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엔 사건을 모르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65년 전에 받았어야할 황소 두 마리 값을, 65년 후인 작년 말에 껌 한통 값도 안 되는 돈으로 받은 사건이다. 일본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위안부로 낙인 되면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할머니들의 한 많은 인생은 둘째 치고, 복리 이자는커녕 단순 이자 계산도 없었던 99엔에, 팔순 할머니는 넋을 잃었고 국민들은 분노했던 것이다. 일본국의 최고재판소에서 ‘모든 것은 한일협정으로 끝났다.’는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도, ‘나고야 고등재판소에서 말한 미쓰비시 중공업의 도의적 책임까지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목이 나고야회원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다카하시 마코도라는 어느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태평양 전쟁사를 뒤적이면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하다 지진으로 희생당한 조선인 소녀 6명을 발견하게 되었고, 살아남은 소녀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던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고 묻힐 뻔한 역사의 발견이었다. 강제노역을 시킨 사실이 없다고 계속 부인만 해왔던 미쓰비시가, 나고야 회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작년 9월 일본 정부 보관 문서고에서 근무확인서를 발견하자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를 제기하자 어쩔 수 없이 99엔을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런 때에 묘하게도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 전시장이 광주시 상무지구 광주시청 앞에 버젓이 문을 열면서부터, 우리 시민모임은 날마다 1인 시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미쓰비시중공업의 서울 지사와 외교통상부를 오가며 여러 번의 집회를 가져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우습게도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2,000배를 곱해 198,000원 정도로 배상하여 마무리 짖겠다는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10만 국민서명운동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국가가 안하고 국회가 안하니 국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고, 시장이 쳐다보지도 않고 시의원들이 내다보지도 않으니 시민들이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반년 간에 걸친 10만 서명운동은 말 그대로 국민대장정이었다. 광주지역의 70여개 중·고등학교를 포함한 전국 100여개 학교에서 7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16개 모든 시도에서 6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했다. 동경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3보1배 후 134,162명의 서명지 전달, 내각부에 서명지 전달, 전후보상을 위한 일본 의원연맹 방문, 주일 대사관 방문, 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 시간에 맞추는 일정 소화 등을 위해 거르는 끼니는 봉고차 안에서 주먹밥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배고프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은 물론, 국가의 권위와 자존의 회복을 위한 우국충정으로 배불러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전범국가 이었지만, 독일은 무릎 꿇고 눈물로 사죄하며 배상한 후, 피해를 입혔던 주변 국가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과 비교하면, 일본은 너무도 치졸하다. 잘못된 역사를 밝혀내고 기록하며,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독일과 비교하면, 일본국은 너무나도 음흉하고 교활하고 치졸하다.
|
|
|
▲ 김선호 광주시교육위원 당선자. | |
첫댓글 선생님을 만나고 있노라면 저절로 힘이 납니다. 참 고마우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