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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끝기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 CATHARINA DE SIENA)의 생애와 사상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그녀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교회 박사 칭호를 받았다. 여성으로서 교회 박사가 된 이는 교회 역사 안에서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모든 생활 체험에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바쳐 하느님의 신비를 깊게 파고든 그녀에게는 너무나 적절한 일이다.
카타리나는 당시의 교황과 귀족들, 수도자, 상인들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썼다. 또, 교황과 피렌체 시민들 사이의 논쟁을 중재했을 때 암살 위기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던 33살의 그녀에게 신비가, 중재자, 신학자, 설교자, 간호사, 교회 박사 등의 모든 호칭이 거룩한 월계관으로 주어진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헤지오그라피라고 불리는 일종의 성인전으로서, 모범이 되거나 영감을 주는 인물에 대한 본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경하기 위한 전기다. 이들은 많이 윤색되긴 했지만, 정열적이고 풍부한 언어를 사용하여 다소 어색하긴 해도 그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타리나에 대하여 전해진 그리고 기록된 전승들은, 모두 함께 영향력 있는 14세기 여인의 모습을 2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어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1. 연혁
1347년 3월 25일 염색업자 베닌까사 야고보와 아내 라빠 사이에 23번째 쌍둥이 자매로 태어남.
1348년 1세 25번째 동생 난나 태어남. 시에나에 처음으로 흑사병 유행. 1353년 6세 첫 환시 경험. 1354년 7세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정결서원). 10살때까지 고행, 사색, 관상을 통한 영적생활. 1362년 15-16세 언니 보나벤투라 사망. 첫 고해신부이며 지도자인 폰테의 토마스 O. P.의 충고에 따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결혼 계획을 거부. 참회의 수녀회 입회. 서원. 몬테 풀치아노의 성녀 이녜스와의 기적. 탈혼. 1365년 18세 만텔라테들의 도미니꼬회 수도복을 받고 3년간 고독의 시기 시작. 그동안에 읽는 법을 배움. 1368년 3년 동안의 유혹 끝남. 예수와 약혼. * 8월 12일 아버지 야고보 사망. 옆구리 고통 받음. * 혁명으로 가족들 시에나에서 추방됨. 폰테의 토마스 수사. 가파리니 신부(신학과 성서 설명). 두번째 고백신부가 된 도미니치 신부를 알게 됨. 카푸아의 라이문도 (두번째 고해신부. 후에 도미니꼬 수도회 총장.).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장. 아우구스티노 수사들. 참회의 수녀회 수녀들과 교류 시작. * 정치가. 예술가. 일반 또는 상류층의 사람들과의 사제 관계 형성. 1370년? 23세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지키기 위해 미사, 기도, 희생을 함. 영성체 후에 탈혼. 예수의 물과 피를 마심. 1372년 25세 염문에 대한 환청. 1373년 사순절부터 예수 승천 때까지 55일간 절식. 1374년 27세 때 처음으로 피렌체로 여행. 카푸아의 라이문도 O.P.가 그녀의 고해신부와 지도자가 됨. 시에나에서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봉사. 페스트 퍼짐. 조카 8명 죽음. 1374-1376년 권력가. 상류층 인사들, 학자들에게 십자군 전쟁 추진서한 보냄. 1375년 피사 성당 미사 중 공중부양과 오상의 기적을 받음. 피사로 여행하여, 피사와 루까 시가 교황을 반대한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설득. 그해의 대부분을 피사에서 보내며,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설교에 새 힘을 얻음. 1375-1377년 고행 관상 생활 시작. 여러 곳에 나타나는 기적 1376년 3월 26일 아비뇽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와 피렌체 평화협정 실패. 중재자로 나섬. * 6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알현. 설득. * 9월 13일 교황, 로마 귀환 중 제노바에서 카타리나 접견. 1377년 1월 16일 교황 로마 환궁. 벨카로 성을 입수하여 수녀원 세움. * 9월 라이문도 신부 미네르바 수도원 원장이 됨. * 그녀의 편지 272통은 「대화」의 원본이 됨. * 12월? 도시간 평화정착 시도. 1378년 3월 27-28 교황 서거. * 6월 18일 구에프 일당에게 암살 위기. * 7월 8일 바르톨로메오(우르바노 6세) 교황 선출 * 9월 20일 로베르또(클레멘스 7세) 교황 선출.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지지. * 10월 ? 「대화」 완성. 1380년 2월 탈진. * 3월 26일 병자성사(바로톨똘로메오 도미니치 신부). * 4월 29일 선종. 1461년 6월 28일 시성(교황 비오 2세). 1866년 4월 13일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 (교황 비오 9세). 1940년 5월 15일 이탈리아 첫 수호자 공포 (교황 비오 12세). 1943년 9월 15일 간호사의 수호자. 1970년 4월 4일 교회학자. 2. 시대적 배경
카타리나가 살았던 당시, 1347년부터 1380년 사이에 교회사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황제를 겸하고 있던 교황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독립국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사회, 그녀가 몸담았던 도미니꼬 수도회 모두가 혼돈의 상태이자 신비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고, 터키인들에 대한 십자군과 피렌체와 교황의 알력, 그리고 서방대분열로 인한 그리스도교의 불일치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지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을 맡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양편에 모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교황의 시도에 대응하여 필립은 프랑스 주교 관구들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 분담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했고, 보니파시오는 필립을 파문했다. 1305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로 선출된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그 이후 70년간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이 따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카타리나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특히 심하게 이러한 외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해 있었던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불화와 유혈혁명을 통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를 얻었으며, 13세기 끝무렵에는 아홉 명의 대의원들 그룹이 선출하여 시에나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고보 베닌까사는 이러한 포폴라니(통치자가 되도록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에 속한 사람이었다. 3. 사상(신비주의)
짧으면서도 열성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삶을 볼 때, 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온은, 카타리나 같은 성인의 생애에서 신비를 배제하는 것은 인격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라이문도도, 그녀와 가까이서 알고 지내다보니 그녀가 영혼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곧바로 더 없이 자연스럽게 천상의 일들로 마음을 들어올리는 흐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그녀를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활동하면서 만지거나 접촉하는 것 일체는 바로 기도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관상은 활동생활 한 가운데 현존하고 있었고, 그녀가 기도하고 심지어는 탈혼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던 사실들이 많은 편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녀의 글들을 기도와 활동 사목의 상호작용이 더없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에 필요적절한 것이 되고 있다. 진리와 사랑 - 카타리나에게 하느님은 온유하신 최초의 진리요, 사람에 미치신 자의 그 자체이셨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지식과 사랑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기리고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더 없이 간절한 욕구로 들뜬 채로 일어선다. 영혼은 일정 시간 덕을 실천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선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 자기 인식의 독방에 기거하는 데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지식에 뒤이어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은 사랑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로 자신을 감싸는 것이다. 「대화」첫 단락 카타리나의 사랑은 언제나 또렷한 의식 속에서 진리의 빛 속을 걸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거침없이 ‘사회적인 신비가’로 이상화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느님 안에서 체험한 ‘진리’를 절대로 수정하려 들지 않던 가타리나의 철저한 타협 거부와, 눈으로 목격한 잘못들을 모조리 개선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인간적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었다. 가타리나는 진실로 신비적인 활동가였다. 가난과 질병,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불의의 고통은 그녀에게는 단순한 악도, 체계적인 악도 아니었다. 그것이 악이라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과정에서 메말라지면서 역으로 자신의 육체까지도 쇠약하게 만들어 버린 바로 그 정서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초월하여 훨씬 더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형태의 활약은 비록 기쁜 것은 못 되었지만 그녀의 신비적 체험이 요구했던 것이었고, 그녀의 글들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활약인 것이다. 4. 카타리나의 신학
그녀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라 부를만한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녀의 글은 체계도 없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답답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녀의 가르침은 토마스 계열에 속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노 계열에 속한다. 그녀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우베르티노 다 카살레다(그리온)이며, 도미니코회 수도자 자코포 다 보라지네와 카발카의 저서들에서 근본적인 영향을 받았다. 카타리나는 이 모두를 자기 안에 흡수하고 통합시켜서 자신의 전체적인 지식을 형성하였다. 신학적으로 보면 새롭거나 창의적인 것은 없다. 가톨릭 가르침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믿어지는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들까지도 틀림없는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카타리나의 독창적인 부분은 이같은 전승을 신선하고 생동감있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카타리나가 쓰고 구술한 글들은 모두가 시에나의 방언인 넬 수오 볼가레였다. 파산반티와 카발카가 본고장 말을 사용하여 종교적인 문제들을 기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항상 가능한 모든 부류의 인간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했으며 질서정연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주제를 아주 밀도있게 전개했으며, 은유가 산재하고, 늘 새로운 연결관게가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카타리나의 초기 편지들 일부에서 어느 정도 부차적인 성격을 지니는 까닭에 「대화」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비적 체험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다. 5. 「대화」에 대해서
「대화」는 그녀가 제자들에게 베푼 모든 가르침을 담은 최고의 저서이자 유산인 셈이다. 카타리나는 이를 그저 ‘나의 책’이라고 불렀으며, 라이문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울러 부탁드리거니와 당신과, 바르톨로메오 (데 도미니치) 형제, 토마스 (델라 폰테) 형제, 그리고 대작곡가 (조반니 탄투치)는 이 책과 그 밖에 눈에 띄는 내 모든 글들을 간수하십시오. 토마소 (피에트라) 선생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데다 이용하십시오. 이들은 나의 심신에 위안을 주었던 것들입니다.”
전승이 영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들은, 카타리나가 「대화」 전체를 닷새 동안 탈혼 중에 구술하였다는 비교적 공통된 믿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동시대인들 다수가 이 작품에 붙인 지극히 복합적인 참고사항들로 보면 여기에 소요된 시간은 훨씬 더 길어서 1년 가까이 되지 않았는가 싶다. 이 책은 그녀가 두 번째로 평화를 주선하는 사명을 띠고 피렌체로 출발한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던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에서 몇 달 보내는 그 정신없는 동안에도 카타리나는 틈틈이 원고를 붙잡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책을 보면 카타리나는 교회 분열이 극도로 심화되지 않고 그 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 내부의 부패와 개혁의 필요성은 많이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분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카파리니는 그녀가 1378년 11월에 로마로 불려가기 이전에 이 책을 끝마쳤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책에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서 구술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대화」의 문체는 ‘탈혼 상태에서의 구술’과는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늘이거나 줄이느라 굉장히 고심한 흔적까지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스테파노 마코니가 전한 카파리니의 기록 또한 그녀가 “본향 사투리로 손수 작성한 책 가운데서 여러 페이지를” 친히 쓰고 있는 광경을 직접 똑똑히 목격했었노라고 쓰고 있다. 아무튼 편지들과 「대화」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특정한 주제와 심상들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반드시 발견하기 마련이다. 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기도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참 하느님이신 당신께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저를 모든 악한 생각에서 보호하시며,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시고 불타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7. 참고자료
* 시에나의 가타리나, “대화”, 바오로딸출판사, 1997.
* 매리 앤 파툴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가르침”, 분도출판사, 1997. * 빈제, “시에나의 가타리나와 함께하는 기도”, 성바오로출판사, 1996. * 폴리, “매일의 성인”, 성바오로출판사, 1987. 8. 성녀 가타리나에 관한 링크
[도미니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
1347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완덕의 길을 추구하고자 하여 아직 소녀 시절에 도미니코회의 제3회에 입회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도시들 간에 평화와 화목의 씨를 뿌렸다.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끊임없이 방어했고 수도 생활의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 건전한 교리와 깊은 영성에 찬 글을 남겼다. 1380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오, 영원한 하느님이시여,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신성의 일치를 통하여 당신은 독생 성자의 피를 한없이 보배롭게 만드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내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당신은 영혼을 채워 주시지만 그것으로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 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 하고 또 목말라 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나는 내 지성의 빛으로 당신의 빛 안에서 당신의 심연과 당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맛보았고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 안에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바로 당신의 모상임을 알았습니다. 영원한 아버지시여, 이것은 당신의 힘과 당신 외아드님의 속성인 지혜를 나에게 주심으로 된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자께로부터 발출하시는 성령께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의지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삼위 일체시여, 당신은 창조자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당신께서 성자의 피로 말미암아 내 안에 이루신 새 창조를 보고 당신이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심취하여 계신지를 당신 빛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70. 여성편 (4) 시에나의 가타리나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했지만 여성 영성의 전통 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된다.
첫 여성 ‘교회 박사’로 선언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 흡수
교회 역사 안에서 ‘교회 박사’라는 칭호가 수여된 이는 33명으로 알려진다. 여성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 등 세 명이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여성으로서는 처음 교회 박사로 선언됐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그는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의 상태로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 13세기 막데부르크의 멕틸데, 14세기 스웨덴의 브리짓 등 여성 신학자들의 뒤를 이어 교회 영성사 조류에 영향을 미치고 또 여성 영성의 전통 맥을 이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단한 활동가이면서도 깊은 관상가였고 또 자신의 신비 체험을 통해 당시 정치권과 교회 장상들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가타리나. 그녀는 전통 신학과 영성적 가르침들을 자신 안에 흡수, 통합적 지식과 영성을 형성했으며 이를 신선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성녀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에게 주입된 지혜입니다. 말하자면 이 지혜는 알기 쉽고 깊이가 있으며 천상적 진리에 관해 도취시키는 열정이자 신구약 성서 안에 담겨진 신앙의 신비를 말합니다.
이러한 동화는 분명히 가장 특이한 자연적 선물들로 인해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또한 신비적인 은사 곧 성령으로부터 나온 지혜의 은사에 기인한 의심의 여지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 가타리나 성녀의 교회박사 선언 강론)
가타리나 성녀의 본명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erina Benincasa). 1347년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에서 염색업을 하는 베닌카사 가문의 25명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는 천성적으로 생기발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6살 때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 체험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예수님이 교화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빛의 바다에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은 수많은 성인 성녀들 무리에 둘러싸여 계셨고 그중에서 가타리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요한 사도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7살 때 봉헌 결심
7살 때 이미 자신의 온 일생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이후 안전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려는 집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16세가 되던 해에는 만텔라테회(Mantellate, 도미니코 제3회로 이들은 수도복을 입고 가정에서 살면서 도미니코회 지도하에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에 입회했으며 18살 때부터 3년 동안 독방에서 오로지 기도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글 읽기를 터득한 것도 이 시기에 이뤄졌는데 20세가 되면서 그리스도와 ‘신비적 약혼식’을 가졌던 가타리나는 ‘교회 쇄신에 기여하라’는 깨달음을 얻고 만텔라테회 회원들과 함께 토스카나 지역은 물론 이탈리아 전역, 나아가 고국을 벗어나서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병자간호와 특히 죄인들 개종에 힘썼던 가타리나는 흑사병 같은 전염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벗이 되어주었다. 이는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고 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 가타리나의 행동은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모략과 박해를 받기에 이르는데 이로써 도미니코회 총회 석상에 출두, 신앙을 검토당하기 까지 했다.
가타리나는 1376년 아비뇽의 그레고리오 11세를 찾아가 교황에게 대항하고 있는 피렌체인들과 화해하도록 간청,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계속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 개혁에 기여했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분열된 교황권과 교회 통일을 위해 매일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가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했다. 이외에도 하느님과의 대화와 기도, 교회 각계각층 사람들을 위한 기도 바치기와 편지 보내기 등으로 자신의 몫을 다했다.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기록한 저서 ‘대화’ 외에도 약 400통의 편지를 남긴 가타리나는 1380년 4월 29일 ‘주여,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
“어머니가 자신의 젖으로 아이를 먹이듯 기도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으로 우리를 먹여 기른다.”
가타리나는 기도에 있어 우리 자신의 방법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어 맡겨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분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기도를 ‘예수님의 발에 매달리는 단계’,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르는 단계’, ‘예수님과 입맞추는 단계’로 구분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섭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1416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던 가타리나는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23일, 이주연 기자]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시에나의 가타리나 (상)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시에나의 가타리나 (하)
짧으면서도 열정적인 활동으로 일관된 가타리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녀에게 관상이 끼여들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에 함께 있던 이들에 의하면 그녀에게 관상적신비적 체험이 없었다면 그 같은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결같이 단언한다.
그들은 그녀가 관상 중에 체험한 것은 곧 행동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었으며 또한 활동하면서 만나고 겪은 것 모두는 기도 속에 현존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가타리나는 사회적 신비가 또는 신비적 활동가라고 불린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3. 가타리나의 영성
대화 와 편지들 안에 나타나는 가타리나의 영적 가르침은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녀의 영적 가르침은 매우 교의적이며 스콜라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3.1 사랑의 세 단계 가타리나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장 과정으로 사랑의 세 단계를 서술한다.첫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이기적으로 사랑한다. 비굴한 사랑이다. 자신이 지은 죄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중에 살고 있다.
3.2 신비적 합일
가타리나가 서술하는 신비적 합일은 성화 은총을 통한 하느님과의 단순한 일치가 아닌 영혼 안의 하느님 현존의 체험과 인식이다. 그녀는 신비적 합일을 표현하기 위하여 요한 복음의 표상들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사]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도미니코 수도회 제3회원으로서 신비가이며 아비뇽의 교황청을 원래대로 로마로 옮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16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6)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1) 6세때 신비체험 후 일생을 주님께 봉헌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은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코린 1,25)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Sta. Catharina Sinenisis, 축일 4.29)처럼 이 말씀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분도 드물다. 카타리나 성녀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니다. 글조차 읽고 쓸 줄 몰랐다. 글을 배운 것은 선종 3년 전이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강론 등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다.
그런데도 교황 바오로 6세는 1970년 카타리나를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와 함께 교회 학자로 세웠다. 카타리나는 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당시 혼란스럽던 교회를 바로잡는데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그의 일생부터 알아보자.
카타리나는 흑사병이 이제 막 유럽에 번지기 시작하던 1347년 주님 탄생예고축일에, 염색업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베닌카사 가문의 자녀로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났다. 카타리나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6세 때는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옥좌(玉座)에 앉아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 체험을 했다. 이때 꼬마 카타리나는 동정의 서원을 하고, 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중에 카타리나가 성장하자 부모는 결혼을 시키려 했지만, 카타리나는 어린 시절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야기 하며 결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는 등 여성적 매력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카타리나는 수많은 영적 유혹을 당하게 된다. 영적 성장을 위해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 마음에 끊임없이 정결치 못한 생각이나 상상이 일어났다. 이에 카타리나는 이틀에 30분만 자는 고행에 나섰다. 멸망의 길로 빠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연히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어느 날 카타리나가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불렀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 그 생생한 대화가 카타리나의 저술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 카타리나 : “나의 주님! 악마들이 그 숱한 음란함을 통해 내 마음을 괴롭혔을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 주님 : “나는 네 안에 있었다.”
▲ 카타리나 : “오! 주님 친히 진리이신 당신 앞에 나는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내 마음은 혐오스럽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떻게 당신께서 거기 계실 수 있었는지요?”
▲ 주님 : “그러한 생각과 유혹들이 네 마음 안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즐거움이었느냐, 고통이었느냐, 기쁨이었느냐, 슬픔이었느냐?”
▲ 카타리나 : “큰 고통과 갈등이었습니다.”
▲ 주님 : “네 마음 중심에 숨어 있는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겠느냐 내가 거기에서 현존하지 않았더라면 음란한 생각이 가득찼을 때, 너는 쾌락에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원수들로부터 유혹 당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너의 구원을 위해 숨어서 아무 흔들림 없도록 너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는 네게 더 친밀하게, 더 자주 나를 드러내 보이리라.”
카타리나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느꼈으며 이후에는 어떠한 유혹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카타리나는 이후 3년간 기도, 묵상, 노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를 하고, 18세 때 성 도미니코의 제3회에 입회했다. 이 회의 회원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동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 성 도미니코의 정신을 따라 가능한 한 복음의 권고를 실천하며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회였다. 이후 20세에 카타리나의 영적 성장은 이미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대부분 과부들로 구성되어 있던 도미니코 제3회는 빈민층에 대한 봉사가 주 소임이었다. 카타리나는 주로 병자들을 보살폈고,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돌봤다. 특히 1370년의 대 기근과 1374년의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는 육체가 쇠진할 정도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카타리나가 간호사들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카타리나는 이와 함께 엄격한 금욕생활도 이어나갔다. 그녀는 주위에서 염려할 정도로 식사량을 줄여나간 반면 영성체를 자주 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금욕생활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5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7)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2) “아버지 당신께 제 영혼 맡기나이다”
세상에는 좋은 의도를 가진 선한 행위가 주위 사람들의 좋은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한 행위가 반드시 칭송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한 행동과 거리를 두고 있는 이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카타리나는 어려움에 처한 불우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헌신했다. 남의 집 청소까지 맡아서 해 주는 등 손발이 닳도록 일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모함도 만만치 않았다. 암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은 카타리나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카타리나에 대해 근거 없는 모함을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조금도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고 여인을 계속 도왔다.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여인을 간호했다. 의도적으로 기분 나쁘게 대하는데도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 기분 나쁘게 대한 쪽에서 오히려 더 당황하는 법이다. 그래서 여인은 그런 카타리나를 더 혹독하게 대했다. 그러자 카타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배은망덕한 유대인들이 당신을 저주하며 모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결코 중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겨우 두세 번 악담을 들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명하신‘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덕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마침내 카타리나의 성덕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거룩한 영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깊이를 더했다. 종종 주님의 발현을 뵙는 은혜를 받기까지 했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손에는 황금 관을 다른 한 손에는 가시관을 들고 나타나서 “나의 딸아, 어느 것이든 하나를 선택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카타리나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가시관을 잡아 머리에 쓰며 “저는 황송하옵게도 주님의 배필로 선택된 자로서 주님과 같은 고통의 가시관이야말로 적합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청원은 받아들여진다. 1374년 주님께서 재차 발현하셔서 그의 몸에 오상을 박아 주셨다. 카타리나는 그 상처를 평생 동안 숨겼는데, 죽음이 가까이 와서야 타인의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졌다.
여기서 오상의 고통을 받은 성인 성녀들은 이렇게 대부분 스스로에게 드러난 기적을 숨겼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훗날 비오 성인도 그랬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교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성인과 성녀들은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기적들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런 카타리나에게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줄 것이니, 여러 나라를 다니며 위정자와 지도자들에게 내 소망을 전하라.”
이에 카타리나는 주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다. 1374년 카타리나 성녀는 당시에 치열했던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피사를 방문했다. 당시 교회는 교황파와 대립 교황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늘 정통 교황파에 서서 교황의 정통성 확보에 이바지했다. 1309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져 있었는데, 카타리나는 직접 그곳을 찾아가 교황님을 알현하여 1376년 교황청이 로마로 다시 돌아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카타리나의 공이 지대했던 것이다. 그녀의 사명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당시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 중에는 사치 생활로 기울어진 이들이 많았다. 카타리나는 이를 크게 염려하며 거리낌 없이 그 개혁 방법을 교황에게 올리기까지 했다. 카타리나는 또 설교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주변에 추종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교가 사제의 절대 고유 권한으로 여겨지던 시절, 한 여성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카타리나의 영적 능력과 지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서서히 주님의 품에 안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380년 카타리나는 먹고 마시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며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해 2월 29일 3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성혈, 성혈, 성혈”이라는 말을 거듭 외치다가 예수님처럼 눈을 감고 “아버지 당신 손에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461년 6월 28일 교황 비오 2세는 카타리나를 성녀로 시성하셨고, 1866년 4월 1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로마의 수호자로 반포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0년 5월 15일 카타리나를 이탈리아의 첫 수호자로 공포하고, 1943년 9월 15일 그녀를 모든 간호사의 수호자로 삼으셨다.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1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8)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3) “예수님의 배필로 영원히 살아가겠다”
지난주까지는 카타리나 성녀의 삶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봤다. 이번 주부터는 카타리나 성녀의 영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많은 이들이 성인 성녀의 연대기적 삶과 몇몇 모범에 대해선 단편적으로 알고 있지만, 정작 그분들의 삶 안에 녹아있는 영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껍데기만 아는 것이다. 성인 성녀의 삶이 진정으로 나의 삶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섭리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성의 진수를 맛보는 것이다.
우선 카타리나 성녀의 선종한 나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33세에 선종했다. 태어난 해와 연도는 다르지만 정확히 예수님과 같은 나이에 하늘에 올랐다. 성녀의 삶이 이렇게 짧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그랬듯이 그 짧은 생애 속에서, 주어진 일 해야할 일을 모두 완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훗날 교회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된다. 평신도였고 더군다나 여성이었다. 그녀는 학문을 배우지 않았던 분이다. 글도 선종 3년 전에야 겨우 깨우쳤다고 한다. 30세까지 일자무식으로 살았던 분이다. 그랬던 그녀가 어떻게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동급의 교회 박사가 될 수 있었을까. 카타리나 성녀의 삶은 참으로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어린 시절이 남다르다. 형성하는 신적신비인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신비 체험을 초등학교 입학전 나이에 했다고 한다. 수준 높은 관상가도 아닌데, 어린 시절에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사실 어린 시절의 신비 체험은 대부분 부모의 영향이 크다. 부모의 깊은 신심이 아이들에게 심어지고, 그때 그 아이들이 모방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기도를 하면 아이들도 기도를 하고, 부모가 매일 “돈! 돈! 돈!”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도 돈만 알게 된다. 돈만 밝히는 자녀를 두었다면, 자신들이 먼저 돈만 밝히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부모가 매일 저녁 식사를 한 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묵주기도를 해 보라. 만약 이웃집 보는 눈이 쑥스러워 길거리에서 묵주기도를 하기 힘들다면 집안에서 성경 필사를 한 번 해 보라. 성경 필사가 부담스러우면 그냥 성경을 함께 읽어도 된다. 아이들이 달라질 것이다. 부모가 성체조배를 하면 아이들도 성체조배의 참맛을 알게 된다. 부모가 기도하면 아이들도 기도한다. 그래서 신앙도 깊어지게 된다.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를 닮는다.
카타리나 성녀의 부모도 분명, 카타리나에게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줬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에 카타리나는 7세 때 평생 동정을 바라며, 스스로 서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당 복사들에게 요즈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외교관이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고, 음악가, 선생님 등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다. 대답이 다양하다. 그런데 신부님 수녀님이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저는 결혼할 거예요”하고 말한다.
그런데 카타리나의 대답은 달랐다. “결혼하지 않겠다”였다. “예수님의 배필로 영원히 살아가겠다”였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독신과 결혼의 길은 분명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것이다. 결혼하는 것, 대단히 좋은 일이다. 결혼 성소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그런데 똑같은 비중으로 독신 성소도 아름답다. 카타리나는 그 독신 성소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성소에 대한 확신은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부모는 카타리나의 결심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늘 기도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녀의 확고한 모습을 보면서 차츰 마음을 돌리게 된다. 형성적 영성을 완성해 나가는데 있어서 세속적인 반대라는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타리나가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묘한 일이 벌어진다. 본능적인 성에 대한 유혹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사춘기다. 길거리에서 봤던 멋진 남자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남자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듯이 카타리나 성녀도 그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15세 소녀 카타리나는 이런 유혹에 적극 대처한다. 이틀에 30분 꼴로 잠을 잤다. 잠을 자지 않는 시간에 늘 깨어 기도했다. 혹독한 고행이다. 이런 고행은 진정한 영적 갈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갈망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19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9)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4) 혼돈과 어둠의 시기에 예언자적 역할 수행
카타리나가 애타게 그리스도를 찾자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그리스도는 찾으면 오시는 분이다. 아니, 늘 옆에 계신데 우리가 찾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카타리나는 자신이 성적인 충동에 휩싸여 있을 때 당신이 어디에 계셨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늘 너와 함께 있었다고 대답한다. 카타리나가 놀라서 “어떻게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찬 저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오히려 카타리나에게 “성적 욕망에 휩싸였을 때 기뻤느냐 아니면 고통스러웠느냐”를 묻는다. 카타리나가 고통스러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 고통 한가운데에 자신이 섭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고통, 그 슬픔 가운데 함께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타리나의 내면에는 정신적 창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영적인 창고 즉 마음의 창고가 있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영적인 창고에 머무르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고통을 받아도 예수님은 그런 부족한 우리 안에서 늘 함께 머무르신다.
이후 카타리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육체적 유혹에 흔들리는 일이 없어졌다. 또 한 차원 높은 진정한 영적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카타리나는 3년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세워 나갔다.
그러다 18세 때 수도회 제3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렇게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 환자와 함께하며 8년을 보냈다. 그런데 당시 카타리나가 접해야 했던 세계 형성의 장(場)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흑사병이 휩쓸고 있었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 혹은 1/4이 죽은 대 참사였다. 성직자의 40%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교회도 사회도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또 당시 유럽에선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교회도 1309년에서 1377년까지 68년간 교황님들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교회는 프랑스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복잡한 교회사의 내막을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교회로 볼 때는 참으로 아팠던 시기였다.
1000년 넘도록 교회는 성화하고 발전해오면서 좋은 역할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시행착오들이 일어나게 된다. 하느님은 은총을 계속 주시는데,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면 언제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는 반드시 하느님에 의한 또 다른 섭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타리나는 바로 그 섭리의 한 방편이었다. 카타리나는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예언자적 역할을 하도록 불림을 받은 분이었다.
카타리나에게 오상의 은총을 내렸다. 오상이 무엇인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 즉 합치를 이룬다는 증표다. 그 오상과 함께 소임을 맡기신다. 바로 프랑스에 머물고 계신 교황님을 로마로 모셔오도록 한 것과 교회의 쇄신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카타리나는 이 소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교황님이 로마로 돌아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카타리나는 또 일부 사치와 향락에 떨어진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합치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30대 중반도 되지 않은 젊은 카타리나는 완전한 합치의 삶을 살았고 그 힘으로 교회를 쇄신했다.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는 카타리나를 14세기 혼란 가운데서 태어나도록 섭리하셨고, 당신과의 합치로 이끄셨고, 그 영향을 통해 교회를 바로 잡으셨다. 카타리나는 33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형성은 물론, 세계 형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육신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 어떤 유혹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하느님과 영감과 갈망을 주고받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유혹들을 극복했고, 형성의 초대에 완벽하게 응답했다. 문제는 한 사람의 완벽한 형성은 단순한 한 개인의 형성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카타리나의 완벽한 형성은 바로 세계 형성으로 이어진다. 교회를 쇄신했고, 결국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 개인을 형성시키시고, 다음으로 그 주변 사람들을 형성시키시고, 세계를 형성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하느님의 형성 의지에 동참하겠다는 우리 개개인의 동의다.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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