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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의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1797 ~ 1828)...그에게는 씩씩하고 용기있게 자신의 작품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릴 만한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그리고 늘 그를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재정적 문제도 따라다녔지만, 또한 그를 괴롭히는 병마의 그림자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자신에게 침잠하여 음악을 써내려갔고 그를 잘 아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재능을 알아주고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슈베르트란 존재를 알려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전날의 우울한 생각이 되살아나곤 한다. 이처럼 나는 즐거움도 또한 마음을 붙일 곳도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당시에 쓴 일기의 한 대목을 보더라도 그가 처해있던 당시의 상황, 또한 심리적 고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이 자신을 괴롭힐수록 오로지 음악에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유일한 재능인 음악의 창조에 매달림으로써 반대급부적으로 희망과 유일한 낙을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일기장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편린도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의 표현이다.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만인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이야말로 이해력을 날카롭게 해주고 정신력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후 슈베르트의 작품은 점차 내면적이고 개성적이면서 또한 그러하기에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의 슬픈 영롱함으로 채색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해(1824)에는 여름에 잠시나마 그에게 시름을 달래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에스테르하지 백작 일가와 더불어 헝가리의 젤리스(Zseliz)란 휴양지로 함께 가게 되었던 슈베르트는 밝고 아름다운 풍광과 모처럼의 어울림 속에서 몇 개의 음악을 쓰게 되는데, 여기에는 현악 4중주곡 가 단조인 ‘로자문데’와 당시 잠깐이나마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백작의 딸 카롤리네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한 ‘대 2중주곡’도 들어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오래 머물던 그는 빈의 친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0월 중순쯤 그는 쉔스타인 남작의 마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마차 창문을 열고 있다가 기관지염에 걸려 빈의 로사우 지역에 있던 아버지의 집에서 정양하며 그는 곡을 하나 써내려갔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독특한 ‘아르페지오네(arpeggione)를 위한 소나타 가 장조 D.821’이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가 단조도 이 해에 씌여져서 묘하게도 이해를 대표하는 곡 세 개가 모두 ‘가(A) 조’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럼, 이때 등장하는 아르페지오네란 무엇일까요?
1823년 빈의 기타와 바이얼린 제작자였던 요한 게오르크 슈타우퍼(Johann Georg Stauffer:1778 ~ 1853)는 어떤 악기를 하나 만들어내고서 4월 30일에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셰 차이퉁 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기고문을 내게 됩니다.
“...기타 다모르(guitarre d'amour) 혹은 기타 첼로(guitarre-cello)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형태는 일반적인 기타와 유사하나 하장(下長)이 더 크고 거트 선이 끼워져 있으며 손가락으로 뜯거나 활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음색의 아름다움과 풍부함, 그리고 매력은 고음역에서 오보에에, 그리고 저음역에서 바셋 호른에 이르는데, 특히 반음계적인 패시지의 연주와 더블 스토핑까지도 가능하다...”
외관은 기타를 키워놓은 것이고 첼로처럼 브릿지를 가지면서 E-A-D-G-B-E의 6선을 끼워 24개의 플렛(fret)을 이용, 한손으로 눌러 음을 잡고 활로 소리를 내는 악기 - 이것이 바로 아르페지오네였습니다. 얼른 봐도 기타족이긴 하지만 오히려 비올라 다 감바와 유사한 모습이었던 재미있는 모습의 이 악기는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은 현악기를 이리저리 개량하고 개발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악기를 개발한 슈타우퍼는 아르페지오네를 널리 보급해보고자 광고를 내면서 동시에 이 악기에 맞는 좋은 음악을 써 줄 작곡가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아르페지오네의 공개연주를 빈젠즈 슈스터(Vinzenz Schuster)라는 연주자에게 맡겼었고, 또한 이 악기의 연주지침교육서를 그에게 쓰도록 하였었는데, 슈베르트의 친한 친구였던 페르디난트 보그너(Ferdinand Bogner)와 슈스터는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탁이었는지 혹은 위촉이었는지 어쨌거나 슈베르트는 그를 위해 새로 개발된 이 악기를 위한 음악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알려져있는 사실은, 슈베르트 자신이 이 악기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전해집니다. 기타와 첼로를 합친 듯한 음색이 사색적이고 그가 그해 다녀왔던 헝가리의 냄새가 난다고 하여 비교적 적극적으로 그는 음악을 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형식을 놓고서 소나타로 할 것인지...혹은 변주곡으로 할 것인지를 망설이다가 결국 소나타 형식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정양하면서 곡을 써내려갔습니다. 11월에 완성된 이 곡은 그해 말경에 처음 연주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는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한 채 단 몇 대만 생산이 되고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쓴 이 곡은 그의 슬픔에 찬 내면적인 탄식을 안고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곡으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곡이 다시 아르페지오네로 연주되어 녹음이 이루어진 것은 1974년에 이르러서입니다. 주로 첼로로 연주되었던 이 곡을 아르페지오네로 연주하여 녹음을 하게 된 것은 도이치 그라모폰의 고음악 전문 레이블인 아르히브(Arkhiv)에 의하여 시도되었었는데, 마침 이 아르페지오네의 첫 발명자이자 제작자였던 슈타우퍼의 제자 가운데 빈과 라이머리츠에서 활동하던 안톤 미타이스(Anton Mitteis)가 만든 아르페지오네가 베를린의 음악악기 박물관(Berlin Musikinstrumenten-Museum)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주를 할 수 있는 피아노는 현대 피아노가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19세기 초반(1810) 빈에서 제작되어 사용되다가 역시 같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요셉 브로드만(Joseph Brodman)의 함머플뤼겔(Hammerflügel)을 이용하여 녹음하기로 하였습니다.
클라우스 스토르크(Klaus Storck)가 아르페지오네 연주를 맡고 형제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알폰스 콘타르스키(Alfons Kontarsky)가 함머플뤼겔 연주를 맡아 지극히 옛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녹음이 완성되어져 음반으로 나왔습니다.(Arkhiv 2533 175)
조금은 조심스런 모습으로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르크의 아르페지오네 연주가 손에 익숙해진 듯 대단히 감성적이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펼쳐집니다. 결코 큰 사운드가 아니지만 이 곡이 담고있는 내면적인 열정을 나름대로 잘 표현해주고 있으며, 콘타르스키의 반주도 때로는 톡톡 튀듯 돌출되지만 전체적으로 슈베르트적인 반주가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잘 나가는 첼리스트들은 거의 빠짐없이 이 곡을 연주, 녹음하고 있는데,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대조적인 연주를 비교하며 듣기를 좋아합니다.
다닐 샤프란(Даниил Шафран)의 첼로 연주는 결코 힘으로 하는 연주가 아닙니다...어찌보면 첼로가 아니라 바이얼린의 소리를 그대로 확대하여 놓은 것처럼 섬세하고 세밀합니다. 다만, 이를 가늘거나 불안하게 들리지 않도록 완벽한 테크닉으로 받쳐주고 있다는 점이 샤프란을 돋보이게 하는 특징이 아닐까...합니다.
그는 1923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보리스가 레닌그라드 필하머니의 첼로주자였으므로 자연히 그 역시 첼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의 스승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선배격이었던 알렉산드르 슈트리머였는데, 그들은 칼 다븨도프와 세르게이 꼬졸루뽀프같이 직설적이고 다이나믹한 운궁의 계보가 아니라 섬세하면서 격조높은 소리를 만드는 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세때 전소련 콩쿨에서 우승한 그는 1950년 프라하의 봄 콩쿨에서 결국 므스찌슬라프 로스뜨로뽀비치와 더불어 공동우승을 차지하면서 1955년 런던 연주를 계기로 해외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1960년에 모스끄바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차이꼽스끼의 ‘로코코...’로 데뷔하자 그는 미국의 ‘스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몇 주 뒤 샤프란은 다시 카네기 홀에서 반주자였던 리디야 뻬체르스까야와 함께 무대에 올랐었고 RCA는 그날의 레퍼토리 가운데 쇼스따꼬비치와 슈베르트의 작품을 선정하여 녹음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들려주는 샤프란의 ‘아르페지오네...’는 장년기의 뚜렷한 정열과 완벽한 기교가 뚝뚝 묻어나오는 듯합니다. 부드럽지만 내면적인 슬픔을 집착하듯 이어가는 1,2악장에 이어 3악장의 열정적 질주감이 이 곡의 본질을 꼭 집어내는 듯합니다. 애절함이랄까요? 그 표현력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는 1980년에 자신의 전문 반주자였던 안드레이 미뜨닉과 함께 한 번 더 멜로지야에서 녹음하고 있는데, 노련함이 돋보이는 대신 인생에 대한 고뇌와 비장함이 서린 장년기의 녹음에 비하여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연주가 있습니다. 므스찌슬라프 로스뜨로뽀비치(Мстислав Ростропович)는 자타가 공인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연주자이자 지휘자입니다. 그리고 위의 샤프란과는 달리 대단히 직설적인 화법으로 우리들을 사로잡아 버리는 강렬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에딘버러 음악제 참가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었을 때 그와는 무척 닮은 꼴인 한 사람의 음악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 우정은 영원한 것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이었습니다. 영국과 소련을 오가며 우정을 쌓던 그들이 영국 방문시 데카사에서 음반을 녹음한 것은 1968년 - 브리튼은 지휘봉이 아니라 피아노를 택했고 로스뜨로뽀비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들의 녹음을 들어보면 벤자민 브리튼은 문자 그대로 로스뜨로뽀비치의 반려자로서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슈베르트의 피아노 반주는 그 자체로서도 대단히 뛰어난 하나의 곡이 되는데, 브리튼의 연주는 ‘영국 신사’의 그것처럼 분명하지만 로스뜨로뽀비치의 호흡을 존중하면서 차근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로스뜨로뽀비치는 자신의 첼로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적 색채와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인생의 비감함이 서린 서정적인 이 곡을 대하면서 호흡을 길게 가져가고 대단히 차분한 음색으로 진지한 슬픔을 표현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연주에 대한 안티팬들도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핵심이겠죠...하지만 덩치큰 거인이 표현하는 나름의 섬세한 비감함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변신’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로스뜨로뽀비치의 그 모습과 연주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 아닐런지...?
피에르 푸르니에도 모리스 장드롱도 폴 토르틀리에도 린 하렐도 미샤 마이스끼도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서 녹음하고 있지만, 이 대조적인 두 사람의 역시 대비가 되는 연주가 항상 저에게는 우선입니다.
음역의 문제로 인하여 사실, 이 곡을 첼로로 연주하기에는 무척 힘듭니다. 웬만큼 연주한다는 첼리스트들도 최소 2,3개월은 연습해야 정확한 테크닉을 겨우 익힐까말까라고 할 정도이니 여기에 자신의 색채감을 입혀 발표한다는 것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욱이 이 곡을 첼로가 아니라 비올라로 표현한다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입니다.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늘진 감성이 고음역 부분에서 많이 감쇄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입니다. 그래서 비올라로 연주하려면 분명히 어두운 음색의 연주가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은 전세계의 수많은, 기교가 뛰어난 비올리스트들이 그다지 어렵지않게 연주하고 있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 곡을 비올라로 연주하는 것은 아주 특이하고 힘든 경험이었을것입니다. 지금까지 찾아본 결과, 아래의 음반보다 더 먼저 이 곡을 비올라로 연주한 녹음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은 1983년 9월입니다.
비올라 연주를 맡은 토마스 리블(Thomas Riebl)은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며, 실제로 음반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1956년생이며 빈에서 태어나 이곳 음악원에서 배웠고 알반 베르크 재단의 스칼라쉽으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부다페스트와 뮌헨에서의 비올라 콩쿨에서 우승을 한 그는 빈 6중주단에서 활약하며 실내악과 독주자로 유럽을 다니고 1983년 이후로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반려자이자 반주자인 수잔 톰스(Susan Tomes)와 함께 이 곡을 녹음하였는데, 그의 비올라 자체의 음색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첼로의 소리처럼 비교적 두텁게 울려퍼지면서 비올라가 갖는 이중성 가운데 하나인 약간 어둡고 쓸쓸한 음색이 잘 살아나고 있습니다. 특히 2악장의 서정적인 부분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비올라의 특성이 대단히 뛰어난 솜씨로 발휘되는 듯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뛰어난 비올리스트인 유리 바쉬메뜨가 자신과 호흡이 잘 맞는 피아니스트 미하일 문쨘과 더불어 녹음한 연주(1990)도 들어봤지만 지나치게 날카롭게 들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연주자임과는 별도로 연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이자 재력가이면서 동시에 더블베이스를 독주악기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데 많은 공을 들였던 망명 음악가 세르게이 꾸셰비쯔끼(Ceргей Кусевицкий)는 러시아 이민자의 자손인 게리 카(Gerry Karr)에게 자신의 애기(1611년산 아마티)를 물려주었습니다.(직접 물려준 것은 아니지만...) 1941년 로스앤젤레스생인 게리 카는 남가주 대학과 줄리어드 음악원을 거쳐 독주 더블 베이스의 길을 개척해온 사람입니다.
게리 카는 첼로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운지를 놀리기 힘든 더블 베이스로 이 곡을 연주하였습니다. 1980년 5월 그 자신이 자주 드나드는 일본의 킹 레코드에서 녹음하였는데, 반주는 개인적으로 자주 반주를 맡아온 하먼 루이스(Harmon Lewis)가 맡았습니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상당히 둔중하면서도 날렵합니다. 그의 연주 기교가 뛰어남을 반증해주는 연주인데, 가만히 들어보면 조금씩 편곡아닌 편곡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첼로와 똑같이 연주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싶네요.
다만, 기교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첼로나 비올라처럼 내면의 내성적 슬픔과 비애감이 잘 표현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더블 베이스의 붕붕거림이 조금은 희화화하는 역할을 하여 나타난 것일 겁니다.
이밖에도 많은 다른 방식의 연주들 - 기타 합주, 기타와 첼로 등등 - 이 있지만, 본래의 연주 형태보다 더 많이 변형시킨 것은 이제 더 이상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그 곡이 가진 본질감을 훼손시키는 느낌도 들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첼로의 연주도 마찬가지...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인 연주도 그래서 싫어하게 됩니다. 차라리 로스뜨로뽀비치처럼 감정과잉임을 고백하는 것이 솔직하게 낫지......개인적인 감정입니다.)
슈베르트...그의 피아노 소나타 D.960도, 교향곡 9번 ‘그레이트’도, 피아노 3중주 2번도, 현악 4중주곡 ‘죽음과 소녀’도, 가곡집 ‘백조의 노래’도 그의 가슴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듯하여 들을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저려옵니다.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 역시 쉽게 들을 수 있는 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촛불 하나 켜두고 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늦은 저녁에 슈베르트의 참마음을 대하고 싶어집니다.
= 2008.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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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픔이야말로 이해력을 날카롭게 해주고 정신력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에 밑줄 그어 봅니다. 가끔은 현실에서 냉정함을 잃지말아야 할 때가 있지요. 그 것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적당한 슬픔이나 우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대상을 관조할 수 있게해줍니다....
크.....이 야밤에 아르페지오네를 듣게 만드시네요....오늘밤에 잠 다잣구먼..... 저는 오직 마르타 아르헤리치땜시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자주 듣습니다.마이스키의 유려한 첼로소리뒤로 아르헤리치의 피아노소리는 슈베르트의 맑은 눈망울로 다가오고.......
부지런하신 .. 스토로크의 아르페지오네 악기로 연주하는 LP판 아르페지오네 언젠가 들어보고 싶네요.. CD로 들어도 첼로완 느낌이 달랐던것 같아요..^-^
저도 스토르크 연주를 제일 좋아라 하는데.....^^ 가지고 있는게 LP 라서 지금은 턴테이블이 없어 듣질 못하지만 말이죠 ㅡ.,ㅡ
내가 가진 CD하고 바꿀까요? ㅋㅋㅋㅋㅋ
영모야 얼렁 바까라쿠까....아님 저얼때 바꾸지 마라쿠까.....ㅋㅋ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전날의 우울한 생각이 되살아나곤 한다." 가끔씩 이런 날엔 레퀴엠에 영혼을 묻고, 슬픔의 카타르시스로 정화되어 다시 깨어나기를 .....
저는 토마스 리블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네요..
아르페지오네.... 샤프란의 연주로 처음 만났습니다. 역시 샤프란연주의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와 함께 저에게는 클래식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서는.. 첫사랑과 같은 음반이라 특별하지요.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때 그시절(?) 생각나네요.. ^^ 저는 샤프란이 연주한 음반에서 샤프란의 첼로야 말할것도 없지만.. 반주자 펠릭스 고트리브의 피아노의 여운도 참 특별하게 가슴에 남아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곡이네요. 저녁무렵 이 곡을 들으면.. 가슴속에 저녁바람 냄새가 스며들어옵니다. 오랜만에 희영님 글 읽다가.. 맨 마지막 줄.. 잔잔히 감동받아 갑니다. 늘 음악과 함께 하시는..... ^^ 부드러운 봄날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