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학기 초 선생님은 그날 수업 내용을 칠판에 적으시면서 공책에 따라 쓰라고 말씀하셨다. 시간 내 다 받아 적지 못하면 손바닥을 맞을 거라는 엄포와 함께. 열심히 필기를 시작했지만, 매사에 느린 편인 데다 눈도 나쁜 나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칠판 가득 판서가 끝나고 내용을 가리시는 선생님, 차르륵 커튼레일 소리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앞줄부터 필기 검사를 하시는 선생님이 내 자리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죄어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결국 손바닥을 맞았는지, 아니면 가까스로 통과되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그날 느낀 감정은 여태 또렷하게 남았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춰야 해. 바짝 긴장해도 시간 내 다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압박감은 이후 지금껏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 토드 로즈는 무려 하버드 교육대학원 교수님이다. 그런데 이분 이력이 특이하다. 중학교 때 ADHD 판정을 받고 고등학교는 낙제했단다. 음주 허용 연령도 되기 전에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최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고, 생활보호 대상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놀라운 건 사회는 그를 문제아로 대하는데 그의 생각은 달랐다는 것. “나는 이런 평가가 어쩐지 부당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진정한 나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중략) 시스템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시스템을 나에게 맞출 방법을 찾아보려 매달렸다.”(36쪽) 이 책은 평균주의가 왜 문제인지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신념을 바탕으로 탄탄한 이론적 논거를 더해 독자들을 설득해 낸다.
토드 로즈는 “이 책의 목적은 평균의 횡포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데 있다.”(37쪽)고 썼다. 평균이 실은 아무 것도 대변하지 못하는 허상일 수 있고, 개개인성을 중시하면 인간의 잠재력을 더욱 끌어낼 수 있단다. 책을 읽으면서 이제껏 살면서 나는 한 번도 평균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큰일 난다는 교훈을 얻은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중·고등학교에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중학교 첫 시험 성적표를 받은 날, 예상보다 높은 전교 석차에 어찌나 짜릿했던지! 머릿속에 전교생을 일렬로 줄을 세우고 내가 앞에서 몇 번째인지를 세어보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습관적으로 남과 비교하며 평균보다 높은 우월감을 즐기기도 하고, 때론 못난 나에 대한 열등감으로 괴로워도 하고, 평균이라는 안전한 기지에 숨기도 하면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시소 타기하던 시간이 길어서일까. 처음엔 책을 읽으면서 평균을 자꾸 옹호하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했다. ‘평균이 뭐 어때서? 얼마나 유용한 개념인데, 전체 핵심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잖아, 대량생산과 경제발전에 도움도 됐잖아.’ 저자 역시 내 마음을 읽은 듯 “일터의 테일러주의화와 학교의 표준화 및 등급화 시행이 무슨 실패작이라도 된다는 주제넘은 주장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실패작도 아니다. (중략) 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92~93쪽)고 말한다. 산업화 시대, 획일성과 효율성이 최고 가치였던 시대에는 평균주의의 장점 역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개개인성, 창의성,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로 변모한 현대사회에서 평균의 종말은 이제 시대적인 요구다. 비로소 저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런 개념을 채택할 경우의 중요한 부분은 어쩌면 획일성의 문제 해결에 유익하다는 점일지 모르겠다.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 모두와 똑같되 조금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쓰는 대신에 최고의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힘쓸 테니 말이다. (중략)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신이 아닌 진정한 자신이 된다. (258쪽)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든 구절이다. 평균주의가 치르게 한 대가는 끊임없이 타인을 준거 틀로 삼아 비교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든 것일 테다. 그럼 평균주의에서 벗어나 고유한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해방이 아닐까. 고작 책 한 권 읽었다고 완전한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계기로 삼을 수는 있다.
얼마 전 몇 년 만에 단둘이 마주 앉은 지인이 말했다. “언니, 그사이에 좀 달라진 것 같아요. 뭔가 더 편안해졌달까.” 이유를 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읽고 쓰기에 몰입하면서부터라는 걸. 내 안에 견고하게 부착된 서열화와 비교 의식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유롭고 가벼워짐을 느낀다. 글을 쓰면서 또 문우들의 글을 읽으면서 잘 쓴 글, 못 쓴 글, 1등, 2등이 따로 없다는 걸 배웠다. 다만 공장에서 찍어내듯 판에 박힌 평균의 글쓰기는 매력이 없다. 조금 투박하고 서툴러도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낼 때 읽는 이도 공감이 간다. 내 안에 갇힌 생각을 열어주고, 세상을 탐구하며,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책 읽기와 글쓰기가 참 좋다. 앞으로도 귀한 보물을 쓰다듬듯 애정하며 가까이 할 생각이다.
더불어 두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로서 학교와 사회가 아무리 아이들을 평균주의로 대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우리 가정에서는 고유한 그 자신으로 봐줘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already, but not yet) 새로운 미래는 “발달이 사다리가 아니라 발달의 그물망(202쪽)”이라고 믿는 너와 나, 우리에 의해 열릴 것이다. 꿈쩍하지 않고 근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우리 사회도 곧 변화의 물결에 휩쓸릴 것이라 믿는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 아니냐고? 글쎄, 해방은 이미 시작된 것 같은데. 내 안에서도, 이 글을 읽는 당신 안에서도.
첫댓글 평균주의에서 벗어나 고유한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