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어 및 관련 단어 소개 26≫ ◆ 숫자 ◆
▶하나(1)
◆하느님◆
1. 일반적인 천공신(天空神) 개념 : 하느님은 우리말로는 하늘, 한자(漢字)로는 천(天)의 존칭어인데, 광활하고 높은 창공은 종교적 궁극자 및 최고원리의 상징으로서 인류 종교현상 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종교표현이다. 종교학자들은 고대인들이 하늘이나 땅을 단순한 현상이나 물체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보고 그 거룩함의 신성을 경외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가장 오래된 문자문화를 지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누(Anu)신, 가나안 지방의 엘(EI)신, 그리스의 제우스(Zeus)신들은 모두 천공신(天空神)으로서 다신(多神)들 중에서 그들이 아버지 혹은 천상회의의 임금으로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세계적 종교로 발전했던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유태교의 야훼(Yahweh), 이슬람교의 알라(Allah)신 역시 천공신이었는데, 예언자들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최고신에서 유일신 신앙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원시사회에서도 천공신 신앙이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어 다신적 신앙체계 속에서도 최고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아프리카 요루바(Yoruba)족의 올로룬(Olorun)은 비인격적이고 소리가 없는 천공신인데 최고신으로 신앙되고 있고, 딘카(Dinka) 족의 느히알릭(Nhialic)은 ‘위’를 뜻하는데 사람들을 만들었고 정의의 원천으로 재앙을 내리는 최고신이다. 이와 같은 최고신 개념은 라틴아메리카의 토착신앙 속에서도 발견되어 우주의 주인 · 아버지 · 왕 · 통제자로 믿어지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종교현상학을 확립시킨 크리스텐센(W. Brede Kristensen)은 종교적 인간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최고의 실재원리를 보았으며, 세상의 다양성 속에서도 일치를 가져오는 우주적 질서와 규범의 이미지를 그 안에서 보았다고 지적하였다[Phenomenology of Religion, 41면]. 결국 천공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연과 인간사회 모두를 지배하는 의지(governing will)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키우는 질서와 축복의 원천적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재앙 · 파괴 · 죽음을 가져오는 꿰뚫어 불 수 없는 힘이기도 하였다. 하늘의 이런 지배하는 의지를 나타낸 가장 대표적인 예를 크리스텐센은 고대중국의 천명(天命)사상에서 보았는데, 사실 중국의 종교전통은 천(天)사상을 계속 해석하면서 천인(天人)관계의 이해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포함되는 중국문화권에서의 천공신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다른 두 종교학자들의 천공신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먼저 언급하겠다.
벤 데어 레우(G. van der Leeuw)는 하늘은 인간과 다른 절대타자(絶對他者, the wholly Other)로서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신성 그 자체인(numen)의 표현이기 때문에 종교인의 마음 안에 특정한 모습을 띨 필요조차도 없이 있는 하늘 그대로로서 충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Religion in Essence and Manifestation, 65면].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천공신이 초월성 · 권위 · 영원성 등을 계속 간직하면서도 비를 내려 땅에 풍작을 주는 특성이 점점 폭풍우신 등[Marduk神이나 Baal神 등] 다른 신들에 의하여 대치되어 천공신은 실질적 종교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은퇴되는 현상을 묘사한다. 또 한 가지 그가 지적한 사실로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천공신과 태양신의 관계이다. 태양을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예는 이집트, 멕시코, 페루 등 실제로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역에서만 발견되는데, 엘리아데는 이 현상을 천공신이 창조자라는 개념으로부터 풍요다산(豊饒多産)의 신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예로 보았다[≪종교형태론≫ 140~145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천공신과 태양신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되어 태양은 어디까지나 하늘 밑에 종속되어 있다.
2. 중국의 천(天)개념 : 중국 고유의 사상에는 유교(儒敎)는 물론 도교(道敎)와 민중 신앙에서도 초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천 내지 천도(天道)나 천리(天理)의 개념이 최고신 내지 절대원리로서 인간의 인격형성과 상벌의 궁극적 규범으로 존재하여 왔다. 우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료인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자연과 국가의 운명을 주관하는 최고신으로 제(帝) 내지 상제(上帝)가 나타난다. 상제는 비 · 바람 · 번개 · 구름을 좌우하여 추수를 주관하며 자연적 재앙과 국가의 열망권까지를 쥔 초월자로서 어떤 자연물이나 자연 전체와도 일치되지 않는 추상적 존재이며 권위의 원천이었다. 왕(王)은 여일인(余一人)이라고 자칭하여 인간을 대표하며 상제의 축복을 백성에게 전하는 유일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였다. 왕이 죽으면 상제의 손님이 된다고 믿었으며[賓於帝], 상제의 명령을 전하는 사방제(四方帝)와 더불어 천상궁전의 일원이 되어 조상신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서주시대(西周時代)에 들어와 상제는 ‘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천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임을 알 수 있다. 상제가 높은 천상의 임금이라는 인격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천은 창공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면서 천공신으로서의 최고신 내지 절대원리의 복합적인 뜻을 지닌 상징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천공신으로서의 천은 조물자(造物者)로서 시경에 보면,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었고 위대한 문왕은 그것을 다스린다”라고 하였고[周頌, 天作], 주재자(主宰者)로서 “하늘이 모든 백성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은즉 그 안에 원리가 있다”[大雅, 蕩과 烝民]고 하였다. 그러나 높은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大雅, 文王]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이 알아보기 어려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小雅, 十月之交]. 서주 초기에 확립된 천 사상의 정치적 측면은 천이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 백성을 지배할 왕권을 부여한다는 천명사상과 그렇기 때문에 왕이 덕을 잃으면 천명도 바뀐다는 역명(易命)사상 이었다. 천이 백성의 안녕을 중시하기 때문에 천명을 보존하기 위하여는 덕 있는 정치를 베풀어야 된다는 정치이상은 임금과 백성 모두에게 경천(敬天)사상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물론 정치적 혼란기에는 천을 향한 호소와 탄식의 시들이 씌어지고 정치적 혼란 그 자체가 종교적 위기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노력이 중시되어 가면서도 계속 도덕과 질서의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천신앙은 존중되었다.
중국사상의 황금기라고 일컫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전국시대(기원전 5~3세기)에 이르면 중국 종교전통의 뼈대를 이루는 세 가지 학파가 고대로부터의 천신앙을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정통사상을 대표하게 되는 유가(儒家)에서는 천을 인간 안에 주어진도덕성[論語에서의 德, 孟子에서의 性]의 궁극적 근원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본성을 다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 천을 알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자(孔子)의 사상체계에서 천은 밖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仁)을 이룬 군자(君子)의 궁극적 규범으로 인간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유교의 천사상의 고전적인 예를 논어(論語)에서 찾는다면, 천은 공자에게 도덕적 문화를 전수할 사명을 맡긴 역사의 주재자로서 공자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며 동시에 말없이 4계절을 이루게 하고 부귀와 생사를 주관하는 궁극원리이다.
한편 묵가(墨家)에서는 차별 없이 모든 이를 이롭게 한다는 겸애(兼愛)를 하늘의 뜻[天志]으로 보아 모든 인간사의 절대규범으로 규정하였다. 묵자의 상동(尙同)사상으로 하늘의 뜻이 왕을 통해 매개된다든지, 귀신이 하늘이 정한 상벌을 집행한다는 점에서 묵가는 보수적이며 민중신앙에 가깝게 대표하고 있다고 보겠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서 발견되는 도가(道家)의 천해석은 묵가는 물론 유가보다도 더욱 급진적이었다. 인격적이던 상제개념을 형이상학화하여 만물의 기원이며 동시에 만물을 무위(無爲)로 키우는 원리로서 천도 혹은 도(道)라고 불렀다.
전국시대에 확립된 이렇게 다양한 천 해석은 순자(筍子) 이후로 활발해진 융합적 경향으로 서로 합쳐져서 유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진 주역(周易) 안에는 전통적 최고신으로서의 천 개념을 보유함과 동시에 지(地)와 더불어 음양(陰陽)을 이루기도 하고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음양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태극(太極)이라는 궁극적 존재로 철학화되기도 하였다. 이런 철학화의 경향은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더욱 가속화되어 주돈이(周敦頤)는 모든 것의 근본인 태극을 무극(無極)으로 표현하였고, 주자(朱子)는 이것을 다시 천리(天理)라고 하였다. 태극 · 무극 · 이(理)는 모두 전통적인 천의 철학적 해석으로 궁극적 실재로서 하나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 안에 있어서 모든 물체나 관계는 천리를 가지고 있다. 주자 자신이 천은 형체로는 창공을 가리키고, 주재자로서는 상제이며, 동시에 ‘이’라고 그의 강의록[朱子語類 25, 79 등]에 말한 것은 전통적 천 사상과 철학적 새로운 해석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3. 한국의 하느님 개념 : 고려말부터 주자학이 한국에 전래되면서 위에서 살펴본 복합적인 유교의 천사상이 한국인의 의식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놀랄 정도로 어떤 거부감이나 알력이 없이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한국인들의 종교전통 안에 천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사상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천 신앙이 왕과 연결된 점(占)의 기록 내지 종묘제사를 위한 찬가[頌]에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최초의 하느님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기(古記) 등,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 옛기록을 인용하여 전하는 왕국의 시조신화(始祖神話)에서 찾을 수 있다. 고조선 단군신화의 환인(桓因)은 천상 세계에 거처하는 최고신으로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 보내고, 환웅이 거느린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는 바람 · 비 · 구름으로 은(殷)의 갑골문에서 보이는 상제의 사자(使者)들과 같이 인간세계에 천공신의 뜻을 전한다. 북부여의 해모수(解慕漱)는 천제(天帝)로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웠고, 그 아들도 상제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으며 아들을 바라다가 돌 속에서 금빛나는 어린애를 구해 양자로 하며 “하늘[天]이 나에게 아들을 주심이로다” 하고 기뻐하였다. 고구려의 주몽도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강의신[江神]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유인하여 잉태되었는데, 유화가 갇힌 방 속에 햇빛이 비치고 알을 낳아 태어났다. 여기서 햇빛을 태양신으로 주몽을 낳게 한 주체로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천신의 능력이 내려오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성장한 주몽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는 도중 강가에서 고기와 자라에게 다리를 놓으라고 명하는 말 속에서도 확인된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곧 주몽을 낳게 한 주체는 최고신인 천제 하느님이요, 햇빛은 그 능력 내지는 사자의 역할을 하며 주몽은 범인과 달리 처음 알로 태어나서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이다. 천 ⇒ 햇빛 ⇒ 알이라는 같은 구조는 신라의 세 왕족가문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 석탈해(昔脫解),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우선 박혁거세의 설화에서 육부(六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들이 흰 말이 꿇어앉아 절하는 데서 본 것도 하늘에서 땅에 비치는 기운이었으며 그 속에서 혁거세가 들은 알을 찾자 흰 말은 하늘로 올라갔다. 석탈해와 김알지는 알 대신 궤 속에서 나오지만 하늘을 향해 길흉을 묻는 것과 하늘에서 땅에 내린 광명 등 모두 주체가 하느님임을 알 수 있다. 수로왕(首露王)의 설화도 같은 구조를 지니고 하늘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음을 천명한다. 특히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 속에서 하늘과 태양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이 기적적으로 일본으로 가 그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을 때 해와 달의 빛이 없어지자 왕의 사자가 가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명령으로 온 것이니 어찌 할 수 없다고 하며 고운 명주비단을 하늘에 제사지내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아졌다고 하였다. 결국 한국 신화들에 보이는 최고신은 천공신, 곧 하느님이며, 태양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으로 백마와 마찬가지로 사자의 역할 및 능력의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곰, 닭, 강신 및 용왕의 딸 등은 지모신(地母神)의 상징으로서 음양사상에 근거하여 하늘의 정기와 땅의 정기가 결합하여 인간세계를 낳았다는 사상을 전하는 이야기들이다. 천공신과 태양신을 동일시하거나 천제를 태양이 신격화한 존재로 보려는 해석은 [≪한국사≫ 2권 49면, ≪한국사강좌≫ 1권 21면 등] 신화 자체의 구조는 물론 계속되는 전통에서도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태양신과 천신을 동일시하려는 것은 ≪삼국유사≫ 안에서 환인은 “제석(帝釋)을 이른다”고 주석을 붙인 데서 기인하는데, 제석 등 모든 불교의 천계신(天界神)들은 인드라를 비롯한 deva의 번역으로 아직도 윤회의 미계(迷界) 속에 있는 신들로서 부처에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를 말하였다. 곧 절대신이나 최고신을 소유하지 않는 불교의 deva로서의 천과 한국 고유사상의 하늘과는 그 구조가 상이해서 위의 주석은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한국 고유사상의 하느님은 오히려 중국의 천 사상에 흡사해서 유교 성리학에서 말하는 천리가 철학화되어 종교성에는 약하지만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삼국시대에 천제에게 드리는 제사인 교(郊)에 돼지를 바친 기록들이 나오고, 고려시대에도 계속 둥근 하늘을 본떠서 만든 원구(圓丘)에서 매년 동지 및 비를 빌기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지냈다. 조선조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유학이 국가 이념으로 정비되면서 조선이 제후국이라 하여 하늘에 임금이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였는데 고종(高宗)이 황제위에 즉위하며 이를 회복하였다[김경탁, <하느님 관념 발달사> 한국원시종교사 2, ≪한국문화대계≫ 6권 172면]. 그러나 이런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예식이 종교학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고, 오히려 민중 속에 내려온 무속신앙 안에서의 하느님 개념과 한국 유학자들 속의 하느님 개념이 어떠하였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우선 무속 연구 결과에 의하면 수많은 신령들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당들은 하느님이라는 최고신의 개념을 막연하게나마 배경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김태곤, ≪한국무속연구≫ 288~289면,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26~26면]. 그리고 한국유학자들의 경(敬)사상에는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상제를 대하듯 공경스런 태도로 모든 일에 전념하라는 것으로 초기 유학 및 한국 전래의 경천사상이 실천면에서 긍정되고 종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에 처음 그리스도교를 소개하는데 성공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유교경전에 나오는 상제 혹은 천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같은 절대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야훼를 천주(天主)라고 번역하고 유교적 용어를 빌어 그리스도교를 중국 지식인들에게 소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는 조선조 후기의 실학의 선구자요 서학(西學)의 학문적 연구를 시작한 이익(李瀷)은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이다”라고 평하였다. 이 근본적 공통점이 그리스도교가 짧은 시일내에 한국인들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한편 1860년 이후 사회적 정치적 불안 속에서 신흥종교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최초의 민중운동이었던 동학(東學)을 일으킨 최제우(崔濟愚)는 서학에 대항하여 하늘로부터 도를 받았다는 확신에 차 있었고 세상이 어지럽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아 지성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표방한 ‘시천주’(侍天主)가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시기에는 양천주(養天主)로 되어 사람은 모두 본래 하느님을 모시므로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人卽天]라고 해석되었고, 더 나아가 3대 주교인 손병희(孫秉熙) 시기에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표어가 천도교의 요지로 선언되어 천은 곧 인간의 마음이라고 해석되었다[최동희, <한국 동학 및 천도교사> ≪한국문사사대계≫ 6권 755~770면]. 그 밖에도 증산교(甑山敎)의 구천상제(九天上帝), 대종교(大倧敎)의 한얼신(神)들은 모두 신흥종교에서 전통적 하느님 사상을 수용하여 각기 다르게 해석한 예라 하겠다.
끝으로 한국 고유의 하느님 신앙을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겠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및 가나안 지방의 하느님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좋은 모범을 보여 준다. 최고신이던 천공신 ‘엘’신, 혹은 엘로힘(Elohim)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의 명칭이었던 야훼와 동일시되면서 유일신화되었고 엘신의 여러 가지 특성들도 수용되었다. 따라서 엘신 밑에 있던 많은 신들은 우상들로 배격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천사들로 격하되어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자들이 되었다. 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 학자들이 성서공동번역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야훼를 ‘하느님’이라고 함께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천주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계속 쓰여지고 있지만 한국 그리스도교의 절대자의 칭호문제에 대하여는 <기독교사상> 1980, 7월, 95~108면] 한국 고유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하느님 신앙을 수용하자는 중요한 태도라고 하겠다. 사실 오늘날 한국인의 하느님 의식은 벌써 상당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변화되고 있다. 곧 전통적으로 느껴오던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고 있으나 때로 너무나 멀고 무심한 하느님이라는 막연한 개념에서 인간의 역사 속에 섭리로 개입하시고 개인의 생활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며 은혜를 주시는 능동적인 하느님 개념으로 한국인의 4분의 1을 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金勝惠)
▶둘(2)
◆마태 22, 36-39 가장 큰 계명 ◆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12, 41-44 가난한 과부의 헌금 ◆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삼(3)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로부터 출발한다. 성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1. 성서상의 삼위일체 : ① 구약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그늘이라고 신약에서 진술되고 있으나 (1고린 10:11, 갈라 3:24, 히브 10:1), 종교사적으로 구약은 엄격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교부들이 일부 구약성서의 본문들이 삼위일체 신비를 암시한다고 간주한 바 있다. 창세기에서의 '우리' 형식(창세 1:26, 3:22, 11:7, 이사 68),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 남자들의 방문(창세 18:1-16), 민수기에서의 야훼의 삼중축복(민수 6:24-26), 이사야에서의 세라핌의 '거룩하시다' 삼회찬미(이사 6:3) 등을 말하는 본문들이 삼위일체의 사전계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신빙성이 약하다고 오늘날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보다는 구약이 엄격한 유일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충만함이나 외부지향의 계시를 지니고 있는 지가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현존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특정 중개형식(仲介形式)의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야훼의 천사'(malakh Jahwe), '지혜'(Chokma), '하느님의 말씀'(dabar Jahwe), '성령'(ruah) 등의 실재에 대해서 기술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직접적 작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개념들이 '위격'을 그대로 지칭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신약에서 증언되는 삼위일체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신약성서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현시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며(마태 12:28, 루가 11:20)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반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全權)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병행구), 더 이상 앞지를 수 없는 하느님의 임재(臨齋)이며(마태 11:25 이하, 요한 10:30), 성령의 충만이다(루가 4:18). 그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이 명백히 증언되고 있다(요한 1:1-18, 필립 2:5-11).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이 하느님과 조물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적이거나 종교적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서 하느님 구원의 충만이다(루가 4:18, 디도 3:5 이하, 1고린 12:4). 예수 자신은 성령(pneuma)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하고 있고(마르 3:28-30), 그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지칭된다(마태 12:31, 루가 12:10). 부활이후에 성령의 출현이 보도된다. 성령이 전 교회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는 증언이 이루어진다(사도 2:1-41, 4:31, 8:15-17, 10:44, 19:6). 이 성령은 그리스도 계시와의 일치 안에서 역사한다(로마 8:11, 필립 1:19, 2고린 3:17, 갈라 4:66, 1요한 4:1-3).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6:7,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1고린 2:10). 이를테면 구체적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의 파악 불가능성을 체험케 하며 따라서 성부와의 구별을 체험케 한다.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작용이 구별되어 증언되고 있으며,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예수 세례 때의 삼위일체묘사(마르 1:9-11), 부활한 예수의 세례명령 속에 나타난 성삼형식(마태 28:13)과 다른 많은 삼위일체 정식(定式)들은 이러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로마 1:3-5, 8:9-11, 2고린 13:13, 요한 14:26, 15:26).
2. 삼위일체 교리 : 삼위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신비(絶對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인지될 수 없으며, 계시된 다음에도 이성(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될 수 없다(DS. 3015, 3225). 그리스도 신앙에 절대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 신비이다. 왜 삼위일체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 신비인지는 교리상으로 확정된 바 없으며, 왜 이 신비가 우리에게 중요한지, 또 어떠한 구원실재 안에 우리를 위해 소여되어 있는 지도 명시적 사유가 교리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位格, upostasis, persona, subsistentia)으로서 존재하는데(DS. 73, 75, 88, 112, 115, 152, 501, 525, 528-531, 800, 803, 351, 1330),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本性, phusis, natura)이고, 하나의 하느님 본질(本質, ousia, essentia)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實體, substantia)이다(DS. 73, 75, 88, 112, 115, 152, 150, 501, 525, 527이하, 800, 803이하, 1330이하, 1337, 1880).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DS. 44, 75, 125, 162-169, 188, 501, 526이하, 800, 851이하, 1330). 여기서 사용된 개념들의 교의적 정의는 내려진 바 없다.
② 그런데 이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DS. 75, 531, 1330이하, 2828).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고(DS. 75. 189, 525, 800, 1330이하), 성자는 성부의 실체로부터, 오로지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DS. 44, 189이하, 76, 112, 125, 163, 525이하, 800, 804, 1330이하).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DS. 75, 527), 하나의 유일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DS. 71, 189이하, 75, 150, 527, 800, 850, 1300, 1330). '출산'(出産, generatio)과 '기출'(氣出, spiratio)은 신성의 전달 내지는 파견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이 전달이 한편으로는 성부로부터 출산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출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출산'과 '기출'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교리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
③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關係, relatio)가 있으며(DS. 531, 573, 800),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있다(DS. 73, 189, 973이하). 그런데 세 위격들이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동일하면서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 근거가 보다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
④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DS. 529, 580, 1330),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사위일체(四位一體, Quaternitas)를 구성하지 않는다(DS. 534, 803이하).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relationis oppositio)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DS. 1330),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며(DS. 1331),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DS. 529, 680, 790, 851).
⑤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存在, esse)와 역사(役事, operatio)면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DS. 189, 112, 501, 800, 851), 외부를 지향해서 오로지 하나의 역사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DS 501, 531, 800, 1330). 세 위격들의 역사의 동일성을 말하는 공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효능인(效能因, causa efficiens)이며(DS. 3814), 이 공리로 말미암아 오로지 로고스(말씀)만이 인간이 되었다는 육화 교리와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교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이 된 위격은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 위격이며, 세 위격들은 인간과 각기 고유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교리들로부터 파생되는 교리인, 성부로부터의 성자와 성령의 구세경륜적 '파견' 교리는 교도권에 의해서 거의 계발되어 있지 않다(DS. 527, 536, 1523). 요컨대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치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점 : 삼위일체는 있을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의신학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교화한 유일신론자들처럼 생활하는 것같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를 대할 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 신비가 왜 계시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사변적 삼위일체 교리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신비에 대한 신심을 촉진하기보다는 소원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사변적 고찰을 시도하는 전통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역사(歷史)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행업(行業)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하여 이 신비를 구원의 신비로 제시하려는 현대 신학자들의 취지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현대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이 요약 소개될 필요가 있다.
①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계발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된 이른바 '심리학적 삼위일체론'(心理學的 三位一體論, De Trinitate psychologica)은 사계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 삼위일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는 성서적 진리를 자신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모상이 원형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모상의 본질을 구명해서 원형이신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일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들의 구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를 인간영혼(anima)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이 영혼의 세 가지 속성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삼위일체의 내재성을 특정하게 이해토록 하는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유비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실재의 세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에, 인식이 성자에, 사랑이 성령에 해당된다고 설명된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규정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인간 정신생활의 성취 속에서 하나의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의 현존을 파악하는 유비를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發出, processus)의 성격을 순수정신의 내재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 발출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 두 기능, 인식(認識, cognitio)과 의지(意志, voluntas)가 하느님의 발출에 상응하는 유비로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안에서 말씀[知性]과 사랑[愛志]의 두 발출 이외에 다른 발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의 성격을 지성과 의지의 성취양식을 분석하는 가운데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성의 발출이 유사성(類似性, similitudo)의 근거에 입각하여 발생하기에 출생(出生, generatio)이라고 규정한다. 출산자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발출은 유사성의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상대자에로 이끌리는 성향(inclinatio in rem volitam)에 입각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말씀을 산출하는 지성작용은 유사성의 산출과 같아서 '출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하느님에게서의 의지작용은 유사성의 출산행위가 아니라 성향적 발출행위이기에 '기출'로 표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구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신학의 기본 통찰들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부연해서 해설한다고 볼 수 있다.
② 현대 신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역점을 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이 지양되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이 강조되면서 인간과 조물 일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로부터 분리된 신적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실천적이고 생동적 사유가 된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양자택일적 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의 삼위일체론적 기점은 범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라너는 삼위일체를 구원신비로 이해하려는 취지로써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는 구원이 하느님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당신을 자신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외부로 건네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수취자(受取者)가 요청된다. 이 수취자가 바로 정신과 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다.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참으로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상응해서 초월적(정신)이고 역사적(육신) 양식으로 발생한다. 인간의 역사성에서 비롯하는 전 인류사는 하느님의 계시사(啓示史)와 구세사와 공존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전달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면, 구체적 인간 역사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자 인간에 의한 수용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제공이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될 경우에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출현이 발생한다고 라너는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육화를 '행해진 진리'라고도 라너는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초월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다가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하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성령의 고유성이 사랑(Liebe)이라는 통찰이 생겨난다. 또한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진리로 발생하는 한, 역사를 지니며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전달이 사랑으로 발생하는 한, 이는 절대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 안에서의 역사의 재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역전시킬 수 없이 나타나는 구체적 역사로서의 역사와 완성된 최후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은 구별되면서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느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 분을 성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의 초월성을 주도하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그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현현되는데 이 분이 곧 성부의 육화된 말씀, 성자라고 불린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세 측면이 동일시되거나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주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리고 말씀(진리)과 성령(사랑)의 두 파견은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 속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소인(素因, Moment)들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초월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자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는 이 이중 파견이 바로 하느님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성부가 자기전달을 통해서 당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진술된 것'과 '수용된 것'과의 실질적인 구별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달된 것이 '전달자'로서의 하느님과 '전달된 것'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에 실제적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바로 하느님의 '본질'로 표시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간의 충만으로서 전달됨으로써 구원이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과 발출을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세경륜적) 자기 전달의 발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을 구원의 신비로 이해한 것이다.
몰트만 역시 라너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를 정관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궁지에 처한 조물들의 자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역사의 압축으로 보면서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 아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죽음에로 건네지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서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을 고통당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들의 양도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술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의 성령으로서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와서 새 생명의 가능성과 힘을 선사하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 삼위일체 사건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성령 가운데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느님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역사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인 삼위일체안에 통합된다는 통찰이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고난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이 없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서 삼위일체가 고통에 찬 조물의 역사와 관련된 실재임이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느님과 조물 일반, 특히 자유로운 조물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 이해뿐만 아니라 신앙의 쇄신 자체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래의 역사과정은 성령 안에서 부활한 성자를 통하여 조물, 특히 인간을 향하는 하느님 성부로부터의 구원역사이자, 성령에 의해 이끌린 인간과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인도되는 귀환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 경위는 신비로 머무르지만, 인간과 세계의 완성된 구원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완성된 역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삼위일체 신비는 내포하고 있다. (沈相泰)
◆마태 17, 1-4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
1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다섯(5)
◆모세 오경◆
1. 이름 : 오경이란 그리스어로 (he) pentatemchos(biblos), 이에 따른 라틴어 pentateuchus를 번역한 것이다. 어원을 정확히 밝히면 pente(=5)와 teuchos(=그릇, 항아리)의 합성어로 사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각각 5개의 두루말이로 나누어서 5개의 항아리 같은 데에 보존하였다는 데에서 pentateuchus란 명칭이 유래한다. 모세가 앞에 붙어 모세오경이라고 일컫게 된 것은 그가 오경의 저자라고 믿은 데에 기인한다(여호 8:31, 23:6, 2열왕 14:6 등 참고). 그러나 구약 자체는 어떤 종류의 법이나(출애 24:4, 34:7 이하 참고) (신명 31:9 · 22이하 참고) 등 일부에 국한하여 모세가 썼다고 할 뿐, 한 번도 오경이 모세의 작품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나 플라비우스 요셉, 그리고 신약(마르코 12:26, 요한 1:17, 사도 13:38) 그리스도 교회는 모세오경이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전할뿐이다.
‘5경’이란 단어의 구성을 본따서 4경(Tetrateuchus)이나 6경(Hexateuchus)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모세오경의 생성과정과 범위를 문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도중에 생긴,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의 4책 또는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 6책을 각각 지칭한다.
유태인들은 모세오경을 간단히 Tora라고 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법으로 통용된 것은 나중의 일이고 본래는 법이라기보다 생활의 가르침과 지침을 함께 뜻하는 것이었다.
2. 내용, 구성, 특성 및 의의 : 모세오경 첫 권은 창세기([라] genesis [그] Geneois [히] Be reshilh)[처음에], 둘째 권은 출애굽기([라] exodus [그] ezdos [히] We elle] Shemoth)[그리고 이것들의 이름이다], 셋째 권은 레위기([라] Leviticus [그] leueitichon [히] Wajjgrea)[그리고 그는 불렀다], 넷째 권은 민수기([라] numeri [그] Arithmoi [히] Bemidebbar)[광야에서], 그리고 다섯째 권은 신명기([라] Deuteronomium [그] euteronomion [히] haddebarim)[이것이 말씀이다]라고 불린다. 내용을 따른 전체적 구성은 다음과 같이 일별할 수 있다.
① 원사(元史) : 창세기 1-11장 ㉮ 1-3장 세상과 인류의 창조와 사람의 죄, ㉯ 4장 카인과 아벨, ㉰ 5장 및 11:10 이하 족보 ㉱ 6-9장 홍수, ㉲ 10장 세 인종, ㉳ 11:1-9 바벨탑 이야기, ② 성조들의 역사, 창세 12-50장 ㉮ 12-25장 아브라함(및 롯)에 대하여, ㉯ 26장 이사악, ㉰ 27-36장, 야곱(및 에사오와 라반)에 대하여, ㉱ 37-50장 요셉과 그 형제들, ③ 이집트에서 해방, 출애 1-15장, ㉮ 1장과 5장 노예 생활, ㉯ 2장 모세의 젊었을 때, ㉰ 3-4장 및 6장, 모세의 불림, ㉱ 7-13장 재앙과 빠스카 ㉲ 14-15장, 홍해 바다를 건너감, ④ 시나이산에서 계시 : 출애 19장-민수 10:10 ㉮ 출애 19장 하느님의 나타나심, ㉯ 20장 십계명, ㉰ 21-23장 계약의 책, ㉱ 24장 계약의 체결, ㉲ 25-31장 계약의 기념 장막을 세우는 것에 대한 지침, ㉳ 35-40장 그 실행, ㉴ 32장 금송아지 사건, ㉵ 경신례 법-여기에 연결되는 법으로 레위기 1-7장 제사, 8-9장 사제 축성 및 첫 제사, 10장 나답다 아히후의 잘못, 11-15장 정결에 관한 것, 16장 속죄일, 17-26장 신성법을 들 수 있다. ⑤ 광야를 통해 인도하심 ㉮ 이집트에서 시나이까지, 출애 16-18, △ 16장 만나와 메추라기(민수기 11장 참고), △ 17장 물을 주심과 아말렉과의 전쟁에 대하여(민수기 20장 참고), △ 18장 모세의 장인 이트로와의 만남, ㉯ 시나이에서 모압까지, 민수 10-36장(및 신명기 31-34장), △ 10:11 이하 떠남-결약의 궤에 대해 언급, △ 11장 백성의 불평, △ 12장 아론과 미리암의 분노, △ 13장 이하 정탐, △ 16장 이하 코락흐. 다탄 아비람의 분노, △ 22-24장 빌레암의 말, △ 25-36장 약속된 땅의 국경까지 감, ⑥ 신명기는 제2의 법으로 5-26장, - 특히 12-26장까지 - 독립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세 오경의 특징을 들면, 우선 내용에 있어서 크게 보아 천지창조부터 모세의 죽음까지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보고 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이야기와 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오경은 이 법이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하느님의 백성의 기본 헌법이고 하느님의 백성의 생활을 결정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 법으로 살고 이 법을 하느님의 섭리의 표현이어야 하고 또 하느님이 역사를 주도하는 가운데 그 법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를 통하여 법이 주어졌지만 그는 또한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 있어 주인공의 구실도 하였다. 그래서 법과 실생활 및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이 역사 속에 하느님의 계획 및 섭리가 들어 있으므로 법 역시 하느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모세오경은 따라서 법을 이론적 근거에 따르지 않고 독특한 이스라엘 역사로 뒷받침하려고 하므로 모세 이전의 성조들 심지어 천지창조로부터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이야기 형식의 서술이 법으로 통용되는 가르침 및 지침과 함께 섞여 있는 것이고 이것이 모세오경의 특징이다. 이 이야기들은 바로 역사적 성격을 띠면서 하느님 백성의 구성과 하느님의 법의 계시를 이해시키고 있다. 법이나 역사 서술에 있어 일정한 순서를 체계화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중복, 간과, 모순, 균열 등을 볼 수 있고 모세오경을 한 책으로 보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5권으로 나뉘어져 있어도 모세오경은 하나의 책으로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이런 시도를 오경의 특징을 근거로 해야 하는 이상, 모세오경의 내용과 지향은 전체적으로 보아 하느님 백성의 구현 및 구성, 그리고 그들에게 삶의 근거가 되는 하느님의 법의 계시를 역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모세오경 연구 ① 오경의 저자에 대하여 : 이 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믿어온 지가 오래됐지만 12세기에 에즈라(Ibn Esra)라는 유태인 학자와 종교개혁 때 칼슈타트(A.B. Karlstadt), 그리고 17세기에 홉즈(T. Hobbes), 스피노자(B. Spinoza), 시몬(R. Simon) 등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모세가 오경을 썼을 까닭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명 34:5 이하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정주하고 난 후 역사를 되돌아보며 썼다는 증명이 되고, 그렇다면 모세가 미리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설명 시도와 또 다른 문제 제기가 뒤따랐다.
모세가 일일이 다 썼다는 것이나 모세오경이 모세와 관계없다고 하는 것이나 다 극단적이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해명을 따라 많은 가톨릭 학자들은 모세가 다 쓴 것이 아니고 모세로부터 오는 전승-십계명이 그 예다-을 토대로 삼아 모세오경이 씌어졌다는 뜻에서 모세를 저자로 본다.
② 모세오경의 사료에 대하여 : 오경이 모세로부터 오는 전승을 토대로 씌어지고 모순되고 반복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여러 사료가 있었다고 학자들이 일찍이 간파하게 되었다.
오경에 대한 비판은 이미 16세기에 시작되어 예수회 회원인 페레이라(B. Pereira)와 봉프레르(J. Bonfrere)는 오경 전부가 모세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17세기에 시몬(R. Simon)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런 의견은 모세오경이 여러 사료(史料)를 근거로 하여 쓰여졌다는 가설을 세우는데 있어 초석 구실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즉 1711년 비테르(H.B. Witter)는 창세기 1-2장을 근거삼아, 그리고 1753년 아스트럭(J. Astruc)은 창세기 전부를 토대로 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다르게 쓰이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야훼가 쓰이는 구절과 엘로힘이 쓰이는 구절을 따로 모으게 되었고 이것이 문헌비판의 효시가 되었으며, 동시에 문서설([독] Urkundenhypothese [영] The documentary Hypothesis)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히 호른(J.G. Eichhorn)은 1779년에 야훼 이름이 나오는 사료와 엘로힘 이름이 사용된 사료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그 특징을 자세히 구명하고 더 나아가서 출애굽기 1-2장까지 이 두 사료를 구분하였다. 1798년에 일겐(K.D. Ilgen)은 또 다른 엘로힘 이름을 쓰는 사료를 구분해 냈다.
다른 한편 베트(W.M.L. de Wette)는 1805년에 신명기는 독립적으로 모세오경의 사료를 이루고 있고, 요시아왕의 개혁(기원전 622년)과 관계가 있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 후 후펠트(H. Hupfeld, 1796-1866) 및 딜만(A. Dillmann, 1823-1894) 등은 지금까지 연구된 것을 토대로, 비록 시대적 순서는 후에 교정되었지만 J(=야휘스트), E(=엘로히스트), P(=Priestercodex 제관기) 그리고 D(=신명기)의 사료 구분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 사료의 발달 과정은 렌스(E. Renss, 1804-1891), 그라프(H. Graf, 1815-1869), 특히 벨한젠(J. Welhansen, 1844-1918)에 의하여 규명되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위에 언급된 사료들은 J. E. D. P.의 순서로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인정되어 왔다. 근래에 와서 시미트(H. Schmid), 렌토르프(R. Rendtorff) 등이 제일 오래 되었다는 야휘스트의 연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지만 크게 호응을 얻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모세오경에 대한 연구가 다각적으로 시도됨에 따라 생긴 이론 가운데에는 문서설 외에도 단편설([독] Fragmentenhypothese [영] The Fragment Hypothesis)과 보충설([독] Ergahzungs hypothese [영] The Supplementary Hypothesis)이 있다. 전자의 가설에 의하면, 독립된 그리고 완결된 여러 작은 단위의 이야기들이 여러 시대에 거쳐 생겼고 후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순서에 따라 집성되어 지금의 모세오경의 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게데(A. Geddes, 1737-1802), 파터(J.S. Vater, 1771-1826), 베트(1780-1849)를 들 수 있다. 보충설은 문서설과 단편설의 종합을 꾀하고 있다. 이 가설에 의하면 창조부터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취급한 기본 사료가 있고, 그 후 다른 독립된 이야기나 사료들이 보충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지금도 모세오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 대표적인 학자로 에발드(H.G.A. Ewald, 1805-1875), 블리크(F. Bleek, 1793-1859)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설들은 지금의 구약, 특별히 모세오경 연구에 큰 기여를 했고 계속 연구되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자아내게 되었다. 물론 이것도 계속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대개 일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기원전 950년 전후로 남쪽에서 씌어진 야휘스트, 기원전 800년 전후, 북쪽에서 씌어진 엘로히스트, 기원전 7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쓰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명기 기본서, 그리고 기원전 550년 전후하여 바빌론에서 씌어진 제관기가 사료로서 모세오경을 쓰는데 사용됐다는 것, 둘째 이스라엘의 멸망(기원전 722년) 후, 예루살렘에서 야휘스트 사료와 엘로히스트 사료를 집성했기 때문에 두 사료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예호휘스트(Je=Jehowist) 집성, 귀양 후 이 집성된 예호휘스트 본문과 제관기(=P)를 집성한 모세오경 집성(=Rp), 그리고 신명기를 근거로 신명기부터 열왕기 후서까지 집성한 신명기적 집성(=Rptr)이 있다는 것, 셋째 야휘스트를 근거로 엘로히스트의 첨가와 여기서 생긴 예호휘스트에 제관기를 넣고 신명기를 토대로 한 집성(Rarr)을 첨가하여 대개 450년 전후하여 모세오경이 집성되었다는 것, 넷째 따라서 야휘스트와 제관기는 사료로 씌었으나 엘로히스트가 단편인지 아니면 일관된 역사를 서술한 사료인지 토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들이다.
이런 사료와 집성의 구분이 모세오경 연구에 이바지 한 것도 있지만 그 지체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각 사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아직도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여러 사료의 흔적이 모세오경 외에도 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또 사료와 집성의 구분이 모세오경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벨한젠(J. Wellhansen)의 4사료 구분은 가톨릭 교회와 다른 학자들로부터(예를들면 C. Keil, R. Kiltel, W.W. von Baudissin) 전반적인 또는 부분적인 문제에 있어 비판을 받았다.
③ 양식사적 및 전승사적 연구 : 사료의 구분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학자들은 양식사적 그리고 전승사적 관찰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 연구는 모세오경에 수록된 이야기의 삶의 배경을 연구하고 어떤 전승을 거쳐 지금의 본문을 형성하게 됐는가를 과제로 삼고 있다. 물론 이 연구가 4개의 사료설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근거로 모세오경이 생겨난 배경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런 연구는 궁켈(H. Gunkel)이 지금의 창세기 이야기가 이루어지기 전에 개별적 이야기가 있었음을 드러내므로 처음 시도하였다. 그 후 그레스만(H. Gressmann)이 이 방법을 출애굽기에 적용하였다. 라드(G. von Rad)는 이런 고찰을 따라 출애굽, 시나이 사건, 가나안에 이르는 것 등이 본시 각각 다른 성소와 관계를 맺고 독립적으로 전해 왔는데 나중에 한데 합했다고 본다. 노트(M. Noth)도 모세오경 가운데서 이집트에서의 탈출, 가나안에 들어감, 성조들에의 약속, 광야를 거쳐 감, 시나이산에서의 계시가 5개로 독립되어 전승된 테마이고 다른 것은 보충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런 독립된 테마는 그 나름대로 고유 전승이 그 전에 이미 있었다고 본다.
이런 고찰 방법을 적용하게 된 이유는 어떤 텍스트를 쓴 시대를 알아내도 거기에 사용된 재료나 내용의 시대는 알 길이 없고 또 나중에 씌었다 해서 거기에 사용된 재료가 꼭 나중에 생겼다고 말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런 방법은 사료 구분을 하는 문헌비판이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한다. 문헌비판을 해도 아직도 균열이 보이는 듯한 텍스트는 이미 여러 시대를 통하여 다른 삶의 배경을 거쳐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 텍스트가 지내온 여러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다른 한 편 한 저자보다 여러 자자나 학파가 개재했을 가능성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세오경에 대한 관찰방법도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독립적으로 전승된 이야기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전해 내려왔으며 어떻게 지금의 순서를 갖고 각 전승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각 전승이 그렇게 개별적으로 존재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질문들은 양식사 및 전승사적 고찰방법이 야기시키는 것들이다. 지금의 모세오경 연구는 어느 한 방법으로 되지 않고 사료적인 측면에서 모순이나 반복이 없는 일관된 본문을 찾아내는 문헌비판과 양식사적 비판, 전승비판 및 집성비판을 통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沈勇燮)
▶육(6)
◆(요한 2, 1—7) 카나의 혼인 잔치◆
1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칠(7)
▶일흔일곱(77)
◆마태 18, 21-22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칠성사◆
그리스도가 창설한 7가지 성사. 교회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요 도구라는 뜻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규정한 교회헌장은 칠성사를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교회헌장 11항). 즉 신도들은 성세를 받음으로써 교회에 결합되어 그리스도교적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호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재생하였기에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 견진성사로 신도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신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할 책임을 진다. 신도들은 성체의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하여 신적(神的) 회생을 하느님께 바치며,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도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의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 병자의 성사로써 온 교회는 병자들을 수난하시고 현양되신 주님께 맡겨 드리며 그들의 병고를 덜어 주고 구원하시도록 청하며 또한 병자들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善益)에 기여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신품성사를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교회를 사목하도록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정되는 것이다. 끝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부부는 혼인성사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일치와 결실, 풍부한 사랑의 신비를 표시하고 거기에 참여하며 이 성사의 힘으로 부부생활과 자녀 출산과 그 양육을 통해서 서로 성덕에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 성사1
출처 : [가톨릭대사전]
◆마르 16, 9-10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
9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십사(14)
◆마태 1, 16-17◆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팔(8)
◆마태 5, 3-10 참행복( 진복팔단)◆
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열(10)
◆마태 25, 1-3 열 처녀의 비유◆
1“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열둘(12)
◆마태 10, 1-4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1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일곱(7)
▶사천(4000)
◆마태 15, 32-38 사천 명을 먹이시다◆
32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38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었다.
▶아흔아홉(99)
▶백(100)
◆마태 18, 12-14 되찾은 양의 비유 ◆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둘(2)
▶다섯(5)
▶열둘(12)
▶오십(50)
▶이백(200)
▶오천(5,000)
◆마르 6, 30-44 오천 명을 먹이시다 ◆
30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일흔둘(72)
◆루카 10,1-3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1그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100배
▶60배
▶30배
◆마태 13, 2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23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삼백(300)
◆요한 13,1-5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1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