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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 기념관 '홍 현지' 관장
글 전현자 (본지 한국취재기자)
기자 경허선사 기념관이 조계사 앞에 있으니 마치 경허선사께서 나타나 가르침을 펼치신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봅니다. 어떤 계기로 경허 선사를 연구하게 되었나요?
홍소장 대중들로부터 제일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두 가지로 요약 한다면 첫째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는가 싶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생명체를 안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살폈답니다. 초등학교 때 받은 급식 빵을 아껴서 개미집 구멍을 돌아다니면서 옥수수 빵을 부셔서 개미집에 넣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뱀을 죽이려하면 막대기를 휘저으며 내 뱀이니 죽이지 마라 했습니다. 집안이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고,아버지는 사리가 일곱과 나왔습니다. 어머니도 집이 가난하여 끼니가 없는 상황에서 명절이 되면 아이들을 모두 목욕 시키고 다 앉아서 경을 읽게 하셨습니다. 배는 고파도 정신은 고프지 말라는 가르침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경허 선사의 사진을 부엌에 걸어 놓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는 경허 선사인 줄도 몰
랐었지만 말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경허선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연구소를 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연구 하셨네요. 소장님께 경허선사는 어떤 분이십니까?
홍소장 경허선사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분입니다만 그래도 결론을 내려야 한다면, 인류문화유산이십니다. 경허선사께서는 인간의 단계를 넘어서신 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로 수많은 제자가 있었고, 수많은 역대 조사가 있었지만, 경허선사야말로 인간의 모습을 하셨지만 인간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기자 경허 선사를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하시는 핵심적인 이유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홍소장 경허선사의 위대한 것은 그 사상에 있습니다. 경허선사의 사상적 요체는 중도불이입니다. 위대하다고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상을 세우신 것만이 아니라 실천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에 있을 수 있는 어려운 사람이 있고 돕는 사람이 있는 이원론적인 관점이 아닌 상대가 없는 하나의 상태에서 행을 하신 것입니다.
기자 만공 선사의 ‘경허집’과 소장님의 경허선사연구는 무엇이 다른지요?
홍소장 만공선사께서 ‘경허집’을 엮으신 이유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참회하는 의미로 쓰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영주사미 살해사건을 아시나요? 산적들이 사미승을 죽인 사건입니다. 영주사미가 경허선사의 시봉으로 산길을 가던 중 나타난 사람들이 사미승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답니다. 사미승에 할 이야기가 있다며 경허스님을 먼저 가시게 부탁을 하고서 사미승 등에 걸망에 가득 찬 것에 책과 옷만 들어 있는 것을 모르고 돈을 내 놓으라했답니다. 돈이 없자 폭행하고 발각이 두려워 죽인 사건입니다. 경찰은 경허선사를 의심하였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제자 만공스님은 경허선사께 “스님! 영주사미의 생사는 어찌되었습니까?” 여쭈었답니다.
경허선사께서는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영주는 내가 죽였다”하셨답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감옥에 갈 것도 마다치 않으셨던 스승이셨습니다. 산적들의 범행이 나중에 밝혀지자 한 순간이라도 스승을 의심한 것과 스승의 생사초월과 같은 마음에 감동되어 펴낸 것이 ‘경허집’입니다.
경허선사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 주셨음에도 선사 스스로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써달라고 하면, “그런 것 써서 뭐해? 다 필요 없는 것이야.”하시면서도 써주셨답니다.
경허선사의 선시가 150수 있어요. 만공선사께서 한암선사께 가지고 가시어 출판을 의논 드렸답니다. 한암선사께서 “경허의 법은 따를지언정 행은 따르지 마시오.”란 말에 가져와버렸답니다. 그런데 1931년 경허선사의 제자 한암선사께서 ‘경허집’을 내십니다. 뜻이 맞지 않아 만공선사께서 그만 둔 것을 말입니다.
그 경허집에는 “법화를 배움은 옳으나 행리를 배우면 안 된다”하신 한암선사의 문구가 영인본에 쓰여있습니다.
기자 법과 행이 둘일 수 있나요?
홍소장 둘일 수 없지요. 법이 곧 행이지요 행이 곧 법이고요. 중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가르침입니다. 왜 불이를 붙였을까요? 중도가 세요? 불이가 세요? 중도불이가 세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 자체가 중도입니다. 불이는 법과 행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천적 중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경허선사의 요체는 중도가 아니고 중도불이입니다. 제가 쓴 경허집 자체가 중도불이예요. 만공선사의 경허집에는 ‘중도불이’란 단어는 단 한글자도 없습니다.
기자 연구소를 내시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홍소장 경허선사에 대해 쓴 박사 논문이 1350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잘려서 950페이지로 통과가 됐지만요. 논문을 수덕사로 가져가면 꽃방석이 기다릴 줄 알았어요. 칭찬도 받고 더 연구하면 연구비도 주실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경허선사 선양하고, 만공선사 선양하는 일이라면 토론장의 청소부를 못하겠습니까? 여자인 것을 문제 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2015년 일입니다. 저의 수행 스승이셨던 혜암 큰스님께서는 남,녀,노,소를 안 가리셨습니다. 꽃길은 커녕 거친 길에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 같아 스스로 해내겠다는 결심으로 경허연구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습니다. 밥벌이였던 학원을 청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3층 건물에 1층은 초등생, 2층은 중고생, 3층은 우리집이었어요. 2층을 정리하고 3개월 후 경허 연구소를 만들었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연구소 이사들 열 세분을 모두 수덕사에서 모셔 왔습니다. 그러나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벼랑에 선 기분입니다. 그런 중에도 올 2월에 경허기념관을 개관하는 것에는 수덕사 설정스님의 도움이 매우 컸습니다.
기자 기념관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홍소장 일주일에 두 번 화, 목요일에 경허선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기자 어려움에 매우 안타깝지만 강의하신다니 다행이십니다. 그럼에도 보람과 의미는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홍소장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경허연구소를 열어놓으니 제보가 많이 들어옵니다. 여기저기서, 민초들이 경허 선사를 아끼려고 마음을 보태주시어 전화가 빗발칩니다. 그중 한 가지는 경허 선
사 친필이 옥션에 떴다고 연락을 해주셨습니다. 경허선사 선시강의를 충정사에서 개강하고 난 뒤 알아보니 옥션에서 없어졌습니다.
이듬해에 다시 인사동에 떴다고 나왔습니다. 현금을 싸들고 가서 그 자리에서 모셔 왔어요. 단 한 푼도 깎을 생각 도 안하고 모셔와 진품인지를 알아보니진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 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 퍼포먼스를 한 사람이 있어요. 부처님 오신 날 행사에 경허연구소와 같이 부스를 만들어서 합니다. 그때 엄청나게 큰 붓으로 ‘중도불이’를 썼습니다. 그 분께 경허선사의 친필이라며 번역 해 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박사님, 경허선사 친필 아닙니다.”
왜 아니에요? 진품이라 했는데?
“아니 경허 선사 여동생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고, 신랑이 옷 치수를 알려 달라는 내용이 나오니 경허선사께 여동생이 어디 있어요? 가짜입니다” 라며 진품이 아니라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알려주었습니다. “아니에요. 경허 선사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인터넷으로 뒤졌습니다. ‘연길, 의제’ 연길을 치니까 결혼식을 할 때 신부 쪽에서 혼사 날짜를 보내는 걸 연길 이라하고, 의제라고 하는 것은 ‘신랑의 옷 치수를 적어주세요’라는 뜻으로 봉투가 두 개가 됩니다. 경허 선사께서 쓰신 글이었습니다.
‘연길과 의제를 한꺼번에 보내오니 그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스물다섯 살이셨던 경허선사께서 쓰신 글이었습니다. 탐관오리에게 재산을 몰수당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안 계시니 여동생을 결혼 시키며 아버지 대행을 하시면서 전 봉준장군 아버지께 보내신 글입니다. 사문 경허. 라고 쓰였으니 확실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1년이 지나고 불교 신문에 경허 선사 친필이라는 것이 떴어요. 살펴보니 경허 선사 글씨였습니다.
그 분께 연락해 조계사 앞에서 만났습니다. 나이 많이 드신 어르신이셨는데 복사본을 가져 오셨습니다. 판매한 사람이 사기를 쳤더라고요. 어르신은 진본인 줄 알고 매입했는데 말입니다. “어르신, 이것은 복사본이에요. 진본 어디 있어요? 판매한 사람 전화번호 주세요. 경찰에 신고 할 거
예요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가져간 경허선사 선시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어르신께 “당신 사기꾼이네요. 경찰에 가셔야겠어요”. 했는데 겁도 안내시고 선사의 친필에 취해 버리셨습니다. 얼마나 경허 선사가 좋았으면 가짜 복사본을 돈을 주고 사셨을까 싶으니 울컥했습니다. 어르신께서 주신 전화번호로 복사본을 진품이라고 판 인간에게 “당신 사람이냐? 노인네께 더욱이 경허선사를 글씨를 사기 쳐요?” 결국 그 진본은 못 샀지만, 복사본을 전문가에게 보냈습니다.
혼사를 흔쾌히 받아들여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신입니다. 29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으로 2012년에 수덕사에서 경허선사의 서간으로 낸 책이 있습니다. 그 뒤 2018년에 제가 경허선사 친필문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중에 해석 못한 서간을 6개월 걸쳐 연구했습니다.
총 열 세 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내용에 묘향산에 가 숨어 있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하늘만 보입니다. 삭막합니다. 두 번째를 해석하다 마지막 13편은 뭐라고 쓰여 있는지 궁금해 살펴보니 놀랍게도 내가 선의 교령만 흔들어놓고 선석을 물려주고 가야 하는데 못하고, 대중에게 내가 떠난다는 말을 못하고 삼수갑산으로 간다. 북성으로 돌아간다. 고 쓰여 있습니다. 13편이 끝인가 살펴보니 그 뒤로 북한을 왔다 갔다 한 시가 또 있었어요. 너무 놀라와 이 서간을 주신 단양 송림사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 받은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스님께서 서예의 대가이신데, 스님 오시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하시어 통화하여 확인 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이 서간은 신도분이 주셨는데 그 분은 삼육 불교 대학의 법사였다” 하셨습니다. “그 분
이 세상을 떠난지 십 년이 됐는데 ‘스님! 제가 죽기전에 스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글씨가 사실은 경허 선사 친필이라고 하는데 몰래 전해온 것입니다. 스님을 믿을 수 있어 스님께 맡기면 안전할것이라 드립니다.’면서 경허 선사 친필 열 세편을 주셨답니다. 너무 오래되어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를 주신 것이랍니다. 그것을 제가 한 장짜리 액자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누구에게 보낸 것이며 무슨 내용인가 알아보았습니다. 토막을 내서 스캔을 떴더니 저런 모양이 나왔습니다. 13개의 쪽으로 스캔 된 것입니다. 그 중에 전봉준장군에게 보낸게 일곱 개, 그리고 전봉준 장군 아들한테 보낸 것이 두 개, 서석사에 보낸 것이 한 개, 귀산 장로에게 한개, 용호당에 쓴 것이 두 개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열 세 개였습니다.
6개월에 걸쳐 번역을 마치고 서간을 모시고 있다 스님께 경허선사의 서간을 전해준 분의 성함을 여쭈니 전 병근이라 하셨습니다. 천안 전씨로 전봉준장군과 같은 문중이지요. 경허선사께서 어려움을 겪으신 것이 다 전봉준장군 때문인데 말입니다.
기자 그러셨습니까?
홍소장 경허선사의 여동생과 전봉준 장군이 혼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경허선사께서 동학 농민 운동을 지시하셨습니다. 이 일로 경허선사께서 역적으로 몰려서 도망 다니신 것입니다.
기자 세상에는 동학운동은 전봉준 장군이 하신일로 알려졌는데 경허선사께서 동학에 지시를 하셨다고요?
홍소장 네. 맞습니다. 그럼에도 전봉준 장군은 유족회가 전국에 다 있습니다. 동학운동을 도와주신 경허선사는 삼수갑산에 가서 과부를 얻었다는 등, 온갖 모함이 난무합니다. 경허선사는 경허선사이시며,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동학일로 경허선사를 고발한다는 등 협박을 받아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삼수갑산을 헤매어 다니신 것입니다 삼수갑산에 숨어 사시면서도 헌병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 더 깊이 숨으셔야 했습니다. 어쩌다 대접을 받으러 가셨을 때도 항상 창문을 열어 놓으시고 다른 쪽에서 쫒아오는 것을 보시게 되면 도망가시려 하셨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전봉준의 가족들도 뵈러 왔답니다. 용호, 남전 그리고 또 한 스님인 세분의 스님들께서도 다녀가셨다는 것도 쓰여 있습니다.
기자 소장님 스스로 경허 선사께 미친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그런 당신은 누구십니까?
홍소장 나는 나입니다.
때: 3월 21일
곳: 서울 종로구 견지동 경허사상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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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재를 털어서 불사 하시는 불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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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이 만상을 삼켰도다
광명과 만상이 함께 공할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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