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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뚫은 종
출 21: 2-6
뿌리라는 영화에 보면 흑인들을 팔고 사는 노예의 제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는 흑인들을 사람인데 사람 취급을 하지 아니하고 물건처럼 다룹니다. 그래서 노예를 팔 때 노예 상은 이 사람은 치아가 튼튼해서 일을 잘 할 수 있고, 이 사람은 건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잘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종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남자라고 하는 것은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예를 소개하고 값을 부르면 필요한 사람들이 흑인들을 종으로 사가는 시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권이 완전히 다 무시된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생각할 때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대판 노예 시장도 있어요. 요즘도 사람들을 돈 몇 푼에 잡아 철창 속에 가둬 놓고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노예제도를 허용하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종제도는 현대인들이 만들었던 노예제도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런 종 제도를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느냐 하나님께서 종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혼하는 법을 허용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서 가정을 만들었을 때 절대 헤어지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너희가 나누면 안된다. 그래서 한번 결혼하면 평생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도 이혼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는 두 가정 당 한 가정이 이혼하는 추세에 우리가 도달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잖아요 그러면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은 이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나 있었던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 까지 흘러 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갈라 서려고 합니까? 인간의 완악함과 강팍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이혼할려고 하면 이혼 증서를 여자에게 써 주고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뜻으로 종 제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노예제도를 거의 폐지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율법을 적용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노예가 종살이했다가 도망치잖아요. 그러면 붙잡아 갖고 억지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판 노예제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도망간 종은 붙잡아 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을 보면 붙잡아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런 규정을 볼 때 그러면 누가 종살이 하겠느냐. 종살이 하다가 도망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종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정 반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종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빚을 못 갚았을 때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빚을 많이 졌는데 갚으라고 해서 못 갚잖아요. 그러면 그 빚만큼 사람이 가서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옛날에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종 살이를 하겠다고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 가는 경우입니다. 부자집에 종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집도 제공 받으니까 그냥 종이 되겠다고 가서 나를 종으로 삼아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해서 종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져서 종이 되는 사람이거나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있는데, 문제는 6년까지만 종을 부리고 7년째는 무조건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년째 되는 해는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집에서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이 됐는데 나는 계속 종하겠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종이 나가 자유가 있지만 나가고 않고 계속 주인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겼을 경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재판장 앞에 가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주인의 평생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의사를 밝힌 다음에 종이 되겠다는 그 종을 데리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면 귀 뚫은 종이 되어서 그 주인의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분들이 귀를 많이 뚫잖아요. 가끔 남자분들도 귀를 뚫는 분이 있는데 귀 뚫는 의미를 알고 귀를 뚫으시기 바랍니다. 왜 여자들이 자꾸 귀를 뚫으려고 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제일 먼저 따먹은 사람이 하와잖아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다가 양심이 껄려 목에 그 씨가 걸렸는데 여자는 거리낌도 없이 싹 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로 불순종했던 사람이 하와거든요. 그러니까 하와의 후손들인 여자들이 귀를 뚫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저는 이제 평생 귀 뚤은 종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를 다 뚫는 것입니다. 종이 귀를 뚫는 것은 7년째는 나가서 자유할 수 있지만 계속적으로 이 주인집에 남아 평생 종이 된다고 할 때 귀를 뚫습니다. 이렇게 귀를 뚫은 종은 사고 팔 수가 없습니다. 평생 귀를 뚫은 그 집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주인 집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주인과 더불어 평생 살다가 죽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귀를 뚫은 종은 왜 귀를 뚫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5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다” 주인을 사랑해서 귀를 뚫는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귀를 뚫는 것은 평생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 강제로 종을 억압을 해 뚫는 것이 아닙니다. 귀 뚫은 종이 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자원해서 귀를 뚫고 주인의 평생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7년째 자유인이 되고 나가면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귀를 뚫어서 평생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귀 뚫는 것은 억지로 뚫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할 때 억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예배, 자원하는 봉사,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사람이 있어요. 본인은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남이 갖다가 자기에게 십자가를 져주니까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도대체 내가 왜 예루살렘까지 와서 십자가를 지려고 왔나하면서 원망 불평하면서 갈보리 산을 올라 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이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시몬처럼 억지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드리는 것은 기뻐하지 않아요. 가령, 새벽 기도를 쉽게 하는 분도 있구요. 어렵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분들은 왜 어렵게 하는지 아세요?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하려고 그러니까 어렵습니다. 목사님 눈치 봐서 하고 또 무슨 일 때문에 하고, 어떤 형편 때문에 하려고 하니까 지옥같은 것입니다.
세상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여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행처럼 좋아하는 것 있습니다. 찻간에서도 하고 기찻간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다. 명절때가 이제 곧 돌아올텐데 성도 여러분들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그것을 좋아하는지 노는 문화도 없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어쨌든 정신을 못 차려요. 불신자건 믿는자든 동양화 나오는 그림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려요. 그리고 날 밤을 새는지도 몰라요. 밤이 2시가 돼도 3시가 돼도 그냥 눈이 벌개 가지고 밤새도록 합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밤새도록 해 봐야 남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 해 가지고 돈 많이 버는 줄 아세요? 떼 돈 버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해 봐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남는 것도 없고, 그냥 허리만 아프고 온 몸이 쑤시는데도 도끼 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열심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 하면 다 칭찬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열심히 하면 다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울 때에 아버지 사랑과 어머니 사랑이 다릅니다. 집에서 부부가 자식을 생산해서 낳잖아요. 그러면 아이가 어렸을 때는 칭얼거리기도 하고 낮 밤이 뒤 바뀌어서 울기도 하 잖아요. 그러면 누가 끌어 안아요. 남편이 먼저 끌어 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울지마 울지마하며 달래 봅니다. 아기가 울지마 한다고 말 귀를 알아 듣습니까? 그래서 계속 울잖아요. 한참 울다 보면 에이 신경질 난다고 아이를 팽개칩니다. 남자들은 아이가 보채면 계속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엄마는 그렇게 안해요. 애가 울잖아요. 울고 보채는 아이를 끌어 않고 밤새도록 씨름하며 잠을 설칩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끌어 안고 우는 아이 달래 주고 기저귀도 갈아줍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다 해 본 일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왜 다른지 아세요. 남편은 자기 뱃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둘이 협조해서 만들었는데도 자기가 열 달동안 고생해서 낳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가 밤새도록 보채면 명분이야 좋습니다. 내일 직장도 나가야 되고 해야 될 일도 많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똑같이 고생해서 만들어 놓고 부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끌어안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를 하고 우리를 낳았어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지면 깨달아 질수록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귀를 뚫고 평생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7개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너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너의 문제는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꾸 서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거나 혹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종이 6년이 지나고 7년째 자유할 수 있는데 나는 나가서 자유하지 않고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것도 귀를 뚫으면 이제는 사고 팔 수 없고 주인 집에서 평생 종 노릇 해야 되는데 왜 귀를 뚫을 수 있는 결단을 내렸느냐.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귀를 뚫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정말 알게 되면 예수님 앞에 귀를 뚫고 예수님과 영원히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과 귀 뚫지 않은 종하고 다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사고 팔 수도 없어요. 다른 집에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를 뚫지 않은 종은 시간만 되면 나는 가겠다는 것입니다. 6년 지나고 7년째 되면 나갈 수 있으니까 나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나갈 생각을 하는 종이 귀 뚫지 않는 종입니다. 이와같이 교회 안에는 귀 뚫은 종과 귀 뚫지 않은 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귀를 뚫은 분들은 그런 의미로 귀 뚫었다고 생각하시고 나는 평생 예수님의 종이다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종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귀를 뚫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평생 예수님의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어야 됩니다.
2.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은혜 받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면 이 종이 그 주인을 위해서 귀를 뚫겠습니까? 이 주인과 평생 살겠다고 귀를 뚫겠어요. 절대 귀를 뚫을 리가 없어요. 귀를 뚫었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 주인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주인과 살면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다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귀를 뚫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시오. 큰 은혜를 받아야 귀를 뚫는다. 그래서 6년 지나서 7년째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주어졌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평생 종이 되겠다고 귀를 뚫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은혜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2절에 사도 바울은 귀 뚫지 않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은혜를 받느냐 하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데 큰 빛이 바울에게 비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팍 꼬꾸라졌어요. 이때 바울이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주여 뉘시오니이까”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이전까지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인물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예수님은 안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핍박하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은혜가 무엇일까? 그 은혜는 자기가 그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었는데도 자기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첫번째 은혜입니다. 나 같이 벌레만도 못하고 쓸모없는 도적의 죄수같은 나를 주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에 바울은 감격했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 발로 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어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아니하면 올자가 없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발걸음을 끌어서 여러분들 수 많은 60억 인구 가운데 6억의 인구밖에는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데 그 6억의 인구 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10분의 1밖에 안되요. 전세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있는 사람들인 줄로 알지만 굉장히 적은 수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있어요. 그러면 그 6억의 인구가 다 알곡인 줄 아세요. 알곡만 추려 내면 얼마 되지도 않아요. 그렇게 적은 수의 하나님이 부른 사람들 속에 여러분이 들어 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요. 자기 같이 못된 짓 하고 돌아다니고 탕자같은 자기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잘 나서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하나님이 불러 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불러 준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은혜로 불러 주신 것이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셔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나고 싶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여러분들 부르면 쉽지만 여러분 대통령 만나러 가 보세요. 만날 수 있나. 여러분이 어떻게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면회도 안돼요. 청와대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을 지 몰라도 들어갈 수도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고 오라 하셔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셔야 됩니다. 만나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에서 만나 주셨어요.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은혜에 바울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바울을 불러 주시고 만나 주시고 일감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일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네가 좀 수고를 좀 해 줘야 되겠다. 대통령이 장관 자리 주면서 부르면 여기 있는 분들 아마 다 달려갈 거예요. 일감 주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교육부 장관하라고 하십니까? 아이구 나 보고 왜 외무부 장관을 하라고 하십니까? 난 그런 것 못합니다. 여러분,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능력은 있는데 안 불러줘서 안 써 주어서 속상한 사람도 많아요. 대통령이 나를 불러서 한 자리 맡기면 내가 참 잘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불러 주시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써 주시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꾼된 것을 여러분들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지난 날의 잘못했던 모두 용서해 주시고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면 네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고 일감을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베드로를 다시 써 주셨어요. 베드로처럼 받은 바 은혜가 크다고 생각할 때에 귀를 뚫게 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물과 피를 쏟아 주신 그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늘 생각하셔야 되요. 십자가를 통해 받은바 은혜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위해 귀 뚫은 종이 되기를 나는 원합니다.
3.주인과 동거하기 위함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주인과 평생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귀 뚫은 종은 사단의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고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자유한 가운데 주님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뚫지 않았을 때에는 마귀도 섬길 수 있고, 세상도 섬길 수 있고 우상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귀를 뚫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제 평생 이 주인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귀 뚫은 종은 이제 내 것이 필요 없게 됩니다. 주인 것이 다 내것이요 내 것이 다 주인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귀 뚫은 후로는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떠날 수도 없지만 떠나지도 않는 종이 바로 귀 뚫은 종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과 귀를 뚫지 않은 종입니다. 하나님은 귀 뚫은 종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1)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 뚫은 종에게는 이전의 공개하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귀 뚫은 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귀 뚫지 않았을 때는 주인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 뚫은 종에게는 모든 것을 다 말 해 줍니다. (2)주인과 더불어서 식탁에 함께 앉아서 음식을 나누게 됩니다.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은혜를 나누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3)주인의 모든 것을 맡는 자가 됩니다. 귀 뚫은 종은 주인이 모든 것을 맡아 감당하는 종이 귀 뚫은 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크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그 하나님과 우리가 평생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귀를 뚫은 종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귀를 뚫은 종입니까?
출 21: 2-6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피어싱(piercing)이 상당히 유행을 합니다. 피어싱이란 몸의 각 부위에 구멍을 뚫어 링이나 막대 모양 등의 장신구로 치장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귀, 입술, 눈꺼풀, 코, 혀, 배꼽 등 여러 부위를 뚫어 장식물을 부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피어싱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더 마시고 싶은 콜라처럼 살을 뚫으면 뚫을수록 계속 뚫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대개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은 뚫는 순간은 만족을 느끼나 다 채워지지 못한 다음 욕구를 위해 뚫을만한 또 다른 부위를 찾게 마련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피어싱, 하고 찾아 자세히 읽어보면 외국인 가운데 더러는 온 얼굴과 몸 부위에 장신구를 달아서 도무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않지만 귀걸이는 하잖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여성들 가운데 귀걸이는 웬만하면 다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걸이의 유래를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귀걸이가 어떻게 유행되었느냐고요? 오늘의 말씀이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한 가정의 종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 위한 종의 표시로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따라 두 종류의 종으로 구분하는데 일시적인 종과 귀를 뚫은 영원한 종입니다.
귀를 안 뚫은 종은 평생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6년 동안만 주인에게 속하여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갑니다.
즉 안식년이 되면 주인도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하고 그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대신 혼자 주인의 집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면 됩니다.
가령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아내와 함께 나가게 되나 만일 그 아내가 주인이 돈을 주고 사와서 그 종에게 아내로 준 상태라면 아내는 물론 그 낳은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종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 종이 자원하여 영원한 종이 되는 표시로서 귀를 뚫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06절).
그러면 이때부터 그 종은 종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저는 바로 귀를 뚫은 행복한 종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어떠한 사람이 노예가 되었습니까?
①전쟁에서 붙잡힌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민 31:09; 왕하 05:02).
이것은 전쟁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오기 위해서와 적군이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법입니다.
②너무 가난해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주인의 보살핌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인 셈이지요.
③자녀를 양육할 수 없어서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출 12:02, 07; 레 25:39).
물론 이것도 주로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이란 얼마나 불행한 신분입니까?
자유는 고사하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인간성을 부인 당해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옛날 종의 비참성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만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는데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습니다.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동시에 종이 된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가장 성황 하던 로마 제국 당시에는 종들이 무려 육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해지는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에 의하면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하죠.
①저를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②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③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부정과도 다름없는 노예제도를 언약 백성 가운데 율법으로서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02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히브리인의 종의 제도가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 기간이 6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0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히브리 종은 육년 간 고용된 계약 노동자로서 종이 그 기간이 지나 자유함을 얻을 때는 더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조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정신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신명기 15:12~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 15: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렇게 보면 종이 실제로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하자면 얼마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년은 자신의 몸값이나 부채의 반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한 이년간은 그 동안 먹고 산 것에 대한 값으로 여기고 한 일 년은 나갈 때 얻는 물품 값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당시 히브리인들의 종에 대한 규례는 다른 여러 종에 비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규례는 종의 규례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렵게 된 사람을 돕는 규례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돈이 없어 부채를 지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살만큼 준비시켜 내 보내는 제도가 바로 유대인의 종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째가 되는 희년이 오면 그때는 노예가 된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빚으로 잡혔던 농토까지도 전부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2. 스스로 영구한 종의 길을 택하는 자도 있습니다.
0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0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같은 유대인들끼리 종을 삼았을지라도 칠년 째 되는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으로 신분 환원을 시켜 주어야 함이 법이라고 앞서 말씀 드렸지요.
그러나 종 된 사람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주인을 위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이 되는 의식을 가집니다.
재판장. 이는 본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인데(창 24:3; 수 02:11) 70인 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귀를 뚫을 것이라.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Knobel).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으로서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아내나 자식들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자원하는 종으로서 이 사람은 평생토록 그 주인을 섬깁니다. 해방될 날이 없지요. 해방이라면 그 종이 죽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 종이 마음이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려 할 때 주인이 재판장에게 이 사람은 귀를 뚫은 종입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재판장은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게 합니다.
귀를 뚫었던 흔적이 그를 평생 종으로 살게 하는 것이지요. 귀를 뚫은 종은 빚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고마움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 노예가 된 자로서 그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귀를 뚫기 전 주인을 계속 섬기거나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상전과 자신의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비천한 노예가 아니라 진정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유를 주신 그 주인이 너무 고마워서 종이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 종이 짊어지고 다니는 종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이 가치 있겠습니까?
가령 아내가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 라고 자진해서 고백한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을 것이며 그 대상이 주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성도 간에는 모든 일을 섬기는 자세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3. 종은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갈 0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그 자유로 주님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추진력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스스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자원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귀를 뚫은 종처럼 살아야지요.
①주님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참 자유를 주신 분 우리에게 참된 죄 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처지의 노예처럼 부리려고 종이 되라, 종노릇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자유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②주님의 종만이 아니라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자원하여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복종할 수 있고 피차에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보기에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아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서로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자원하여서 귀에 구멍을 뚫었던 종들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 하는 비극의 세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D. 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으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도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빌 02:0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0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