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연구실장 법상스님] '正定' 하면 매순간 집중…정화의 꽃 피워
나부터의 정화로 지구촌을 정토화해라
여러분, 맑고 향기롭게 살고 계십니까?
법정 스님께서 생전 설하신 '맑고 향기롭게' 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늘상 살아가는 지침으로
맑고 향기롭게 살 것을 말씀하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그 향기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길상사라는 사찰 이름을 지은 것도 여기에
오신 분들에게 모두 길상한 일들만 일어나서
늘 가정이 행복하고 늘 봄바람 같은
인생이 되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맑고 향기롭게' 라는 의미 아래에
"불교의 정화(精花)는 나비 효과가 있다" 는 주제로 시작하겠습니다.
불교의 정화(精花)는 아주 맑고 향기로운 꽃이라는 의미도 있고,
청정한 불도를 현실로 옮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정화는 승가의 정화뿐만 아니라
불교의 자체의 정화가 필요합니다.
요즘은 지구촌 시대입니다.
지구가 하나의 촌락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면 단위가 일일 생활권이었다면
지금은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 대한민국 불교의 정화가
세계 불교의 정화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말 입니다.
이것은 법정 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맑고 향기로운 삶이 내 삶에서 벗어나 이웃의 삶이 되고
전 지구의 삶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거 법정 스님의 정초 법문 중 하나를 살펴보니,
"시간을 살리는 삶을 사는가 하면
시간을 죽이는 삶도 산다"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하지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은 바로 정화하는 삶이라 할 수있습니다.
정화는 우리 현실 속에서 불국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 정화는
개인이 이루는 하나의 정화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정화운동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혼탁함은 누구 하나가 개인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화의 꽃은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해서
인도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펼쳐왔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정화는
현대에도 절실히 요청 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까지
다양한 불교적 패러다임을 배워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우리 생활에서 하나의 가치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한낱 교과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알면 그 한 가지 만큼은 자기 삶의
패러다임에서 정토를 구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개인의 정화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개짓이 큰 바람을 몰고 오듯
나비효과로 한국과 지구촌락이 정토화되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2600여 년 전에 부처님은 인간 세상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후 부처님은 신의 노예이자 피조물이었던 인간이
신을 지도하는 승격의 모습을 갖추셨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사건이 있다면
인간이 신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석가모니의 탄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불자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셔도 됩니다.
그 자부심으로 불법을 이웃에 전하고 세계가 정화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불자들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께서 늘 말씀하셨듯
맑고 향기롭게 살아간다면 내 가정이 정토화되고,
내 이웃, 내 나라, 세계가 한 가족처럼
정토화되는 세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업으로 '시간을 살리는 삶' 살 것
그렇다면 어떻게 정토화할 것인가가 화두이겠지요.
먼저 우리는 우선 마음가짐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맑고 향기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맑은 것만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맑은 것에 대한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탁한 것이 함께 있어야지
맑은 것에 대한 가치가 빛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세상이 혼탁할수록
부처님 가르침은 빛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불보살이 가지는
네 가지의 자비심 자(慈)·비(悲)·희(喜)·사(捨)입니다.
자무량심은 즐거움을 주는 마음,
비무량심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희무량심은 기쁨을 나누는 마음,
사무량심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다면 향기로운 삶은 어떠한 삶일까요?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올바른 수행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중도적 수행관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수행할 당시에는 '따빠스' 라는
극단적 고행법과 극단적 수정주의 수행법이 유행했습니다.
이 두 내용들을 부처님께서 조화롭게 접목시켜
새로운 수행법을 고안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중도적 수행법을 익히시고
최초로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팔정도와 더불어
사성제라는 내용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는 연기의 내용을
인간의 현실적 삶 속에서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며,
이상적인 삶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팔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향기롭게 사는 것입니다.
정견(正見)에서 정(正)이라는 의미는 '바르다' 라는 의미 외에도
'조화롭게 더불어 산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는 어느 곳에 치우침 없이
조화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또 팔정도 중에서 우리 삶의 패러다임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정어(正語)입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거짓말, 편견을 갖거나 치우친 견해로 말을 전하는 것,
남에게 하는 악담 등의 반대말입니다.
정직한 말을 하고 두 말이 아닌 한 말을 하고,
조화롭게 서로 어울리는 말을 하는 것이 정어(正語)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정어(正語)만 잘 지키고 살아도
우리는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또 바른 행위를 뜻하는 정업(正業)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탐욕(貪)과 성냄(瞋), 어리석음(痴)을 버리는 삶,
생명을 죽이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삶,
자기가 노력한 그 이상의 대가는 바라지 않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모두 투기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를 떨쳐버리고 노력한 대가 이상은
바라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업(正業)을 실천하는 삶은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신
'시간을 살리는 삶' 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현실에 불만족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서 들판을 다 다녔지만
그 어느 곳에도 찾지 못하고 집에 와보니
파랑새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처럼 깨달음이란 저 멀리 유한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삶에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합니다.
깨달음의 이상은 극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현재 행복하고자 하는 의식 속에 이미 행복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정 스님께서는 '무소유(無所有)' 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소유의 삶은 소유할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 자체가 이미 텅 비어있는 존재이자
우주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못하고 하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변화합니다.
따라서 나라는 주체는 현실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소유의 가르침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무소유의 삶이야말로 행복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를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맑고 향기로운 삶의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정업에 의해 정명이 이뤄집니다. 정명(正明)은 바른 생활입니다.
즉 생활 자체가 행복임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행복을 실현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내 생활 속에서
스스로 맑고 향기롭게 피어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의 법음에 따라 오늘 이 길상사에도
그 향기가 가득히 퍼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끊임없이 이런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정진을 위해 정념하라
정정진(正精進)이라는 것은 삶의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른 행동, 바른 언어, 바른 생각을 실천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도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법정 스님은
"시간을 살리는 삶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삶이 있다" 고 하셨습니다.
정정진의 실천이 바로 시간을 살리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늘 우리는 정념(正念)해야 합니다.
정념은 여러 가지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마음 챙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마음을 챙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갑니다.
늘 우리는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베풀면서 살아야 하겠지요.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다른 사람을 보며 웃어주는 것 또한 베풂입니다.
항상 웃으십시오. 우리 모두는 빚을 지고 삽니다.
모든 우주적 도움을 받는 가운데 바깥으로 빚을 지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 베풂으로써 빚을 갚아야 합니다.
물질적 보시만이 아니라, 오늘 들은 이 법문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도 큰 보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보시를 해서 복덕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념 중에 예부터 내려오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관신부정(觀身不淨) · 관수시고(觀受是苦) ·
관심무상(觀心無常) · 관법무아(觀法無我)입니다.
관신부정(觀身不淨)은
이 몸은 항상 부정한 것으로 들끓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몸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라는 뜻입니다.
관수시고(觀受是苦)는 이 세상에 감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항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무상(觀心無常)은 한 인간이 가진 마음의 실체를 보니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는 대상에 따라서 그 실상을 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관법무아(觀法無我)는 모든 존재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끔 청정 그 자체를 유지해야 합니다.
내 몸도 순간순간 고정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무소유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신앙적인 면에서는
염불, 염법, 염승, 염시, 염계, 염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염천은 천상에 나는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수경에서 설하는 바에 따르면
입으로 네 가지, 몸으로 세 가지, 마음으로 세 가지,
총 열 가지 선업을 지키며 살아갔을 때 천승락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염휴식(念休息)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무상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놓은 채로 그냥 두고 살아가는 것을 염휴식이라 합니다.
그리고 염안반((念安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호흡기관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가장 중요한 수행법 중
수식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흡은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 몸은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이것을 잘 알고 스스로 조절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사(念死)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찰나를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몸이 매시 매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을 때 한 시도 소홀하게 살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정(正定)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각기 맡은 바 집중해서 행하는 것을 정정이라 합니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집중하면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그 후 여유가 있을 때
육바라밀과 십바라밀을 행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실을 극락으로 만들고
정화의 꽃을 피워 청정한 국토를 이루는 삶입니다.
한 사람의 행위가 나비 효과를 이루어서
내 가정, 내 사회에 지구 촌락 모두에 정화의 꽃을 피우는
불국토를 건설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출처 - 2015년 4월 5일 길상사 일요법회(현대불교신문) 선재 편집] 나무아미타불]
《무주선원無住禪苑》부처님 도량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