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신라는 삼국시대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예전에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벌이는 '황산벌'이란 영화가 있었다. 영화에서 백제의 계백장군은 전라도 사투리를 그리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영화에 웃음을 더해주었다. 당시 충청도 분들이 계백장군이 충청도 사투리를 쓰도록 영화를 만들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를 비교해서 설정을 해야 더 코믹하고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황산벌이란 영화 말고도 일반 TV 안방극장 사극에서도 보면 삼국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삼국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던 적대국으로 실제로 “삼국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점이 평소에 굉장히 궁금하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과거 삼국시대에 사용한 언어에 대한 연구 자료가 거의 없다보니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가 없어 발간된 책자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작년 가을에 그동안 출토된 목간들을 수집하여 연구한 결과를 책자로 발간한 서적이 나와서 구입하여 읽어보았다.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쓴 “목간(木簡)에 기록된 고대(古代) 한국어(韓國語)”란 책자인데 전공서적이라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좀 어렵게 느꼈지만 삼국시대 역사와 언어에 관심이 많은 터라 그런대로 읽어볼 만 했다.
목간(木簡)이란 나무나 대나무를 잘 다듬어서 그 위에 글씨를 써 넣은 글을 말한다. 나무토막에 글을 써 넣은 역사는 중국의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후한말까지 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종이가 발명되면서 목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중국에서 발견된 목간은 약 40만 점, 일본에서 발굴된 목간도 22만 점 이상인 반면 한국에서 발견된 목간은 440점 정도로 적다, 그만큼 이 나라에 부침이 많아 전쟁 통에 모두 불에 타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고대 한국어는 삼국통일 시점부터 고려가 건국하기 이전까지의 한국어를 고대 한국어라고 불렀는데 목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삼국시대의 언어를 포함하여 고대 한국어의 범주에 넣고 있다. 한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목간의 연대는 6세기 중엽부터 9세기까지 작성된 목간으로 이를 고대 목간이라 부른다.
고대 한국어 자료 중에는 각종 금석문이나 고문서를 포함한다. 그런데 백제어를 기록한 금석문이나 고문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겨우 백제어 자료라 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의 지명 정도이며,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인명이나 관직명 등이 보조 자료로 존재하기는 하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백제가 멸망하고 한참 후인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로서 여기에 기록된 단어들이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표기법을 적용하였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백제어 연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백제시대 작성된 목간자료의 발견은 백제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실 백제목간이 출토되기 전에는 백제의 문자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80점 가까이 출토된 백제의 목간자료는 백제의 표기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각종 금석문이나 고문서는 기록의 주체가 대개는 국가 기관이거나 고위 관리이며 한어(漢語)로 기록된다, 반면 목간의 기록 주체는 하급 관리가 대부분이며 국가의 기록물에 나오지 않는 지명이나 인명, 물건 이름 등이 이두와 같은 우리말 표기법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비문 같은 자료는 거의 대부분 중국 한어(漢語)의 어순을 따랐기 때문에 한국어 문장 표기의 예로 볼 수가 없다. 또한 논어를 적은 목간처럼 기존텍스트를 그대로 옮겨 적은 중국 한어 목간도 한국어 표기가 아니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 연구 대상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을 논의할 때에 백제와 신라의 표기를 구별하지 않고, 신라의 표기법을 바로 고대 한국어 표기법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주로 이용한 한국 고대어 자료에는 각종 금석문, 고문서, 향가 등인데 이들은 대부분 신라의 자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백제목간이 적잖이 발굴된 상황이므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해졌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옛 백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는 백제목간이라 할 수 있지만 목간의 작성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신라목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함께 출토된 유물 중에 기와조각에 716년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간에 쓰인 글씨의 표기방법이 “말음첨기와 훈주음종(아래 설명 나옴)”의 신라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있어 신라목간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고, 특히 백제의 표기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백제목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사(숫자)의 일치는 언어의 계통을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의 언어계통을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도 당연히 수사(數詞)가 된다. 그런데 출토된 목간 자료들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백제어와 신라어는 표기법이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차이가 있는 것은 언어의 차이라기보다는 방언의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백제어와 신라어를 하나의 공통어로 묶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이 두 방언을 합하여 고대 한국어로 칭한다. 그러나 북방 부여계어(夫餘係語) 계통의 수사(數詞)를 사용한 고구려 언어는 남방계 언어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언어적으로는 백제가 신라와 가까웠지만 표기방법은 백제는 고구려와 표기법(韓音字 위주)이 유사하다. 반면 신라는 훈주음종(訓主音從: 어휘형태는 뜻으로 읽고, 문법형태(조사)는 소리로 읽음, 예 去隱春 : 가는 봄)과 말음첨기(末音添記 : 훈자이건 음자이건 그 말음을 덧붙여 표기) 표기법을 따른다. 전문가의 견해는 신라는 지역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인 표기법을 고안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목간에 기록된 백제어와 신라어의 수사(數詞)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이 수사를 고구려의 수사와 비교하면 아주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목간의 표기에서 백제어와 신라어의 차이는 거의 없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따라서 백제어와 신라어는 남방의 한계어(韓係語)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남방 한계어의 수사를 고구려 수사와 비교해 보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목간에 쓰인 수사는 남방의 한계어(韓係語)와 북방의 한계어(韓係語)가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제어와 신라어는 남방 한계어(韓係語)에 속하고 고구려어는 북방 부여계어((夫餘係語)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결과를 도출해내는데 익산 미륵사지 1호 목간이 기여한 바가 아주 크기 때문에 미륵사지 목간은 한국어학사에서 국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학계에 계시는 학자 분들의 연구결과이나 나는 개인적으로 삼국은 수시로 전쟁을 하면서 국경지대는 전쟁의 승패에 따라 자신이 거주하는 땅의 국적이 수시로 달라지는 상황이라 국경지대에 사시는 분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을 것 같고, 이러한 사례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인 서동요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며, 특히 백제와 신라 사람들이나 국경을 넘어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투리의 차이가 좀 심해서 그렇지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