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7375] 동산처사(東山處士) 곽여(郭輿)- 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
곽여(郭輿)의 장원정응제야수기우(長源亭應製野叟騎牛)' . 곽여(郭輿)의 '소 타는 시골노인 太平容貌恣騎牛 (태평용모자기우) 半濕殘霏過壟頭 (반습잔비과롱두) 知有水邊家近在 (지유수변가근재) 從他落日傍溪流 (종타락일방계류) 태평스러운 얼굴로 편안하게 소를 타고 보슬비에 반쯤 젖어 언덕머리 지나가네. 강가에 집이 가까이 있는줄 알고 그 사람을 따라 지는 해도 시냇가를 따라가네.
태평스런 얼굴, 아무렇게나 소를 탔다 안개비에 반쯤 젖어 밭둑 지나간다 물가에 오니 집에 다 온 걸 알겠구나 저 지는 해도 따라왔네 개울물과 함께
野叟 야수(강호에 묻혀 사는 늙은이/野人), 貌 모(모양/얼굴), 恣 자(방자하다/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 騎 기(말을 타다), 恣騎牛 자기우(편안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소를 타다), 濕 습(축축하다/젖다), 殘 잔(해치다/남다, 나머지), 霏 비(눈이 펄펄 내리다/조용히 오는 비), 殘霏 잔비(그쳐가는 비/안개비), 壟 롱(언덕/밭이랑), 壟頭 롱두(밭머리/밭둑길), 從他 종타(그를 좇음/소탄 늙은이를 좇음), 傍 방(곁)
【 評說 】 소타고 가는 시골 늙은이 시골 노인이 석양에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가는 태평스런 모습을 그린 詩이다. 이 詩는 원래 제목이 ‘長源亭應製野叟騎牛’장원정응제야수기우이다. 즉 장원정이라는 정자에서 시골노인이 소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王名왕명(예종)으로 지은 것이다. 곽여가 임금인 고려 예종을 모시고 개성 근교에 나가 민생을 살피던 중 소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과 마주쳤다. 예종의 명으로 즉석에서 이 詩를 지어 올렸다. 자연 속에서 평생을 욕심 없이 낙천적으로 살아 온 한 늙은이가, 아무렇게나 소를 타고 밭머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집이 물가 근처에 있었는데, 마침 지는 해도 늙은이를 따라 흐르는 시내물 위로 지고 있었다. 소를 타고 가는 늙은이의 평화스런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 바로 자연과 동화된 天眞천진 그 자체가 아닐까? 푸른 소(靑牛)를 타고 유유히 함곡관을 나서는 老子노자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仙風선풍이 감도는 소를 타고 가는 늙은이의 도인 같은 풍모를 미화한 것도 그 렇거니와 소 탄 늙은이를 조용히 뒤쫓아 가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음미하고 이를 詩로 읊은 작자 일행의 관심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李仁老이인로는 ‘破閑集’파한집에서 “어찌 다만 仙風道韻선풍도운이라고만 하랴, 사람의 마음을 통째로 움직이기에 족하다.”고 감탄했다 한다.
원문=동문선 제19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어가(御駕)를 따라 장원정에서 다락에 올라 늦게 바라보니 들 늙은이 소를 타고 개울을 끼고 돌아가는 자 있어 명을 받들어 어제(御製)에 화응하다 [隨駕長源亭上登樓晩眺有野叟騎牛傍溪而歸應製]
곽여(郭輿)
태평 시절 풍치어라 멋지게 소 타는 모양 / 大平容貌恣騎牛 부슬비에 반은 젖어 밭둑 지내느니 / 半濕殘霏過壠頭 알겠구나 물 가까이 집 있음을 / 知有水邊家近在 지는 해에 개울을 끼고 가네 / 從他落日傍溪流 東文選卷之十九 / 七言絶句 隨駕長源亭上。登樓晚眺。 有野叟騎牛。傍溪而歸。應製。
大平容貌恣騎牛。半濕殘霏過壠頭。 知有水邊家 近在。從他落日傍溪流。
곽여(郭輿)
태평 시절 풍치어라 멋지게 소 타는 모양 / 大平容貌恣騎牛 부슬비에 반은 젖어 밭둑 지내느니 / 半濕殘霏過壠頭 알겠구나 물 가까이 집 있음을 / 知有水邊家近在 지는 해에 개울을 끼고 가네 / 從他落日傍溪流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 |
곽여郭輿
곽여(郭璵), 금문우객(金門羽客), 동산처사(東山處士), 몽득(夢得
- 郭輿곽여(1058 문종12~ 1130 인종 8) : 고려 예종 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夢得몽득이고, 호는 東山處士동산처사이며, 시호는 眞靜진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에 소속되었다가 홍주사를 맡아 외직으로 나갔을 때
長溪草堂장계초당을 짓고 여가를 즐기다가 곧 관직을 버리고 금주로 은거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들여 선생의 대우를 하였으며,
예종과 談論唱和담론창화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를 金門羽客금문우객이라 불렀다 한다.
다시 사퇴하고 성 동쪽 若頭山약두산에 살면서 동산처사라고 자호하였다.
예종이 산재를 지어주고 虛靜齋허정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예종이 산책 때 들러 함께 시를 읊고 즐겼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문신. 자 몽득(夢得). 시호 진정(眞靜).
우복야참지정사(右僕射參知政事) 상(尙)의 아들.
과거에 급제 후 궁중의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있다가 홍주(洪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주(金州)의 초당(草堂)에 돌아갔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세자일 때 사귄 정으로 불러서 궁중에 있게 하고,
선생으로 대하여 담론(談論)하기를 즐겼다.
뒤에 물러날 때 왕이 성동(城東)의 약두산 일봉(若頭山一峯)을 주어,
거기 서재를 짓고 머무니, 왕이 산책을 나오면, 들러 함께 시를 읊고 즐겼다.
그가 죽은 뒤 왕이 정지상(鄭知常)을 시켜 <산재기(山齋記)>를 쓰게 하고
시호를 내렸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곽여(郭輿: 1058~1130)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몽득(夢得)이다.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여(輿)’라고 지어 주어 그것을 본명으로 하였다고 한다. ‘여(璵)’자를 쓰기도 하였다.
청주 곽씨는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는데 곽상의 4대손인 곽원(郭元: ?~1029) 때에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곽원은 996년(성종 15)에 급제한 후
형부시랑,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1017년에 지공거가 되었다.
이후 우산기상시, 형부상서 등을 거쳐 참지정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청렴하고 문장이 능하다는 평을 받았다.
곽원의 손자인 곽상(郭尙: 1034∼1106)은 처음에 소리(小吏)였는데
선종의 잠저 때에 빈객이 되었다. 선종 즉위 이후에 감찰어사, 추밀원좌승선, 전중소감 등을
지냈으며, 1103년(숙종 8)에 수사공으로 치사하였다.
곽여는 1058년에 곽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083년(문종 37)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자현(李資玄)과 동방(同榜)이었다.
이자현, 이중약, 김황원, 정지상, 김부철, 홍관, 그리고 승려인 담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김황원, 이중약 등과는 문장과 청담(淸談)으로 벗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신교(神交)’라 칭송하였다.
활동사항
1083년(문종 37)에 과거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여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다가
홍주사(洪州使)로 나갔다. 이때 고을 바깥의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라 이름 붙이고 공무 중에 여가만 생기면 이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홍주사의 임기를 마치고 예부원외랑이 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은거하였다.
1113년(예종 8) 3월에 예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왔다.
예종은 궁중의 순복전(純福殿)에 머물게 하고 선생으로 칭호하였다.
오건(烏巾)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항상 예종의 곁에서 조용히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으니 사람들이 그를 금문우객(金門羽客), 즉 궁중 도사(道士)라고 불렀다
. 예종은 그가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므로 혹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결국 곽여가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요청하자 예종은 개성 동쪽의 약두산에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 이름 하였으며, 예종이 친히 편액을 써서 하사하였다.
하루는 예종이 동산재에 갔다가 곽여가 마침 도성에 가고 없자 벽에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이에 곽여는 예종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화답시를 지었다.
1115년(예종 10) 6월에 곽여는 송으로 사신 가는 왕자지와 문공미를 전송하는
연회를 자신의 별장에서 열고자 예종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예종은 주과(酒果)를 내려 주고 내관(內官)에게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연회가 지나치게 성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1116년 4월에 서경으로 순행하였을 때 예종은 곽여를 불러 상안전 뒤
화단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친히 술과 음식을 하사하며 시를 짓게 하고 예종도 화답하였다.
또 여러 종친과 곽여를 불러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짓고 곽여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곽여와 예종은 군신 관계 이상의 친밀한 사이로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에 『예종창화집(睿宗唱和集)』이 나오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 발문에서, “예종은 곽여와 같은 사인(詞人) · 일사(逸士)와 함께
시부(詩賦)를 지었는데 세간에 전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니
실로 태평성대의 일이다.
지금 『예종창화집』이란 것이 세상에 유포된 지 오래인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가
비로소 어떤 사람의 집에서 얻어 읽어보니 당시 군신간의 경사스런 모임을
목격한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탄식하고 한탄하다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마구 흘렀다.”고 감회를 서술하였다.
곽여는 시 뿐만 아니라 경서와 사서, 심지어 도교, 불교, 의약, 음양설에 관한 책까지
섭렵하였으며 한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여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활쏘기, 말 타기, 거문고, 바둑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상훈과 추모
1130년(인종 8)에 72세로 생을 마감하자 인종은 죽음을 슬퍼하며
근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진정(眞靜)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또 정지상(鄭知常)에게 명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짓게 하고 이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