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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함께 하는 기쁨
성경본문: 시편 133: 1-3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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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십억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곳에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일 것입니다.
도대체 예루살렘 성전은 어떻게 생겼을까?
유감스럽게도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모스크의 사원만이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가도 성전은 없지만, 성전이 왜 그곳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전설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성전이 무너져버린 데 대한 아쉬움을 달래주며, 그 곳에 성전을 세우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흔히들 알려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장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모리아 땅이라고 하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세워진 회교도의 사원을 들어가 보면 그 중심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바치려하였던 그 자리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목적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철저히 순종하며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장소에 대하여는 이런 전설도 있습니다.
옛날에 한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참으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둘은 농사도 함께 지었습니다. 모든 일을 똑같이 나누어서 하고 이익도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형은 결혼을 해서 가족들이 있었고, 동생은 아직 혼자였습니다.
추수를 마친 후 어느 날... 동생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곡식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공평하지 못해. 형은 먹여 살릴 가족들도 많지만 나는 혼자가 아닌가... 형 몰래 내 창고의 곡식 자루를 하나씩 형의 창고에 날라 놓아야지...‘ 그날부터 동생은 자기 창고의 곡식을 밤이 되면 한 자루씩 형의 창고로 날랐습니다.
그런데 형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곡식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공평치 못해... 나한테는 늙으면 나를 거두어줄 자식들이 있지만, 동생은 아직 혼자가 아닌가... 동생 몰래 내 곡식을 동생의 창고로 밤마다 옮겨 놓아야지...‘ 그리고는 그 날 밤부터 그렇게 하였습니다.
형제는 각각 자기의 창고를 돌아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곡식이 줄어들지를 않았으니까요... 며칠 동안 곡식을 날랐으면 틀림없이 그 만큼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곡식자루를 메고 창고를 나선 형제가 도중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의 궁금증은 풀리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그 자리에서 자루를 내려놓고는 서로 껴안고 깊은 사랑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이곳을 성스러운 자리로 선언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남다른 사랑을 목격한 까닭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자리가 바로 형제가 부등켜안았던 그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형제가 보여준 아름답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전을 세우신 목적이 형제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며 우애 있게 잘 살라고 하는 뜻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그동안 아브라함의 제사가 보여주듯... 신앙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만 올려다 볼 것이 아니라 주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형제나 자매들과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입장이 되어주며, 이해를 통해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도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열다섯 편의 말씀에는 각각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절기가 되었을 때에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며 하나님을 찬송하던 노래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동안 세상살이에서 잊고 살았던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성전을 향하는 길에서부터 다시금 예배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오늘의 말씀은 좀 특이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 초점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다기 보다는 더불어 같이 성전에 올라가는... 또는 더불어 함께 지내는 이들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이들과 형제처럼... 하나 되어서 잘 지내는 일도 참 중요한 것이고 그 속에서도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형제가 더불어서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2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기름이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것에다가 비유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름이 이렇게 머리로부터 흘러내린다는 것...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대목의 말씀을 읽을 때에 문득 시편 23편이 떠올랐습니다.
다윗의 시편인데...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고백하였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이 우리에게 고백하는 하나님은 마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주인과 같습니다.
험하고 고단한 나그네 길에서 지친 우리들을 위하여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이렇게 다윗은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요?
기름 속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들에게 기름을 발라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양들의 피부 밑에는 작은 벌레들이 파고들어서 양들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거나... 어떤 양들은 아예 통째로 기름통에 집어넣었다가 꺼내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벌레들이 파고들어서 낸 상처들이 깨끗하게 아물고 치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은 어떤 특별한 자리에 오르는 이들에게 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왕의 대관식이라든지...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이들에게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는 일에 기름이 사용되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 다는 것 속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너는 나의 특별한 존재야... 난 너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어...’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면서 때로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면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얻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들 자신이 잃어버린 정체성... 내가 바로 하나님이 사랑받는 자녀인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형제들과 더불어서 어울려 지내는 일 속에 하나님은 이러한 축복을 숨겨 놓으신 것이지요. 서로가 사랑하며 잘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모든 상처들을 치유 받게 되고... 잃어버렸던 자존감과 자신의 참 모습을 서로가 더불어 지내는 일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것은 마치 이슬이 우리들 속에 부어지는 모습에다가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3절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헐몬 산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아주 높아서 많은 이슬이 맺히는 산입니다.
이렇듯 북쪽의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이슬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쪽의 시온산까지 흘러내린다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론 시인의 상상력에 바탕이 된 대목인 것이지요.
헐몬에서 만들어지는 이슬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남쪽 시온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을 적시고도 남음이 있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슬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생기와 신선함입니다.
우리다가 어쩌다가 밖에 나가서 아침을 맞이할 때... 풀잎에 맺혀진 이슬을 보면서 받는 느낌은 참으로 신선하고 생기가 가득하다는 것이지요.
형제와 더불어 같이 지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그것은 마치 이슬이 우리에게 내리는 일에다가 견주고 있습니다.
북쪽 헐몬 산에서 만들어진 이슬이 남쪽 시온까지... 이스라엘의 전체를 적시는 것처럼... 형제들과 어울려 잘 지내는 일은 우리의 삶 전체를 생기가 넘치고 신선한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나를 격려해준 일...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는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 때부터 삶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이제가지 살아왔던 것처럼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이른 아침에 맺혀있는 이슬처럼... 그런 신선함과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서강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장영희 교수가 어렸을 때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 교수는 초등학교 때 서울 제기동의 한옥에 살았답니다. 다리가 불편해 집에서 책읽기에만 빠져있던 그녀를 어머니가 대문 앞 계단에 끌어 앉혔습니다.
작은 방석을 하나 깔아주고요.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답니다.
술래잡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공기외엔 끼어들 수 없었던 그녀에게 친구들은 꼭 무언가 역할을 만들어줬습니다.
고무줄이나 달리기를 하면 심판을 시키거나 신발주머니와 책가방을 맡기는 식으로요. 덕분에 놀이에는 참여하지 못해도 소외감이나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봐 친구들이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엿장수 아저씨가 골목길에 들어섰습니다.
집 앞에 앉아 있던 그를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깨엿 두개를 내밀더랍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습니다.
"괜찮아."
순간 좀 당황했습니다. 뭐가 괜찮단 말인가?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신기산 것은 그 말이 지금도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
"괜찮아." 라는 그 말이 그녀에게는 삶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무엇이 괜찮다고 하는 것인지...) 중요한 건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한 곳이라고. 좋은 사람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도전 골든벨이라는 퀴즈 프로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친구가 결국 문제를 못 풀고 허탈해 할 때... 친구들이 몰려와서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얼싸안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해 온다고 합니다.
형제가 더불어 잘 지내는 것...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 대해주는 것... 그것은 정말 생각지도 않은 생동감과 신선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거기서... 어떤 곳을 말하나요?
이렇듯 형제들이 더불어 함께 지내는 자리이지요...
나보다는 너를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이해해주는 곳... 바로 그 자리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커다란 감동과 기쁨이 되는지...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영생의 기쁨... 영생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형제처럼 지내는 일을 얼마나 원하시고...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형제의 범위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한 형제요 자매처럼... 한 가족처럼 잘 지내다면... 우리는 그런 좋은 관계 속에서 홀로 있을 때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 교회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비유한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수는 마가복음 3:33절 이하에서 지금 자기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곧 자신의 어머니고 형제들이라며... 자기를 찾으러 왔던 가족들을 거절하셨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9절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방인 유대인 가릴 것이 없이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인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한 형제요 자매처럼 잘 지내는 일 속에 정말 많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형제관계는 문자 그대로 한 부모님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난 형제를 말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 사회는 대가족제도였습니다.
농사일을 하든지... 양을 기르든지... 모든 것이 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결혼을 하고서도 따로 떨어져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형제들 사이에서 다툼이나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한 것이지요.
우리는 야곱의 가정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고... 형제들 사이에 크고 작은 싸움이 참 많았던 것을 잘 알고 있는데..이런 문제는 비단 야곱의 형제들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제 형제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가운데서... 더 이상 다투지 말고... 서로 이해하며... 용서하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일과도 같아서 살면서 얻은 모든 갈등과 상처가 다 치유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온 몸을 이슬로 적시는 일과 같아서 삶에 필요한 신선함과 생기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것은 또한 세상 어느 곳에서도 누릴 수 없는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번 주간에는 <설 명절>을 맞이하면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금 한 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시간을 우리들 모두가 가질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 형제들과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이렇듯...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고 삶이 회복되며... 생생한 삶의 생기를 되찾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영원한 행복을 경험하는 축복된 자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설>에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괜찮아...” 라는 말을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아마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 저.. 이런 죄를 지었는데요...”
“괜찮아...
“ 예수님 저 이번에 시험을 잘 못 보았는데요...
괜찮아...
“예수님 저 이번에 사업에 실패했는데요...
괜찮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늘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거지같은 몰골을 하고 돌아와도... ‘괜찮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성을 보고서도... ‘괜찮아... 이제부터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괜찮아...” 이 말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 예수님이 가장 즐겨하신 말씀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아...”.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과 출발을 격려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번 <설>을 전후해서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소리를 듣던지... “괜찮아...”. 이 말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지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며 진정 세상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연합과 동거의 아름다움
(시 133: 1~3)
한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정직하고 친절하여 소문이 많이 퍼졌고 손님이 점점 많아 졌습니다. 나중에는 물건이 달릴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트럭으로 물건을 들이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이 바쁘게 물건을 팔고 있는 아내에게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별로 없데. 그리고 저 건너가게는 이제 곧 문을 닫을 처지가 되었다고 하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트럭으로 주문하던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 종류도 줄였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그 물건은 저희 가게에 없습니다. 그 물건은 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사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손님은 줄게 되었고 수입도 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그렇게 바쁘게 장사하는 일로부터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그렇게 좋아하던 독서를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지 아십니까? 그 유명한 ‘빙점’을 쓴 그리스도인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함께 살려고 생각했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복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니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늘 3절 마지막에는 거기서 여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다 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합니다. 이것은 욕심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욕심을 가질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복에 대해서 왜곡된 복, 오염된 복을 이야기해서 그렇지 참된 의미의 복은 좋은 것이고 어떻게 하든 이런 복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해서 여기저기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가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 점쟁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또 복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가서 빌기도 하고 복 많이 떨어진다고 하면 계룡산 관악산을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신년이 되면 축복성회 같은 곳에 우루루 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은 내가 찾아 헤맨다고, 소원이 간절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과 관계없이 생각해 봐도 그렇게 해서 복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실까요? 이걸 알지 못하고 헛된 곳에 가서 복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자녀들이 제대로 복을 받도록 해 줘야 하는데 거꾸로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헛된데 힘을 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줄만한 사람에게, 복 받을만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지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시편 133편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3절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다 고 말씀하시는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먼저 1절에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합과 동거라는 단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연합과 동거함이 없이, 함께하며 하나 됨이 없이 복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복을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복 받는 길, 하나 되고 함께 됨이 없게 되면 다 허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고 함께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는 가정에 복을 주시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 되는 그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큰 문제는 GNP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국민과 국민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지도자와 일반국민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어야 하고 부모와 자식간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형제자매간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간에 누가 잘못이나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형제간에 하나가 되어야 내가 복을 받습니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하나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나가 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명령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교우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쁘고 힘들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교우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기독교인들은 터를 넓혀가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고 함께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크게 주장하고 내 주장을 잘 관철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다 잃게 됩니다. 사람도 잃어버리고 기쁨도 평화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고 꼭 이루려는 사람은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좀 바보같이 어리숙하게 나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 내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내 생각을 접을 줄 아는 사람은 지금은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전부 다 얻게 됩니다. 사람도 물질도 평화도 복도 다 얻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땅이라는 의미는 결국에는, 나중에는 전부 다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37편 1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기러기는 함께 대형을 이루어서 날아갈 때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저 멀리까지 날아갈 때 혼자 힘으로는 도무지 가지 못하지만 같이 대형을 이루고 날아갈 때에 부력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구름 속에 들어갈 때나 어두워 질 때에는 ‘끼럭끼럭’ 하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대열을 잘 지키고 빠져 나가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대열을 잘 지켜야 낙오자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연합과 동거를 말씀했습니다.
또 2절에서는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거쳐서 옷깃까지 내림같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 즉, 어른들이 연합하는 곳에 복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가정이 복을 받고 어떤 가정의 자녀들이 복을 받을까요? 부부가 연합하는 가정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하나가 되고 남편이 아내에게 하나가 되어 함께하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집안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되어주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려면 돈도 좀 들고 속상하는 일도 있고 욕먹는 일도 있고 내가 손해보는 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어른입니다. 부모가 연합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복을 받고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가 된 나라의 국민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 특별히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의 CEO 부부가 편하지 않으면 그 회사 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 직원은 회사 사장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화합하고 평화롭게 지내야 회사가 잘되고 또 회사가 잘 되어야 내가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가 될 때에 교인들이 복을 받습니다.
또 이 말씀에는 머리를 머리로 여기는 곳에,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을 가장으로 여기는 가정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게 되고 나라에서는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교회도 교회의 지도자를 어른으로 여기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물론 못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모자랄 수도 있고 나보다도 훨씬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은 같습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는 그 곳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수도원이 날이 갈수록 쇠퇴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찾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수도원장이 고민이 되어 깊은 산 속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지혜자를 찾아가서 조언을 요청합니다. 그 지혜자는 “죄송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 따로 없고 도와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단 하나 제가 아는 것은 그 수도원 수도사들 가운데에 메시아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이 돌아와서 다른 수도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에 수도사들이 누가 메시아일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수도원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서로 존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분이 혹 메시아 일지도 모르겠다고 해서 은혜가 넘치게 되니 구도자들이 그 수도원을 많이 찾아오게 되고 그 수도원은 옛날처럼 번창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는 그 곳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기름이 수염을 거쳐서 옷깃으로 내린다고 했습니다. 기름은 참 부드럽습니다. 함께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냥 억지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하는 것인데 오늘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위의 사람 즉 어른들이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엄하게 하고 무섭게 하고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위에서부터 오히려 섬기고 덮어주고 사랑을 해주는 그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땅이 건조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가 적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건조하고 비가 적음에 비하여 초목들이 잘 견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침의 이슬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들에게 물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새벽에 양들을 끌고 나가서 풀과 함께 수분을 섭취하게 합니다. 이 이슬을 먹기만 하면 하루에 필요한 모든 수분을 다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슬은 어떻게 내리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지역의 갈릴리 위쪽에 올라가게 되면 헐몬산이 있는데 상당히 높은 산입니다. 그 산에는 눈이 있는데 습기가 많습니다. 그 습기가 내려오다가 시온의 산들의 뜨거운 기운을 만나서 밤중이 되어 기온이 차게 되면 그것이 이슬로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높은 산에 풍성한 눈이 덮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해에 그 이슬들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통해서 보이지 아니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질서입니다. 질서가 있는 곳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수염으로, 수염에서 그 아래 옷깃으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헐몬산에서 시온산으로 흘러 들어가는 질서가 있습니다. 위가 있고 중간이 있고 아래가 있는 질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내는 곳에는 보내는 질서가 있으므로 보낼 곳에서 보내지 않을 때는 은혜가 없습니다. 나누어줄 사람은 나누어 줘야하고 베풀 사람은 베풀어야 거기에 복이 있게 됩니다. 줄 자는 주고, 받을 자는 받는 질서가 있는 곳, 이곳에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 곳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도 성령, 수염에도 성령, 옷깃에도 성령, 모든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세 번째가 성전입니다. 2절에 아론의 수염이라고 말씀하는데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의 용도는 성전,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3절에 시온의 산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시온이라는 곳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교회, 예배당을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쳐다보게 하는 말씀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형제자매가 하나가 되고 함께 하는 곳에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을 존중하고 어른은 사랑으로 덮는 그 곳에 하나님은 복을 가득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인도하고 성령이 주장하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늘 교회와 성전을 바라보고 찾고 그 곳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오늘 시편133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온 가족이 모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모이는 좋은 명절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 명절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한 좋은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태근 목사)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