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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未時,오후1시~3시)쯤 량주형 일행은 옥룡자(玉龍子) 도선대사(道詵大師)를 만나기 위하여 탐라 남원(南元) 법화사(法華寺)에 도착했다.
법화사는 남원 서귀포항구에서 오 리(약 2km) 정도 떨어진 오름 아래에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천혜의 요새지였다. 탐라명당(耽羅明堂)이 있는 행정의 중심지 산북(山北)에서 탐라 반대편까지 해안선을 따라 달려왔는데, 중간에 두 번 역참에서 말을 갈아타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십대 중반인 량주형이나 사십대 중반인 양(楊)사부도 모두 말타기에는 아주 능하여 뒤쳐짐이 없었다.
“문사(文士)께서 말도 잘 타십니다.”
량주형이 양(楊)사부에게 치사(致詞)를 했다. 의외였던 것이다.
“저도 원래는 량(梁)씨이고 우리 량씨는 대체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지요. 고쿠리(高句麗)가 망할 때 량만춘(梁萬春)성주(城主)께서 고쿠리 전역의 량씨들을 탐라로 데려오지는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고종 때 일이지만 선대의 당태종 이세민이 당군과 신라군에게 고쿠리의 량씨들은 모두 참살하라는 칙명을 내려놓아서 남겨진 량씨들은 모두 성을 바꾸어 연명했던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궁사범도 원래는 량(梁)씨입니다.”
“어허. 그래요.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감히 성주님께 가르침이라니요... 가끔 사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법화사(法華寺)는 탐라에서 가장 큰 절이다. 승려의 숫자는 300명 정도인데 특이한 점은 승려 모두 일반인과 같이 머리를 기르고 있었고, 모두 무술에 능한 승병들이었다.
법화(法華)라는 절 이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 나온 이름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행과 깨달음에 대해서 풍부한 사례를 수록하고 있는 경전(經典)이다. 충실한 내용으로 수행의 지침서로 최고라는 평을 듣는 경전(經典)이다.
하지만 법화사(法華寺)는 장보고(張保皐,원래 이름 량궁복)가 당나라, 신라, 왜국 등의 장보고(張保皐) 상단(商團)의 근거지마다 설립한 절의 이름이기도 한데, 탐라 남원(南元) 법화사(法華寺)는 장보고가 탐라에 비밀리에 설립한 절이다. 장보고 상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장보고상단의 다른 근거지에서는 탐라 남원 법화사는 알지 못했다.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량주형 일행의 말들을 쉬게 하려고 마굿간으로 데리고 갔다.
“성주님께서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절의 운영을 맡고 있는 스님이 영접을 나왔다.
“주지스님께서는 탑광실(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방,보통 주지스님 집무실이다.)에 계십니다. 같이 가시지요.”
절의 중심부에 있는 탑광실에서 일행은 법화사의 주지스님인 도선대사를 만났다.
스님을 만났을 때의 예절인 삼배(三拜)를 올리려고 했으나 도선대사는 맞절로 삼배를 대신했다.
“선종(禪宗)에서는 허례허식을 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하시지요.”
도선대사는 칠십에 가까운 노구지만 건장한 체격에 안광이 형형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위엄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빈도(貧道)가 탐라를 드나든지도 어언 사십년이 넘었습니다. 한때는 부친의 사연을 듣고 분노하고 복수의 광기에 몸을 맡긴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몸과 마음이 평온하니 조금은 깨달음을 얻은 듯 합니다.”
도선대사가 겸손하게 말머리를 떼며 손수 차를 대접했다.
“탐라에 용호아지발도가 탄생했다는 경사는 어제 들었습니다. 두 분 사부(師父)님들의 지극한 노력이 거둔 작은 결실이겠지요. 치하드립니다.”
“제가 십오 년 전에 아드님 이름을 지어 드렸지만 벌써 이렇게 헌헌장부가 되셨으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도선대사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금오를 보며 량주형에게 치사를 했다.
“그때 금오(金烏)라고 이름을 지어주셔서 이런 광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아드님의 양물이 크고 불알이 세 개라서 세발달린 태양의 새 삼족오(三足烏)가 생각나서 지어 드린 이름인데 이 혼탁한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구제해줄 영웅이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경하드립니다.”
량주형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이제 황해용왕께 금오를 보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그런 것 같습니다.”
“성주님도 알고계시겠지만 석 달 후에 계절풍에 맞추어 법화사 상단의 배가 탐라 상단과 같이 탐라 상단의 이름으로 송악(松岳)으로 출발합니다. 그때까지 석 달 간 금오는 두 분 사부님과 같이 빈도가 준비해둔 공부가 있으니 법화사에 머물며 공부를 하고 송악의 황해용왕께 가면 될 듯 합니다. 그리 하시겠습니까?”
“대사님의 은덕에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할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인연이라고 생각해 두시지요. 빈도도 나이가 칠십이 다 되어서 이것이 운수납자(雲水衲子,참선 수행하는 선승을 말한다.)의 마무리가 될 듯합니다.”
“그러면 저는 전에 대사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이제 금오와 부자의 연을 끊고, 탐라에서 금오를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미타불. 견성오도(見成悟道) 그 어렵지만 가장 쉬운 길로 같이 가보시지요. 성불(成佛)하소서.”
량주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행이 타고 왔던 말 세 마리를 몰고 말을 달려 법화사를 떠났다.
금오의 간 곳을 모르게 하려고 호위군사도 없이 온 걸음이었다.
량주형은 바람과 같이 산북을 향해서 달려갔다.
도선대사와 미리 정해둔 일이었지만, 말위에서 량주형은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숙소를 배정받은 금오일행은 안내스님을 따라 법화사 절 구경을 하였다.
법화사 옆 골짜기로는 우마차길이 잘 닦여 있고, 튼튼하게 지은 창고건물이 요소요소에 잘 숨겨져 있었다.
“옥룡(玉龍) 장보고(張保皐)장군께서 신라에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이 곳 법화사에 상단의 온갖 교역품들과 보물들을 가져다 놓으셨는데 그것들을 기본 재산으로 해서 탐라 상단(商團)의 이름으로 당, 신라, 왜국, 천축, 회회국 등과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옥룡자(玉龍子)께서는 옥룡의 아드님으로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희 법화사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장보고상단의 상인이며 군사이고 뱃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삭발도 하지 않고 고기를 즐겨 먹으며 무술 수련과 군사조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도선대사께서는 이 모든 것이 불 법리(佛 法理)에 어긋나지 않고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도선대사는 장보고의 아들로 영암 낭주 최씨 집안의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지 십년도 되기 전에 장보고가 변을 당하고 장보고 일족이 신라조정의 손에 의하여 멸문지화의 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낭주 최씨 집안에서는 처녀가 개울물에 떠내려 오는 큰 오이를 먹었더니 임신이 되었다고 소문을 내고, 깊은 산중 절에서 아이를 길러 화를 모면하게 하였다.
비록 산중 절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자랐지만 아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했다. 때마침 신라 지방호족들에게 지금까지의 교종과는 다른 선종이라는 새로운 불교가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하여 알려졌고, 지방호족들의 비호 아래 선종은 크게 성장했다.
선종은 신라의 지방조직인 9주5소경마다 각기 세력을 형성하여 9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다.
지리산 남원(南原) 실상산문, 하슬라(강릉) 사굴산의 사굴산문, 영월 사자산의 사자산문, 문경 희양산의 희양산문, 보령 성주산의 성주산문, 곡성 동리산의 동리산문, 창원 봉림산의 봉림산문, 장흥 가지산의 가지산문, 해주 수양산의 수미산문 등 9산선문(九山禪門)이 신라 각 지방에 근래 삼십여 년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도선은 동리산문의 개산조(開山祖) 혜철대사의 계보를 잇는 장문인이었으나, 신라 최초의 선문인 지리산 남원(南原) 실상산문의 실질적인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십여년 전에는 신라 헌강왕의 간청으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에서 왕사로 잠시 있었으나, 신라왕실의 호화로운 사치 중독과 귀족들의 아수라 권력다툼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행운유수(行雲流水) 수행승으로 전국을 떠돌며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마주했다.
“이것은 량만춘 성주의 팔우노(八牛弩)입니다.”
안내하던 스님이 전각 안쪽에 잘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팔우노(八牛弩)를 소개했다. 소 여덟 마리가 활줄을 당겨 끌어서 화살을 쏘는 거대한 석궁(石弓)이다.
이어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노(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을 애꾸눈으로 만든 영물(靈物)이 이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안내하던 승려가 웃음 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고쿠리(高句麗) 말기 량만춘 성주의 활약에 대해서는 금오는 양사부에게 여러 번 자세히 들은 바가 있었지만 각종 노(弩)들을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양사부와 궁사범 모두 찬찬히 노(弩)들을 보면서 그 원리를 연구했다. 특히 양사부는 각 노들의 상세한 그림을 하나하나 그렸다.
금오와 일행들에게 방 세 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요사(療舍)채가 배정되었다. 다른 집들과는 뚝 떨어진 위치에 오름 중간쯤에 위치한 호젓한 곳이었다.
“황해용왕께 법화사의 비둘기를 이용하여 전서구(傳書鳩)를 날렸습니다.”
궁(弓)사범이 금오에게 보고했다.
탐라 법화사에는 바다를 호령했던 장보고 시절 구성된 각종 연락수단이 잘 유지되어 있었다. 전서구(傳書鳩)는 가장 빠른 연락수단이기는 했으나, 비둘기의 훈련 및 유지가 아주 어려워 좀처럼 보기드믄 연락수단이었다.
“석 달 동안의 공부계획을 봉서(封書)로 도선대사께서 보내왔습니다. 오전에는 자유롭게 공부하고 오후에는 도선비기(道詵祕記)를 공부하게 됩니다. 법화사에서는 점심을 먹는군요. 승려들의 무술수련이 그만큼 고되다는 뜻이겠지요. 말로만 듣던 도선비기를 저희 세 사람 모두에게 전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주 된 공부 대상은 물론 주군(主君)이시고, 저희 두 사람은 공부한 것을 무덤 속까지 함구할 것입니다.”
양사부가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화롯불에 봉서를 태웠다.
이튿날 오후. 탐라 법화사의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창고 안을 들어서자 모래와 흙, 나뭇조각 등으로 신라 전역과 탐라가 세밀한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로 세로 모두 일곱장(丈,약21m)에 달하는 커다란 모형이었다.
창고의 한 쪽은 높이 2장(丈,약6m)의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어서 모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신라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군요. 대단합니다.”
양사부가 모형을 보며 가벼운 탄성을 올렸다.
“도선대사께서 이 모든 곳을 다니시고 지리(地理)를 연구하셨다니 대단합니다.”
“제 고향 토산(兔山)이 저 쪽에 있군요. 동대천(東大川) 유역의 용암산지(熔岩山地)로 천험의 요새지요.”
궁사범이 감개무량(感慨無量)해서 모형 속의 고향을 쳐다봤다. 고향을 떠나 온지도 어느새 10여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이곳은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어도 시간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온갖 전투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금오가 모형판의 구석구석을 보며 그 정교함에 감탄했다.
“신라와 탐라의 지형도를 보니 땅의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것이 느껴지지요?”
도선대사가 누마루에 일행을 앉히고 지형도를 보며 가르침을 시작했다.
“따라서 넓고 평평한 탐라의 지형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병대만의 돌격이나 망구다이 같은 전술들은 신라의 산지에서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땅의 생김새와 기운의 흐름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병법서들, 주나라 손무(孫武)가 쓴 『손자(孫子)』, 전국시대 위나라 오기(吳起)의 『오자(吳子)』, 제나라 사마양저(司馬穰苴)의 『사마법(司馬法)』, 주나라 위료(慰繚)의 『위료자(尉繚子)』, 당나라 이정(李靖)의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한나라 황석공(黃石公)의 『삼략(三略)』, 주나라 여망(呂望)의 『육도(六韜)』등은 모두 중원(中原,중국)을 배경으로 저술된 것으로 산이 많고 국토가 좁은 신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빈도는 삼십여 년전 이인(異人)을 만나 두치강(섬진강)변 모래 위에서 지형과 전략의 오묘한 이치를 전수 받았습니다. 그 후에 이십여 년간은 부친이신 장보고장군의 원한을 갚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신라 전역을 다니며 지형과 그 전술적 쓰임새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상함을 깨닫고 이후 10년간은 비보풍수로, 결함이 있는 땅들을 완전한 땅, 사람이 살기 좋은 땅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금번 석 달간의 공부는 지리와 전략전술에 관한 공부가 두 달, 그리고 마지막 한 달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천리(天理)의 진리가 모든 지리에 적용됨을 느끼는 깨달음의 공부가 되겠습니다.”
“탐라의 용호아지발도께서는 병법서들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와 닿으셨는지요?”
“저는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가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한 번 외워보실 수 있습니까?”
“예.”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상권
태종이 이정(李靖)에게 말하였다.
“고구려가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므로, 내가 사신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듣지 않소. 이에 나는 군대를 출동시켜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경의 의향은 어떠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알고 있기로는 고구려의 정권을 잡고 있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병법에 능통하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또 중국이 멀리까지 군을 출동시켜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3만의 군사를 맡겨 주신다면 신이 연개소문을 사로잡아다 바치겠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어떠한 전략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은 정병(正兵)으로 공략하려고 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장군이 지난 번 돌궐(突厥)을 평정할 때에는 기병(奇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정병을 사용하려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남만(南蠻)을 정벌하여 그 군주인 맹획(孟獲)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을 때 바로 정병을 사용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진(晋)나라의 마륭(馬隆)이 양주(凉州)의 강족(羌族)을 토벌할 때에도 제갈량의 팔진도에 의하여 편상거(偏箱車)를 활용하였는데, 지세가 광활하고 평평하면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만들어 적의 진공에 대비하였고, 도로가 협착하면 수레 위에 판자 지붕을 만들어 덮고 적과 싸우면서 진군을 계속한 바 있소. 그러니 정병은 옛날의 명장들도 중요시하였던 것이기는 하오.”
이정이 말하였다.
“지난 번 신이 돌궐을 토벌할 때에 서쪽으로 몇 천리를 진격하였습니다. 그 때 만일 정병을 쓰지 말았다면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녹각거(鹿角車)와 편상거(偏箱車)는 전투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사들의 전투력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면, 전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전진하면서 대오를 정돈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교대로 상황에 따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마륭은 제갈량의 옛 전법을 많이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수(隋) 나라 송로생(宋老生) 군을 격파하였을 때에 접전 초기에는 우리 의병이 불리하여 약간 물러났었소. 그래서 내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남쪽 언덕에서 달려 나가면서 적진의 측방으로 돌격하였소. 그렇게 하니 송로생 군은 후면이 차단되어 궤멸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송로생을 사로잡게 되었던 것이오. 이것은 정병이오, 기병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폐하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武)의 자질로서, 병법을 배워서 능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병법은 황제(黃帝) 이래로 먼저 정병(正兵)을 사용하고 나중에 기습공격을 하는 기병(奇兵)을 사용하였습니다. 또 곽읍에서 송로생 군과 대전할 때 우리 군은 대의(大義)로써 기병한 의병이니, 이는 정병입니다. 그러나 당시 건성(建成)이 말에서 떨어짐으로써 우리 군이 약간 후퇴하게 된 것은 기병 전법을 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이 반문하였다.
“그 당시 우리 군은 약간 물러났었소. 그러나 하마터면 통일의 대업이 실패로 돌아갈 지경이 되였던 것인데 이것을 어찌하여 기병 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용병에 있어서 적의 전방을 향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을 정병이라고 하며, 후퇴하는 것을 기병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우리의 우군(右軍)이 약간 후퇴하지 않았다면 송로생 군을 어떻게 유인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손무병법》에 ‘적에게 유리한 상황임을 보여 주어 적을 유인하고, 적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공격하라.’ 하였습니다. 송로생은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용맹만 믿고 경솔히 진격하다가 뜻밖에 후미가 차단되는 바람에 폐하에게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병법에 이른바 ‘기병을 정병으로 바꾸어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한(漢)나라 곽거병은 병법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의 용병술이 은연중 손무와 오기(吳起)의 병법과 부합되었으니, 이러한 경우도 있는가 보오, 그 때 우리의 우군(右軍)이 퇴각하자, 고조(高祖)께서는 아연실색하였는데 내가 달려가 용전분투하여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켜 승리로 이끌었으니 병법을 배우지 않고도 은연중 손무와 오기의 병법과 부합한 것이라 할 수 있소. 경의 말이 참으로 옳소.”
태종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후퇴하는 군은 모두 기병(奇兵)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가 후퇴할 때에 깃발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못하며, 북소리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장단이 맞지 않으며, 군사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호령이 통일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의 패퇴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깃발의 높이가 가지런하고 북소리의 장단이 맞으며, 호령이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혼란된 것처럼 보인다면, 이것은 적이 패하여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적의 기계(奇計)가 숨어 있습니다. 병법에 ‘거짓으로 패주하는 적은 추적하지 말라’ 하였으며, 또 ‘공격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공격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위장해 보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기병을 말한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곽읍의 전투에서 우리 우군이 약간 후퇴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으며, 송로생이 사로잡힌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만일 정병을 변화시켜 기병으로 사용하고, 기병을 변화시켜 정병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용병을 잘하는 장수는 기병과 정병을 적절히 배합하여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무쌍하여 신묘한 성과를 거두는 것은 하늘의 조화로 돌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태종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종이 물었다.
“기병과 정병은 평소부터 구분되어 있는 것이오? 아니면 대전시에 상황에 따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조조(曹操)의 《조공신서(曹公新書)》에 보면 ‘아군의 병력이 2군이고 적의 병력이 1군이면, 1군을 정병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1군은 기병으로 사용하며, 아군의 병력이 5군이고 적의 병력이 1군이면, 3군을 정병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군을 기병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원칙일 뿐입니다. 손무는 ‘전투의 승리는 오직 기병과 정병의 운용 여하에 딸려 있을 뿐이다. 기병과 정병을 상황에 따라 변화시켜 사용한 경우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많다. 기병을 정병으로 변화시켜 사용하고, 정병을 기병으로 변화시켜 사용함은 마치 순환되는 고리와 같이 끝이 없다. 누가 이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손무의 이 말은 기병과 정병의 깊은 뜻을 잘 터득한 것입니다. 기병과 정병은 평소에 구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군사들이 장수의 전술을 익히지 못하고 副將들 역시 장수의 명령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에는 반드시 두 부대로 나누어서 가르쳐야 하며, 각기 소속된 깃발과 북소리의 신호를 숙지하게 한 다음, 깃발과 북소리의 신호에 따라 두 부대가 서로 합쳐지게도 하고 다시 나누어지게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병법에 ‘분산과 집중을 변화시켜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전투 훈련의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훈련하여 장병들이 모두 장수의 전술을 숙달한 다음에는 마치 목동이 양 떼를 몰듯이 군사들이 장수의 지휘에 따르게 됩니다. 군사들이 장수의 지휘에 잘 따른다면 어찌 구태여 기병과 정병을 구분하려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손무가 말한 바 ‘적의 전술은 환히 드러나 보이게 하고, 아군의 전술은 절대로 적에게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은 기병과 정병을 변화하여 사용하는 전술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병과 정병을 구분하는 것은 평소 전투 훈련을 할 때의 일이요, 대전시에 상황에 따라 적절히 변화하여 사용하는 것은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이 병법은 참으로 심오하오. 조조도 반드시 이 심오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오. 다만 《조공신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병법을 전수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병과 정병을 구분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며, 기정(奇正)의 원칙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오.”
태종이 다시 말하였다.
“《조공신서》에 ‘정병은 정면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이요, 기병은 좌우에서 불시에 기습 공격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경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조조가 지은 《손자병법주해》에는 ‘먼저 진격하여 적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부대를 정병이라 하고, 정면 대결한 다음 뒤 늦게 나와서 공격하는 부대를 기병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좌우에서 불시에 기습 공격하는 것을 기병이라 한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대병력이 적과 당당히 대결하는 것은 정병이고, 장수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기 재량으로 임기응변하여 운용하는 군은 기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뒤늦게 출격하는 것이나 좌우에서 기습공격하는 것들을 기병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고 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우리 측의 정병을 적이 기병으로 오인하게 만들고, 우리 측의 기병을 적이 정병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것이 손무가 말한 ‘적의 전술은 환히 드러내 보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기병을 정병으로 변화시켜 사용하고 정병을 기병으로 변화시켜 사용해서 적이 우리 측의 의도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손무가 말한 ‘우리의 전술은 절대로 적에게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는 것이 아니겠소?”
이정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옛날의 명장들을 능가하십니다. 신이 따를 바가 못됩니다.”
태종이 물었다.
“부대를 분산시키기도 하고 집중시키기도 하여 사용하는 경우에 어떤 것을 기병이라 하고, 어떤 것을 정병이라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용병을 잘하는 자는 병력을 모두 정병으로 사용하거나 모두 기병처럼 사용하기도 하여 적으로 하여금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정병을 사용하여도 승리하고, 기병을 사용하여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의 군사들도 오직 승리한 결과만 알 뿐이며, 어떻게 하여 승리한 것인지 그 과정은 알지 못합니다. 장수가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군사들을 분산시키기도 하고 집중시키기도 하는 것은 오직 손무(孫武)만이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오기(吳起) 이하의 인물은 그에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오기의 방법은 어떠하였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이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오기에게 적과 아군이 서로 대진하게 되었을 때에 적을 무찌르는 방법을 묻자, 오기는 ‘신분이 천한 자로서 용감한 사람을 앞장세워 적을 공격하게 하고, 교전이 시작되면 패주하게 합니다. 이들이 패주하더라도 처벌하지 말고 적의 동정을 살펴야 합니다. 만일 적군의 진퇴에 절도가 있어서 패주하는 아군을 함부로 추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적장에게 지모(智謀)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적병들이 일제히 나와서 패주하는 아군을 추격하면서 전진하거나 정지함에 종횡으로 산만하여 절도가 없다면 이는 적장에게 재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서슴치 말고 공격하여야 합니다.’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기의 전술은 대체로 이와 같아 심오하지는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손무처럼 ‘정병으로 적과 대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의 외숙인 한금호(韓擒虎)가 ‘경과는 함께 손ㆍ오(孫ㆍ吳)의 병법을 이야기할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도 기병과 정병의 운용을 말한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한금호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기병과 정병의 전술을 알았겠습니까? 그는 기병은 기병으로만 알고, 정병은 정병으로만 알 뿐이며, 기병과 정병을 서로 변화시켜 무궁무진하게 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태종이 물었다
“옛 사람들은 적과 대진하였을 때에 기병으로 불시에 기습을 감행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기병과 정병의 변화무쌍한 전법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고대의 전투는 대부분 전술을 약간 아는 자가 전술을 전혀 모르는 상대방을 이겼고, 재능이 약간 있는 자가 재능이 전혀 없는 상대방을 물리친 것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병법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들면, 진(晋)나라 사현(謝玄)이 진왕(秦王) 부견의 80만 대군을 격파한 것은 사현이 싸움을 잘한 때문이 아니요, 부견이 워낙 싸움을 잘못했기 때문에 패했던 것입니다.”
이 때 태종은 좌우의 신하를 돌아보고 사현의 전기를 찾아오게 하여 그것을 읽어 보고 말하였다.
“부견의 어떤 점이 용병을 잘못한 것이란 말이오?”
이정이 이에 대해 답하였다.
“신이 부견에 대한 기록들을 보니, 당시 진(秦)나라 군사들은 모조리 궤멸되고 오직 모용수(慕容垂)가 거느리고 있던 부대만이 온전하였습니다. 부견이 겨우 패잔한 기병(騎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모용수의 진영으로 달려가자,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慕容寶)는 부견을 죽이자고 권하였으나 모용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나라 군의 내부에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모용수 휘하의 부대만이 온전하였으니 부견은 모용수의 모략에 빠졌던 것입니다. 부하의 모략에 빠지는 자가 어찌 적을 이겨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부견이 전술을 모르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손무병법》에 ‘계책이 많은 자는 계책이 적은 자를 이기고, 계책이 적은 자는 계책이 없는 자를 이긴다.’ 하였으니, 모든 일이 다 그러한가 보오.”
태종이 물었다.
“황제(黃帝)의 병법을 세상에서 악기경(握奇經)이라 하기도 하고, 악기경(握機經)이라고도 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기(奇)의 음이 기(機)이므로 기(機)자로 쓰기도 하는데, 그 뜻은 같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4개의 진(陣)을 정병으로 하고, 4개의 진을 기병으로 하며, 8개의 진에 소속되지 않은 여기(餘奇), 즉 중군(中軍)을 악기(握機)라 한다’ 하였습니다. 여기의 기(奇)는 나머지란 뜻인데, 기(奇)의 음이 기(機)이므로 악기(握奇;나머지 부대인 지휘 본부)를 악기(握機), 즉 작전기밀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병법은 모두가 기략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깁니다. 기략을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휘관인 대장만이 이것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병은 장수가 군주로부터 명령을 받아 정상적으로 군을 운용하는 것이며, 기병은 장수가 상황에 따라 재량으로 군을 운용하는 것입니다. 옛 병법에 이르기를 ‘평소에 명령이 잘 이행되어 군사들을 가르치면 군사들이 복종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장수가 군주로부터 명령을 받아 정상적으로 군을 운용한다는 것입니다. 또 ‘용병술은 미리 말하여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장수가 출전하게 되면 군주의 명령도 때로는 따르지 말아야 할 경우가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장수가 현지 상황에 따라 군을 운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수로서 정병만 사용할 줄 알고 기병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을 수비만 하는 장수[守將]라 하며, 기병만 사용할 줄 알고 정병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을 전투만 하는 장수[鬪將]라 합니다. 기병과 정병을 적절히 배합하여 사용할 줄 알아야 국가를 보전하는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기(握奇)와 악기(握機)가 본래부터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병법을 배우는 자는 이 두 가지를 함께 통달하여야 합니다.”
태종이 물었다.
“병법에 ‘진(陣)은 아홉 개로 형성되며, 8개의 진은 주변에, 나머지의 1개진은 중앙에 위치한다. 중앙(중군)은 대장이 장악하여 사방 팔면의 진이 모두 중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큰 진에는 작은 진이 들어 있고 큰 부대에는 작은 부대가 들어 있으며, 평소에 남쪽을 전면으로 하고 북쪽을 후면으로 삼고 있다가 회군할 때에는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 전면인 남쪽이 후면이 되고 후면인 북쪽이 전면이 되게 하며, 진격시에는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후퇴 시에도 급히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전진과 후퇴에 방진(方陣)의 진용을 유지하며, 전후좌우의 사면 중에 어느 한 곳이든 적의 공격을 받으면 모두 전위가 되어 적과 대항하고, 나머지 여덟 개의 진지는 모두 후위가 되어 서로 구원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어느 방향이든 적과 대치하는 곳이 전위가 되며, 적이 중간을 침범하면 전위와 후위가 모두 이를 구원하여 상산(常山)에 살고 있는 솔연(率然)이라는 뱀처럼 대응하여야 한다.’ 하였소. 그리고 ‘진영의 수가 다섯에서 시작하여 여덟에서 끝나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말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갈량은 돌을 가지고 종횡으로 포진하여 팔행(八行)의 방진을 만들었으니 이것은《악기경》의 도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전에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에 반드시 먼저 이 진형을 사용하였습니다.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악기경》은 그 대강일 뿐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팔진은 천(天)ㆍ지(地)ㆍ풍(風)ㆍ운(雲)ㆍ용(龍)ㆍ호(虎)ㆍ조(鳥)ㆍ사(蛇)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기에 무슨 뜻이 있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 병법을 비장(秘藏)만하였기 때문에 엉뚱하게 이러한 여덟 가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팔진은 본래 하나의 진형을 여덟 개로 나눈 것입니다. 천ㆍ지는 그 진에 대한 대장기(大將旗)의 명칭이었고, 풍ㆍ운은 정기(旌旗)의 이름이었으며, 용ㆍ호ㆍ조ㆍ사는 이 네 가지 동물처럼 용감하고 재빠르게 공격하라는 뜻에서 붙인 부대 명칭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전하게 됨으로써 엉뚱하게 물건의 형상과 병력을 배치하는 것으로 잘못 알게 된 것입니다. 만일 물건의 형상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라면, 어찌 이 여덟 가지 밖에 없겠습니까?”
태종이 물었다
“진영의 수가 다섯에서 시작되어 여덟에서 끝나는데, 이것은 물건의 형상을 따라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경의 말은 실로 옛날의 제도에 부합되는 말이오. 경이 더 자세히 말해 주었으면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황제(黃帝)가 맨 처음 구정(丘井)의 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병법을 제정하였습니다. 토지를 구획함에 있어 1개 정(井)에는 종횡으로 네 개의 길을 내어 9등분으로 구획하고,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나머지 여덟 구역은 사전(私田)으로 삼아 여덟 가호(家戶)가 이를 경작한 다음, 공전의 수확은 나라에 바치고 사전의 수확은 여덟 가호가 각각 나누어 갖게 하였습니다. 그 모양이 우물 정(井)자와 같으며, 아홉 개의 네모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방진에 원용하여 아홉 개의 네모꼴 가운데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구역은 실제 병력을 포진하는 실지(實地)로 삼고, 나머지 귀퉁이의 네 구역은 실제 병력이 포진하지 않는 허지(虛地)로 삼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진영의 수가 다섯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또 아홉 개의 네모꼴 중 중앙에는 대장이 위치하며 나머지 여덟 구역에는 여덟 개의 부대가 사면을 에워싸고 방진을 칩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덟에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형을 유지하고 있다가 적을 만나 진형을 적절히 변화해서 대응하여야 할 시기에 이르면 이리저리 병력을 배치하여 혼전을 벌이더라도 진용이 어지럽지 않고, 방진을 원진(圓陣)으로 바꾸더라도 대오가 분산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분산되면 여덟 개의 작은 진을 이루며, 이를 다시 합치면 하나의 큰 진이 된다’는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황제의 병법은 참으로 심오하오. 후세에 비록 하늘과 같은 지혜와 신과 같은 지략을 가진 인물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오. 황제 이후 이 진법을 이어받을 만한 사람으로 누구를 들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주(周)나라 초기에 태공망(太公望)이 이 병법을 응용하여 기도(岐都)에서 정전법(井田法)을 세우고, 병거(兵車) 3백 대와 용감한 군사 3천 명으로 군의 대오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보 또는 7보 앞으로 나아가서 대열을 정돈하고,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적과 대전할 때마다 진용을 가다듬는 전법을 가르쳐 주나라 군대를 목야(牧野;河南省 淇縣)에 전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백 명의 용사로 적에게 도전하여 무공을 세우고, 4만 5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주나라 《사마법(司馬法)》은 태공망의 병법을 근본으로 한 것입니다. 태공망이 세상을 때나자, 제(齊)나라 사람들이 그 병법을 전수하게 되었습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오패(五覇)의 으뜸인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다시 태공의 병법을 연구하여 군사들을 훈련시켰는데, 모두 ‘절도가 있는 군대’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나라는 천하를 제패하고 여러 제후들을 복속시켰던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유학자들은 흔히 말하기를 ‘관중은 패자(覇者)의 신하일 뿐, 왕자(王者)를 보필할 수 있는 큰 인물은 못 된다.’고 하는데, 이는 관중의 병법이 왕자의 제도인 정전법에서 나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제갈량은 왕자를 보필할 만한 인물이었는데도 자신을 관중과 악의(樂毅)에게 비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관중 역시 왕자를 보필할 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오. 다만, 그 당시 주나라의 왕조가 쇠퇴하여 관중을 등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중은 제후국인 제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무력으로 천하를 바로잡았던 것이오.”
이정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이처럼 잘 알아보시니, 노신의 이 영광스러움은 옛날의 현신(賢臣)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제 신은 관중이 제 나라를 다스린 법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중은 제나라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3군(軍)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구를 1개 궤(軌)로 삼고, 군대에서는 다섯 명을 1개 오(伍)로 편성하였습니다. 10궤를 1개 리(里)로 삼고, 군대에서는 50명을 소융(小戎;소부대)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또한 4리를 1개 연(連)으로 삼고, 군대에서는 2백 명을 1졸(卒)로 편성하였으며, 10연을 1개 향(鄕)으로 삼고 군대에서는 2천 명을 1개 여(旅)로 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5향을 1개 사(師)로 삼고, 군대에서는 1만 명을 1개 군으로 편성하였습니다. 이것은《사마법》에서 1개 사만을 5개 여단(旅團)으로 나누고, 1개 여단을 5개 졸로 나눈 것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실제는 모두 태공 망의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마법》을 전양저가 저술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사기(史記)》의 양저 열전을 보면, 제 나라 경공(景公) 때에 전양저는 용병술에 능하여 연(燕)ㆍ진(晋) 두 나라의 침공군을 격파하였으므로, 경공이 그를 후대하여 병권의 요직인 사마(司馬)라는 관직을 맡겼기 때문에 ‘사마양저’라고 일컫게 되었으며, 자손들도 사마씨(司馬氏)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위왕(威王) 때에 이르러 옛날의《사마법》을 다시 논술하고 또 양저가 전한 병법을 함께 엮어서 사마양저의 병서 수십 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세의 병학가들은 다시 이것을 권모(權謀)ㆍ형세(形勢)ㆍ기교(技巧)ㆍ응양(陰陽)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사마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한(漢) 나라의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이 고대의 병법서 1백 82가(家)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35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것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소. 그것은 어떠한 내용의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장량이 배운 것은 태공의 병법인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이며, 한신이 배운 것은 전양저의 《사마법》과 손무(孫武)의 《손자》입니다. 그러나 이들 병법서의 대요는 삼문(三門)과 사종(四種)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무엇을 삼문(三門)이라고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태공의 병법은 모두 2백 37편입니다. 그 중에서 태공모(太公謀, 모략에 관한 것)가 81편인데 이것은 이른바 음모(陰謀)로서, 한 마디말로는 그 뜻을 다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태공언(太公言)이 71편인데, 이것도 법으로서 심오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으로 태공병(太公兵, 병법에 관한 것)이 85편인데, 이 또한 사람의 재주로는 그 내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삼문이라 합니다.”
태종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사종(四種)이라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한(漢)나라 임굉(任宏)이 논한 네 종류의 병법서를 말합니다. 즉 권모(權謀)ㆍ형세(形勢)ㆍ음양(陰痒)ㆍ기교(技巧)를 합해서 사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사마법》의 맨 첫머리에 봄과 겨울의 사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무슨 까닭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때(농한기)에 따라 사냥을 함으로써 무예를 익히고, 사방에서 잡은 짐승들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례(周禮)》에서는 사냥을 국가의 가장 큰 행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왕(成王) 때에는 기산(岐山) 남쪽에서 사냥을 한 바 있었고, 강왕(康王) 때에는 사냥을 하기 위해 풍읍(豊邑)의 궁정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였으며, 목왕(穆王) 때에도 사냥을 하기 위해 도산(塗山)에 제후들을 모이게 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두 천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주 나라가 쇠퇴하여 이러한 일을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게 되자, 제(齊) 나라 환공(桓公)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여 제후들을 소릉(召陵)에 모이게 하였으며, 진(晋) 나라의 문공(文公)은 천토(踐土)에 제후들을 모아 놓고 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제후의 패자(覇者)가 천자의 일을 받들어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실로 《사마법》에 있는 구벌(九伐)의 법으로 천자의 명령을 잘 받들지 않는 자들을 응징하는 조치로서, 제후들이 천자에게 조회한다는 이름을 빌기도 하고, 혹은 천자가 제후국에 순수(巡狩)한다는 이름을 빌어 군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한 것입니다. 이는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함부로 군을 출동시킬 수 없으므로 봄과 겨울의 농한기에 사냥을 함으로써 군사들이 무예를 익혀 국방을 튼튼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마법》의 첫머리에 봄과 겨울의 사냥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니 그 의미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병거(兵車) 2광(廣, 1광은 전차 15대)을 사용한 법을 설명하고, ‘여러 군관들이 신분과 소속을 밝히는 깃발을 보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군이 명령하지 않아도 군대가 완벽하게 행동하였다.’ 하였으니, 이것도 주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좌씨(左氏)의 말에 의하면, ‘초왕은 병거 30승(乘)을 좌ㆍ우로 나누어 2광을 만든 다음, 병거 1승에는 보병 1백 명[卒]을 배속시키고, 여기에 다시 보병 50명[兩]을 덧붙였으며, 보병들은 병거의 오른쪽에 배치하여 수레가 가는 방향에 따라 전투를 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주나라의 제도입니다. 신이 생각컨대 1백 명을 졸(卒) 이라 하고, 50명을 양(兩)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초나라의 병거에 대한 제도는 수레 한 대에 보병 1백 50명을 배속하였으니, 이것은 주나라의 병제에 비하면 병력이 다소 많은 것 뿐입니다. 주나라의 제도는 병거 한 대에 보병이 72명이고 중무장한 병사[甲士]가 3명인데, 중무장한 병사 1명에 보병 24명을 소속시켜 도합 25명을 1갑(甲)으로 하여, 3갑에 총 74명이 배속되었습니다. 초나라는 산과 늪이 많은 지역이며, 병거는 적고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병력을 많이 배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3개 부대로 나누는 것은 주나라 제도와 마찬가지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춘추시대에 진(晋)나라의 순오(荀吳)가 오랑캐[狄]를 칠 때에는 병거를 사용하지 않고 보병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병이오, 기병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순오 역시 병거의 편성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비록 병거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군의 편성법은 변경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1개 부대는 좌측을 맡는 좌각(左角)이 되게 하고, 또 1개 부대는 우측을 맡는 우각(右角)이 되게 하였으며, 1개 부대는 전위대(前衛隊)인 전거(前拒)가 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병거의 편제를 세 부대로 나누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병거 1승(乘, 대) 에 대한 것이나 병거가 천 승이나 만 승이 되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조(曹操)의 《신서(新書)》를 살펴보면 공격용 병거 1대에 병사 75명을 배치하는데 병사들을 셋으로 나누어 일부는 전위대인 전거(前拒)가 되게 하고, 나머지는 각각 좌우를 맡게 하였습니다. 또한 운반용 수레(守車)에는 취사병 10명, 군수품 관리병 5명, 마소(牛馬) 관리병 5명,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병사 5명, 도합 25명을 배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공격용 병거(전차) 1대와 수거(守車) 1대에는 총 1백 명의 병사가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10만의 군사를 출동할 경우에는 병거 1천 대를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운반용의 중거(重車, 輜重車ㆍ守車) 1천 대가 배속됨으로써 도합 2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체로 순오의 법을 따른 것입니다. 또 한(漢) 나라와 위(魏) 나라 시대의 군제를 보면, 병거 5승을 1대(隊)로 하고 지휘관으로 복야(僕射) 1명을 두었으며, 10승을 1사(師)로 하고 솔장(率長) 1명을 두었으며, 또한 군관 2명을 두어 솔장을 돕게 하였는데, 병거가 아무리 많아도 모두 이에 준하였습니다. 신이 옛 제도를 참작하여 만든 군제에서는 옛날의 기병부대를 도탕대라고 하였으며, 오늘날의 전봉대(戰鋒隊)는 옛날의 기병과 보병을 같은 수로 편성한 부대이고, 오늘날의 주대(駐隊)는 옛날의 병거를 겸한 부대입니다. 신이 지난 번에 서쪽 지방의 돌궐(突厥)을 토벌할 때 몇 천리의 험준한 산악을 행군하였지만, 이 편제를 한번도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군을 통제하였던 방법이 참으로 훌륭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위공문대》중권
태종이 영주(靈州)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 이정을 불러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짐(朕)이 이도종(李道宗)과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 등에게 명하여 군을 이끌고 설연타(薛延陀)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철륵(鐵勒)의 여러 부족들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우리의 관리들이 자기들을 통치해줄 것을 애걸하였으므로, 짐은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었소. 그 후 설연타는 서쪽 지방으로 도주하였는데, 짐은 후환이 될까 염려하여 이세적(李世勣)을 보내어 토벌하게 한 결과, 북쪽 변방을 모두 평정하게 되었소. 그러나 여러 부락에는 번족(蕃族)과 한족(漢族)이 뒤섞여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모두가 분란(紛亂)없이 오랫동안 안주하게 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칙명을 내려 돌궐로부터 회흘(回紇)의 부락에 이르기까지 66개 소의 역(驛)을 설치하게 해서 상황을 탐지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좋은 방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한족 출신과 번족 출신을 혼합하여 편성하지 말고, 각기 구분하여 부대를 편성한 다음, 따로 따로 훈련을 시켜야 옳을 듯 싶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적이 쳐들어오게 되면 은밀히 주장에게 명하여 전투시에 각기 기호(旗號)를 변경하고 복색(服色)을 바꾸어 기습적으로 공격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그럴 때에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병법에 이른바 ‘모든 술책으로 적을 기만한다’는 것으로서, 번병(蕃兵)을 한병(漢兵)인 것처럼 기만해 보이고, 한병을 번병인 것처럼 기만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이 번병과 한병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면, 공격과 수비에 대한 우리의 계책을 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병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이쪽의 계책을 측량할 수 없게 하여 기만을 당하게 만듭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 방법은 참으로 내 뜻에 맞소. 경은 은밀히 변방의 장수들에게 지시하여, 번병과 한병을 가지고 적을 기만시켜 기정(奇正)의 변화를 발휘하는 전법을 쓰도록 하오.”
이정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폐하의 영명하심은 하늘이 내신 것으로 한 가지만 들으면 열 가지를 아시니, 신이 어찌 다 설명 드릴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제갈량의 말에 ‘절도가 있는 군대는 무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에게 패하지 않고, 절도가 없는 군대는 유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을 이길 수 없다.’ 하였는데, 짐은 이 말이 결코 불변의 정론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이는 제갈량이 절도가 없는 군대를 개탄한 나머지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손무병법》에 ‘군사를 가르치는 방법이 밝지 못하고 장교와 사병의 임무가 일정하지 못하며, 진용이 이리 저리 풀어져 있는 군을 규율이 없는 군대[亂兵]라 한다.’ 하였으니, 예로부터 군에 규율이 없어 절도를 잃음으로써 적에게 승리를 안겨 준 예는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군사를 가르치는 방법이 밝지 못하다’ 함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열병(閱兵)할 때에 옛 법도를 따르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장교와 사병의 임무가 일정하지 못하다’ 함은 장교와 사병의 임무가 자주 교체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군에 규율이 없어 절도를 잃음으로써 적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 함은 자멸하는 것이며, 적이 강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군에 절도가 있으면 평범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에게 패하지 않고, 군에 절도가 없어 스스로 혼란해지면 훌륭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위험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을 더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사열하는 법은 참으로 소홀히 할 수 없소.”
이정이 말하였다.
“군사들에 대한 교육이 법도에 맞으면 적과 대전시에 군사들은 모두 용감히 싸워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육이 법도에 맞지 못하면 지휘관이 아무리 아침 저녁으로 독려하고 질책하여도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신이 애써 옛 제도를 수집하여 도표를 만들어 군사들을 가르치는 이유는 절도가 있는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은 짐을 위하여 옛날의 진법(陣法)을 가려 뽑아 모두 도식(圖式)으로 그려 올리도록 하오.”
태종이 말하였다
“번족(蕃族) 출신의 군사들은 준마로 달려가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을 잘하는데, 이것을 기병(奇兵)이라 할 수 있겠소? 또 한족(漢族) 출신의 군사들은 힘센 궁노(弓弩)로 적을 협공하기를 잘하는데, 이것을 정병(正兵)이라 할 수 있겠소?”
이정이 말하였다
“《손무병법》에 보면, ‘용병을 잘하는 자는 세(勢)로 승리를 추구하며, 개개인의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려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각자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활용하며, 세(勢)에 따라 운용한다.’ 하였습니다. 손무가 말한 ‘사람을 가려 뽑는다’ 함은 번족 출신과 한족 출신 등을 그들의 장기(長技)에 따라 싸우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번족 출신은 기마전에 장기가 있으니 이는 속전속결에 유리합니다. 또 한족 출신들은 궁노에 장기가 있으니 이는 지구전(持久戰)에 유리합니다. 이와 같은 장기는 번족과 한족의 지역적인 특성(勢)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것을 기병과 정병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신이 앞에서 ‘번병(蕃兵)과 한병(漢兵)을 각기 기호(旗號)를 변경하고 복색(服色)을 바꾸어 공격하게 한다’고 말한 것은 기병과 정병을 계속 바꾸어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기마전에도 정병이 있고, 궁노로 싸우는 데에도 기병이 있으니, 어찌 일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경은 기병과 정병의 전술을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우선 아군의 전법을 적에게 보여 주어 적으로 하여금 이에 대처하게 한 다음 그 전법을 변경시키는 것이 바로 훌륭한 전술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이제 경의 말을 알아듣겠소. 《손무병법》에 ‘적을 기만하는 방법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가, 적이 도저히 측량할 수 없게 하여야 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장수가 피아의 형세에 따라 승리를 쟁취하되, 장병들이 승리한 원인을 전연 알지 못하게 한다.’ 하였는데, 그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것 같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이미 병법의 태반을 터득하셨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근래에 거란(契丹)과 해족(奚族)들이 모두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예속되었으므로, 짐은 이들 지역에 송막(松漠)과 요락(饒樂)의 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서 이들을 관할하게 하였소. 짐은 설만철(薛萬徹)을 도호부사로 임명하여 이들을 다스리려 하는데, 어떻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설만철의 능력은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만 못합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번족 출신 중에 병법을 통달한 자들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들과 더불어 송막과 요락 지역의 산천과 도로 상태, 번족의 토속과 민심 등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바 있으며, 또 멀리 서역(西域) 지방의 여러 부족에 대한 얘기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들의 말은 모두 믿을 만 하였습니다. 또한 신이 이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는데, 모두 이를 이해하고 오묘한 뜻에 탄복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그들을 의심하지 마시고 임무를 맡기소서. 설만철은 용맹은 있으나 지략이 부족하오니, 설만철에게만 모든 일을 맡기기는 어렵습니다.”
태종이 웃으며 말하였다.
“현재 번족 출신의 장병들은 모두 경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소. 옛 사람의 말에 ‘중국의 여건은 이족(夷族) 출신의 장병을 써서 이족을 공격하여야만 성공할 수 있다.’ 하였는데, 경이야말로 이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여러 병서(兵書)를 보았지만 모두 《손무병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손무의 13편은 모두가 허실(虛實)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오. 용병에 있어서 허실의 세(勢)를 잘 알고 있으면 싸움에 승리하게 마련이오. 지금 여러 장수들은 ‘적의 세가 실(實)한 경우에는 싸움을 회피해야 하고, 적의 세가 허(虛)한 경우에는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은 하고 있으나, 막상 적과 부닥치게 되면 허실의 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처하는 자가 많지 않을 것이오. 이것은 적을 유인하여 적의 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유인을 당하여 군세를 적에게 노출시키기 때문이오. 경은 여러 장수들을 위하여 이에 대한 병법의 요점을 말해 주기 바라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장수들에게 병법을 가르치려면, 먼저 기(奇)와 정(正)이 서로 변화하는 방법을 가르친 다음에야 허실의 형세를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기병을 정병으로 변화시키고 정병을 기병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허한 것처럼 보이는 형세가 사실은 실한 것이고, 실한 것처럼 보이는 형세가 사실은 허한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손무병법》에 보면 ‘싸우기 전에 미리 적의 계책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하고, 군을 출동시켜 전장의 형세를 파악하며, 피아의 상황을 살펴서 지형의 험이도(險易度)를 파악하고, 소규모의 전투를 실시하여 적세의 허실을 파악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기(奇)와 정(正)을 변화시켜 운용하는 것은 우리 측에 있고, 형세의 허실은 적에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기와 정을 변화시켜 운용하는 것은 적세의 허실을 환히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방법입니다. 적의 세가 허하면 아군은 기병으로 대응하여야 합니다. 장수가 만일 기와 정을 변화시켜 운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비록 적세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한다 할지라도 적을 유인하여 승기를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폐하의 명령을 받들어 다만 장수들에게 기와 정의 전술만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허실에 대한 방책도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기병을 정병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적측에서 아군이 기병으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대응할 경우에 아군은 정병으로 바꾸어 공격하며, 정병을 기병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적측에서 아군이 정병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대응할 경우에 기병으로 바꾸어 공격함으로써, 적의 세는 항상 허약하게 만들고 아군의 세는 항상 견실하게 하는 것이니, 이 전법을 장수들에게 가르쳐서 쉽게 깨닫도록 하여야 할 것이오.”
이정이 말하였다
“많은 병서의 내용들을 요약하면 모두가 ‘적의 작전계획은 드러나게 하고 아군의 작전계획은 드러나지 않게 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 하여야 한다’는 것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이를 장수들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요지도독(瑤池都督)을 설치하여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는데, 번족 출신의 병사와 한족 출신의 병사는 성격이나 재능이 각기 다르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사람을 탄생시킬 때에 본래 번족과 한족의 구별을 둔 것은 아닙니다. 번족의 사는 곳은 멀고 황막(荒漠)하여 곡식이 잘 자라지 않으므로 사냥을 생업으로 하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은 말타기와 전투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들에게 은혜와 신의로 대하고, 옷과 식량을 주어 구휼한다면 모두가 한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 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셨으니, 우리의 국경 수비대는 철수시켜 내지에 주둔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군량 수송을 절감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힘을 다스린다[治力]’는 것입니다. 다만 한족 출신의 관리로서 번족의 사정을 잘 아는 자를 선발하여, 이들을 분산시켜 여러 성보(城堡)를 지키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오래도록 평 안이 유지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변이 일어나거든 곧 한병을 출동시켜 진압시키도록 하십시오.”
태종이 물었다.
“손무가 말한 ‘힘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손무는 ‘아군은 싸움터의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멀리서 오는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편안히 있어 충분히 휴식한 상태에서 피로에 지쳐있는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배불리 먹고 있으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적을 상대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힘을 다스리는 방법의 대강을 말한 것입니다. 용병술에 능한 자는 이 세 가지를 여섯 가지로 활용합니다. 즉, 아군의 유인작전에 말려 들어오는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안정을 유지한 상태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자중하고 있으면서 경거망동하는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철저히 경계하고 있으면서 경계가 해이해진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통제를 엄격히 하고 있으면서 군기가 문란한 적을 상대하며, 아군은 굳게 수비한 상태에서 공격해 오는 적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을 다스리는 전법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적과 싸위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오늘날 손무의 병법을 배우는 자들은 한갓 글만 읽을 뿐 그 뜻을 깊이 연구하여 널리 응용하는 자가 적소. 경은 부디 힘을 다스리는 법을 여러 장수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오.”
태종이 물었다.
“싸움에 익숙한 노련한 장병들은 지금 거의 다 죽고 없으며, 여러 부대들이 새로 편성되어 아직 실전의 경험이 없소. 지금 이들에게 훈련을 시키려면 어떤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찍이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에 세 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습니다. 먼저 5명의 병사를 1오(伍)로 묶어 소부대 훈련을 실시하고, 소부대 훈련이 끝나면 대부대 훈련을 실시하였으니, 이것이 첫 단계입니다. 대부대 훈련은 1개 오를 10개 오로, 다시 10개 오를 1백 오로 합쳐 가면서 훈련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다음은 부장이 지휘하는 사단 규모의 훈련을 실시하게 합니다. 부장은 여러 부대를 집결하여 큰 진영을 구성하고 보다 큰 규모의 훈련을 실시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대장은 이 세 단계의 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열병식을 거행하여 제도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살피며, 어느 쪽을 기병(奇兵)으로 하고 어느 쪽을 정병(正兵)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한 다음, 장병들을 집합시켜 선서를 하게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합니다. 훈련시에 폐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 이를 관망하신다면, 모든 전투 대형을 전부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오(伍)를 편성하는 법에 대하여 몇몇 병가 사이에는 이설이 있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알맞는다고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춘추좌전(春秋左傳)》에는 ‘전차 25대를 1편(偏)으로 하는 전차부대를 선두에 두고, 5명을 1오로 하는 보병부대를 후미에 둔다.’ 하였으며, 또 《사마법(司馬法)》에는 ‘5명을 1오로 한다.’ 하였습니다. 《위료병법(尉?兵法)》의 속오령(束伍令)에는 ‘5명을 1오로 하여 군호(비표) 1개를 사용한다.’ 하였으며, 한(漢) 나라 제도에는 군령 하달에 사용하는 비표로, 한 자 중 되는 척적(尺籍)과 1개 오가 함께 사용하는 오부(伍符)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부(符)ㆍ적(籍)을 만들 때에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로 만들었으므로 본래의 제도를 잃게 된 것입니다. 신이 옛 법을 참작하여 전차(兵車)를 사용할 경우에는 5명의 1오를 바꾸어 25명으로 하고, 이것을 변화시켜 75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전차 1대에 보명 72명과 갑사(甲士) 3명을 배속시키는 제도입니다. 만일 전차 대신 기병(騎兵)을 사용할 경우에는 기병 8명으로 보병 25명에 해당시켰으니, 이는 다섯 병종(兵種)이 다섯 가지 병기를 사용하여 적을 막아내는 오병 오당(五兵五當)의 제도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여러 병가(兵家)의 병법은 모두 5명을 1오로 편성하는 법을 중요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법(伍法)을 작게 적용시키면 5명이 되고, 이것을 크게 적용시켜 다섯 갑절로 할 경우에는 25명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3열로 하면 75명이 되고, 다시 이것을 다섯 갑절로 하면 3백 75명이 됩니다. 3백 75명 중에 3백 명을 정병(正兵)으로 하고 60명을 기병(奇兵)으로 하며, 나머지 15명은 전차 1대마다 갑사 3명씩 배치하여, 모두 5대의 전차에 나누어 소속시킵니다. 정병 3백 명을 반으로 나누어서 좌ㆍ우 2개 부대로 만들고, 기병 60명을 반으로 나누어서 좌ㆍ우 2개 부대로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정병과 기병 모두 좌ㆍ우 부대의 병력수가 동일하여 한편으로 기울지 않게 됩니다. 사마양저가 말한 ‘5명을 1개 오로 하고 10오를 1개 대(隊)로 한다.’는 법을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가장 알맞은 법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이세적(李世勣)장군과 더불어 병법을 논해 보면, 경의 주장과 같은 것이 많았는데, 다만 그는 병법의 출전(出典)을 규명하지 않았을 뿐이었소. 경이 창안(創案)한 육화진(六花陣)은 어느 진법에 근거한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에 의거한 것입니다. 이 육화진은 대진(大陣) 속에 소진(小陣)이 들어 있고, 대영(大營) 속에 소영(小營)이 들어있으며, 진영의 정면과 모퉁이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빈틈이 없고, 진영간의 질서가 정연합니다. 옛 팔진도의 진법이 이러하므로, 신은 육화진의 진도(陣圖)를 만들 때에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외면의 6군(軍)은 방진(方陣)을 이루고, 내부의 1군은 원진(圓陣)을 이루어, 마치 여섯 갈래로 갈라진 꽃모양과 같다 하여, 세간에서 육화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내부는 원진이고 외면은 방진으로 하는 것은 무슨 뜻에서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방진은 정병에서 나오고 원진은 기병에서 나옵니다. 방진은 절도에 맞는 보법(步法)을 바탕으로 하고, 원진은 선회하여 운행하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보법은 땅을 상징하였는데, 땅은 모가 났으니 보법도 모가 나게 하는 것이며, 운행은 하늘을 상징하였는데, 하늘은 둥그니 진영의 연결을 원형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법이 절도에 맞고 진영의 연결이 정돈되어 있으면, 진용(陣容)을 아무리 변화시키더라도 혼란되지 않습니다. 육화진은 제갈량의 옛 법인 팔진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보법은 일직선으로 하여 방형(方形)을 나타내고, 병기의 운용은 자유자재로 움직여 원형으로 하여야겠소, 즉 보법을 익혀 절도있는 걸음을 가르치고, 병기 다루는 법을 익혀 손 놀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오. 그리하여 손과 발이 마음대로 재빨리 움직이게 되면 훈련은 이미 절반 이상 된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오기(吳起)의 ‘대오가 끊기더라도 완전히 떨어지지 말고, 후퇴하더라도 완전히 흩어지지 말라.’한 말은 보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군사를 대오에 맞추어 훈련시키는 것은 마치 바둑알을 바둑판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바둑판에 구획된 금이 없다면 어떻게 바둑알을 제대로 놓을 수 있겠습니까? 손무가 말하기를 ‘전장의 지형에 따라 전투의 규모를 정하고, 전투의 규모에 따라 작전의 부서를 정하고, 작전의 부서에 따라 투입할 병력을 정하고, 투입된 병력에 따라 피아의 전투력에 대한 종합 평가를 내리고, 완벽한 평가에 따라 승리를 가져온다. 승리하는 군대는 마치 24냥의 무게인 1일(鎰)로 한 푼을 상대하는 것과 같고, 패전하는 군대는 이와 정반대여서 한 푼으로 1일을 상대하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이는 피아의 군세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이에 필요한 대응을 하며, 전장의 지형을 살피 원진으로 싸우느냐, 아니면 방진으로 싸우느냐를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손무의 말은 참으로 의미가 깊소. 장수가 만일 전장의 거리와 지형의 넓고 좁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진퇴의 절도를 어떻게 알맞게 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평범한 장수 중에는 진퇴의 절도를 아는 자가 적습니다. 전투를 잘하는 자는 기세가 맹렬하고 진퇴의 절도가 기민합니다. 그 기세는 마치 활을 힘껏 당기는 것과 같고, 그 절도는 화살을 재빨리 발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은 그 전법을 다음과 같이 육화진에 적용하였습니다. 대오를 세울 때에는 각 대의 간격을 10보로 하고, 주대(駐隊)와 앞 부대와의 간격을 20보로 하였습니다. 1대마다 하나의 선봉대를 두고 적을 향하여 전진할 때에는 50보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런 다음 첫 번째 나팔소리가 울리면 각 대가 모두 전진하되 10보 이내에서 정지합니다. 그렇게 하여 네 번째 나팔소리가 울리면 각각 창을 겨누고 대기하고 앉았다가 북소리가 울리면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세 번 크게 외치고 창으로 세 번 적을 공격합니다. 그 후 적진 쪽으로 30보 내지 50보 되는 지점까지 나아가 적의 동정을 보아 대응함으로써 적을 제압합니다. 이 때, 후방에 있던 기병(騎兵) 부대가 앞을 향하여 전진하는데, 역시 50보 지점까지를 한계로 하여 때에 따라 멈춥니다. 앞에는 정병(正兵), 뒤에는 기병(奇兵)을 배치하여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앞에는 기병, 뒤에는 정병으로 바꾸어 배치해서 공격해 오는 적을 맞아 기회를 엿보아 역습합니다. 이것이 육화의 진법이며, 대체로 이러한 진용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조조(曹操)의 《신서(新書)》에 이르기를 ‘포진하고 적과 대치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표목(表木)을 세워 놓은 다음, 부대를 이끌고 각각 표목에 따라 군사를 배치하며, 만일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도 다른 부대가 구원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부대의 책임자를 참형에 처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떠한 전술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적을 앞에 놓고서 표목을 세우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표목을 세우는 것은 단지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에만 쓰는 방법입니다. 옛날 용병술에 능한 자는 군사들에게 정병의 전술만을 가르칠 뿐이요, 기병의 전술은 가르치지 않았으며, 군사들을 마치 양떼 몰듯이 하여함께 전진하고 함께 후퇴할 뿐이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조조는 교만하여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당시의 장수들 중에는 《신서》를 신봉하는 자들까지도 《신서》의 단점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그것을 비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표목을 세워 진을 친다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폐하께서 만드신 파진(破陣)의 악무(樂舞)를 보니, 전면에는 네 개의 표목을 세우고, 후면에는 여덟 개의 깃대를 늘어놓은 다음 무인(舞人)들이 좌우로 나아가 일직선으로 몸을 돌리는가 하면 재빨리 달리기도 하고 서서히 거닐기도 하며, 징을 울리고 북을 치는데 각기 절도가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곧 팔진도(八陣圖)에 있는 사두 팔미(四頭八尾)의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악무가 보기에 훌륭하다는 것만 알 뿐이니, 군용(軍容)이 그 안에 깃들어 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한(漢) 나라의 고조(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노래하기를 ‘어찌하면 용맹한 사람을 얻어 사방을 지킬 것인가?’ 하였소. 병법이란 마음으로 통하여 전수할 수는 있어도 말로 전할 수는 없는 법이오. 짐이 파진의 악무를 지었는데, 오직 경만이 그 참뜻을 깨달았을 뿐이오. 후세 사람들도 내가 이 악무를 공연히 지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오.”
태종이 물었다
“동서남북과 중앙에 청(동)ㆍ적(남)ㆍ백(서)ㆍ흑(북)ㆍ황(중앙)의 오색 깃발을 세우는 것은 정병에 해당하는 것이오? 또 깃발을 이리 저리 변화시켜 적의 침공을 격퇴하는 것은 기병에 해당하는 것이오? 군을 여러 부대로 분산시키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여, 기병을 정병으로 바꾸고, 정병을 기병으로 바꾸어 사용하려 할 경우에는 부대의 수를 얼마로 하는 것이 합당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은 옛 법을 참작하여 사용합니다. 3대(隊)를 합칠 때에는 두 깃발을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시키지는 않으며, 5대를 합칠 때에는 두 깃발을 교차시키고, 10대를 합칠 때에는 다섯 깃발을 교차시켜 신호합니다. 또한 나팔을 불고 교차되었던 다섯 깃발을 떼어 놓으면, 앞서 합쳐졌던 부대들은 다시 흩어져 본래대로 10대가 됩니다, 그리고 교차되었던 두 깃발을 떼어 놓으면 앞서 합쳐졌던 부대들은 다시 풀어져 5대가 되며, 서로 기대기만 하고 교차되지는 않았던 두 깃발을 떼어 놓으면 앞서 합쳐졌던 부대들은 다시 풀어져 3대가 됩니다. 부대가 분산되어 있을 경우에는 합치는 것을 기병이라 하고, 합쳐져 있을 경우에는 분산시키는 것을 기병이라 합니다. 분산시키고 합치는 법을 세 번 반복하여 훈련하면 다시 본래의 정병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하면 사두팔미(四頭八尾)의 진법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알맞은 대법(隊法)입니다.”
태종은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칭찬하였다.
태종이 물었다
“조조의 《신서》에는 전기(戰騎)ㆍ함기(陷騎)ㆍ유기(遊騎)의 세 가지 기병이 있는데, 오늘날의 기병(騎兵)은 이 중에서 어느 것에 해당되오?”
이정이 말하였다.
“신이 《신서》를 보니, ‘전기는 선두에 두고, 함기는 중앙에 두며, 유기는 후미에 둔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다만 똑같은 기병을 세 종류로 나누어 이름만 바르게 붙였을 뿐입니다. 기병대의 8기(騎)는 전차[兵車]에 배속되는 24명의 보병에 해당되며, 24기는 전차에 배속되는 72명의 보병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옛날의 편제입니다. 전차대에 배속되는 보병은 마땅히 정병(正兵)의 전술을 가르쳐야 하고, 기병(騎兵)은 마땅히 기병(奇兵)의 전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조조의 말에 따르면, ‘선두와 후미 및 중앙으로 나누어 세 겹의 매복[三覆]을 설치한다.’ 하였고,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단지 용병술 가운데 한 가지의 예를 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삼복(三覆)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전기는 반드시 함기와 유기의 앞에 두는데,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기병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전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만일 수레를 돌려 진용을 전환시킬 경우에는 후미의 유기가 선두가 되고, 선두의 전기는 후미가 되며, 중앙의 함기는 변화에 따라 독립시키기도 하고 앞뒤 부대에 통합시키기도 하여 능률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는 모두 조조의 전술을 응용한 것입니다.”
태종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조의 말에 미혹(迷惑)되었을 것이오.”
태종이 물었다
“전차대와 보병ㆍ기병 이 세 병종은 각각 특색이 있지만, 이를 사용하는 법은 모두 마찬가지인 셈이오. 그런데 이것을 응용하는 묘수는 역시 사람(장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어리진(魚麗陣)을 살펴보니, 편(偏), 즉 25대의 전차로 편성된 부대를 선두에 두고, 오(伍), 즉 5명을 단위로 하여 편성된 보병부대를 후미에 배치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다만 전차대와 보병만을 사용하고 기병은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진법을 좌거(左拒)ㆍ우거(右拒)라 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적의 공격을 방어할 뿐이요, 기병(奇兵) 전술을 써서 승리하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晋) 나라 장군 순오(荀吳)는 오랑캐[狄]를 정벌할 때에 전차를 사용하지 않고 보행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자군(自軍)에 기병대가 많아서 그대로 싸우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오직 기계(奇計)를 써서 승리를 거두려고 힘쓴 것이며, 적을 방어할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위의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하여, 기병 한 명을 보병 3명에 해당시키는 비율로 하고, 전차대와 보병의 숫자 역시 이에 적당히 맞추어 부대를 혼합 편성하였습니다. 이것을 상황과 장소에 따라 적절히운용하는 것은 장수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이 방법을 잘 운용한다면 우리의 전차대가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하여 진격할 것인가, 기병부대가 과연 어디로부터 진출할 것인가, 보병부대가 과연 어디로 부터 추격해 올 것인가를 적이 어떻게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땅속 깊이 숨어 있는 것과 같이 하여 그 동태를 파악할 수 없게 하고, 혹은 하늘 위에서 행동하는 것과 같이 하여 민첩하게 공격합니다. 이는 지혜가 뛰어나신 폐하만이 아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야 어찌 이를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물었다.
“태공의 병법을 보면 진을 칠 때에 대진(大陣)은 사방 6백 보(步), 소진(小陣)은 사방 60보를 필요로 하며, 진지 둘레에 12개의 표목을 세워 12진(十二辰)을 표시한다고 하였는데, 그 방법은 어떤 것이요?”
이정이 대답하였다.
“진지의 구획은 사방 둘레가 1천 2백 보로 하고,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각 부(部)마다 병사 1인당 사방 20보의 구역을 담당하게 합니다. 즉 종렬의 개인 간격은 5보, 종렬의 개인 거리는 4보로 합니다. 1개 진에 약 2500명의 병사를 배치하되, 사방 3백 보의 정방형을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동ㆍ서ㆍ남ㆍ북ㆍ중앙의 오방(五方)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네 귀퉁이는 공지(空地)로 남겨 둡니다. 이것이 진과 진 사이에 같은 규모의 진을 수용할 만한 여유를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할 때, 용사 한 사람이 각각 3000명 의 병사를 관장하고, 진지마다 6000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병력이 도합 3000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태공이 지역을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포진한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경이 만들어 낸 육화진(六花陣)은 지역을 어떻게 구획 하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규모가 큰 열병식(閱兵式)을 할 경우에는 사방 1200보의 면적을 필요로 합니다. 6진(陣)이 각각 400보의 땅을 차지하며 동과 서의 양상(兩廂, 2개 제대)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공지 1200보를 두어 이것을 전투 훈련장으로 사용합니다. 신이 일찍이 30000명의 병사를 훈련시킬 때에 6진을 만들어, 진마다 6000명의 병력을 배치하되, 그 중의 1개 진을 대장 직할의 중군영(中軍營)으로 삼아 시범부대로 삼고, 나머지 5개 진은 방진(方陣)ㆍ원진(圓陣)ㆍ직진(直陣)ㆍ예진(銳陣)으로 배치한 다음, 진마다 5개 형태의 진용으로 변화시켜 도합 25회의 진형(陣形) 변화 연습을 하게 하였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오행진(五行陣)이란 어떤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본래 오방(五方)의 빛깔에 따라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입니다. 즉 동방은 청색, 서방은 백색, 남방은 적색, 북방은 흑색, 중앙은 황색에 해당한다는 오행설(五行說)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영의 형태는 방(方)ㆍ원(圖)ㆍ곡(曲)ㆍ직(直)ㆍ예(銳)의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는 지형에 따라 병력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군사들이 청소에 다섯 가지 형태의 진용을 익혀두지 않으면 적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용병술은 일종의 기만술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오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치 오행의 술수(術數)에 상생(相生)ㆍ상극(相克)의 신비스러운 진리가 있는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실상 군의 대형은 흐르는 물로 상징되는 바, 물이 지형에 따라 흐르듯이 진용 역시 지형에 따라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법의 요체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전에 이세적이 진형의 빈모(牝牡)ㆍ방원(方圓)과 매복 전법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는데, 옛 병법에 그러한 것이 있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빈모의 설은 세간에 전하는 말로 음과 양의 두 뜻이 있을 뿐입니다. 범려가 말하기를 ‘군의 후미는 음을 사용하고, 선두는 양을 사용할 것이며, 적의 양기가 탕진되게 하고, 아군의 음기가 충만되기를 기다려 공격하라.’하였습니다. 이것이 병가에서 음ㆍ양을 운용하는 미묘한 법입니다. 범려는 또 말하기를 ‘오른쪽에 진을 치는 것을 빈(牝)이라 하고, 왼쪽에 진을 치는 것을 모(牡)라 하며, 아침 일찍 진을 치기도 하고 저녁 늦게 진을 치기도 하여, 천도(天道)에 순응하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른쪽에 진을 치기도 하고 왼쪽에 진을 치기도 하며, 혹은 아침 일찍 치기도 하고 저녁 늦게 치기도 하는 것은 때에 따라 변화하여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바, 병가에서 운용하는 기ㆍ정의 변화와 같은 것입니다. 오른쪽(음)과 왼쪽(양)은 인간의 음양이요, 아침(양)과 저녁(음)은 하늘의 음양이며, 기(奇, 陰)와 정(正, 陽)은 하늘과 인간이 서로 변화하는 음양입니다. 만일 한 가지만을 고집하여 융통성을 모른다면, 음과 양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빈모(牝牡)의 진형만을 고집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적의 군세를 탐색하려 할 경우에 원래 정병 작전을 써야 하는 것이나, 때로는 적을 기만하기 위해서 정병 작전을 쓰지 않고 기병 작전을 써야 하며, 적을 공격하려 할 경우에는 원래 기병 작전을 써야 하나, 때로는 적을 기만하기 위해서 기병 작전을 쓰지 않고 정병 작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기병과 정병을 때에 따라 변화시켜 쓴다’ 고 하는 것입니다. 또 군을 매복시키는 법에 있어서 비단 산골짜기나 숲 속에 은폐하는 것만을 복병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병으로 있을 때에는 태산처럼 육중하고, 기병으로 출동할 때에는 번개처럼 민첩하여, 비록 적과 대면한다 할지라도 적은 아군이 정병인지 기병인지 헤아릴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는 정병도 복병인 것입니다. 기ㆍ정의 운용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면 무슨 형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읍니다.”
태종이 물었다.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주작(朱雀)ㆍ현무(玄武, 騰蛇)로 표현되는 사수진(四獸陣)이 상(商)ㆍ우(羽)ㆍ치(徵)ㆍ각(角)의 네 가지 음(音)을 상징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기만술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러면 이것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오?”
이정이 말하였다.
“그대로 두는 것이 곧 이를 폐기하는 방법이 됩니다. 만일 이것을 폐기하면 또 다른 속임수가 더욱 성행하게 될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사진(四陣)은 청룡ㆍ백호ㆍ주작ㆍ현무의 네 가지 짐승 이름을 빌러 오고, 다른 사진은 천(天)ㆍ지(地)ㆍ풍(風)ㆍ운(雲)의 이름을 붙였으며, 또한 상금(商金;서방 백호)ㆍ우수(羽水;북방 현무)ㆍ치화(徵火;남방 주작)ㆍ각목(角木;동방 청룡)을 사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옛날부터 병가들이 사용해 온 기만술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속임수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폐기한다면 장수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자들을 어떻게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겠습니까?”
태종이 한 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경은 이것을 비밀로 하고, 외부에 누설하지 마시오.”
《이위공문대》하권
태종이 물었다.
“장수는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법을 엄하게 하여, 사졸들로 하여금 장수인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들 하는데, 짐은 이 말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오. 옛날에 광무제(光武帝)는 원군이 없는 고립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왕망(王莽)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였는데, 그 당시 광무제는 형법으로 군사들을 엄하게 다스린 적이 없었소. 그런데도 승리하였으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병가의 승패는 그 상황이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한 가지 예만 가지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날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의병을 이끌고 진(秦) 나라 군을 무찔렀는데, 그들의 형법이 진나라보다 더 엄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무제가 군사를 일으켜 승리한 것은 당시 왕망을 원망하는 민심에 순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왕망의 장수인 왕심(王尋)ㆍ왕읍(王邑)은 병법을 전혀 몰랐으며, 단지 병력수가 많다는 것만을 과시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왕망이 스스로 패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손무는 ‘장수가 군사들과 친숙해지기 전에 군사에게 잘못이 있다 하여 처벌하면 군사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고, 이미 친숙해진 뒤에 군사에게 잘못이 있는데도 처벌하지 않으면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군사들을 전투에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장수된 자가 군사들에게 먼저 사람을 베풀어 친숙해진 뒤에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다스려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만일 군사들에게 먼저 사람을 베풀지 않고 형벌만 준엄하게 시행한다면, 제대로 군을 통솔하여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상서(尙書)》에 ‘위엄이 자애심보다 앞서면 성공하고, 자애성이 위엄보다 앞서면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손무의 말은 먼저 자애를 베푼 뒤에 위엄을 보여야 하며, 이와 반대로 먼저 위엄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위엄을 먼저 보이고 자애를 뒤에 베풀게 되면, 그 자애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상서》에서 말한 것은 군을 출동시켜 적과 대치한 뒤에 형법을 철저히 지키라고 경계한 것이요, 군을 출동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하에게 먼저 사랑을 베푼 뒤에 위엄을 보이라는 손무의 말은 만세불변(萬世不變)의 진리인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이 지난 번 소선(蕭銑)의 무리들을 평정했을 때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그 일당의 가산을 몰수해서 장병들에게 시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경만은 홀로 이에 반대하여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괴통(測通)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였소. 짐은 경의 의견을 따랐던 바, 얼마 후 강한(江漢) 일대의 적대 세력들이 그 조치에 감격하여 모두 귀순해왔소. 짐은 ‘문덕(文德)은 사졸들을 감동시켜 따르게 하고, 무위(武威)는 적을 두렵게 하여 굴복시킨다’ 고 한 옛 사람의 말은 경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후한의 광무제가 군벌 적미(赤眉)의 세력을 평정하고는 그들의 진영에 들어가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순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적미의 장병들은 감격하여 말하기를 ‘소왕(蕭王;광무제의 당시 봉호)은 우리들을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여 성심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불어넣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광무제가 자신의 지혜로 그들이 자기에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며, 광무제가 생각없이 함부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이 지난 번 돌궐을 토벌할 때에 번족(蕃族) 출신과 한족(漢族) 출신으로 혼성된 군을 이끌고 천 리나 되는 먼 변방으로 출정하였지만, 신은 옛날 위강(魏絳)이 양간(揚干)을 모욕하듯이 대하거나, 전양저(田穰?)가 장가(莊賈)를 처형하듯이 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심을 다하여 지공무사하게 부하들을 대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에 대하여 잘못 들으시고 신을 발탁하시어 분에 넘치는 높은 지위를 내리셨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문맥과 무위를 가지고 있다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에 돌궐과의 화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당검(唐儉)이 사신으로 돌궐에 갔을 때, 경은 화의로 말미암아 돌궐의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돌궐을 쳐서 패퇴 시켰소. 사람들은 경이 당검을 사간(死間)으로 삼아 희생시키려 했다고들 하였는데, 짐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소. 경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정이 두 번 절하고 대답하였다.
“신은 당검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여 폐하를 섬겼습니다. 그 당시 신은 당검의 설득만으로는 돌궐을 회유하여 복종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군을 출동시켜 돌궐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작은 신의를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이 당검을 사간으로 삼아 그를 죽음에 몰아넣으려 했다고 하는데, 이는 신의 본심이 아닙니다. 신이 《손무병법》의 용간편(用間篇)을 보니, 첩자를 쓰는 것은 가장 하책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 글의 뒤에 논평하기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첩자를 활용하여 성공하기도 하지만, 또한 첩자를 잘못 믿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하였습니다. 만일 청년시절부터 세상에 나와 한 군주를 섬겨 엄정하게 국사를 처리하며, 충성과 정성을 다하여 군주를 섬긴다면 적국에 아무리 유능한 첩자가 있다 할지라도 어찌 그를 이간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검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것은 신이 작은 신의를 저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폐하께서는 더 이상 신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태종이 말하였다.
“인의가 없으면 첩자를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니, 인격이 낮은 자는 첩자를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이오. 주공(周公)은 대의를 위하여 역모에 가담한 친형제들도 처형하였으니, 당검과 같은 사신 한 사람을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소. 이제 짐은 경의 본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소.”
태종이 물었다
“용병술에 있어 ‘주인의 입장이 되어 자기 나라 지역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유리하게 여기고, 객(客)의 입장이 되어 남의 나라 지역에서 싸우는 것을 불리하게 여기며, 속전속결을 좋게 여기고 지구전을 나쁘게 여긴다.’ 하였으니, 이것은 왜 그러한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군(전쟁)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나라에서 싸우거나 지구전을 하는 것이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손무병법》에 이르기를 ‘원정을 가서 장거리에 군량을 수송하게 되면 반드시 백성들이 빈곤해진다’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나라에서 작전할 때에 생겨나는 폐단입니다. 또 이르기를 ‘한 장정을 두 번 이상 징집하지 말고, 군량을 세 번 이상 전장으로 수송해 가지 말라’ 하였으니, 이것은 지구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이 주인의 입장과 객의 입장을 비교하여 보건대,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객의 입장을 바꾸어 주인의 입장으로 만들고, 주인의 입장을 바꾸어 객의 입장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군량을 적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바로 객의 입장을 바꾸어 주인의 입장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계략을 써서 적의 군량을 결핍되게 하고,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은 바로 주인의 입장을 바꾸어 객의 입장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용병에 있어서는 주객(主客)이나 작전의 지속(遲速)에 관계없이 시의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한 경우가 있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춘추시대에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에 좌ㆍ우 2군을 출동시켜 북을 치며 진격하자, 오나라는 2개 군으로 나누어 이를 방어하였읍니다. 이때 월나라는 은밀히 중군(中軍)을 도강시켜 소리를 내지 않고 기습공격하여 오군을 무찔렀습니다. 이것은 객의 입장을 바꾸어 주인의 입장으로 만든 사례입니다 석륵(石勒)이 희담(姬澹)과 싸울 때, 희담의 군은 장거리 행군을 하여 전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석륵은 그의 부장 공장으로 선봉을 삼아 희담의 군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양군이 한 동안 싸우다가 공장의 군이 거짓으로 후퇴하자, 희람이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하였음 너다. 이때 석륵은 군을 매복시켜 놓고 있다가 불시에 공장의 군과 합세하여 좌우에서 희담 군을 협공한 결과, 희담 군을 대패시켰습니다 이것은 피로한 군대를 바꾸어 편안한 군대로 만든 사례입니다. 옛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철질려와 행마(行馬)는 강태공(姜太公)이 창안한 것이라 하는데, 과연 그러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적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용병에 있어서는 아측에서 공격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방어에만 치중해서는 안됩니다. 태공의 《육도(六韜)》에는 방어용 장비나 기구들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공격용 무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태공은 ‘보병을 거느리고 적의 전차대나 기병대와 싸우려 할 경우에는 반드시 구릉이나 분묘, 또는 그 밖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라.’ 하였고, 손무는 ‘천연적인 험지나 구릉과 분묘, 옛 성터 같은 곳에 군사를 주둔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많은 장병들을 지휘하려면 우선 장병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장병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길은 불길한 유언비어를 막고 불안 요소를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만일 주장이 어떤 불안한 마음이나 꺼리는 바가 있으면, 장병들의 마음도 이에 따라 동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은 이러한 틈을 타서 쳐들어오게 됩니다. 지형이 좋은 곳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장병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입니다. 계곡이나 늪지대, 움푹 패인 곳이나 천연적인 험지, 또는 감옥 안과 같고 그물 속과 같은 곳은 사람의 행동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병가들은 이러한 지역을 피하여, 아군의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틈을 타서 적이 공격해 오는 일이 없도록 대비합니다. 구릉이나 분묘, 또는 옛 성터는 크게 험한 곳이 아니니, 아군이 그러한 곳을 장악하면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형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태공의 말은 용병술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니, 흉기로 말하자면 병기보다 더한 것이 어디에 있겠소. 군을 출동시킴에 있어 진실로 인민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을 의심하여 그 출동을 기피할 것이 있겠소? 이후로 장수들 중에 음양설의 길흉에 얽매어 승리의 호기를 놓치는 자가 있으면 경은 이를 잘 깨우쳐 주기 바라오.”
이정이 두 번 절하여 감사해 하고 말하였다.
“신이 《위료병법》을 보니, ‘황제(黃帝)는 문덕(文德)으로 나라를 지키고 무위(武威)로 적을 정벌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형벌과 문덕이며, 음양설의 길흉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음양설은 병가의 기만술로서 전쟁시에 이를 응용하여 장병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는 있는 것이나, 그 자세한 내용을 병사들이 알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 장수들이 흔히 음양설에 구애되어 전투에 패배하는 일이 많으니,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폐하의 훌륭하신 가르침을 받들어 장수들에게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용병을 함에는 부대를 분산시키기도 하고 집중시키기도 하여, 각각 때에 따라 적절히 운용하여야 할 것이오. 역대의 사례 중 이에 잘 대처한 경우는 언제였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부견이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비수(澔水)에서 싸우다가 진군(晋軍)에게 대패하였으니, 이것이 부대를 한 곳에 집중시키기만 하고, 적절히 분산하여 활용하지 못한 사례입니다. 오한(吳漢)이 공손술(公孫述)을 토벌할 때, 부장 유상(劉尙)의 부대와 20리 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습니다. 얼마 후, 공손술이 부대를 이끌고 와서 오한 군을 공격하자, 유상 군은 오한 군과 합세하여 공손술 군을 공격해서 대패시켰으니, 이것이 부대를 분산시켰다가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집중시켜 공격한 사례입니다. 태공의 말에 ‘부대를 분산시켜야 할 경우에 분산시키지 않는 것을 미군(靡軍, 옭혀 매인 군대)이라 하고, 부대를 합쳐야 할 경우에 합치지 않는 것을 고려(孤旅, 외로운 군대)라 한다.’ 하였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렇소. 부견이 처음에는 병학에 정통한 왕맹(王猛)을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오. 그 후 왕맹이 죽자, 부견은 그대로 패망하였으니, 이것을 미군이라 할 것이오. 오한은 광무제(光武帝)의 신임을 얻어 군을 운용함에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촉(蜀) 나라의 공손술을 평정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고려(孤旅)에 빠지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오. 실패와 성공의 이러한 사례는 만세에 거울로 삼을 만하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병서를 보니, 그 수많은 내용이 모두 ‘온갖 방책을 써서 적의 실수를 유도한다’ 는 한 귀절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소. 이에 대하여 경의 견해는 어떠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전쟁에 있어, 만일 적이 작전에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면, 아군이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수가 비슷한 바둑의 두 적수가 대국을 할 경우, 피차간에 단 한수라도 패착을 하면 그 판을 지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전쟁이란 한번의 실수로 말미암아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작전에 많은 실수가 범해진다면 그 승패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공격과 수비,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전술이 아니겠소? 《손무병법》에 ‘적을 잘 공격하는 자는 적이 어떻게 수비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적이 아군의 어느 곳을 공격해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하였소. 그런데 손무는 적이 와서 공격하면 아군 역시 공격하고, 적이 굳게 수비하면 아군 역시 수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공격과 수비를 하나로 연관시키려면 어떠한 방법으로 대처하여야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역대의 전쟁을 보면, 이처럼 서로 공격하고 서로 수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읍니다. 그런데 모두들 손무의 ‘수비는 부족하게 하고, 공격은 충분하게 하라[守則不足 攻則有餘]’는 말을 잘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족하다’는 것을 전투력이 약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충분하다’는 것을 전투력이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전투력이 부족하면 수비하고, 전투력이 충분하면 공격하라’는 뜻으로 잘못 알고 있으니, 이는 공격과 수비의 올바른 법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손무병법》을 살펴보니,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수비하고,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경우에는 공격하라.’ 하였습니다. 이는 적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우선 수비하고 있으면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라는 뜻이요, 오로지 전투력의 강·약만을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손무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공격하여야 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수비를 하고, 수비하여야 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공격을 하여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격과 수비, 이 두 가지는 역할이 분명이 다르므로, 같은 전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참으로 그러하오. 손무의 ‘충분하다’는 말과 ‘부족하다’는 말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전투력의 강ㆍ약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소. 그리하여 수비하는 방법은 아군의 전투력이 부족한 것처럼 적에게 보여야 하고, 공격하는 방법은 아군의 전투력이 충분한 것처럼 적에게 보여야 함을 모르고 있소. 수비할 때에 아군의 전투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면, 적은 반드시 아군의 군세가 허약한 것으로 오판하여 경솔하게 공격해 올 것이니, 이것은 적이 공격할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공격할 때에 아군의 전투력이 충분한 것처럼 보이면, 적은 반드시 우리의 군세가 강성한 것으로 오판하여 여러 곳을 수비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킬 것이니, 이는 적이 수비할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공격과 수비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의 전술인데, 피아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두 가지 일로 나누어지는 것이오. 그리하여, 아군의 공격과 방어가 성공적이면 상대적으로 적의 공격과 방어는 실패하게 마련이고, 적의 공격과 방어가 성공적이면 상대적으로 아군의 공격과 방어는 실패하게 마련이오. 이해와 득실, 성공과 실패는 이처럼 상반되는 것이어서, 적과 아군에 각각 판이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오. 그러나, 공격과 수비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서 그 원리는 같은 것이니, 공격과 수비가 똑같은 법임을 아는 자는 백전백승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손자》에 ‘적의 허실과 아군의 강약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로울 것이 없다[知彼知己 百戰不殆]’ 한 것이니, 이는 공격과 수비가 똑같은 법임을 말한 것이오.”
이정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옛 성인의 병법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공격은 수비하기 위한 방책을 찾기 위해서이고, 수비는 공격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니, 공격과 수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승리를 도모함에 있을 뿐입니다. 장수가 만일 적을 공격할 줄만 알고 수비할 줄을 모르며, 수비할 줄만 알고 공격할 줄을 모른다면, 공격과 수비를 두 가지로 완전히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공격과 수비에 대한 임무를 따로 따로 갈라놓는 결과가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입으로 손ㆍ오의 병법을 암송한다할지라도, 마음속으로 병법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지 않았다면, 공격과 수비가 똑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하였다.
“《사마법》에 ‘나라가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천하가 아무리 태평하다 할지라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하였으니, 이 역시 공격과 수비가 똑같음을 말한 것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는 군의 공격과 수비의 방법에 대하여 최선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공격에 있어서는 비단 적의 성벽과 적의 진영을 공격함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적의 심리를 공격하는 전술이 있어야 합니다. 수비에 있어서는 비단 성벽과 진영을 굳게 지킴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은 크게 말하면 일국의 군주가 해야 할 도리이고, 작게 말하면 일군의 장수가 알아야 할 법입니다. 적의 심리를 공격한다 함은 손무가 말한 ‘적의 허실을 안다’는 것이며,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한다 함은 손무가 말한 ‘아군의 강약을 안다’ 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참으로 그러하오. 짐이 전에 출전하였을 때에도 작전계획에 있어서 피아 어느 쪽이 더 치밀한가를 먼저 저울질한 다음에야 피아의 허실을 알 수 있었소. 그리고 군의 사기에 있어서 피아 어느 쪽이 더 왕성한가를 먼저 살핀 다음에야 피아의 강약을 점칠 수 있었소.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더라도, 적의 허실을 알고 아군의 강약을 아는 것이 병가의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소. 지금의 장수들이 적의 허실은 모른다 할지라도 아군의 강약을 잘 알고 있다면, 싸움에 있어 실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이정이 말하였다.
“손무의 말에 ‘우선 적이 아군과 싸워 승리할 수 없도록 철저히 대비한다’ 는 것은 바로 자기를 안다(知己)는 것입니다. 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는 것은 바로 적을 안다(知彼)는 것입니다. 손무는 또 ‘철저한 수비는 아측에 있게 하고 허점은 적에게 있게 하라’ 하였으니, 신은 한시도 이 점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손무는 적군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여, ‘군의 사기는 아침에는 충만되어 있고, 낮에는 차츰 쇠퇴해지고, 저녁에는 권태를 느껴 막사로 돌아가 편안히 휴식할 것을 생각한다.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군의 사기가 충만되어 있을 때를 피하고, 권태를 느껴 돌아가 휴식하려고 할 때를 포착하여 공격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생명이 있고 혈기가 있는 동물은 일단 용기를 내어 적과 싸우게 되면 죽음도 돌보지 않는데, 이는 기운(사기)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들을 전투에 투입하는 방법은 먼저 사기를 자세히 관찰하여 ‘기어이 적을 이기겠다’ 는 필승의 의지를 격동시킨 다음에 야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기는 사기(四機) 중에서 기기(氣機), 즉 군의 예기(銳氣)를 가장 중시하였으니, 이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병들 개개인에게 각자 용전분투할 수 있는 사기를 불어넣어 주면, 그 예기를 당해낼 적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군사들의 사기가 충만 되어 있다’는 것은 단지 아침ㆍ저녁의 시간적인 개념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요, 하루에는 아침(시작)과 저녁(종말)이 있음을 들어서 전투의 초기에는 군사들의 사기가 왕성하고 종말에는 사기가 쇠진함을 비유한 것입니다. 세 차례나 진격 북소리가 울렸는데도 적의 사기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면, 저녁이 되었다 한들 적이 어찌 싸움에 권태를 느껴 휴식하려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오늘날 병서를 익히는 자들은 헛되이 문장만을 암송할 뿐이며, 그 참뜻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적의 유인술에 번번히 말려드는 것입니다. 적의 사기를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장수라면 그는 군권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경이 일찍이 이세적을 병법에 능하다고 말하였는데, 장차 그에게 오랫동안 요직을 맡길 수 있겠소. 그러나 그는 짐이 직접 통제를 하지 않으면 부릴 수가 없으니, 태자(太子) 치(治)로 하여금 그를 통제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폐하를 위하여 계책을 생각하옵건대, 폐하께서 일단 이세적을 좌천시켰다가 태자로 하여금 다시 그를 등용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하면 이세적은 반드시 태자의 은혜에 감격하여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폐하의 정책에도 하등 손상될 것이 없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 방법이 좋겠소. 짐은 경의 말을 믿어 의심하지 않겠소.”
태종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만일 이세적이 장손무기(長孫無忌)와 함께 국정을 맡는다면 후일에 어떻게 되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이세적의 충성심은 신이 보장하는 바입니다. 장손무기는 우리 국가의 창업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이며, 폐하의 친척이기 때문에 폐하께서 천자를 보좌하는 재상의 지위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어진 선비들에게 겸손하나, 속으로는 현신(賢臣)들을 질투하고 있읍니다. 이 때문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은 해하의 면전에서 그의 한점을 공박하고 마침내 은퇴하였으며, 후군집(侯君集)은 장손무기가 옛 은혜를 배신한 것에 원한을 품고 그로 인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장손무기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을 믿고 자문하시기 때문에 신은 거리낌없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이 말을 부디 누설하지 마오. 짐은 서서히 이에 대한 방안을 강구해보겠소.”
태종이 물었다.
“한 고조(漢高祖)는 장수들을 잘 통솔했다고 하는데, 그를 보좌하였던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은 처형되었고, 소하(蕭何)는 투옥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보기에는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둘 다 장수를 잘 통솔한 군주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진(秦)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장량(張良)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한(韓)나라 재상이었는데, 진 시황(秦始皇)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자 이에 원한을 품고 복수하려고 하였으며, 진평(陳平)과 한신은 초(楚) 나라에서 자신들을 등용해주지 않은 것을 원망한 나머지 한(漢) 나라의 힘을 빌어 일어서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하ㆍ조참(曹參)ㆍ번쾌ㆍ관영 등으로 말하면, 모두가 망명하여 한 고조에게 귀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고조는 이들의 힘으로 천하를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만일 6국의 후손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였더라면 이들은 각자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니, 한 고조가 비록 장수를 잘 통솔하는 재능이 있다 한들 이들이 어찌 고조를 위하여 충성을 바쳤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한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장량이 젓가락을 빌어 6국의 후손으로 다시 나라를 세우려는 계책을 저지시키고, 또 소하가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군량을 보급한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말한다면 한신과 팽월이 한 고조에게 살해된 것이나,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중용되지 못한 것은 모두가 같은 일입니다. 이 때문에 신은 유방과 항우가 장수를 잘 통솔한 군주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한(漢) 나라를 중흥한 다음, 공신들을 잘 보전하고 이들에게 일체의 직책을 맡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장수를 잘 통솔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광무제는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았으므로 성공하기가 쉬웠다고 하나, 당시 왕망(王莽)의 세력은 항우에 못지않았고, 광무제를 보좌한 등우(鄧禹)와 구순(寇恂) 등의 재능은 한 고조의 신하인 소하나 조참보다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광무제는 사람들을 성심으로 대하여 인심을 얻었고, 유화책을 써서 공신들을 잘 보전하였으니, 고조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신은 광무제가 고조보다 장수들을 잘 통솔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이 물었다
“옛날에 군주가 출병하기 위하여 장수를 임명하게 되면, 사흘 동안 목욕 재계하고 종묘에 들어간 다음, 날이 위로 향한 도끼[鉞]의 자루를 잡고 장수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 도끼날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장군이 모두 통제하라.’ 하고, 다시 날이 아래로 향한 도끼[斧]의 자루를 잡고 장수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 도끼날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장군이 모두 통제하라.’ 하였으며, 장수가 출전하게 되면, 친히 장수가 탄 수레의 바퀴를 밀면서 ‘군의 전진과 후퇴를 때에 맞추어 자유로이 하라.’ 하고 당부하였소. 그리하여 장수가 일단 출정한 뒤에는 전군이 오직 장수의 지휘에만 따르고, 군주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하오. 짐은 이러한 의식이 오랫동안 폐지되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경과 함께 옛날의 의식을 참작해서 군상이 장수를 임명하여 전지로 보내는 의식 절차를 제정하려고 하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옛날 성인이 장수를 임명하여 전지로 보내는 의식을 제정할 때에 목욕 재계하고 종묘에서 의식을 거행한 것은 신(神)의 위엄을 빌고자 함이었으며, 부월(斧鉞)을 주고 또 수레바퀴를 밀면서 당부한 것은 생살(生殺)의 대권을 장수에게 위임한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출병할 때마다 반드시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시고 종묘에 고유(告由)한 다음 장수를 파견하시니, 이것은 신(神)의 위령(威靈)을 비는 지극한 정성이 깃든 것입니다. 또한 장수를 임명하실 때마다 반드시 장수의 편의에 따라 군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장수에게 권한을 위임해 주시니, 이것은 장수에게 대권을 빌려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니, 옛날 종묘에서 목욕 재계한 다음 임명식을 거행하고 출전시에 수레바퀴를 밀어주던 예식과 어찌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 옛날의 예법에 부합하며 그 의의가 같은 것입니다. 굳이 옛법을 참작하여 다시 제정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태종은 ‘옳은 말이오.’ 하고, 측근의 신하에게 명하여 종묘에 고유하는 의식과 장수에게 당부하는 두 가지 일을 기록하여, 후세의 법으로 삼게 하였다.
태종이 물었다
“병법에 있어 음양설에 입각한 술수는 폐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용병술은 원래 속임수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음양설에 의한 술수를 잘 활용한다면 탐욕스러운 자도 부릴 수 있고 어리석은 자도 쓸 수 있으니, 이를 폐지해서는 안됩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은 일찍이 현명한 장수는 일진(日辰)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음양설을 신봉하지 않고, 병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만이 이에 구애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러하니 폐지하여도 괜찮지 않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은 갑자일(甲子日)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지휘하는 군대와 싸웠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이후로 갑자일이 전투에 불길한 날이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주나라의 무왕은 갑자일에 싸워서 승리하였으니 그에게는 길일이 되는 셈입니다. 이는 일진으로 보면 똑같은 갑자일인데 당시 은나라는 정치가 문란하였고, 주나라는 잘 다스려졌기 때문에 은나라는 망하고 주나라는 흥왕(興旺)했던 것입니다. 또 송(宋)나라의 무제(武帝)는 군을 충동시켜 공격하면 망한다는 왕망일(往亡日)에 군을 출동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였으나, 무제는 ‘우리가 쳐들어가면 저들이 망한다[我往彼亡]’ 하고, 끝내 남연(南燕)으로 진격한 결과 대승을 거두고 남연을 평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미루어 보면 음양가의 길흉설은 폐지하여야 함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제(齊)나라 전단(田單)의 군이 연(燕)나라 군에 포위되었을 때 전단은 병사 1명을 천신(天神)으로 분장시켜 배례(拜禮)를 올리고 제사를 지내어, 제나라 군대가 마치 천신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속였으며, 또 천신으로 하여금 ‘연군을 공격하면 격파시킬 수 있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전단은 쇠뿔에 창칼을 달고 쇠꼬리에 횃불을 달아 연군을 향하여 내보냈습니다. 쇠꼬리에 횃불이 타오르자 성난 소떼가 달려 나가 연군을 유린하였으며, 제나라 군사들도 일제히 진격하여 연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병가의 속임수로서 음양가의 길흉설도 이처럼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전단은 천신을 분장시켜 놓고, 천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꾸며 연군을 격파하였는데, 태공(太公)은 이와 반대로 은나라를 정벌할 때에 사람들이 승패에 대한 길흉을 점치려 하자, 점치는 데 사용하는 시초(蓍草)와 거북 껍질을 불 태워버리고, 그대로 진격하여 주왕(紂王)을 멸망시켰소. 이 두 가지 사례는 서로 반대되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한 것은 양자가 같습니다. 한쪽은 이를 역이용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입니다. 태공이 무왕과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목야(牧野)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깃발이 벗겨지고 북이 파손되었습니다. 이에 산의생(散宜生)은 일단 진격을 중지시키고 점을 쳐보아 길하다는 점괘가 나온 다음에 진군을 계속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장병들이 전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점괘를 빌어 군사들의 불안해 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여 임기응변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공은 ‘썩은 풀[蓍草]이나 마른 뼈(거북껍질) 따위에 무엇을 물어 길흉을 판단한단 말인가? 또 제후국인 주나라가 천자국인은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으로서 부득이 해서 하는 일이다. 만일 점괘가 불길하다고 하여 이번의 거사를 중단하고 다시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그대로 진격을 강행하였던 것이니, 이 역시 임기응변의 한 가지 방편이었습니다. 이는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에 산의생이 임기응변술을 구사하였고, 나중에 태공이 그것으로 결말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의생이 점괘를 인정한 것과 태공이 점괘를 부정한 것은 서로 다르나, 임기응변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앞에서 음양설에 의한 술수를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은 음양설이 임기응변의 한 가지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양설을 활용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은 오직 장수의 임기응변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태종이 물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있는 장수는 이세적(李世勣)ㆍ이도종(李道宗)ㆍ설만철(薛萬徹) 세 사람 뿐이오. 이 중에 이도종은 황실의 친족이므로 논외로 하고, 나머지 두 사람 중에 누가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세적과 이도종은 큰 승리를 거두지도 못하고 또 큰 패배를 당하지도 않지만, 설만철은 크게 승리하지 않으면 크게 패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폐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해 보니, 큰 승리를 거두지도 못하고 큰 패배를 당하지도 않는 자는 절도가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크게 승리하기도 하고 또한 크게 패하기도 하는 자는 요행으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손무는 ‘전쟁을 잘 수행하는 자는 우선 아군이 패하지 않도록 대처한 다음, 적에게 패할 만한 허점이 발견되면 즉시 공격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절도가 있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피아의 두 진영이 서로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승리를 점칠 수 없어 서로 결전을 회피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옛날 춘추시대에 진(晋)나라 군대가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두 진영이 서로 대치해 있었는데, 이 때 두 나라 군대가 서로 진영을 후퇴시켰습니다. 《사마법》에 이르기를 ‘패주하는 적을 멀리 추격하지 말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할 때에는 말고삐 [綏]를 풀어 속히 달리게 하되, 적군을 완전히 섬멸시키려고 하지는 말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말을 모는 고삐줄이란 통제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군이 절도를 지키고 있고 적군 역시 대오가 정돈되어 있다면, 어찌 서로 함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출전했다가도 서로 후퇴하고, 또 적이 후퇴하더라도 끝까지 추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비겁해서가 아니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손무의 말에 ‘깃발이 질서 정연한 적을 맞아 싸우지 말고, 진용이 당당한 적진을 공격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아군과 적군 두 진영의체제가 비슷하고 군세가 대등할 경우에 만일 아군이 단 한 번이라도 경거망동하여 적이 그 시기를 타서 공격한다면 크게 패할 우려가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용병에는 싸우지 않아야 할 경우도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싸워서는 안 될 조건(견고한 수비)은 아측에 있게 하고, 싸워야 할 조건(허술한 수비)은 적측에 있게 하여야 합니다.”
태종이 물었다
“싸워서는 안 될 조건이 아측에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은 무였을 말하오?”
이정이 대답하였다.
“손무의 말에 ‘아군이 전투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벽을 구축하지 않고 단지 땅 위에 금 하나만 그어 놓고 방어한다 하더라도 적이 공격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는 적이 아군의 어느 곳을 공격하여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측에 유능한 인물이 있다면, 적은 후퇴하는 아군을 무모하게 공격하려고 도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싸워서는 안 될 조건을 아측에 있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반드시 싸워야 할 조건은 적측에 있게 하여야 한다.’ 함은 손무의 말에 ‘적의 군세를 잘 드러나게 하는 장수는 적에게 어떤 작전 의도를 보여 주어 적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것에 속아 넘어가게 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며, 적에게 어떤 이익을 낚싯밥으로 던져 주어, 적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것을 탐하여 취득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이익으로 적을 유인하고, 아군은 본래의 태세로 되돌아가 적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 때 만일 적측에 유능한 인물이 없다면 적은 반드시 아군에게 싸움을 걸 것이니, 아군은 그 기회를 타서 반격하면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싸워야 할 조건은 적에게 있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절도 있는 군대란 참으로 뜻 깊은 말이오. 그대로 하면 나라가 흥성할 것이며, 그대로 하지 않으면 나라가 패망할 것이오. 경은 군을 절도있게 통제한 역대 명장들의 기록을 편찬하고, 그림을 함께 그려 도표를 만들어서 짐에게 올리도록 하오. 짐은 그 중에서 가장 정요(精要)한 것을 뽑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오.”
이정이 말하였다.
“신이 지난 번에 올렸던 황제(黃帝)와 태공(太公)이 창안한 두 진법과 《사마법》 및 제갈량이 말한 기정(奇正)의 병법에 이미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의 명장들 중에는 위에서 든 병법을 실행해서 성공한 자가 많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록하는 사관(史官) 중에 병법을 아는 자가 적었으므로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은 폐하의 명령을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태종이 물었다.
“병법 중에 어느 것이 가장 뜻이 깊다고 하겠소?”
이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일찍이 병법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병법을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단계적으로 심오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세 등급이란, 첫 번째는 도(道)이고, 두 번째는 하늘과 땅에 관한 것이며, 세 번째는 장법(將法)입니다. 도에 대한 내용은 지극히 심오하여, 《주역(周易)》에서 일컬은 바 ‘총명하고 지혜로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관한 것이란 기상이나 기후 등을 말하며, 땅에 관한 것이란 지형의 험이도를 말합니다. 용병술에 능한 자는 기상이나 기후를 이용하고 지형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는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장법은 장수가 능력이 있는 자에게 적절한 임무를 맡기고, 병기를 예리하게 정비함에 있습니다. 이는 《삼략(三略)》에서 ‘훌륭한 인물을 얻은 자는 번창한다’ 는 것과 관중(管仲)이 말한 ‘병기를 반드시 견고하고 예리하게 하라’ 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참으로 옳은 말이오. 내가 생각건대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도 적국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자가 제일 훌륭한 장수이고,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하는 자가 그 다음이며, 참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스스로 수비하는 자가 그 다음이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손무의 병법에는 경이 말한 세 등급의 병법이 모두 구비되어있다 할 것이오.”
이정이 말하였다.
“역대 명장들의 기록과 사적을 관찰해 볼 때에도 또한 세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장량ㆍ범려ㆍ손무, 이 세 사람은 성공한 다음 깨끗이 물러나 종적을 감추었으니, 이들이 도를 알지 못했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관중ㆍ악의ㆍ제갈량, 이 세 사람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수비하면 반드시 견고하게 지켰으니, 이들이 천시와 지리를 살피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는 진(秦)나라를 잘 보전한 왕맹(王猛)과 진(晋)나라를 잘 지켜낸 사안(謝安)을 들 수 있는데, 만일 이들이 재능이 있는 자에게 임무를 맡기고 병기를 예리하게 가다듬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나라를 잘 지켜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병법을 배우는 요령은 반드시 낮은 것부터 시작하여 중간의 것에 도달하고, 중간의 것에서 다시 가장 심오한 것에 도달한다면, 점진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밟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병서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글귀만 암송하였을 뿐이며, 그 내용을 얻은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도가(道家)에서 ‘3대를 이어 장수가 되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꺼리는데, 이는 병법을 누구에게나 함부로 전수해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오. 그러나 병법은 또한 전수해 주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경은 부디 조심하여 전수해 주도록 하오.”
이정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나, 태종과 문답한 병법의 내용을 자세히 적어서 이세적에게 전해 주었다.』
금오는 반시진(약 1시간)에 걸쳐서 차분하게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암송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과연 놀랍습니다. 양사부께서 그동안 노고가 크셨습니다.”
도선대사가 감탄하며 양사부에게 치사를 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는 옛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합니다. 주군의 자질이 워낙 뛰어나셔서 저는 그저 옆에서 조력했을 뿐입니다. 다만 자만하여 나중에 큰 일을 그르치는 불상사가 있을까하여 자중을 늘 당부하여 드릴 뿐입니다.”
양사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십대에 당나라의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인 양사부가 자신이 사십이 되도록 갈고 닦은 학문을 금오에게 남김없이 가르치려고 하였는데 금오는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모두 소화해 냈던 것이다.
“학생의 자질은 파악했으니 이제부터 두 달동안 강행군으로 수업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사부님들도 옆에서 적극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두 달간 도선대사는 심혈을 기울여 모든 지식을 전달했다. 이윽고 두달이 지났다.
“참으로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한 달 동안 도선비기를 전수하겠습니다.”
“그동안 유용하게 사용했던 이 모형은 오늘부로 모두 없어집니다. 불가(佛家)에서 만다라를 만들고 완성되면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도선대사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놓았다. 겉면에 도선비기라고 적혀 있었다.
“저의 부친이신 량궁복(장보고)장군의 경우도 그러하였지만, 우리 천손(天孫) 량씨는 천성이 어질고 남을 쉽게 믿는 타고난 성질이 있습니다. 천하제일의 무장(武將)인 장보고장군께서 한낱 중국인 소금밀매꾼에 불과한 염장(閻長)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송사리에게 좆을 물렸다고 하지요. 제가 그동안 연구한 바에 의하면 고쿠리(高句麗)의 량씨는 원래 해(解)씨였습니다. 해모수(解慕漱)께서 탐라에서 홀연히 부여로 건너가시어 하백의 딸 유화낭자를 임신시키고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이후 해모수께서는 남쪽 촐본을 거쳐 왜(倭)로 가셔서 최초의 천황(天皇)이 되셨습니다.”
“졸지에 임신 당하고 홀로 되신 유화낭자는 불행하게도 북부여 금와왕의 후궁이 되시는 와중에도 해추모(解鄒牟)를 나으셨고, 해추모(解鄒牟)께서는 고쿠리(高句麗)를 건국하여 태왕(太王)이 되셨습니다.
당나라 역사서에는 주몽(朱蒙)이라고 쓰여 있으나 이는 중국 역사서의 단점인 자신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나쁜 버릇의 발로입니다. 태왕(太王)의 이름에 무지(無知)할 몽(蒙)자를 쓸 리가 있겠습니까. 추모(鄒牟)가 맞고 이는 부여 말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께서는 34세에 불한당 유리(瑠璃)의 계략에 걸려 참살 당하셨습니다.
이 후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의 손자이신 무휼(無恤)께서 절치부심 끝에 유리(瑠璃)일당을 모두 척살(刺殺)하시고 태무진(大武神) 태왕(太王)이 되셨습니다.
무휼(無恤)이란 동정심이 없다 라는 뜻이니까,유리(瑠璃)일당에게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해추모(解鄒牟) 태왕(太王)의 유족들이 얼마나 복수를 염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무진(大武神) 태왕(太王)께서는 백전백승의, 말 그대로 대무신(大武神)으로써 고쿠리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고 전쟁 때마다 혁혁한 무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인 모본태왕(慕本太王)께서 한나라 요동태수를 크게 이기고 돌아오시는 길에, 기골이 장대한 거지아이가 길옆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시고 이를 측은하게 여겨 궁궐에 데려와서 치료해주고 길렀는데, 이 자가 장성하여 궁궐 내에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모본태왕(慕本太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고쿠리의 태왕이 되었습니다. 이 자가 태조태왕(太祖太王)으로 고쿠리 고씨(高氏)왕조의 시작입니다. 이 자는 자신을 구제해준 모본태왕(慕本太王)을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포악한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하고 자신을 왕조의 시작인 태조태왕(太祖太王)으로 명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가 새로 시작됨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가 영명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결국 해씨(解氏)왕족들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고 성을 량(梁)씨로 바꾸어 목숨만 부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량만춘 안시성 성주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에게 참살 당한 영류왕의 태자 등 고씨(高氏) 일족들을 모두 안전하게 거두고, 이들을 넘겨달라는 연개소문과 일전을 벌리시어 연개소문을 패퇴시키셨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뛰어난 자입니다.
이 자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고쿠리 내부를 첩자를 무수히 사용하여 세밀하게 정탐하였는데, 량만춘 안시성주가 당시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을 전투에서 대패시키고 고쿠리 왕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크게 치하하고 상을 내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다 썼는데 량만춘 안시성주에게는 전혀 그 수단이 먹히지를 않았습니다.
그 뛰어난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이 정병을 거느리고 고쿠리정벌에 직접 나섰으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1,000장(약 3,000미터)너머에서 발사된 팔우노의 애기살에 왼쪽 눈을 잃고, 결국 패퇴하다 요택에서 매복에 걸려 생포되는 망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당나라는 그간 잡아갔던 고쿠리 백성들 사십만을 돌려주고 간신히 이세민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량만춘(梁萬春) 안시성주께서는 실로 대단한 충신이며 명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빈도가 지난 10여년 중에 깨달은 것은 어리석은 것 같은 선량하고 착한 기운이 사악하고 독한 것들을 결국은 이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탐라의 량씨는 천여 년 전 서쪽에서 태양이 뜨는 곳을 향하여 동쪽으로 동쪽으로 태양(太陽)과 밝음(明)을 숭상하는 무리를 이끌고 동진하다 성스러운 태양의 산 태백산(한라산)이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밝음(明)을 숭상하는 무리는 이후 성스러운 땅 탐라에는 <브라만 중의 브라만> 량씨만 남고 지금의 신라 땅으로 가서 6씨족이 되고, 왜국으로 가서 태양의 땅 일본(日本)이라 이름 짓고 정착하고, 전라도 남쪽 지방(지금의 나주지방)으로 가서 마한왕국을 세우고 촐본(卒本)이라 명명했습니다. 그곳이 지금의 무주(武州,전라남도) 금성(錦城)땅입니다.”
“천손(天孫) 량씨(梁氏)의 신화에 의하면 천상에서 태양과 달이 결혼을 하면 그 아들인 금성(金星)이 태어나 밝은 기운을 지상(地上)으로 보내 천손족(天孫族)을 탄생시킵니다. 이 지상의 금성을 촐본, 즉 새벽의 가장 빛나는 별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해추모(解鄒牟)태왕께서 처음 도읍하신 곳도 촐본이라고 이름 지으신 것도 이같은 내막이 있는 것입니다. 촐본이라는 말은 원래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말입니다. 파사국에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터교)라는 밝음을 숭상하는 종교가 있는데 촐본 역시 파사국 말이니 먼 옛날 량씨가 무리를 이끌고 출발한 곳이 어딘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아마 파사국에서 밝음의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큰 난리가 나서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동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탐라의 량씨 중 뛰어난 자는 계속 바다를 건너가 나라를 세웠고 탐라의 량씨와는 드물게나마 계속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탐라의 량씨는 원래 태양을 뜻하는 해씨를 사용하다, 이후 음양(陰陽)의 이치를 도입하여 차음(遮音)인 량(良)를 사용하다 량(梁)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선대사는 한 달 동안 천손(天孫) 량씨(梁氏)의 역사와 도선비기의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가르쳤다.
공부가 석 달이 되는 마지막 날 도선대사는 금오 일행을 향해 마지막 당부를 하였다.
“석달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도선비기는 이제 세 시주의 머릿속에 있을 터이니 이 자리에서 불태워버리겠습니다.”
겉면에 도선비기(道詵祕記)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옥룡자 량씨 씀(玉龍子 梁氏 記)이라고 쓰여 있었다.
화로 속에서 도선비기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예로부터 세상에 내려오는 말에 『동사(東邪) 서독(西毒) 중금오(中金烏)』라는 말이 있습니다.신라가 기운을 잃고 멸망해갈 때 동쪽에서 사악한 자가 일어나고, 서쪽에서는 독을 품은 자가 일어나며, 이때 진인(眞人) 금오(金烏)가 이들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가운데 중(中)자는 중용이나 중도와 같이 올바른 진리를 뜻합니다.”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빈도는 중금오(中金烏)에서 국토 중앙 상주의 금오산(金烏山)을 떠올리고 금오산 속 석굴 속에서 홀로 수행을 하며 지냈습니다. 항간에서는 이 굴을 도선굴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빈도를 찾아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상주 호족인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인데 자신을 견훤(甄萱)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질그릇 견(甄),원추리 훤(萱)을 써서 스스로 이름을 짓고 세상의 비참한 민초들을 위하여 양식을 담는 질그릇처럼, 궁핍한 자의 양식이 되는 원추리처럼 헌신하겠다고 다부지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량(梁)씨인데, 지리산 아래 신라의 중요한 소경(小京,작은 서울)인 남원경(南原京)사람입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량씨들은 150여 년 전 탐라의 용호아지발도였던 량우량(梁友諒)공의 후손들로 남원 량씨(南原 梁氏)로 불리지요.
150여 년 전 왜(倭)가 가야(伽倻)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지리산 일대를 장악하고 막강한 세력으로 신라 수도 금성(金城)을 공격하려고 할 때, 신라 조정에서 파견한 군사는 연전연패하고 이에 당황한 신라조정에서는 누구든지 이 적도(敵徒)들을 진압하는 자는 지리산 일대를 모두 떼어주겠다고 공표하였습니다.
이때 량우량(梁友諒)공은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적의 사령탑에 진입하여 적의 수괴들을 모두 주살하고 가야의 유민들을 설득하여 난을 깨끗하게 진압하였던 것입니다.
신라조정에서는 이때를 계기로 해서 통치상 문제가 많던 지방조직을 새로 9주5소경으로 나누고 약속대로 초대 남원부백(南原府伯)으로 량우량공을 임명했습니다.
소경이란 신라의 작은 서울인데 그중에서도 옛 백제땅인 무주,전주(武州,全州-전라도) 전역을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를 진골귀족도 아니고 신라인도 아닌 외국인(탐라인)에게 어쩔 수 없이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후 량우량(梁友諒)공의 후손들은 이 자리를 잘 지켜 오늘날까지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 일대를 량씨의 왕국으로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이 남원(南原)에서 호랭이아지발도였던 자입니다.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에서도 탐라와 같이 아지발도를 매해 선발하는데, 바다가 없어서 수달아지발도는 없고 육상의 3종목만 시행하고 있습니다.
호랭이(虎)아지발도는 이 세종목 모두를 석권한 자인데, 탐라에서는 각 성씨들의 특기가 달라서 호랭이아지발도가 드물게 나오지만 지리산 아래 남원(南原)에서는 5~6년마다 호랭이아지발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자개(阿慈介)는 상주(尙州)지방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민란이 일어났을 때 신라군이 대패하여 신라조정이 그 책임을 물어 신라군의 장군 영기를 참하고 대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남원(南原) 출신의 정예 수하들을 데리고 민란을 진압하고 상주성을 접수하고 이후 신라 10정(신라의 지방 군사조직) 중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음리화정의 병력들을 모두 장악하여 지금도 상주의 주인으로 있습니다.
견훤은 아자개(阿慈介)의 큰아들이었으나 친모가 일찍 죽고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지내다가 빈도를 찾아 금오산의 도선굴로 왔던 것입니다.
견훤(甄萱)은 비범한 자입니다. 이미 그 힘과 지략은 당할 자가 없어 15~6세의 나이에도 수십 명의 심복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빈도는 견훤(甄萱)이 중금오(中金烏)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도선비기를 전수해주었습니다.
10여 년 전 도선비기는 지난 두 달간 시주님들께서 배웠던 땅의 이치와 전략전술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는 빈도가 신라에 대한 증오심이 강할 때라 견훤(甄萱)에게 이 도선비기를 충실히 익혀 꼭 신라를 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에는 신라 금성(金城,서라벌)을 중심으로 내삼주(內三州,신라의 지방 9주 중 수도 근처의 주들)인 양주,상주,강주의 상세한 지형도와 전술적 이용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빈도가 신라를 멸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부분은 모두 태워버려 유감스럽게도 시주님들에게는 가르침을 드리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 견훤(甄萱)이 2~3년 전에 무주의 미다부리정 소장(小長)으로 가서 그위의 전주 거사물정까지 장악하여 백제의 부활을 선포하고 백제국 황제를 칭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견훤(甄萱)은 서독(西毒) 즉 서쪽의 독기를 품은 자였습니다.
부디 량금오(梁金烏)께서는 동사(東邪,동쪽의 사악한 자)와 서독(西毒)을 모두 제압하시고 늙은 신라를 포용하여 삼한의 통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옥룡자(玉龍子) 도선대사는 석 달 간의 가르침을 모두 마치고 량금오(梁金烏)일행을 송악(松岳)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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