규는 웃어버 렸다.
“헌데, 언제쯤 떠나보시겠에요?”
“글쎄에, 시급히 내가 가야 될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요, 물가는 여기보다도 비싼 모양인데 서두를 것도 없지마는 만일 간다면 추워지기 전에 나서야 않겠소.”
“난 역시 우선은 장기(長崎)로 가봐야 하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어머니도 가 뵙구 싶구…… 혹 벌이 구멍두 걸릴지 모르구 하니까…….”
하기 어려운 말처럼 떠듬떠듬 일본으로 갈 뜻을 비친다.
“아무려나!”
홍규는 잠자코 있다가 손에 들었던 담배 꽁지를 던지고 일어나서 도끼를 들었다. 일본으로 가서 직업을 구하겠다는 말에 이 사람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린 것을 알겠으나 난어머니를 보러 간다는 데야 나무랄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다.
저녁 때 집에 돌아오니 낮에 준식이댁이 다녀갔다 한다.
날마다라도 와서 일을 보아줄 것같이 말을 하더니, 일주일이 가까워야 어쩌면 그렇게 야멸치게 발을 똑 끊을 수야 있느냐고, 아내는 몇 번이나 군소리를 하더니 떠난 뒤에 처음으로 왔던 것이다.
“몸살이 나구 죽어버리구 싶기두 하고 해서, 미안한 생각은 있어두 메칠을 쓰구 누웠었더라나요.”
“그렇기두 하겠지. 안 해보던 일에 몸살도 날 거요.”
준식이의 풀없이 시원치 않은 기색과 아울러 생각하면 이 젊은 부부의 사정 이 딱하고 가엾기도 하였다.
“그저 내가 데리구 있든지 방 한 칸이라두 얻어서 곁에 두었더면 그렇지도 않을 듯싶지마는 방을 얻는 재주가 있어야 말이지.”
홍규는 저렇게 마음과 몸이 거산을 하게 하는 일부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듯이도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왔겠지요…….”
아내는 분홍 비단 조각과 흰 비단 자투리를 펼쳐 보인다. 안집¹⁰까지 놓아서 어린아이의 바지저고리 감을 끊어 온 모양이다.
“허어, 없는 돈에 그건 무얼…….”
“이건, 내가 가져온줄 아슈. 내게다 왜 인사를 하셔요.”
하고 젊은 아내는 새새 웃다가,
“그 돈 주니까 생전 받아야죠. 싸우려 들며 기예 내놓고 갔에요.”
“음…… 그대루 둬. 서울 가면 그걸루 어린 년 양복이라두 한 벌 사주지……그런데 아무 말 없어? 저희끼리 싸웠거나 일본으로 가겠다거나…….”
“이건 뭘 딸 시집보내놓고 걱정하시는 것 같군요. 의좋게 구순히 지낸대요. 안심 하셔요.”
아내는 또 한 번 새새 웃는다.
“암만해두 남편을 내대는 모양이지?”
“그건 몰라두 아주 한시가 새롭다는군요. 제일 옆 사람들과 뜻이 안 맞아서 송구스러워서 마음을 놓고 있을 수가 없대요……."
“흠…… 서루 고생을 하니 동병상련으로 더 구순히 지낼 듯한데…….”
“저희끼리는 그럴지 모르지만 주선 사람이라고 내대는 눈치래요.”
“허허…… 점점 더 조선 남편 둔 덕을 못 본다구 앙짜겠구먼. 그런데 당자가 조선 사람 행세를 터놓고 했든지 한 것이로군.”
“아녜요. 공교히두 전에 신의주에서 살면서 안동 시 공서의 수위를 다니다가 벌써 그만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딴 채에 있지마는 공연히 찝적거리고 다니구 하더니 어젯밤에는 술이 취해 와서 조선 양반 사람은 이런 데 올 데가 아니라구 비꼬구 떠들어대더라나요…….”
“흠…….”
홍규는 아까 낮에 장기로 가서 구직을 한다느니 어머니를 가 보고 싶다느니 하던 연유를 인제야 알겠다고 생각하였다.
“……나중에는 애어머니까지 붙들고 어떻게 만난 내외냐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냐 아버지가 조선 사람이냐 조선 양반 사람이 돈이 많구 허울이 좋구 어떻구……갖은 옴두꺼비 소리로 찧구까불구 진을 빼는 것을 옆의 년들은 낄낄거리며 보고만 있더래요. 그러니 오죽 분하였겠에요. 분하구 섦구…….”
“남편이 조선 사람이기루 서러울 거야 있겠나마는 그래 다른 놈들은 어쩌더 래?”
홍규는 조선 사람에 대한 일반의 감정이 어떤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그제야, 그러면 여기 있을 게 뭐냐고 어서 ‘내지’로 함께 가자고 동정도 하고 권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더래요.”
준식이 역시 그 동정과 권고에 끌려가는 모양이로구나, 하고 홍규는 입이 삐쭉하여졌다.
“하여간 그거 안되었군.”
홍규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정 하면 나두 일어나구 했으니, 저 사조방을 내주구 차차 방을 구해보는 게 어때요?”
“글쎄, 허지만 저희가 되레 이리 오는 것을 탐탁히 생각지 않을지두 모르겠거든.”
“부려 먹을까 봐서요?”
“그런 점두 있지마는 도대체 요새는 저희 식구들이 우리를 경이원지(敬而遠之)를 하는 것 같다는 말야. 여기서 알은체하는 것을 성이 가셔하고 꽁무니를 슬슬 뺀단 말야. 누가! 일본으로 못 가게 붙드는 것도 아니건마는……˙.”
“그거야 뭐 여기 있다가 간들 제 맘대루 못 갈 건가…….”
“또 그럴 바에야 저희끼리 함께 있어서 패전국민의 쓴맛을 흠씬 보고 따라가라지. 이 좁은 집에 모셔다가 둘 묘리야 있나.”
“당신두 퍽 현금주의슈.”
홍규는 준식이란 위인이 무슨 그리 유용한 인물이라고 한사코 붙들려는 것도 아니지마는, 너무나 쓸개가 빠지고 기백이 없는 것이 답답하고 안동에서 건너올 제 다짐을 받은 말은 가뭇같이 잊어버린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언제든지 한번은 혼을 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튿날도 준식이는 여전히 일자리에 뿌루퉁해서 침울한 얼굴로 나왔다. 그러나 어제 집에서 듣던 그 댓말은 여전히 잇새도 어우르지 않았다. 이러저러하니 방이라도 한 칸 얻을 데 없느냐는 의논 한마디 없다. 역시 경원주의로 제 일은 저대로 처리하겠다는가 보다는 짐작이 맞는다고 홍규는 생각하였다.
오늘은 어제 이 집에서 패다가 둔 것이 반 마차쯤 남은 것을 훅닥 패어주고 해가 높다라서 헤어졌다.
“집에 가서 노다가 가지 않으려우?”
하고 끌어보았다.
일전에 고기를 사다가 혼자만 먹어버리기도 하였고 또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제 의향도 들어보고 타일러도 보려는 것이다.
“네, 연장두 가져다두고 옷이나 좀 갈아입구 가죠.”
하고 준식이는 휘죽휘죽 가버렸다.
홍규는 반찬거리나 사가지고 갈까 하고 시장 거리로 들어서서 좌우에 쭉 널린 노점들을 기웃기웃 구경도 하고 값도 물어보고 하다가 어느 잡화점에 태극기가 주검주검 놓인 것을 보자 무슨 생각이 퍼뜩 났는지 그중에서 제일 크고 번채 있는 것을 하나 골라 샀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부엌에 내려가 술안주를 차리는 동안에 반지를 찾아내어 태극기를 곱게 접어 싸고 오래간만에 벼룻집의 먼지를 불어서 내어놓고 먹을 갈았다.
부엌에서 들어온 아내는 무슨 구경거리나 난 듯이 한참 내려다보고 섰으려니까, 기를 싼 종이 위에 빌 축(祝) 자 한 자만 커다랗게 쓴다.
“일본식이지만 이래두 좋겠지?”
홍규는 자기의 필적에 만족한 듯이 회심의 웃음을 띠며 아내를 쳐다본다.
“그건 어디 보내세요? 애기 주실거예요?”
속에 싼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갓난아이 몫으로 무엇을 사왔는가 싶어서 아내는 마주 웃어 보인다.
“글쎄에, 아이에게 주어두 좋구…….”
어정쩡한 소리를 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곧 올 줄 알았던 준식이는 6시나 넘어서 저녁밥 먹을 때에나 술 한 병을 사 들고 씨근씨근하며 들어온다. 약간 주기도 있어 보이거니와 몹시 흥분되었던 것이 아직 덜 식은 눈치다.
“술은 웬걸. 나도 조군 덕에 요새 술잔 값은 넉넉한데…….”
홍규는 오래간만에 화기롭게 농담을 붙였다.
“제 덕이 무슨 덕예요.”
“아 조군 아니더면 내가 무슨 벌이를 하였겠소.”
“천만에…….”
사실 힘드는 것은 준식이가 맡아 패어주고 일의 반 이상을 해주기 때문에 삯전을 한 푼이라도 더 넘기기는 하지마는 늘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요새는 어떻소? 그 속에 못된 자가 성이 가시게 군다더나 인제는 괜찮소?”
아직도 남은 흥분을 식혀주려고 웃는 낯으로 순탄히 말을 꺼냈다.
“제 처한테 들으신 게군요?…… 그놈들 되지도 않은 놈들…… 그렇지 않아두 그동안 하두 속이 복개는 것을 꿀꺽꿀꺽 참다못하여 오늘은 내가 뒈지든지 네가 뒈지든지 해보자고 배르는 판에 마침 잘 걸렸기에 뺨사다귀를 서너 번 갈기구 흙몽둥이를 만들어 들여보내구 왔습니다.”
준식이는 다시 흥분하여지면서도 묵은 체나 뚫린 듯이 어깨를 처뜨리며 길 게 한숨을 뽑아낸다.
“그거 되었나. 너 그래라 나는 나다, 하고 모른 척하고 지내면 그만이지 .”
“그놈들이 지금 와서 성명이나 있는 놈들입니까. 보안대나 로스키가 얼씬만 해도 쥐구멍을 찾는 놈들이 사람을 만만히 보구…… 내가 이런 처지니까 아무런 개수작을 한대두 일본 놈 쳐놓고 편을 들어줄 리 없고 조선 사람 역시 역성은 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은 있거든요. 그러니까 조선 사람에 대한 분풀이를 내게다가 하려 드는 것이 거든요…….”
준식이는 아까 돌아가다가 혹시 그놈이 눈에 띄거든 한번 해보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고뿌 소주를 한잔 켜고 들어가노라니까 원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뜰에서 어정거리던 그자가 준식이의 벌건 얼굴을 보자,
“한잔 걸쳤네그려. 왜놈이나 하는 장작을 패러 다니기에 조선 양반 사람이 욕보네그려 .”
하며 비꼬아놓고는 술 한턱이나 내면 가만 내버려두겠다는 더러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한잔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거의 위협하듯이 달라붙기에 한잔 먹어보라고 따귀를 갈기고 나니 우우들 몰려들었으나 결국은 하야시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우물쭈물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 판에 조선 사람을 건드리기가 어려우니까 요행 무사하였지, 그렇지 않으면 뭇매 맞을 뻔하였구려.”
홍규는 조심하라고 일렀다.
“관계없에요. 그 속에 남자라곤 장정도 몇 있기야 하지만 50 넘은 늙은것 아니면 어린애들뿐이니 맥 못 써요.”
그 낌새를 차리고 한번 해보겠다는 용기도 났던 모양이다.
“그럼 거기 다시 들어가 있기두 안 되지 않았나.”
“관계찮아요. 지금 떠나면 제 방귀에 놀라서 도망질쳤다게요?…… 하지만 한때라도 그 속에서 빠져나와 여기를 오니 사람 사는 데 같고 마음만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몸까지 거뜬해진 것 같습니다.”
준식이는 차차 마음이 가라앉고 불안과 경계에 쫓기고 시달리던 신경의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깨닫는 눈치였다.
“그러기에 피는 물보다 걸다지 않소.”
홍규는 평범한 말이나 이런 때 동족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았느냐고 무언중에 오금을 박는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 하시겠소? 부인야 건너가고 싶어 하시겠지마는…….”
말을 돌려보았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요새는 머릿속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돼가는 대로 살죠.”
홍규가 무슨 말을 꺼내려 하자 아내가 술상을 들고 들어오는 버람에 멈칫하였다.
아내가 갖다놓고 어제 선사받은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아 참, 거기 아까 싸놓은 거 이리 줘요.”
하고 홍규는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의아한 낯빛으로 책상 위의 태극기 싸놓은 것을 집어주고 갔다. 홍규는 그것을 받아 들고,
“이것은 별것은 아니나, 하나는 아이에게 보내주신 것의 답례로, 또 한 가지는 일로부터 생활을 갱신(更新)하여가지고 나가시는 기념으로 드리는 것이오.”
하고 내어놓았다.
준식이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주저주저하다가 꿇어 앉으며,
“무얼 그렇게까지…….”
하고 어름어름 인사를 하였다.
“별게 아니라, 아까 거리에서 우연히 태극기를 파는 것을 보았기에 사다 드리는 거요.”
홍규는 자기 뜻을 알겠느냐는 듯이 웃어 보인다.
“네, 태극기예요?”
준식이는 다른 귀물이 아닌 것을 알차 가벼운 생각으로 봉지에서 깃발을 쑥 빼어서 펼쳐보고 지나는 말로,
“꽤 크고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또다시 머리를 숙여 보이며 좀 열적은 기색이었다.
“일본 사람은 전장에 나갈 제 일장기를 몸에 감고 나가지 않았나요?…….”
홍규는 말을 정중히 꺼냈다.
“일인의 본을 뜨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러한 긴장한 정신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 출발의 첫걸음을 떼어놓아주셨으면 하고 비는 것입니다…….”
“네…….”
수그린 준식이의 머리가 약간 끄덕끄덕하였다.
“……무슨 연극 기분으로 이런 것을 드리고, 이런 잔소리를 들려드리자는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일본인이 조군을 업신여기고, 일본 사람이 편을 들어줄 리도 만무하고, 조선 사람 역시 역성을 들 리는 없겠다는 짐작으로 만만히 보고 그런 흑책질과 모욕을 보이더라고 하지 않았소? 그 원인이 어데 있는가는 아시겠지마는 이 깃발이 백만 천만의 내 편이 되어주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요, 무기인 줄 알기 때문에, 또 믿기 때문에, 조군의 역성을 들어달라고 이 깃발을 드리는 것이란 말씀요……˙.”
준식이의 숙인 머리는 또 한 번 끄덕끄덕하였다.
“내 말이 너무 꾸민 말 같을지 모르나 내 말대로 이 깃발 아래 세 식구가 모여 사십쇼. 북에 있으나 남으로 내려가나 현해탄을 건너서 나가사키로 가시거나, 이 깃발 밑이 제일 안온하고 평화로울 것을 깨달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준식이의 머리가 세번째 커다랗게 끄덕이었다.
홍규는 말을 맺고 술을 치며,
“자! 편히 앉구려. 한잔 드십시다.”
하고, 준식이에게 대한 축배의 의미로 술잔을 들었다.
준식이는 술잔을 들어 입에다가 대는 척하다가 상에 놓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고개를 푹 수그리며 눈물을 쭈르륵 흘린다. 홍규도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고맙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누가 그런 말씀을 들려주겠까! 안개가 잔뜩 낀 것 같던 제 맘이 인제는 활짝 걘 것도 같습니다…… 이 기를 받고 나니 인제는 제가 정말 다시 조선에 돌아온 것 같고 조선 사람이 분명히 된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려서 어렴풋이 뵙던 아버지가 불현듯이 다시 한 번 뵙고도 싶습니다!”
준식이의 눈에는 다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돋는다.
-끝-
2016년 5월 21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