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반전 이끈 리지웨이의 '벼락' 작전, "쇠사슬 전투대형 유지하라!"
(4) 지평리 전투
수류탄 차고 나타난 새 사령관
그는 한국 땅에 도착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던가 보다. 아니, 실망이라기보다 허탈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왜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의 독백 속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리지웨이는 대한민국이 김일성 군대의 공세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시절 분전을 거듭해 전세를 만회한 월턴 워커 중장에 이어 2대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인물이다. 1895년생으로, 그 후임 8군 사령관으로 왔던 밴 플리트 장군에 비해 오히려 나이가 세 살 적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우리나라 밭과 논 등에 뿌려진 강한 인분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고약한 그 냄새와 함께 시작한다.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리지웨이는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푸념부터 털어놓고 있다.
수류탄 차고 나타난 새 사령관
그는 한국 땅에 도착하면서 실망을 금치 못했던가 보다. 아니, 실망이라기보다 허탈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내가 왜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의 독백 속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리지웨이는 대한민국이 김일성 군대의 공세에 낙동강까지 밀렸던 시절 분전을 거듭해 전세를 만회한 월턴 워커 중장에 이어 2대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인물이다. 1895년생으로, 그 후임 8군 사령관으로 왔던 밴 플리트 장군에 비해 오히려 나이가 세 살 적은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우리나라 밭과 논 등에 뿌려진 강한 인분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고약한 그 냄새와 함께 시작한다. 나중에 펴낸 회고록에서 리지웨이는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푸념부터 털어놓고 있다.
- 막 부임해 전선 상황을 시찰 중인 리지웨이(오른쪽). 한쪽 가슴에 보란 듯이 수류탄을 차고 있다.
그랬다. 리지웨이는 늘 그런 점을 강조했다. “미국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라는 그런 말 말이다. 회고록에서도 그랬고, 1951년 내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로 나섰을 때 판문점 인근에서 잠시 회담에 참가하는 아군 대표들을 모아놓고 구수회의를 하면서도 그랬다. 그가 싸움의 명분을 이야기할 때 늘 입에 올리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는 명분에 충실한 군인이었고, 그런 명분을 이루기 위해 열과 성을 모두 바치는 그런 군인이었다.
그는 공수작전의 베테랑이다. 적진에 강하(降下)해 상대의 요부(要部)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는 특수작전의 명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는 유럽의 각 전선에서 공수군단을 이끌며 작전을 벌였고,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공격할 때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습(空襲) 강하 작전을 주도했다.
본인이 강인하고 모질지 않으면 수행하기 힘든 작전들이었다. 그런 싸움을 여러 차례에 걸쳐 펼침으로써 리지웨이는 명성을 얻었던 장군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항상 상의 앞주머니에 수류탄을 매달고 다녔다. 자신의 강인함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장식품이었을텐데, 어쨌든 그와 수류탄은 잘 어울렸다. 그게 멋져 보였는지 우리 군의 일부 장성들도 그를 흉내 내 수류탄을 주머니에 매달고 다녔다.
워커와는 조금 달랐던 리지웨이
그는 월턴 워커 중장과 달랐다. 워커 장군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 막바지 김일성 군대의 공세를 막아낸 명장이지만, 리지웨이는 그보다 더 강인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런 성격의 새 사령관이 부임했다는 점은 어쩌면 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다시 서울을 내주고야 말았던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큰 요행이었을지 모른다.
- 낙동강 교두보에서 김일성의 막바지 공세를 꺾었던 월턴 워커(지프차에 서 있는 사람).
당시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밀리면서 서울을 내주는 상황이 닥치자 워커는 부산으로의 철수를 제안했다고 한다. 우선 축차적으로 방어선을 형성하면서 후퇴하되, 마지막 방어선은 ‘부산 교두보’의 북방인 낙동강 전선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 월턴 워커 장군
그 직전인 1950년 12월 4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도쿄에서 급히 만났다. 추가적인 파병이 불가능하다는 성안(成案)을 지닌 채 도쿄에 도착한 콜린스와 중공군 참전에 따른 국면 악화에 달리 묘안(妙案)을 낼 수 없었던 맥아더의 회담은 결론이 뻔했다.
방어선을 한반도 남북으로 여러 개 설치한 다음 그에 따라 차츰 후퇴해 결국 낙동강 전선, 나아가 해안 교두보로 내려오자는 내용이었다. 12월 7일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그런 후퇴 방침을 결정한 뒤 유엔군과 국군 전체에 그 내용을 명령으로 시달했다. 그런 와중에 워커 사령관은 12월 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으며,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신임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모두가 중공군이라는 커다란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작전계획에 따라 각급 부대가 나름대로 저지선에 서서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하려고 시도했으나, 웬만해서는 뒤집기를 허용하지 않는 전세의 큰 형국은 유엔군과 국군의 후퇴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었다. 그 흐름을 뒤집기란 보통의 강단(剛斷)과 의지로는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
- 참전 초반 무서운 기세로 유엔군과 국군을 압박했던 중공군.
대규모 공습 강하작전의 명수, 그래서 적의 후방에 강한 칼을 꽂는 데에 탁월한 기량을 보였던 리지웨이의 진가는 그 때 드러난다. 그는 미 정부가 내린 “가서 적과 싸우라”는 명령에 매우 충실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대규모 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역전의 노장답게 아주 용맹했다. 그는 현장형 지휘를 강력하게 선보였다. 당시 중공군에 밀린 미 8군의 사령부는 대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최후 저지선 밑에 바짝 붙어 현장을 지휘했다.
그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전선사령관이었다. 아울러 그의 강인함을 설명해주는 대목도 있다. 우선 그는 부임과 함께 “전열을 다시 정비한다. 미 8군은 철수하지 않고 적에게 공세를 펼친다”고 강조했다. 수류탄을 가슴에 달고 현장을 누비면서 마구 밀리는 아군 대열을 향해 반격을 강조하고 다니던 그의 모습이 당시 우리 국군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그는 적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의지와 그에 못지않은 용맹함도 갖췄다.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단도 대단했다. 그 강단이란 게 뭔가. 마땅히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추호의 망설임 없이 단안(斷案)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리지웨이는 당시 매우 위급했던 한국 전선의 상황을 관리하기에는 어쩌면 안성맞춤의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 1·4 후퇴 이후인 1951년 1월 28일 수원으로 날아온 맥아더(가운데)와 함께한 매슈 리지웨이 중장(오른쪽)./스트레이트마이어
그에 따라 리지웨이가 중심을 이룬 미 8군의 분위기가 싹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부산으로의 후퇴에 이어 유엔군을 일본으로, 국군을 남해안 도서지역으로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던 미군 수뇌부 또한 그를 유심히 지켜봤을 것이다. 그가 유엔군과 국군에게 하달한 작전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했다.
그는 두 가지 지침을 내렸다. 저지선에서 틈을 파고들어 우회와 포위를 노리던 중공군에 맞서기 위해 아군끼리의 간격을 좁히도록 했고, 각급 지휘관은 ‘2단계 하급 제대(梯隊) 지휘’를 이행하도록 명령했다. 사이를 좁히라는 말은 지향이 분명했다. 느슨한 방어선을 철통같이 다시 엮으라는 얘기였다. ‘2단계 하급 제대 지휘’는 연대장일 경우 밑으로 두 단계인 대대와 중대까지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현장에 붙어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내린 작전명은 ‘Thunderbolt’, 즉 ‘벼락’이었다. 그리고 작전의 구호는 ‘Shoulder to shoulder’, ‘어깨를 나란히’였다. 매섭게 상대를 찌르는 벼락처럼 적을 밀어붙이자는 취지였고, 그 전제가 아군의 간격을 좁히면서 쇠사슬과 같은 전투대형을 유지하라는 지침이었다. 전선의 국면이 조금씩 달라질 기미가 보였다.
중공군의 공세는 여전했지만, 어딘가 힘이 빠지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조금씩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군의 방어선은 어느덧 평택과 안성, 원주와 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전선은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