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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묵상글 들 (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 충고가 사랑이 되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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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충고가 사랑이 되도록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는데
저는 용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용서를 잘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저는 용서의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일찍 돌아가신 것 때문에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때
막연히 그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다 아버지를 일찍 데려가신
하느님 때문이라 생각하며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다 생각한 적이 있고
가난한 저희를 도와주지 않는 친척이나 과부라고 저의 어머니를 무시한
이웃을 한 때 원망하고 미워하는 정도에서 용서하지 못한 적은 있지만
수도 생활 안에서 행복을 발견 후에는 용서할 일이 별로 없었지요.
누구 때문에 불행해야 그를 용서할 수 없는데
누구 때문에 불행하지 않기로 한 이후에는
용서할 일도, 용서한 일도 별로 없었던 거지요.
기껏해야 누가 저를 오해하거나 무시하거나 모욕을 주거나 하는 정도인데
그것이 무슨 큰 상처가 되고 불행케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지 않은 회칙 22장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영원과 영적 유익의 차원에서 우리가 뭣을 보면
모든 것이 용서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두고두고 원한을 품을 것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 것은 그로 인해 끝까지 불행한 경우인데
이렇게 되면 처음 상처를 준 것은 상대방의 탓이고 죄이지만
용서치 못하고 두고두고 원한을 품는 것은 이제 내 탓입니다.
그러므로 남 때문에 내가 상처받고 불행하고 죄 지었다고 남 탓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때 한 때 그럴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계속되고 계속 용서치 못하는 것은 나의 미성숙이 계속되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내 탓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음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으라는 주님 말씀에 대해 보겠습니다.
옛날에는 겁도 없이 형제들을 막 꾸짖었습니다.
나는 꾸짖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것을 지적해주는 것뿐이라고 강변하면서.
그런데 사랑으로 잘못을 알려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상대에게는 사랑이 아닐 수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데이트 폭력처럼 사랑의 폭력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사랑이고 원하지 않는 방식이면 폭력이잖아요?
그러니 형제의 잘못을 꾸짖을 때 그것이 상대에게도 사랑이 되도록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조심해야 하고, 잘 식별을 해야 하며,
사랑에 불순물과 폭력이 없도록 정화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지도 봐야 합니다.
내가 충고함에 있어 지금 내게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없을지라도
상대방이 아직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기다리면서 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물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충고가 사랑이 되어 상대방이 회개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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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라.”
우리는 주로 자신의 죄를 부여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형제들이 죄짓지 않도록 하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교정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피해의식과 침해당한 아픔에 빠지면, 타인이 잘못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은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사실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신이 용서를 청했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먼저 용서를 청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는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사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 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의 물량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 ‘순수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형제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라고 하시며,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의탁하지 못하고 신뢰를 두지 못해서 입니다.
제 믿음이 부족하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해서 입니다.
제 믿음이 약하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쳐서 입니다.
제 믿음이 흔들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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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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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겨자씨 한 알의 믿음
구약성경의 지혜를 간추린 지혜서에서는 아브라함 이래로 조상 대대로 전해준 신앙의 가치를 의로움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정의를 사랑해야 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며,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는 이들을 멀리하시고, 당신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감추신다고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모두 꿰뚫어보시고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은밀히 나누는 말도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해서 구약 시대의 유다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분의 심판 때문에라도 의롭게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 드려야 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관심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그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해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산수만 알던 학생들에게 방정식과 미적분을 가르치는 격이었던지, 그 당시 율법에 대해서는 해박하던 바리사이들도 알아듣지 못했고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방정식을 쉽게 풀 수 있는 인수분해를 가르치신 셈입니다. 오죽하면, 이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당시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던 가난한 이들에게 죄를 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까지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알아들을 귀가 없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질문만큼이나 엉뚱한 답변으로 응수하시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대로 되리라”(루카 17,6). 그렇게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정답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대속적 행동이야말로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입니다. 의로움은 신앙 진리의 산수요, 거룩함은 그 수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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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여름과 겨울 날씨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덥고 또 습한 날씨, 여기에 엄청난 비를 뿌리는 여름. 그리고 너무 춥고 또 운전하기 힘들게 엄청난 눈을 뿌리는 겨울. 모두 싫은 날씨입니다. 그래서 봄과 가을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맑은 하늘을 보여주는 날씨만 ‘날씨’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폭풍우, 천둥, 번개, 안개, 눈, 소나기 역시 ‘날씨’입니다. 즉, 날씨란 내가 좋아하는 날씨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좋은 날만 내 삶이고, 어렵고 힘든 날은 내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좋은 날뿐 아니라 나쁜 날 역시 나의 삶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과 나쁜 날 모두를 포함해야 내 삶이 완성되는 것이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날을 거부하려고만 하고 있으며, 그런 날은 내 삶이 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쁜 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쁜 날이라고 생각했던 그 날도 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그 자체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모든 날에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만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절대로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한두 번이야 용서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도 하루에 자그마치 일곱 번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믿음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해줍니다.
이 사실을 사도들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부족한 믿음을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그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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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술’이란 배려와 역지사지다. 말하는 내 입장보다 듣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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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순전히 외향적인 사람 또는 순전히 내향적인 사람 같은 건 없다.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유명한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스스로를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외향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한 가지의 모습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융의 말처럼 정신병원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MBTI 세미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나눠서 좀 더 사람을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격유형에 맞춰서 고정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어느 한 부분의 성격으로 고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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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새벽에 강론을 준비해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습니다. 캠핑을 가서도, 성지순례를 가서도, 신문 홍보를 가서도 강론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와의 약속이기도 하고, 강론을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이런 일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가능하게 합니다. 신부님들과 모임이 있을 때도 새벽이면 강론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서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숙소의 인터넷 연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잘 아는 신부님이 방법을 찾았고, 몇 시간 지나서 강론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가지고 간 평화신문을 읽었습니다. 잠시의 시간이지만 평화신문에서 감동을 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다른 길로 갔을 때 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삶은 이렇게 변화와 긴장이 있기에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전에 머물었던 숙소를 원했지만 숙소에 문제가 생겨서 다른 숙소를 얻었는데 주변에 호수도 있고, 전망이 더 좋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전쟁 당시 군종사제였던 키폰 신부님의 유해가 고향인 캔자스에서 70년 만에 안장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신부님은 끝가지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북한에 억류되었고, 포로로 지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신부님의 유해는 북한의 유해 인도로 하와이에 모셔졌는데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신부님의 유해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유해가 안장되는 날에 시장은 ‘키폰 신부의 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유해가 지나가는 동안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조광 교수님의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 발굴의 의미’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순교하였고, 조선의 국법에 따라 사형 당하였지만 그분들의 유해 발굴은 신앙과 국법의 차원으로만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국왕 이외에 더 높은 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었던 그분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첫 발자국을 걸었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시대를 살면서 민주화된 사회를 꿈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키폰 신부님의 숭고한 희생과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은 그분들의 희생과 순교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70년 만에 고향 땅에서 안식을 얻었던 키폰 신부님과 230년 만에 유해가 발견된 복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ness’입니다. 용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주는 것만이 용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용서합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해서 아름답게 이야기해 주는 성서 말씀은 루가복음 15장입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바로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에게 가장 큰 덕목인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용서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나를 구원에로 이끄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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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새로운 시작
-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의 수행 -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ㄴ).
사람 누구나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보람이자 행복은, 평생 공부는 무엇일까요?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 본래의 참 내가, 훌륭한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월 흘러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사람’ 하나뿐입니다.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람뿐입니다.
우리가 수도원에 온 목적도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단기간의 성취가 아니라 죽는 그날 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즘 새삼스런 깨달음은 사람은 나름대로 그 고유의 천재성을, 성인의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재와 노력은 함께 갑니다. 천재를 이길 수 없는 것은 평생 전사로서, 평생 학인으로서 백절불굴의 탄력 좋은 노력과 훈련 때문입니다.
16년간 독일을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나라로 이끌었던 세계적 정치 지도자, 메르켈의 언젠가 인용했던 평전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필자는 앙겔라 메르켈에게 긴 정치 인생 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특성을 한 가지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참을성이요!” 그는 대답하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프린터가 아니라 마라토너다. 그는 언젠가 역사책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라는지 묻는 질문에 “그는 노력했다(She tried)” 라고 답했다. 선동 정치가 판치는 시대에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묘비명으로 “겸손과 품위”를 선택했다.-
참 매력적인 아름다운 영혼, 앙겔라 메르켈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하루 12시간 이상씩 의자에 붙들어 맨 채 손으로 꾹꾹 눌러쓴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집필 자세도 감동입니다.
-‘태백산맥’ 10권 200자 원고지 1만6500장, ‘아리랑’ 12권 2만장, ‘한강’ 10권 1만 5천장을 비롯한 10만 여장의 육필 원고 앞에 서면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감동적인 인터뷰 대목입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것은 읽고 또 읽기 때문이다. 매일 맨손체조와 산책같은 가벼운 운동을 계속해서 피가 원활하게 돌게 한다. 매일 뭔가를 쓰는 것은 프로 스포츠 선수가 체력을 관리하는 것과 같다. 김연아도 손흥민도 그렇게 신들린 듯한 기량의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비결에 없다. 오직 노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집중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 그것을 성취했을 때 황홀감을 느낀다. 그 황홀감이 그 동안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킨다. 그 토대위에 새로운 기운의 새싹이 파르파릇 돋아난다, 그 기운이 고통을 이겨나가게 한다. 그런 세월의 향기가 풍기는 우리의 삶이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인생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정신적-육체적 건강생활을 경작해야 한다. 인생은 경영이다. 나이는 육체가 먹는 횟수일 뿐이다. 나이들수록 정신은 명료하고 명징해질 필요가 있다. 내 부인 김초혜 시인은 저에게 가장 지성적인 대화자이고, 가장 슬기로운 충고자이자, 가장 열정적인 응원자다. 그러므로 김초혜를 영혼 육체를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대목중 김초혜 대신 주님으로 바꿔도 저에겐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저에게 가장 지성적인 대화자이고, 가장 슬기로운 충고자이자, 가장 열정적인 응원자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혼 육체를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사랑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고 겸손을 사랑하고 침묵을 사랑하고 인내를 사랑하고 믿음을 사랑하고 노력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훈련을 사랑하고 용서를 사랑해야 합니다. 끝없는 사랑입니다. 지칠줄 모르는 사랑으로 모든 수행 덕목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노력과 훈련을 기울여야 합니다.
독일의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심지어,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며 희망의 노력과 훈련을 강조합니다. 어찌 희망뿐이겠습니까? 모든 수행 덕목에 필요로 하는 바, 한결같이 깨어 노력과 훈련에 힘쓰는 것입니다. 평생 노력하는 영적 훈련병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모든 수행의 동기이자 원천은 사랑입니다.
첫째,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죄도 보고 배웁니다. 이웃을 죄짓게 하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죄인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둘째, 끊임없는 용서의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용서에 지치지 않도록 용서의 노력과 훈련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끊임없는 믿음의 노력과 훈련의 수행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청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믿음의 중요성을 환기시시키며 믿음의 노력과 훈련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 고무하고 격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중국의 고사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넷째, 끊임없이 정의와 순수한 마음, 지혜, 거룩한 영의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과 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금과옥조의 말씀들입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린다. 지혜는 다정한 영,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정성을 다한 노력과 훈련에 감천하신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삶의 자세와 그대로 통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우선적으로 지극한 노력과 훈련의 수행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고,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우리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우리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지혜1,6ㄴ).
이처럼 노력의 훈련과 은총은 함께 갑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과 인내, 노력과 훈련의 수행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시며,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켜라.”(필리2,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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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의 관계와 형제 사이의 관계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들려 주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루카 17,1)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오늘 복음의 대목은 길지 않지만 세 가지 가르침의 모음집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서 두 가지는 사람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 가르침은 하느님과의 관계, 즉 믿음에 대한 것이지요.
앞서 두 가르침은 형제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나의 그릇된 말과 표양이 작고 소박한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악에 떨어지게 할 수 있음을 주지시키시는 내용이고, 둘째는 형제의 오류나 타락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촉구입니다.
형제의 행위를 교정하는 위치에 서게 된 이는 그 꾸짖음이 다양성에 대한 무지나 감정적 신경증적 폭발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의 죄를 꾸짖을 때 함부로 단죄하거나 모욕해서는 안 되며, 그가 회개하거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언제든 용서를 건네야 하지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이미 제자단 안에서 생활하며 나름 공동생활의 고충을 겪고 있을 제자들이 형제간의 지침을 듣고 바로 예수님께 "믿음"을 청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복음적으로 잘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연결이 필요함을 깨달은 건 아닐까 싶네요.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루카 17,6)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피조물 안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형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해 줍니다.
형제를 변화시키는 기적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는 있는 힘껏 믿음을 부여잡고 기다리면 됩니다. 그 형제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움직이지요.
제1독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 1,1)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는 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정의를 펼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선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찾아야 하지요.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람 사이의 관계, 이 둘은 따로 굴러갈 수 없는 바퀴처럼 한 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의 통치자도 아니고 감히 형제를 꾸짖거나 용서할 위치도 아니라고 방심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아무리 약하고 부족하고 가난한 이라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제외되거나 형제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받은 이는 없으니까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지혜 1,7)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하느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께서 우리의 앞과 뒤, 옆, 위와 아래, 안과 밖을 가득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아는 이는 사람을 다르게 대할 수 없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람과는 또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살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누군가를 일으키고 피어나게 하는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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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많은 이의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내 선택과 결정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내 아집과 욕심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 오만인 줄은 압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인 사제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 있겠지만, 그 ‘옳음’ 때문에 공동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 옳음은 아마도 ‘그른 것’일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사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생각은 “비뚤어진 생각”이며
“미련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공동체가 분열하여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서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제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청원이 바로 저의 청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비롯된 굴레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하여 한 발짝 물러서는 용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자매를 걸고 바다로 내던져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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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죄는 비열하고 불쾌한 행동,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화내고 모욕하고 모함하고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짓들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오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는 어떤 악한 것도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분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신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피곤하게 하며, 조심스럽지 못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히고,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죄짓게 하는 일이 있어서 죄가 생겨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일이 곧 죄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야고 3,2) 실제로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때마다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어 나쁜 습관이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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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루카 17, 6)
삶과 죽음을
잇는 끈또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삶도 무너집니다.
단단한 믿음또한
작디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있는 지를
다시 반성하게됩니다.
얽히고설킨
관계의 길을
다시 열어주는 것또한
주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과 함께
자라나는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은 서로를
살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사셨던 자리를
믿음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깊어질 수 없고
믿음 없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뿌리
구원의 핵심은
바로 믿음입니다.
상처와 아픔까지
감사하게 만드는
믿음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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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서, 회개, 구원>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ㄴ-3ㄱ).”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서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지적하고 꾸짖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같은 태도를 꾸짖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일’은 남을 유혹하거나 압박해서 죄짓게 만드는 일입니다.
‘작은 이들’이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냥 ‘다른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지는 것은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 그렇게 사형당하는 편이 낫다는 말씀은,
그 죄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그만큼 큰 죄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얻을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유혹하는 등의 죄를 짓더라도 신앙인들은 그런 모습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가?”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유혹에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괜찮아.” 같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괜찮다는 그 말이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너희는 죄를 지으려면 혼자 지어라.”,
또는 “지옥에 가려거든 혼자 가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지옥에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서 노력하여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9,43-48).>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죄를 짓는 형제를 꾸짖는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를 용서하는 것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마라.” 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회개하거든’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여기서 예수님 말씀에는 “하느님께서 너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니”
라는 말씀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니
우리도 그렇게 형제를 무한정 용서해야 한다는 것.
‘남을 죄짓게 하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꾸짖고 타이르고 용서해서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은
“용서를 청하거든 용서하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청하는 것은
이미 회개를 했거나 아니면 회개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용서를 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용서를 하는 입장에서는 죄 지은 사람의 회개와 상관없이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그러면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용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으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죄를 지은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형제가 먼저 용서를 한다면, 그 응답으로 회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느님께서 무한정 용서해 주신다는 것만 믿고서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 청하는 일을 자꾸만 반복한다면?
또 형제가 무한정 용서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 청하는 일을 자꾸만 반복한다면?
그 회개를 과연 진정성 있는 회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한 번 주신 용서를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회개로는 그 용서의 은총이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죄 속에 있으면서 거짓 회개라는 죄를 새로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가 회개하기도 전에 형제가 먼저 나를 용서한 다음에
그것을 취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형제의 용서가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나를 용서한 그 형제는 성덕을 쌓은 일이 되지만,
거짓으로 회개한 나는 더 큰 죄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 결심과 실천 없이는 거짓 회개가 될 뿐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이 말씀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일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앞의 용서에 관한 말씀에 연결하면, “누구든지 믿고 청하고 노력하면,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도 회개시킬 수 있고, 구원받게 할 수 있다.”가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1요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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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하느님의 선(善) 안에 머물기 위해>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면서 동시에 모든 이가 더불어 당신의 사랑과 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 길을 알려줍니다. 곧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1-3ㄱ),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해주며(3ㄴ-4), 굳은 믿음을 가지라(5-6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행복하게 살려면 먼저 남을 죄에 걸려넘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에 기우는 본성적 경향과 인간적 한계 때문에 자신부터 죄에 걸려 넘어지곤 하니 남을 죄짓게 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고정된 사고의 틀과 왜곡되고 비합리적인 사고로 남을 판단하며, 자기혐오와 열등감 등을 남에게 투사하게 되지요. 선과 사랑의 결핍이 남을 걸려넘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무감각, 무관심, 상처와 고통의 방치, 불의 앞에서의 회피를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 안에 머물러 다른 이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인간의 한계와 이 세상의 속성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죄의 유혹에 걸려넘어지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는 불행하다고 하십니다(17,1).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당시 몹시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던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으니(17,2) ‘스스로 조심하라’(17,3)고 경고하십니다. 사랑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모든 이가 함께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려면 서로 한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죄를 '떠넘기는' 것이라면 용서는 남의 죄를 '떠맡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그릇으로 다른 이의 영혼의 상처를 품어 녹여버리는 것이 용서이지요. 우리가 이런 용서를 '몇번이고' 한없이 할 때 모두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러 행복한 존재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죽어도 용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와 자신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킴으로써 자기 영혼을 자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매순간 주님의 엄청난 사랑과 용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조건없이', 그리고 '한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화해해야 합니다.
남에게 죄의 짐을 지우고, 남의 죄를 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하십니다(17,6). 자꾸만 죄에 걸려넘어지고, 남을 죄짓게 하고 미움의 골이 깊어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실낱같은 믿음의 동아줄을 잡고 선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다가가보면 어떨까요!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저희를 붙들어주시어 당신의 선 안에 머물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죄에 걸려넘어지게 하지 않게 하시며,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를 너그러이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랑깊은 가슴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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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수시로 자신의 삶과 언행, 일거수일투족을 성찰하고 또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에너지를 받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갑자기 뒷골이 땡기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스트레스 지수가 급상승합니다.
자기 혼자만 죄를 짓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나 이웃들, 주변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함께 파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복음 17장 1~2절)
인류 역사나 교회 역사를 되짚어나가다 보면 그런 사람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 말입니다.
자신의 그릇된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여 작당하고 모의하고, 인간으로서 결코 저지르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다가, 결국 자신도 멸망하고 주변 사람들도 죄짓게 만들어 함께 죽음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틈만 나면 예수님으로부터 강력한 질타를 받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등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지도자들이 그들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제국주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불법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우리나라의 독재자들이 그들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이었는데, 괜히 그들 곁에 있다가 함께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 사람들,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좀 많습니까?
곰곰이 생각하니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만 성당 안 나가면 좋을 텐데, 괜한 트집을 잡으며 배우자나 자녀들을 못나가게 하는 사람들도 심각한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존재 자체로, 숨 쉬는 것 자체로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른바 분노유발자들, 구타유발자들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세상 사람들 혈압을 갑자기 상승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습 자체로, 삶 그 자체로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욕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자신의 삶과 언행, 일거수일투족을 성찰하고 또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내 얼굴 자체가, 내 언행 자체가 누군가에게 큰 스트레스요 분노와 고통을 유발시키는 원인은 아닌지 늘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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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녀들을 향한 가스라이팅, 이젠 그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시고 하지만 그 일을 저지르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로서는 우리가 자아와 원죄의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사탄과 자아와 그로부터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타인을 죄짓게 만드는 일은 멈출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마치 자아와 사탄처럼 누군가를 똑같이 죄짓게 만든다면 사탄과 마귀가 영원히 벌 받게 될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런데 자아나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죄짓게 할까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고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조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는 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연극에서 비롯된 말로 갖은 방법을 써서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자기 맘대로 조종하게 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서 약을 먹입니다. 아내를 사랑해주는 척하다가도 자신이 감추어놓은 물건들을 아내가 옮겨놓았다며 아내가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남편이 아내를 얻어 그 집으로 이사 온 이유는 그 집 위층에 자신이 보석이 탐나 살해한 노부부가 있는데
그 노부부의 보석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잣집 여자를 유혹하여 그 아랫집을 사고 밤마다 위층으로 올라가 보석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씩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올라간 뒤 정확히 10분 뒤에 자신의 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윗집에서 가스등을 켜면 다른 집들은 조금 어두워지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기 정확히 10분 전에 방은 다시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15년 전 위층 노부부를 살해한 사람이 남편이고 남편이 자신까지 미친 여자로 만들어 보석만 찾으면 자신을 정신병원에 버려버리려고 한 것을 밝혀냅니다.
이렇듯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공범이 되게 만드는 에덴동산에서 ‘뱀’이 했던 것을 의미하는 현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뱀에게 잘잘못을 묻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와를 자기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죄를 짓게 하였다면 그냥 마귀요 사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심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유혹자가 됨으로써 그냥 마귀로 심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가정에서 어느 정도는 이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뱀의 역할을 하여 자녀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서 자녀들을 자신들과 같은 욕망을 추구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벼랑 끝, 상담』의 성적 때문에 조현병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항상 싸우는 사람이었고 아이가 7살 때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 죽으러 간다.”라고 말하며 나가버립니다.
아이는 불안하여 엄마에게 전화하였는데 엄마는 즐거운 목소리로 곧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엄마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찢어버리고는 그것밖에 못 하느냐며 눈물을 흘리고 웁니다.
아이는 엄마를 위해 왕따를 당해가면서 공부만 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신발 끈을 묶고 음식을 먹고 학교에 가는 것까지 모두 다 해 주며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분명 서울대 갈 아이라면 계속 부담을 줍니다.
길거리에서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노동자 주제에!”라고 깔보는 말을 하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식으로 교육합니다.
성적 외에는 아이의 생활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하였습니다.
아이는 외고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집단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공부에 대한 공포감이 가중되어 결국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저녁 식사 때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너는 왜 이 모양이냐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아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숟가락을 놓고 말했습니다.
“성적이 밥 먹여줘요?” “뭐?” “성적이 밥 먹여주느냐고요?” “너, 미쳤어? 지금 엄마한테 뭐라는 거야!”
엄마를 소리를 꽥 지르며 아들을 발로 찼습니다. 그 순간 머리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느낍니다.
“제기랄! 그만 좀 하라고! 이 미친 아줌마야! 넌 성적이 다냐? 성적만 좋으면 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그는 식탁을 엎어버린 뒤 밥그릇을 벽에 던져버렸습니다.
밥그릇이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지호야, 왜 그래!”
아빠가 아들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빠에게도 욕을 했습니다.
“왜 그래? 너는 내가 왜 그러는 거 같아? 서울대? 서울대는 너도 못 간 주제에 왜 나보고 가라 말라야! 나쁜 놈아!”
부모는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도 착한 아이가 너무 힘들어서 잠깐 실성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절에 감금시키다시피 하고 돈을 들여 그를 공부하게 감시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는 부모에게 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꼭 유명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힙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힘으로 억누르는 히틀러를 존경하고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아르바이트 두 시간 하는 것도 남들보다 못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누가 아이를 죄짓게 만든 것일까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아이일까요, 아니면 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모일까요?
물론 그 부모도 그 부모에게 그렇게 성장하여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끊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맘대로 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유태인처럼 성인식을 치러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첫영성체입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서 자녀를 형제로 대해줘야 합니다.
옆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고 더는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자유를 내 뜻대로 하려는 시도입니다.
뱀이 그랬고, 마귀가 그랬습니다.
이제 첫영성체를 했다면 아이 스스로 하느님과 성모님을 부모로 여기고 그분들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성인으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 맘대로 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제 아버지가 하느님이고 제 어머니가 성모님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봉헌이 지금은 매우 힘들겠지만 나중에 위 예처럼 자녀에게 칼에 맞는 것보다 낫습니다.
위 자녀도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에 가방에 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에게 향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드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부모와 자녀 사이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성인으로 대해줌으로써 몇 년 흔들리고 올바른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7살 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그때 술과 담배도 하며 화투만 치며 방학을 지냈지만 그렇게 저를 어른으로 대해주신 것이 부모님께 가장 큰 감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믿어주셨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아졌고 아무 눈치 보지 않으며 누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죄짓게 만들어 맷돌을 메고 바다로 가라앉는 게 나을뻔한 그 사례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첫영성체 이후에는 자녀의 자유를 건들면 절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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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알고 저지르는 일은 죄가 됩니다.
또 모르고 저지르는 일도 죄가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그것이 나에게만 영향이 있는지
아니면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죄를 짓는 구조를 만들어
하느님을 향한다고 말을 하면서
모두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교회법에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확인합니다.
먼저 그것이 합당한지 아닌지,
곧 하느님 뜻에 맞는 일인지 아닌지를 살펴봅니다.
두 번째로 절차적으로 맞는지 아닌지,
곧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요소인 합당함이 개인과 하느님 관계에서
식별의 차원을 보여준다면,
두 번째 요소인 합법성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지켜야 할
절차상 정의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절차를 걸쳐 일을 진행한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 차원을 모두 지킬 수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믿음을 더하는 것이 합당함을 찾는 자세라면
스스로 조심하는 것은 과정을 잘 지키려는 자세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죄짓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함께 하면서도
서로 다른 역할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회개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진 몫입니다.
다만 그를 믿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은 다른 차원임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절차상 정의를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노력을 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면서도
서로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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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cpbc TV. 매일미사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매일미사ㅣ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집전
https://youtu.be/CJTWAZoMwgc 32:56
조회수 1,295회2021. 11. 8.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매일미사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글라렛 선교 수도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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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2주간 월요일(지혜1,1-7)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에 충만한 영을,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6-7)
지혜서 1-5장은 지혜서의 제1부로서 정의와 불멸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지혜서 1장 1-15절은 시작 권면의 부분인데, "정의를 사랑하여라." (지혜1,1)라는 초대로 시작하여 "정의는 죽지 않는다." (지혜1,15)라고 하면서 정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친다.
구체적으로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주는 권면으로 시작되지만, 이 권면은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벗어나 이방인들의 사고와 행위를 받아들일 위험이 있는 젊은 유다의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권면을 감싸고 있는 지혜서 1장 1절과 15절의 '정의' 혹은 '의로움'이라는 용어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올바른 태도를 가리키는 넓은 성서적 의미로 사용된다.
'정의'의 의미는 지혜서 1장 1절의 두 개의 병행구절, 즉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에 의해 명확히 설명된다.
죄를 짓고 하느님을 시험하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불신자들(지혜1,2)은 정의도 하느님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와 죄는 공존할 수 없다.
한편,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어가거나"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지혜1,4).
다른 한편,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불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 철학의 용어인 '영혼', '육신', '영'은 전문적인 철학 용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윤리적인 의미로 나타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다정한 영', 또는 '인간을 사랑하는 영'이다(지혜1,6ㄱ).
지혜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을 수 없다(지혜1,6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은 이 구절들에서 혀로 짓는 죄들을 가리키는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다(지혜1,8-11).
하지만 지혜를 가리키는 '다정한 영' 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사실 지혜는 "주님의 영"이며,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지혜1,7)라는 점에서 그리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세계 영혼과 동일한 기능을 행사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혜의 우주적 차원에 머무르는 대신에 곧바로 방향을 돌려 "불의한 것을 지껄이는 자들"과 "간계를 꾸미는 자들"(지혜1,8-9)의 윤리를 경고하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열성스러운 귀는 모든 것을 다 들으니"; 지혜1,10)과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을 죽인다." (지혜1,11)는 것을 일깨운다.
지혜서 1장 10-11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언급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평한 것을 상기시키며, 구체적으로는 지혜서 1장 6-11절에서 비종교적인 것으로 비판받는 말을 가리킨다.
지혜서 1장 12-15절에서 권면은 죽음과 불멸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정의'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삶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정의는 죽지 않지만"(지혜1,15), 그릇된 삶의 길("그릇된 생활")을 택하고 "자기 손의 행위들로" 죽음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지혜1,12).
'자기 손의 행위'라는 말은 아마 지혜서 13-15장의 주요 관심사인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을 처음으로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은 하나의 가능성일 수 있지만, 저자는 지혜서 1장 13-14절에서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다."라는 사실을 즉시 지적하여, 죽음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창세기 3장을 암시한다.
<인격적 지혜>는 오늘 독서에는 하느님의 마음이요, 성령님처럼 계시된다.
1)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4)
간악한 영혼은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권능을 시험하거나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자,하느님을 불신하는 자인 것 같다.(1,1-3참조) 동시에 4절을 보면, 죄짓는 자를 말한다.
요한 복음 1장 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aletos)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dolos)"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희랍어 돌로스(dolos)란 단어는 영어로 guile(가일), subtility(서틸러티), deceit(디시트)로 번역되는데, 교활<狡猾-간사(奸邪)하고 음흉하다>, 엉큼, 간교, 기만, 책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 안에 갈고랑이 같은 낚시바늘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것을 좋아하시고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2) 지혜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계시된다.(5)
그 영은 진실만을 찾으며, 어리석거나 둔하거나 융통성이 없지 않고, 정의만을 추구한다.
3) 지혜는 <다정(多情)한 영>이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고 책임을 물으신다.
4) 지혜는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으로 계시된다.
이것은 아니 계시는데 없이 곳곳이 다 계신 편재성(遍在性)과 무량(無量: Infinitas,ubiquitas)을 드러내며, 동시에 모르는 것이 없이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전지(全知:omniscientia) 를 말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순수한 진실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주소서.
오소서! 성령님! 저희 모두에게 주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외경심과 사랑도 허락하소서.
연중 제32주간 월요일복음(루카17,1~6)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1ㄴ~2)
루카 복음 17장 1~10절은 루카 복음 9장 51절~19장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후기 활동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최후의 순회 선교 여행을 떠나시기 직전(17,11) 베레아 지방의 활동(14,1~17,10)의 마지막 시점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그리고 17장 1~10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4절까지는 성도들의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이웃과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고, 5~10절까지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이 가운데에서 1~4절의 전반부는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에 대한 경계(1~3ㄱ절)와 형제간의 상호 용서에 관한 교훈(3ㄴ~4절)이 나오며, 5~10절의 후반부는 진실한 믿음에 관한 교훈(5~6절)과 겸손한 봉사에 관한 교훈(7~10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레아 지방 활동을 마감하시며, 주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주요한 덕목들을 다시 한번 강조하시면서, 루카 복음 15장, 16장에 나오는 비유들을 총정리하시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임을 밝히신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1~2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이야기와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마태18,1~7).
하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소외되고 멸시받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교훈을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주셨기에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인 '아넨덱톤'(anendekton; impossible)과 '스칸달라'(skandala; offences)를 사용하셔서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내신다.
새 성경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의 원래 의미는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올무', '부딪히는 돌', '거리끼는 것'으로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유혹에 빠뜨리거나 교리 혹은 가르침 등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아넨덱톤'(anendekton)은 '가능하다', '허락하다'는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endechomai) 동사에 부정 접두어 '아'(a)가 결합된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불가능하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me)와 연결되어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유혹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이 있어야 됨을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강조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시고 있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8장 6절과 마르코 복음 9장 42절에는 '연자매'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 a millstone)가 나온다.
여기서 '연자'에 해당하는 '오니코스'(onikos)는 '나귀'(루카14,5)를 뜻하는 '오노스'(onos)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따라서 '연자매', '연자 맷돌'에 해당하는 '뮐로스 오니코스'(mylos onikos)는 '나귀의 힘에 의해 돌리는 커다란 맷돌'을 말한다.
이것은 집안에서 사용되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많은 곡식을 한꺼번에 빻기 위해 사용되는 큰 맷돌이었다.
루카 복음 17장 2절에는 '리토스 뮐리토스'(lithos mylikos; a millstone)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맷돌에 속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것의 용도는 곡식을 가는 것인데, 때로 이방인들은 이것을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의 로마 처형법 중에 하나는, 이 돌의 구멍에 목을 매게 해서 바다에 가라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처형 방법은 영적 세계에 무지한 이교도들이 바다에서 죽은 자들은 사자(死者)들이 머무는 세계로 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왔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은 그들이 죽은 물 위에서 영원히 방향도 없이 떠돈다고 생각했다.
보통 맷돌에 사람을 묶어 바다에 던져도 가라앉는데, 하물며 대형 맷돌에 목을 매어 빠뜨리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음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자매에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은 장례를 지낼 수 없는 죽음으로써 최악으로 여겨졌다.
한편, '걸고'와 '내던져지는 편'으로 각각 번역된 동사 '페리케이타이' (perikeitai; that were hanged; that were tied)와 '에르맆타이'(erriptai; be thrown; be cast)는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로서,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가 제3자, 즉 사법당국에 의해서 수장되는 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걸리어지는 '그 목'은 죄짓는 작은 이의 목이 아닌, 작은 이를 죄짓게 한 당사자의 목이며, 그 목에 연자매를 매고 바다에 던지는 주체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당국이다.
그리고 '낫다'에 해당하는 '뤼시텔레이'(lysitelei; it would be better)는 본절에서 '더 좋다'(it is better)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세금을 지불하다'는 뜻으로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작은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준엄한 형벌이 반드시 주어짐을 전제하는 동시에, 차라리 이러한 형벌이 더 낫다는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은 이'(one of these little ones), 즉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해서 내세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는 것보다,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낫다는 의미이다.
내세에서의 형벌의 막중함은 연자매에 달려 수장당하는 형벌에 비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은 남들이 보잘것 없게 여기는 작은 이, 즉 소외된 이웃이나 스스로 힘으로 설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이들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히 시행되던 가혹한 형벌을 언급한 것은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을 애타는 심정으로 막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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