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밀고 가는 새로운 방식
2013년 《시조시학》 등단 후,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하기도 했던 김수환 시인의 첫 시집 『사람이 간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228로 출간되었다. 김수환의 시조는 한마디로 낯설다. 현대시조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래서 새롭고 이채롭다. 등단 11년 만에 첫선을 보인 시집답게 시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 고심의 흔적을 문학평론가 김남호는 ‘그리움을 밀고 가는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내며, 이 시집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로 ‘모호함’과 ‘모던함’을 제시했다. 전통시조의 율격에 익숙한 독자라면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김수환의 이번 시집이 현대시조의 새로운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김수환 시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2013년 《시조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하기도 했다.
시인의 말
실개천에 흐르는 꽃잎 같은 사람이
머물지 않는 강물에 떠가는 정처도 없는 사람이
있다가 없어지는 구름 아래 있었다가 없어진 사람이
흐린 달 아래 본 듯한 사람이
저녁연기 같은 사람이
사람을 잃은 사람이
말을 잃은 사람이
2024년 3월
김수환
문장이 아니었지만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담장 밑 해바라기가 해바라기를 넘볼 때,
즐거운 일탈이었지만 일탈이 아닌 날도 있었다
구름은 액자보다 못한 때도 있었다
울음 같은 기타는 기타가 아니었고
그런 날 투항의 편지는 편지가 아니었다
나와 너는 넘치고 목적어가 없는
수줍고 어설픈 손짓 같은 말들은
문장이 아니었지만
문장이었다 나만 아는
양파와 깁스
방심은 금물이야 집중하는 게 좋아
한 겹씩 벗겨지면 생각은 작아지거든
남몰래 흔들릴 때는 깁스를 하는 거야
어쨌든 우리 하루는 위태로운 거라서
몇 겹씩 둘둘 싸매는 게 좋을 거야
상처는 곧 아물지만 흉터는 오래 생각해
양파같이 깁스하고 양파같이 우는 거야
깁스 위에 말하고 깁스 위에 쓰는 거지
서로의 빤한 깁스는 양해하면서 말이야
먹다 만 토마토
던져 놓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 맺는다
뜨건 햇볕에 빨갛게
익은 것만 그렇다고,
그녀는
못 잊었다는 말을 그렇게 했다
첩첩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
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
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
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
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
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
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
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
당신은 없고
월요일이 나에게 누구냐고 묻는다
수요일이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 당신은 없고
금요일이 나더러 뭐하는 사람이냐고 한다 화요
일, 목요일, 토요일 모두가 내게는 일요일이라
고 말한다 당신은 없고
자꾸들 그리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떤 기린
1
늘씬한 다리와 딴딴한 허벅지입니다
숨 가쁜 탄력입니다 오직 지금입니다
꿈에 본 세렝게티를 돌파하는 질주입니다
2
한 손에 들어오는 미끈한 목입니다
높아만 가는 생각입니다 기다란 원망입니다
오로지 한 사람입니다 무방비 그 사람입니다
[ 서평 ]
김수환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이 두 기둥은 시조라는 전통의 형식으로 주춧돌을 삼고, 시인의 DNA에 각인된 리듬으로 칸을 짓는다. 지붕은 “줄줄 새는 밤”(「돛대도 아니 달고」)으로 엮어서 이었다. 이렇게 세운 그의 집은 ‘저녁’이라는 ‘시간성’이 측면을 비추고, ‘뒤쪽’이라는 ‘방향성’이 후광으로 받치면서 윤곽이 드러나긴 하지만 흐릿하다. 이 흐릿함으로 인해 그의 시는 모호하지만,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먹물처럼 한없이 번져나가는 여운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실제보다 훨씬 멀리 보이는 볼록거울의 효과를 거둔다. 그의 좋은 시편들에서 종종 느끼게 되는 막막함이나 아득함은 바로 이 효과에서 기인한다.
시조라는 형식과 그리움이라는 정서의 결합은 낯설지 않다. 시조라는 형식과 아픔이라는 정서의 결합 역시 그러하다. 이런 익숙함 탓에 시조는 고리타분한 장르라는 오랜 혐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인은 이런 완고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안간힘의 한 모습이 모호함에서 오는 모던함이다. 물론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방법론은 아니겠지만, 그의 주특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또 다른 주특기는 탄탄한 구성력에서 오는 문학적 완결성이다. 둘을 묶어서 말한다면 ‘모호한 완결성’이라는 형용모순이 되겠지만, 주지하다시피 문학의 힘은 종종 모순에서 오지 않던가.
인용 시는 사랑과 휴식이 기다리는 ‘낭만적인 저녁’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저녁은 온다’는 제목부터 긴장감을 준다. ‘저녁이 온다’와 ‘저녁은 온다’는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전자가 기다리는 것이 마침내 온다는 느낌이라면 후자는 피하고 싶은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느낌이다. 이 시는 불안과 공포가 기다리는 저녁의 분위기를 묵시록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체 4연으로 짜인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이다.
그런데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드는 의문.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지?’, ‘뭐 때문에 평생 동안 저물녘을 힘들어하지?’ 이런 의문형을 만드는 것이 바로 김수환 시의 모호함이고 모던함이다. 그리고 김수환이 ‘그리움’을 말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그리움으로 힘들었으면 저물녘이 올 때마다 초조하고, 밤을 지새울 걱정에 “구절초 눈꺼풀”처럼 불안해하는가?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그 사람’이 관련된 어떠한 서사도 생략된 채 저녁을 맞는 정황만 묘사돼 있다. 생략된 부분을 채우는 것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이다.
어떤 낌새만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능력은 좋은 시인의 자질이다. 이런 자질에 힘입어 그리움이라는 가장 친밀한 정서를 모호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에 담아 아주 낯설게 만듦으로써 낭만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긴장감을 획득한다. 이를 통해 시조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자칫 시를 느슨하게 만들 수도 있는 감상성(感傷性)을 지그시 눌러 문학성을 높인다. ‘모호한 완결성’이란 이런 것이다.
―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