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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 다미아노^)^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아침기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저녁기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끝기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
1182년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자기 유산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굳게 매달렸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글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1226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0. 수도회 창설자편 (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상)
가진 옷마저 벗어버린 가난의 삶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
『저는 저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청년은 부모로부터 제공되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돌려주면서 이같이 가족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은 지금껏 너그러움,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심, 신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안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평화의 기도」, 「태양의 노래」 등 주옥 같은 기도문으로도 친숙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1182?∼1226)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불릴 만큼 복음 정신을 따르는 청빈과 무욕 무소유의 모습을 보인 성인이다.
또한 그러한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 설립과 함께 800여년의 역사가 되어 세상 안에 함께 하고 있다.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 태생인 프란치스코는 포목상을 하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시시라는 도시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 영화를 추구한 부모의 영향아래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에 길들어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면서 자랐고 그 역시 부모보다 오히려 더 그러한 세계를 추구했었다』(Thomas von Celano, Erste Lebensbeschreibung des hl?Franziskus, Nr.1).
생애 전반부에 대한 다소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 문장에서 엿보듯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고 화려한 옷에 향락적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뻬루지아와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던 프란치스코는 1202년부터 1203년까지 포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1205년 다시한번 전투에 참여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일련의 계시를 듣게 된다.
무기와 전쟁도구들로 가득 찬 궁전과 성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것이 너와 너를 따르는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종과 주인 중에서 누가 너에게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연히 주인입니다』고 답한 프란치스코에게 『그럼 너는 왜 종을 따르느냐. 아시시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곳에서 너에게 나의 뜻을 알려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꿈속에서의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상당한 전환점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주었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에 몰두하였고 어느날 아시시 산 근처 성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 있는 십자가 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글자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포르티운쿨라, 성베드로 성당들을 차례대로 고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과제가 「교회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된다.
가진 옷 마저 벗어버리며 하느님으로부터의 불림을 천명한 그는 1208년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때에는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는 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길을 걷기 원하시는지 깨닫게 됐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청빈한 삶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또한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함께 움막 생활을 하던 프란치스코는 다시한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성서를 세 번 펼쳤는데 이때 발견한 구절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해야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라고 외쳤고 한편 함께 했던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생생히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5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1. 수도회 창설자편 (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하)
프란치스코 성인의 형제애는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곳곳에‘회개와 평화’ 선포 작음의 영성·형제애 추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돼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 조직처럼 갖춰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의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 삼아 세운 것이고 그런 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 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 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2일, 이주연 기자]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탄생과 청년기
프란치스꼬는 1181년 혹은1182년에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소도시 아씨시(Assisi)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였고, 그의 어머니는 삐까였다. 후에 그는 프란치스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와 무역을 하였던 것과 프랑스를 좋아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값비싼 옷을 즐겨 입었고 친구들과 함께 연회를 자주 갖기도 했으나 프란치스꼬는 "선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성 보나벤뚜라는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보통 젊은이들과 같은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그에 따라 다른 젊은이들처럼 부유한 상인이나 기사가 되는 포부를 지녔다. 그러나 일단 그가 회개한 후부터, 그는 오직 자신의 완덕을 성취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완덕으로 이끄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1202년 뻬루지아와 아씨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다른 포로들은 비통에 젖어 있었지만 프란치스꼬는 매우 평화로운 상태에 있었으므로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들 중 여럿은 프란치스꼬와 대화를 나눈 후에 화해를 하고 평화를 되찾곤 하였다.
하느님의 부르심
포로에서 풀려나 아씨시로 돌아온 프란치스꼬는 다시 그전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었다. 병중에서도 그는 가끔 산책을 하곤 했는데 그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자연 경관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런 환상을 보게 된다. "그의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었고 한 여인이 그 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장비들은 너의 병사를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바로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또한 기사가 될 꿈을 꾸고 1205년에 뿔리아(Puglia) 원정군에 입대하는 길에서 스뽈레또를 지나가고 있을 때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 "물론 주인입니다"라고 그가 대답하자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에 없이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때 그의 나이 24세쯤이었다.
그에게는 친구들이 권하는 세상의 축제들이 무의미해져 갔다. 점점 강해지는 다른 갈망으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기도와 탐구를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의 이런 갈망에 대답을 주시리라 생각한 그는 아씨시의 동굴을 산책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통회하며 기도하였다. 아씨시로 말을 타고 돌아오던 중 우연히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나병 환자 곁을 피해가고 싶었지만 그는 곧바로 말에서 내려와 나병 환자를 포옹하고 자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들을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꼬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 그 말씀은 그리스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프란치스꼬는 글자 그대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곧바로 그는 그의 말과 장비들을 팔아 성당 수리 비용을 마련하여 주임 사제에게 봉헌했으나 그가 거부하였으므로 성당 창문 옆에다 돈을 놓고 떠나갔다.
얼마 후 주임 사제와 성당 수리를 함께 하기로 협의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란치스꼬의 아버지는 매우 화가 나서 프란치스꼬의 행동의 부당성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시 법원과 교회에 의뢰하는 바람에, 프란치스꼬는 만인들 앞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당성과 앞으로의 활동을 천명해야 했다. 프란치스꼬는 아씨시 주교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였고 주교는 그에게 망토를 건네주며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마태 10,9∼12)를 듣다가 자신의 결정적인 성소, 즉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복되신 프란치스꼬의 유언 참조. 한다는 성소를 발견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의 해석을 한 사제에게 부탁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이나 은,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하자, 이 설명을 들은 그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기뻐 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하던 바다"(1첼라노 22). 프란치스꼬는 이 말씀을 가난과 복음 전파에 대한 계시로 알아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때부터 복음은 프란치스꼬의 생활 규칙이 되었으며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첫 동료들
프란치스꼬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성당 수리가 아닌 영적 차원의 교회의 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활기차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에 프란치스꼬와 같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그에게 합세했으니, 이들은 뀐따발레의 베르나르도, 까따니아의 베드로, 아씨시의 에지디오 등이다. 곧이어 그와 동료들은 12명이나 되어 리보또르또(Rivotorto)에서 거친 움막 생활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의 동료 두 명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성 니꼴라오 성당의 미사에 갔다. 영성체 후 그들은 성서를 3번 펼쳤는데 그 내용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신 말씀이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 19,21),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말씀을 듣고 그는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 하고 외쳤다.
뽀르지운꿀라
프란치스꼬는 몸집이 작고 마음은 겸손한 작은 형제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작은 몫"(Portiuncula)을 차지하였으니,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는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이 예로부터 뽀르찌운꿀라로 불리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예언적인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 다음으로 모든 성인들의 화관이 될 만한 공로를 탁월한 겸덕으로 세우신 동정녀를 기리는 성당이 이 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 작은 형제회가 태동하였다. 견고한 기초 위에서 형제들의 수가 늘어갔고 형제회의 고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성인은 이 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곳을 특별한 경의(敬意)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 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표본으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18 참조).
회칙의 인준
동료들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프란치스꼬는 자기 자신이 더 이상 그들의 유일한 생활 규범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형제들의 생활 양식이 더 자세히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따라서 형제들이 실행해야 하는 "회칙"과 "생활"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회칙과 생활은 그다지 상세한 것이 아니었다. 프란치스꼬는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보여주는 거룩한 복음에서 자신이 원하고 갈구하던 것을 찾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이 기본 원리를 자기 회칙의 핵심으로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자신을 따르는 회개자들의 수효가 11명에 이르자, "생활 양식"(Forma Vitae)을 썼다. "원회칙"(Regula Primitiva)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이 회칙은 매우 짧고 단순하다. 1209년 교황으로부터 구두 인가를 받은 회칙을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복되신 프란치스꼬는 주 하느님께서 매일 형제들의 수를 늘려 주시는 것을 보고 자신과 형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단순하게 몇 마디 말로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주로 인용하여 오로지 그가 갈망했던 완덕을 위해서 생활 양식과 회칙을 썼다. 그리고 다른 사항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조금 삽입하였다"(1첼라노 32).
그는 유언에서 "나는 주님 친히 계시해 주신 생활 양식을 몇 마디 말로 간단히 기록케 했고 교황 성하께서 나에게 확인해 주셨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 자신도 유언에서 말하고 있고, 다른 증언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생활은 자신이 받아들인 일련의 복음서 구절들로 요약되었다. 그 후 프란치스꼬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에 대해 로마 교회의 인준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성청의 인준을 받고자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 교회의 수도인 로마로 떠났다.
프란치스꼬로부터 회칙에 관한 내용을 설명들은 추기경은 순수하게 복음을 따라 살겠다는 프란치스꼬의 계획을 불가능하게 여겼지만 반대할 수는 없어서 교황 알현을 주선해 주었다. 교황은 프란치스꼬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날 저녁에 교황은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교회의 머리이자 어머니인 교회 건물이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고 갑자기 가난한 수도자 한 명이 달려와서는 그의 어깨로 교회를 떠받쳐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교황은 그가 바로 프란치스꼬임을 알아보았다. 결국 교황은 구두로 회칙을 인가했고 이로써 아직까지 삭발례를 받지 않았던 형제들이 설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가를 받은 후 몇 년 동안 작은 형제회는 급속히 증가했는데, "돗자리 총회"(1219년)에는 수천 명의 회원이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프란치스꼬는 1209년의 생활 규범을 개정하여 23장으로 증보하였으나(1221년), 이 회칙(제1회칙)은 많은 봉사자들의 반대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회칙을 "인준 받지 않은 회칙"(Regula non Bullata)이라고 부른다. 이 회칙에서는 다른 어느 글보다도 프란치스꼬의 이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후 1223년 프란치스꼬는 레오 형제와 보니쪼 형제와 함께 리에띠 계곡의 "폰떼 꼴롬보" 은둔소로 가서 마지막 회칙인 제2회칙을 작성하여, 마침내 1223년 11월 29일, "Solet Annuere"라는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칙서를 통해서 인준을 받았다(Regula Bullata). 이 최종 회칙은 문장이 훨씬 간결하고 덜 감동적이나, 첫 번째 회칙의 본질적 요소들을 모두 잘 보존하고 있어, 전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수도회의 복음적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후계자와 그의 마지막 생애
몇 가지 갈등들과 프란치스꼬 자신의 병약함 때문에 프란치스꼬는 1220년 총회에서 총장직을 사임하고 까따니아의 베드로를 총장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였다. 그는 유능한 법률가로서 창립자의 이상을 충실히 지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곧 사망했고, 엘리아 봄바로네가 그를 계승하였다.
1224년 9월 프란치스꼬는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상(像)이 된 그는, 몸이 몹시 불편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공경과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1226년 봄 그가 시에나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마지막 바람의 간곡한 당부를 받아쓰게 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이 그들 가운데서는 사랑을, 가난 부인에게는 충실을, 교회의 고위 장상들과 성직자들에게는 존경과 순종을 실천하라고 역설하며 그들을 축복했다.
성인의 원의에 따라 형제들이 프란치스꼬를 형제회의 요람이라 할 뽀르찌운꿀라로 모셔갔다. 바로 여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가 내용을 보충한 마지막 유언을 받아쓰게 했고, 그 본문은 타인의 문학적 수정 없이 프란치스꼬의 언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 유언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감사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친히 홀로 형제회를 창설하셨다는 확인이었다.
그는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하였고, 모든 형제들이 어떤 일에든 종사하고 일할 줄 모르는 형제는 일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애긍은 일이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간곡하고 전에 없이 엄하게 당부들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또 하나의 회칙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끝맺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치고 그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읽어 달라 하여 들은 뒤, 천사들의 인도로 형제들을 떠나 주님께로 옮겨갔다. 프란치스꼬는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뽀르찌운꿀라에서 임종했다. 2년 뒤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꼬의 유해는 성 지오르지오(Giorgio)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지금의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작은 형제회 한국관구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