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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미술의집 蘭亭 원문보기 글쓴이: 蘭亭주영숙
주영숙 운문소설 [향기의 샘]
-이 소설은 경기신인문학상 당선소설 <그의 인생론>으로써,
2008년에 나온 주영숙 장편시조집 [눈물꽃향기의 샘] 중 <향기의 샘>이며,
총 98수의 사설시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첨삭 수정본).
2019년 4월27일 토요일, 고양국제꽃박람회에서
1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니…….’
가슴이 찢겨나가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환상을 간신히 추스르고, 나는 눈을 연신 비벼대며 딸의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단 하루라도 딸을 안보면 온몸의 신진대사가 뒤죽박죽, 엉망 되기 일쑤였던 겨우 다섯 자 남짓한, 내 몸이 약 기운 떨어진 마약중독자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거 봐라.
2
아빠 죄송해요. 이건 꼭 아빠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아빠에게서 떠날 결심을 하였습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나쁜 곳에는 안 빠질 거니까 염려 마세요. 아빠, 손금고의 돈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이 의심을 받을까봐 말씀 드리는 거지만…… 아빠, 다음에 꼭 갚을게요. 아빠……, 제발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다희는 죽었다고만, 이제 죽었다고만 여겨주세요.
3
죽었으면 죽었지……, 죽었다고만…….
다희는 종이에다 죽음이란 단어를 세 번씩이나 새겨서 제 아비 가슴에다 비수를 세 번 꽂은 셈이지만, 하지만, 정작 저는 아비의 가슴에 꽂혀 부르르 떨고 있는 칼날을 모르고 있으리란 사실이, 나를 더욱 슬픔에 빠뜨리는구나, 풍덩~
도대체 죽음이 뭔지나 알고서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썼단 말이냐~
4
옥상에다 빨래를 널고 내려온 아내가 플라스틱 대야를 소리 나게 내던지며 눈에 쌍심지를 세우는데, 평소 같으면 그래가지고 깨어지겠냐고 빈정거릴 만도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딸의 편지가 어미의 성깔을 극도로 돋구어놓은 판. 정말 그런 판 아닌가.
해묵은 바가지 깨는 소리를 벼락같이 내지르는 아내 좀 봐, 보라고!
5
“다른 사람이라니, 아 내가 그래, 다른 사람이란 말요? 제 에미더러 다른 사람이 뭐야, 다른 사람이…….”
다희가 남긴 글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가오는 의미가 다른데, 내 눈엔 ‘죽음’이란 글자만, 제 어미의 눈엔 ‘다른 사람’이란 글자만 들어왔나, 그랬나, 외출할 준비로 모자를 푹 눌러쓴 내 입에서 김빠진 목소리가 나는데,
“어째 그게 당신이고? 양희도 있고 나리도 안있나? ……저 빼놓고는 모두 다른 사람 아니겠나?”
“하이고, 웃기지 마소! 양희고 나리고.”
6
걸신스레 그러넣는 먹성에 비해 통 살이라곤 안 키우는, 키만 멀대 같이 커서 일쑤 나를 내려다보던 아내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가 않은 눈치인 것이, 나를 째려보며 콧똥을 핑핑 뀌고 있는 것 좀 봐, 보라고! 총알을 장전하고 있는 중이리라. 기세로 보아하니 기관총인 것으로 짐작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낳은 딸 아니라고 저럴 수 있겠는가.
7
한창 꽃물 오르려는 열여섯 살짜리 딸이 가출한 형편에, 자기가 다른 사람 중의 하나고 아니고를 가리는 일이 무어 그리 급한 일이더란 말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며 씰룩여대는 걸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나 역시 폭발 일보 직전. 헌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만 감정의 동물인양 ‘웃기지 마소’를 필두로 냅다 기관총을 쏘아대는 아내.
8
“엄마라 부르기 싫으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적었다구. 다 큰 년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게 무어 그리 힘들다구……, 고거하기가 싫어 집을 나가? 아 이제 겨우 삼학년 올라간 양희더러 밥을 해먹고 학교 다니라는 거야? 안 그러문, 일학년짜리 코흘리개 나리한테 일을 시키라는 거야 뭐야? 뻔하잖어, 뼈 빠지게 벌어서 지네들 뒤치다꺼리하는 줄을, 지년이 그래, 조금치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학교까지 따라가서 집안 일 시켰어? 집에 있을 때만 짬짬이 일 좀 한걸 가지고, 그게 못마땅해서 집을 나갔다 이말 아뉴? 아빠 때문만은 아니라구? ……흥, 소녀가장도 있다 왜. 하이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뭐 누는 격이지 그래, 밖에 나가면 누가 가만히 앉혀놓고 밥 먹여 준디야?
9
이 아엠에푸에, 저 먹기두 바쁜 세상에. 지가 나가서 대체 어쩌잔 말이야, 돈을 훔쳐갔으니 생각이 있는 년 같음 지하철 바닥에서야 안자겠지만…… 아, 그렇구만. 그 돈이믄 한 달은 너끈히 버티겠어. 돈이 떨어질 때까지는 안 들어오겠구먼. 살판났다 살판났어……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봐.”
아내의 거센 속사포에 맥이 쭉 빠진 다섯 자 남짓 이내 몸.
10
내 몸이 픽 쓰러질 위기의 한 순간, 그녀를 향해 눈을 한껏 부릅떠본다.
“우짜몬 그리 당신 입장만 생각하노? 다희가 언제 일하기 싫다고 군소리 하는 거 봤드나? 놀고 싶어 환장했다 카드나? 뜻을 모리겄으모 가마이 있어!”
“왜 몰랏!”
드디어 저 여편네가 아니 할 말을 하고 있다.
11
“지아빠 곱추라고, 그거이 창피해서…… 왕따 당하는 거이 괴롭아서…… 흥, 그걸 내가 몰라? 못된 년. 고년은 언감생심에 아빨 바꾸고 싶은 거요. 알아요? 근데 당신은 것두 모르구 툭 하면 학굘 찾아가 선생님 만나고, 유리배달 갔다 학교 파할 시간만 되믄, 트럭을 학교 정문 앞에 떡하니 갖다 대고선 고년을 기다리잖소? 내 입장만 생각한대서 하는 말인데, 걔 입장이 돼서 함 생각해봐, 얼마나 챙피했겠어…… 안 봐도 비디오다. 하이고오, 비디오가 아니라 영화다. 것두, 트럭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정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는, 나오는 애들마다 하나하나 붙들구 우리 다희는 안 나오냐 하구 물었을 테지. 내가 잘난 다희 아빠다 하구 광고를 했지. 뻔할 뻔짜지, 오마나, 왕따 아니라 특따를 당했겄네.”
12
저 혼자 퍼부어대다가 저 혼자 머쓱해지는 아내를 뒤에 두고 트럭에 올라, 올라서,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그대로 둔 채 무작정 시동을 걸어놓고, 큰소리친다, 고물 트럭의 부릉거리는 소리에 내 목소리쯤은 쉽게 묻혀버리리라, 설마 아무도 못 알아들으리라, 그리 싶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목쉬도록 질러댄다.
“미쳤다! 닐로 데꼬 산 내가, 참말로 돌안 놈이다.”
13
“다희 고거 하나 키울라꼬 닐로 들어앉힌 기라…… 우째 그거로 모리노 말다. 니가 잘나 니하고 산 줄 아나? 야이 문디야, 마귀할멈아, 구천 길 지옥불에 굼브라져서, 천년만년 지옥문지기 몸종이나 하거라, 씨바 조또 음심서 키만 지게작대기 맨치 뻗어가이고, 그래가이고, 어느 누깔 빠진 놈이 닐로 데꼬 살겄드노…… 야이 문디야! 쌔가 만발이나 둘러빠질 예팬네야. 다희는 왕따를 당해 나갔다 치고, 그라모, 잘난 니는 날로 특따 했단 그 말가? 참말로, 주제파악도 몬함서, 쌔가 만발이나 빠지고도 열댓 발은 더 빠질…….”
14
한바탕 돌아다니다가 허방치고 되돌아와서, ‘진해유리’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길게 앉아 또 툴툴거린다.
“트럭서 내린 게 잘못이모, 안 내리모 되는기다.”
봉천본동에서 11동까지 구석구석 대책 없이 달리다가 아뿔사! 하고 술집 골목도 기웃거렸다가 설마 그럴리야, 하고는 다시 4동 쑥고개 길로 돌아 나왔다. 턱없이 터무니없이 매연만을 뿜어대다가…….
15
나는 나의 가게를 빚쟁이네 문전 지키듯이 노려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가 간혹 운전석에 길게 앉아 담배를 피워 물라치면 아내는 짐짓 놀라서 호들갑을 떨곤 했다.
“영판 불이 난줄 알았구먼. 아, 사람은 안 보이고 연기만 올라와, 아니, 똑 바로 앉기 싫음 사람재중 표시로 모자라도 올려놓을 일이지……. 하기야, 똑 바로 앉은들 머리 꼭뒤가 보일 리 만무겠지 만은…….”
16
나는 모자챙을 잡아내려 얼굴의 반을 가린다. 아무도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오밤중이기는 해도 사실, 사실은, 내가 저들을 보기 싫은 까닭이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들이 보기 싫어진 까닭이다. 작은 키에 곱추에 대머리에……, 하지만 보잘것없는 이 몰골을 다희 생모 미연은 매력이라고 했었다.
이내몸 구석구석이 매력의 결정체라고.
17
……12년 전에 이미 네 살짜리 다희를 남겨놓고 하늘로 가버린 미연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줄줄이 흐르고 흘러……, 잠시 눈물을 닦아보다가, 가로수를 대신하여 제가 꽃인 양 시치미 뚝 따고 서있는 가로등을 흘겨본다. 따가워 다시 눈을 감지만 아무리 꼭 감아서도 눈물이, 눈물이……
18
다희 생모인 미연은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바람 부는 사월 하늘에 분분히 날리던 흰 꽃잎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나의 신부였다. 사실 말이지만 그녀와 짝이 될 확률은 백분지 일쯤이었지만 백분지 일의 확률을 붙잡기 위해 무모한 짓으로 끝내기 십상의 그 일을 감행했던 나는 그 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 작심하고 미연의 집에 숨어들어 갔었다. 보쌈을 해오리라하고서…….
그런데 뜻은 못 이루고 장래 장인에게 된통 얻어터졌었다.
19
사실 죽을 각오를 미리 하긴 하였다. 더구나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며 아무 데나 나가떨어지고 처박히자 더더욱 다시 살리라는 욕구는 물론이고 희망도 버릴 입장이었다. 내 세상, 그것으로 깨끗이 막 내린 줄 알았었다.
20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회상에서 빠져 나오고는 빙긋 웃음을 머금는다. 죽을 지경으로 얻어터지고 나서야 얻은 각시. 그 여자가 바로 다희 생모 아니던가. 아무리 죽을병이 들었기로 그렇다. 처녀귀신이나 면해볼 요량으로 내게 시집왔다손 치더라도 그렇다. 송미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람이 아니었다. 천사였다, 선녀였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떨기 꽃이었다. 그리고 다희는 바로 그 분신이 아니던가.
21
애비의 굽은 등은 국보 제 1호였고
애비의 대머리는 율부린너 뺨치는 매력덩어리였고
애비의 작달막한 키는 날아댕기는 축구공이었다.
22
적어도 네 어미에겐 그랬다, 그게 진심이고 아니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네 어미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도록 했고, 애비 역시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다희도 틀림없이 그럴 줄 알았지. 애비도 항상 다희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고 말이다. 다희야, 아니, 아닐 거야. 애들이 너를 놀린 게 문제였을 거야.
23
근데, 네가 왜 애비 때문에 왕따가 되었다는 거냐? 말도 안 돼. 아이들이 아무리 철이 없었기로 그건, 그건, 아니야. 넌 곱추가 아니잖아? 넌 대머리도 아니잖아? 너는 이쁘기 짝이 없는 네 어미의 분신이잖아? 도대체, 이해 할 수 없구나. 다희야, 제발 돌아와라. 대체 어젯밤은 어디서 잤다는 말이냐? 오늘은 또 어디서 자려고?
24
안 그럴께. 다시는 너를 창피하게도 안하고 힘들게도 안할게.
에미가 자꾸 부려먹으면 다희야, 너랑 나랑 단 둘이 따로 나가서 살자꾸나. 너 혼자서 그러지 말고, 애비하고 같이 나가잔 말이다……. 아니지, 너는 애비를 창피스러워 하지? 애비한테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지 참.
입안이 바작바작 타고 얼핏 눈이 감기고…….
25
어린 계집애 몇이 방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하나같이 가슴이 푹 파인 웃옷과 팬티같이 생겨먹은 바지를 입었는데, 하는 짓은 가지가지다.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우며 피유우 하는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뿜는 아이, 거울 앞에 앉아서 얼굴에 화장품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아이, 껌을 짝짝 씹으면서 화투 패를 던졌다 몰았다 하고 장난질하는 아이……
“오늘부터 늬들하고 동고동락할 친구다. 사이좋게 잘 지내.”
금방 기름독에서 빠져나온 놈처럼 빤지르르하게 차려입은 건달녀석이 다른 계집애 하날 쑥 들이는데 바로 다희다. 다희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계집애들한테 인사를 한다. 계집애들의 얼굴이 죄 다희를 향한다.
26
“손님 왕창 끌게 생겼는데?”
“야, 내 밥줄 뺏음 재미없을 줄 알아, 알어? 보아하니 돈 벌려고 자청해서 들어온 모양인데, 흥, 돈을 벌려면 밑천이 드는 벱이여. 자아, 이거 사라. 이래뵈두 이게 오 대째 내려오는 마술 팬티라구. 손님 홀리는 데는 직방이야. 얼마나 휘황찬란한 마력을 가진 줄을 감히 네깟 년이 알겠냐마는.”
27
한 계집애가 손바닥만 한 까마귀빛깔 팬티를 다희 눈앞에 팔랑팔랑 흔들고 있다. 정말 희한하게 생기기는 했다. 구슬이 조롱조롱 달려있는가 하면 새의 깃털 같은 것이 달려있기도 하다. 그런데 두리번거리던 다희가 갑자기 팬티를 뺏어 움켜쥐고는 소리 지른다.
28
“얼만데 그래! 여기까지 와서 왕따 당할 순 없어.”
다희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눈이 반짝이기도 한다. 팬티를 어이없이 뺏겼던 계집애는 요것 봐라 하는 양 실눈을 하고서 다희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이윽고 푸르딩딩한 입술로 이죽거리는데,
“한 장이면 돼.”
29
다희가 팬티를 슬그머니 밀어내면서 애매한 표정으로 따지길
“무슨 팬티가 만원씩이나 해?”
“뭐야? 호호호호~”
모두들 대굴대굴 구르며 깔깔거리는 가운데 팬티를 흔들어댔던 계집애가 다시 팬티를 집어 다희를 톡톡 치며 연신 종알종알……,
“야아 야, 무슨 껌 값이냐? 기가 막혀서! 니가 말한 그 액수에서 공을 두 개는 더 치셔야지. 백 만원짜리 한 장이란 말이다. 알겠냐? 너무 많어? 깎아주랴? 돈 벌기 싫음 말구, 어때? 빨리 결정하란 말야. 자아, 얼마나 깎어?”
다른 계집애 하나가 바람을 잡는다.
“너는 단돈 삼 만원에 사구서 너무 많이 남기는 거 아냐? 야아 야, 절반 똑 분질러서 오십 만원 해줘라. 어때?”
30
다희는 조금 주춤거리다 돈을 꺼낸다. 집에서 훔쳐낸 30만원이다. 저러면 안 돼, 저건 안 돼, 나는 다희를 말리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아서 허방만 치다가, 해도 해도 나오지 않는 소리로 고함쳤는데, 여러 번의 실수 끝에 겨우겨우 성공하였다.
“아아ㄴ 돼…….”
내가 내 비명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고 보니
트럭에 앉은 그대로 악몽을 꾼 거였다.
31
나는 여태 불이 꺼지지 않은 나의 진해유리를 낯설게 바라보면서, 좀 전의 꿈을 한 장면 한 장면씩 곱씹는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있어서는 안 돼는 일이지만, 요즘 세태를 감안하면 충분히 일어나고도 남을, 얼마든지 있을법한 일. 설마 제 발로 찾아 들었을까 싶으면서도, 자립하겠단 철없는 생각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나를 때려, 때려서…….
32
아내가 밖에 나와 두리번거리더니 가게의 셔터를 내리기 위해 끝이 굽은 쇠파이프를 찾아 든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힘든 일은 되도록 여자한테는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내가 세워놓은 원칙이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다가가 아내의 손에서 쇠파이프를 뺏어 들고 보니, 아내가 픽 하고 코웃음 치기를,
“남자라고…….”
‘남자’ 앞에 붙어야 할 ‘꼴에’라는 말을 생략했다고, ‘꼴에’가 투명유리처럼 내 속을 비추며 욜랑거리고…….
33
사실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일은 키가 큰 아내에게 더 제격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아내는 내가 없어도 혼자 가게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유리 자르는 기술도 있다. 나 혼자선 이틀 걸릴 일도 아내가 거들면 단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걸렸다. 그래도 늘 그렇게 억척스런 아내가 결코 달갑지 않았다. 집안일은 툭하면 다희에게 맡기는가 하면 유리 자르는 일에 신들린 듯이 매달리는 게 전혀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면서도, 왠지 싫었다. 아내는 아무리 먹어도 빼빼 말라 보이는 마귀할멈 저리가라 같은 몸매를 아주 만족스러워했고, 남편의 버금가는 기술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니 ‘꼴에 남자라고’ 한대서 새삼 서운할 것도 없다.
애당초 저 잘난 맛에 사는 못 말릴 여자였으니까.
34
하지만, 내게 불만이 있을 때마다 다섯 자에 두 자짜리 3미리 유리를 앞에 놓곤 찌익, 찌익, 그어대는 여자. 그 유리를 산산조각 내고서야 사내처럼 껄껄껄 웃으며 이만하면 기술자 다됐지? 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자축하는 여자. 온 몸이 난도질당한 것같이 더러운 기분을 감춘 채, 번번이 살인적이라 할 여편네의 자축행사에 동조해온 나.
35
하지만, 대체 내가 왜 저 여자하고 살고 있나 하고 한탄스러울 때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확고한 명분이 나를 위로했고, 그래서 그녀의 ‘습관성 비웃음증’ 쯤은 그저 그녀의 성격이다 하고서 나를 죽여 왔다. 그렇다. 나에 대한 그 태도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단지, 아이를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 하는 것에 무심하기 짝이 없는, 계모의 지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서운할 뿐이다. 그것, 그것뿐이다.
36
“전화 겉은 거, 뭐, 안 왔드나?”
“지발로 나간 년이 전환 왜 해?”
아직도 성이 안 풀린 모양이다. 하긴, 분풀이 할 유리는 항상 나였으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아직 다희까지는 유리와 동격에다 올려놓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 분이 풀렸다면 다희를 ‘년’이라고까지는 안 할 테지.
37
나는 계속 투덜대는 아내를 무시한 채 욕실에 들어왔으나 욕실에 들어온 진정한 이유를 몰라 멍하니 서 있다. 도대체, 머릿속이 다희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어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이윽고 나는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대야에 물을 넘치도록 틀어 얼굴을 푸륵푸륵 씻는다. 새삼스럽게 쏟아지는 눈물로 세숫물은 범벅이 되어간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38
후회막심이다. 다희를 애지중지 키우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이미 딸이 하나 딸린 여자를 앞뒤도 재보지 않고 덜컥 들어앉힌 것. 여자가 들어오면 다희도 순조롭게 자랄 줄로만 믿었던 그게 오판이었던 것 같다. 그녀가 8월 초에 들어와서 이듬해 사월 말에 낳은 딸이 아무리 계산해도 내 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더욱 후회가 되었다. 그렇지만 다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다희가 집을 나가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저 여자가 혹시 팥쥐 어멈 노릇을 했는가 싶기도 하고, 장화홍련전의 장쇠 어미 짓을 했는가 싶기도 하고, 참으로, 생각할수록 답답한 노릇이다.
39
어디선가 딸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다.
저 아이가, 저 아이가 웬 남자한테 마구 얻어맞고 있다.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인지, 뭐를 훔쳤다는 것인지,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를 밟으며 비틀거리고 있는 다희의 온 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있다. 유행을 좇느라고 뚫은 바지의 구멍은 방금 괴한에게 당한 흔적으로 변하여 너덜거리고 있다. 죽을 거야! ……, 다희는 죽을 거라는 선언과 함께 입에 거품을 물며 남자를 노려보다가, 마구 뒹군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하는 소리가 허공을 찢고 있다. 먹물을 확 뿌려놓은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별이 지나가더니,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장군이 말을 타고 달린다.
핑하니 하늘로 오르는 장군의 옆구리에서 다희가 손을 흔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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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도무지 나오지 않는 말을 그만두고 이만 바득바득 갈아붙이다가
“이 이가, 이빨까지 갈아…….”
아내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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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별꼴 다 봤다고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꿈에서 본 곳이 낯익은 장소 아니던가. 당장에 그곳을 찾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딸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장군의 옆구리에 채여 눈 깜짝할 새 하늘로……, 죽음이 다희를 데려간다는 암시…….
42
“죽지 마라 죽지마!”
그러고 중얼거리면서 트럭을 달리면서 골똘히 더듬는다. 그곳이 어디더라…… 아아, 어디더라 ……, 아하 그렇다. 장군이다. 강감찬 장군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바로 낙성대다. 근데 낮에 가봤을 땐 없었는데…… 아니지 참, 강감찬 장군은 밤중에 달리고 있었어.
다희를 옆에 끼고서 혜성처럼 하늘을 가로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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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훨씬 넘었는데도 거리는 여전히 붐비고 있다.
인적은 드물지만 차들이 불을 밝히고 으르릉거리며 달리는데, 한적한 낙성대 길에서는 밤샘을 하는 포장마차의 홍합국물 냄새와 숲에서 나는 아카시아 향내 속에 꼼장어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바람에 갑자기 딸의 냄새를 잃어버렸다. 아니, 딸이 구타당하던 현장이 분명 ‘낙성대 휴게실’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와보니 모르겠다. 강감찬, 말을 달리는 장군의 동상만이 우뚝 솟아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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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의 요금 정산소에도 사람이 없고, 공중 화장실도 외등만 몇이 깨어있을 뿐. 여자화장실 안을 기웃거려보았지만 천장에 불만 보름달 같다. 남자화장실도 마찬가지다. 들어선 김에 소변기 앞에 선다. 볼일의 진행 중에 얼굴을 들자, 내 키보다 약간 높은 위치의 벽에 붙은 글귀가 눈에 들어오는데, 명언인 모양이다.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동안 무대위에서 뒤뚱거리다가 곧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는 배우일 뿐이다.’(셰익스피어)
그렇지, 인생은 연극이라고. 연극을 얼마나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의 구분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군.
45
원형 주차장에서 옆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산등나무 밑의 벤치에 잔뜩 웅크리고 누운 사람이 임자다. 나는 실소를 머금는다.
순전히 꿈만 믿고서 딸을 찾겠다고 나선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몽유병자가 따로 없겠다는 기분이다. 벤치에 누운 사람이 딸의 청바지끝자락처럼 내 눈을 끌고 가는데, 죽을 거라며 외치던 딸의 목소리가 벤치에 누운 사람한테서 나는 것만 같아서 도저히 돌아설 수 없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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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시오, 여보시오.”
바바리코트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그를 흔들어대자, 그가 대꾸도 없이 코트를 내리는데, 흰 와이셔츠 깃이 어둠 속에 나비처럼 떠올랐다.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만 아니라면 나 같은 사람은 근접도 못할 것 같은 직업인? 혹 다희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그 사내? 요즘은 그런 세상이 아니던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남자가 다희를 때린 그 남자라고 억지로 갖다 붙일 필요는 없고, 다희를 찾을 실마리 정도는 건질 수 있으리라.
어쩌면 소중한 사람일 터. 강감찬 장군이 보내준 사람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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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양반이 이게 뭐요? 얼른 일나쇼. 집에 들어가서 주무셔야지 원.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소위 집안의 가장이 이라몬 안 돼는 기라요.
가장이 흔들리게 되몬 가족 전체가 무너지는 기요. 그걸 알아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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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갈 곳이 없다며 횡설수설이다.
집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가장으로서 책임을 못다 하는 이상 무용지물이란다. 빅딜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회사와 회사가 통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외국인이 사장이 되는 바람에 떨려났다는 말을 한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이엠에프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말 같아, 나는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그를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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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튼 간에 우리집에라도 갑시다. 아무리 오월이라도 그렇지, 길바닥에서 자믄 고마마 오세풍에 걸리는 기라…….”
남자는 내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저어기 저기 안 있소? 순이네 포장마차. 형씨, 한 잔 사 주실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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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벤치에서 그러고 있었던 것은 실상 나를 만나려고,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동국물과 소주잔을 앞에 놓고 끝없이 넋두리를 하는 저 인간 덕분에 내가 다시 우울해지고 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자기 얘기만 중요할까. 왜 남의 얘기엔 관심이 없을까. 나도 자기 이상으로 괴로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하는 걸까.
남에겐 우동을 사주면서도 정작 나는 하루 종일 굶었다는 사실을 왜 몰라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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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속으로 불만을 삭히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있는 사실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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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들 녀석을 많이 의지했었소. 꽤 똑똑했거든요. 그런데, 녀석이 집을 나갈 줄은, 그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은 정말 몰랐단 말이오.”
나는 딸이 나갔는데 당신은 아들이 나갔구먼. 가슴이 찢어지지? 죽을 것만 같지?
그런데 우동은 잘도 먹는군. 나는 물 한 모금 못 삼키는데, 당신은 그래도 우동 가닥을 잘도 빨아들이는군. 그런데, 당신 아들은 왜 나갔소? 노숙을 하게 된 원인이 실직 탓이 아니라 아들 탓이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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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답은 길었다. 실직이 먼저였는지 아들의 가출이 먼저였는지가 도대체 분간이 안 간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제 어미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버려놓았다는 사실이다.
‘나의 실직은 물론 나의 능력 부족 탓이겠으나 아들은 분명 제 어미 탓이 크다. 마누라는 아들을 중학교 때부터 줄곧 과외를 시키더니 대학 입시 직전까지 그치지를 않는 것이었다.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가면 아이가 스스로 공부할 능력을 상실할 거라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로봇이 될 게 분명하다고, 그토록 알아들을 만큼 일렀는데도 마이동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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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마누라는, 아이 과외도 못시키는 부모는 세상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남들 다 하는 과외를 내 자식만 안 시키면 낙오자가 되는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막무가내였다. 덕분에 이날 이때까지 16평짜리 아파트를 못 면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데다가 아내는 아들 과외비에 보태느라고 파출부 노릇도 만 5년이나 했다. 내 월급은 도대체 코끼리 입에 비스킷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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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아들이 대학에 척하니 붙어만 줬으면 그에 대한 보상은 씻은 듯이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같이 대학이 남아돌아가는 세상이 언제 있었던가. 지방대학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자기 전공을 찾아 소신껏 지원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제 새끼만 최곤 줄 알고 젤 알아주는 대학에서도 젤 비율이 센데다가 원서를 넣었으니 결과야 보나마나 한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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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무엇보다도 사진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랬는데, 천지를 모르는 어미는 녀석을 법대에 넣으려고 했다. 기가 찬 일은, 아이가 그래도 수도권 대학엔 붙었었고, 그랬으면 다 같은 법대니까 그냥 등록시켰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아들의 인생까지를 에미가 살아 줄 것이 아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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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를 시키려고 들다니……, 오비이락이라고, 나는 그 무렵에 실직이 되었는데,
차마 처자식한텐 털어놓지도 못한 채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척하니 갖추고서 이 낙성대로 출근하게 된 것이 이제 이력이 났을 정도다. 그런데 자기가 원치 않던 법과에 붙은 것이 불만스럽던 아들은 어미가 재수하라고 나오니 얼씨구나 했던 거야. 그래서 대학 등록은 않았고, 제 친구들이 대학 입학할 즈음에 저는 또 학원에 등록하고 얌전히 다니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출을 해버렸고, 그게 또 일주일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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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도 떠났을 거라 짐작되어 며칠 머리를 식히고 나면 돌아올 거라는 예상을 해주며 달래도 통 믿지 않고서, 마누라는 이제야 머리를 싸매고 누워 후회를 한다. 아들한테 몸 바쳐 살다가 그만 탈진상태에 빠진 거지. 이러니 내가 집에 들어갈 명분이 있겠는가. 실직한 것이야 다시 직장을 못 구하면 장사라도 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도대체, 아비노릇 남편노릇을 할 아무런 명분이 없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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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부인은 아드님의 생모……요?”
뚱딴지같은 내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한편으로는 친모거나 계모거나 간에 자식을 들들 볶아대는 것은 형태만 다르달 뿐이지 매양 거기서 거기구나 싶었다. 나중에는 자식한테 냉대를 받기 일쑤인 요즘 여자들이 불쑥 안쓰러워지기도 하면서, 아무튼, 조건부 사랑인데도 무조건적인 모성애에 목젖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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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여자가 말이요. 아들 고거 하나 낳고는 영구 불임수술을 해버렸다오. 나 원 참, 아들놈을 그렇게 잡을 심산인 줄은 꿈에도 모르구서, 당신 참 대단하다고 칭찬했었지. 바보, 멍텅구리.”
뭐라고? 불임수술이라고? 갑자기 내 머릿속에 불이 켜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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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나는 다희가 출생한 바로 그 다음날에 불임수술을 받기위해 병원으로 갔었다. 몸이 쇠약한 미연을 살리는 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연을 일 년이라도 더 내 곁에 붙들어 놓으려면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의사는 나에게 불임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던가. 내가 바로 씨 없는 수박이라는 거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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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의사를 붙들고 대판 언쟁을 벌렸었다. 우리 다희는 그럼 어떻게 설명 하려느냐 하고. 그러자 의사는 다희가 생기고 나서 그렇게 된 모양이라는 둥, 근거도 없는 말로서 얼버무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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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내 기억에서 그 일을 지우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결과였다. 그래서 다희는 그 어떤 녀석의 딸이 절대로 아니며, 명백히 송미연의 딸이자 내 딸이 된 거였다.
그런데 나의 귀여운 막내딸은…… 나리는 그럼 어떻게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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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아니었구나. 내가 착각했었어. 나리는 분명 내 딸이 아니야. 내 몸이 씨 없는 수박이라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왜 그 간단한 해답을 두고 달이 찼니 안 찼니 하고 의심만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첨부터 내 딸일 수 없었는데, 나는 왜 까마득히 몰랐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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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허탈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니, 그것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푸하하, 우우우우우 하하하핫!”
배꼽을 쥐고 웃었다, 눈물을 질금질금 짜면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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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여태껏 나리가 틀림없는 내 딸이라고 연극을? 아니면 정말 고것이 영락없는 내 핏줄이라 믿고 있으렷다. 조산이라고? 그랬어. 조산이었어……. 그러나 조산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나는 이내 혼란이 왔다. 골치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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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굴레 밖에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심히 골치 아픈 일이고, 가족의 굴레 안에 들어있다는 착각이 훨씬 행복하다는 이치를, 나는 미친 듯이 웃는 중에 알아채는 중……. 셰익스피어 그 사람은 확실히 위대한 작가인가 보다며, 나는 문득 남자의 등등 탕탕 쳤다.
“이보슈, 빨랑 집으로 돌아가슈. 당신 마누라도 이해하고, 당신 아들도 기다리고, 모두 불러들이란 말이요. 가족이 별 거 있소? 모여 살몬 가족인 기라. 가족이란 거는, 만드는 기란 말이오.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꼬. 가족계획이란 말도 몬들어 봤소?”
그러나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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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아내가 가출한 모양이었다.
실직한데다 엎쳐서 아들까지 잃어버렸다는 그 남자를 집에 데려다준 뒤에 새벽이 다되어서야 들어와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사이에 아내가 없어졌다. 아니다. 내가 집에 들어섰을 때에 이미 없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엔 어디 마실이라도 갔겠지 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저녁이 이슥하도록 안 들어오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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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두 군데를 마치고 돌아온 나리가 제 엄마를 찾아 기웃거릴 때쯤에야 나는 진짜로 아내가 없어진 사실을 깨달았다. 날 골탕 먹이려고 집을 나갔구나. 나하곤 피도 한 방울 안 섞인 딸을 둘씩이나 떠안기고서, 대체 어쩌자고 나간 게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을 꺼내다 말고 흠칫 놀라 냉장고 안을 한참 지켜보았다. 평소엔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던 냉장고가 갖가지 밑반찬으로 가득 차있어서 어이가 없어진다. 하이고~ 이 여편네가 단단히 작정을 했네, 마지막 선심 쓰듯 저래놓고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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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분수도 모리고 까부네. 싫으몬 탁 깨어놓고 싫다고 말할 일이제. 어데 있노? 지랄 말고 나타나거라 고마. 당장 이혼해 줄 끼다 고마. 보기 싫은 놈, 확실하이 안 보그로 해 줄테이까네, 오이라, 말로 하자꼬. 비겁하이 숨지 말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서러워서 죽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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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가 서방의 면전에서 곱추라고 나불댄다 싶더니 이미 갈라설 작정을 했었구나. 그래서 막말을 했구나……. 하기야, 이 몰골을 누군들 좋게 보아주랴. 금쪽같은 딸년이 애비를 버린 마당인데 넌들 무슨 열녀 상 받을 일 있다고 나한테 계속 붙어살랴. 차라리 네가 미녀라면 내가 야수입네 하고 살겠지만, 그런 입살에도 오르지 못할 만큼 보통여자인 네가, 도대체 무슨 낙으로 나하고 살겠는가 말이다.
“치아라, 다 치아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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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작업할 때 쓰는 작은 망치가 손에 잡혔다.
나는 그것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결혼선물이랍시고 내가 직접 만들어준 아내의 화장대가 으리번쩍한 모습으로 나를 깔보고 있다. 나의 초라한 몰골이 머리 꼭대기서부터 발끝까지 드러난다. 순간, 망치를 든 팔이 거울을 향해 신들린 듯이 춤추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쑥 빠져나가 떨어진다. 상관없다. 누구하고의 교신도 이젠 끝. 거울이고 화장품이고 하나 남김없이 때려 부술 거야, 그럴 거라고……. 파편이 튀어서 눈물범벅인 내 얼굴에 달라붙거나 꽂히거나 길게 그어버리거나, 상관없어. 유리조각에 당하는 상처쯤은 이미 오래 전에 면역이 되어있어. 그러니 내게 돌아오는 아픔은 오히려 쾌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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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끝낼 작정을 단단히 했다.
가족이란 대체 무어냐. 그 구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든지 간에, 서로가 아끼고 보듬어가며 살아야만 진정한 가족이 아니더냐. 서로가 헐뜯고, 헐뜯기 이전에 경멸하고, 경멸하기 이전에 창피스러워하고……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래 가지곤 하루도 살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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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던져버린 나는 우뚝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깨어진 거울 속에 하나의 포악한 괴물이 식식거리고 있다. 괴물이 따로 없다. 내가 바로 괴물이구나. 머리에 뿔이 달렸다가 얼굴이 삼등분 사등분으로 변했다가 입이 찢어졌다가 눈이 셋으로 넷으로 변했다가 하는 등, 갖가지 요술을 부리며 얼굴에 박힌 보석을 뽑아내고 있구나. 자기가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괴물. ……아니다. 내가 괴물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괴물의 할아비겠다. 괴물인 줄 모른 채로 이냥저냥 사람처럼 사는 거지. 다른 모든 사람 탈을 쓴 괴물이나 마찬가지로,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당장에 죽어 없어지지 않을 바에야 사람인척 사는 거지. 그림자, 뒤뚱거리다가 사라질 사람이라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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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을 만신창이로 쑤셔놓고 거실로 나오자 두 딸이 꼭 부둥켜안았던 몸을 풀고 조심스레 다가온다.
“아빠아, 피났어!”
양희는 약장으로 뛰어간다.
“아빠 울었어?”
나리의 눈엔 눈물이 넘칠 듯이 실려 일렁이더니 기어코 볼통한 그 뺨을 조르륵 타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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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사람인 나는 문득 괴롭다.
이 세상에 다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다 그만 두자고, 가족의 굴레를 깨뜨려버리자면서 패악 부리던 파편들이 저 안방에 어지러이 널려있는데, 내 부끄러운 모습이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이제 새삼스레 두 딸의 존재가 나를 혼란시키는구나.
“아빠, 화 많이 났어요?”
내 얼굴 토닥토닥 소독해주던 양희가 조심스레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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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내 새끼들, 양희야, 나리야…… 너그들한테 화난 게 아니다. 하지만도, 너그들한테 딱 한 가지만 물어보자.”
양희는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턱을 받치고 앉는다. 나리 역시 눈물을 닦고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너그들도 이 아빠가 챙피하나?”
느닷없는 질문이었는지 두 딸은 멍한 얼굴로 대답이 없다.
“다시 묻겠는데 말이다. 이 아빠 때문에 너그 친구들한테서 왕따 당하나 이 말이다.”
둘이 다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만 잘래잘래 흔든다.
79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창피스럽겠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다니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민망한 나머지 질문을 바꿨다.
“엄마는 어데로 갔노? 어데 간다 쿠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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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엄마를 들먹이니 딸들의 얼굴이 갑자기 피어난다.
양희가 아참, 하더니 종알거린다.
“엄마, 진해 갔어요 아빠. 진해 외갓집에 간다고 했어요. 근데 아빠, 우리 외갓집이 안성 아닌가? 진해도 우리 외갓집이야?”
뜻밖이다. 진해엘 가다니. 거기가 애들 외갓집이라니.
“와 간다 쿠드노? 아빠한텐 말도 안하고.”
양희는 아이참 아빠두, 하더니 연이어 종알댄다.
“아빠가 주무시는데 어떻게 말해요? 외갓집에서 전화 왔다고요, 언니가 거기 있다고……, 그래서 언니 데리러 갔는데?”
불현듯 눈앞이 환해진다. 바로 그거였어, 그래, 그랬어.
81
나는 펄쩍 뛸 듯이 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두 아이를 한꺼번에 껴안고 뒹굴었다. 전화벨이 요란히 울린다. 수화기를 들었던 양희가 아니네? 하고 손을 젓는다.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바닥에 유리파편이 박히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아내의 전화일 것이다.
핸드폰 목을 젖히자마자 급히 입을 갖다 댔다.
“당신이야?”
82
과연 아내였다. 아내의 양양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양희한테서 들었지요? 다희는 만났는데, 얘가 글쎄, 며칠 있다가 올라간다고 그러네요. 어쩔까요? 나만 올라갈까, 아님, 나도 며칠 푹 쉬었다가 다희랑 함께 갈까요? 어머니가 며칠 쉬었다 가라구 자꾸 붙들어서 말이예요. 죽었던 딸이 살아왔다면서 자꾸 우셔요. ……어쩌까요?”
목구멍, 메여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83
“당신이 다희 생모캉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하이튼, 내사 마, 모리것다. 당신 알아서 하라모. 사실은 그랄라꼬 밑반찬을 한 거슥 해놓고 갔던 거 아이드나? 문디 여시야.”
모를 일이다. 다희를 낳은 어미와 기른 어미가 닮은꼴이었다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내가 왜 여태껏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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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내려와 갖고 우리 셋이 같이 올라감 어떨까?”
“돌았는갑다. 당신 딸이 다희뿐가?”
“호호호, 그렇네……. 하지만 걔들은 이모한테 폰 치면 되는데 뭘.”
“아참, 이모가 있었재?”
핸드폰을 닫은 나는 정신이 몽롱하다. 연극을 해도 이토록 천연덕스레 할 수 있단 말인가? 냉정히 분석한다면 다희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딸에게 내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남의 장모님한테 착 들러붙어 내가 당신 딸 대신입니다 하며 아양을 떠는 건 기본이고, 나에게까지 제가 정말 죽은 미연의 분신인양 저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연극도 분수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인생은 연극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인생은 걸어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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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신림동에 사는 제 이모한테 부탁하고, 다희 학교 선생님에게는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식의 전화상의 결석계를 제출하고, 완벽하게 내린 가게 철문에는 이런 것을 써 붙였다. [일주일간 쉽니다] 그리고 나는 아침 6시 50분에 출발하는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다희의 가출 덕분에 모처럼의 휴가를 냈다.
86
‘아무리 연극이라케도 정도가 있재.’
아내의 연극이 너무 철면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던 나는, 열차를 내리던 길로 택시를 탔고, 옛날 내게 씨 없는 수박이라는 판정을 내림으로써 정관수술을 해주지 않았던 ‘박외과의원’으로 갔는데, 헌데 낭패였다. 병원은 그대로인데 그 의사가 없다니! 말도 안 돼! 나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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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인가 챠트인가, 있을 게 아니요? 그거로 찾아보몬 나올 거 아니요? 내가 참말로 씨 없는 수박이었던가, 그기이 알고 싶다 이 말이라요. 이만하몬 그 심각성을 캐치 몬하겄소?”
“그러지 마시고 선생님.”
초등학교 4학년 중퇴 학력의 나더러 선생이라니? 야릇한 흥분에 싸여 몸이 살포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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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흰 얼굴을 바라보니 꽤 진지하다. 웃음기 하나 없다. 선생이라는 뜻밖의 호칭 때문인지 내 결심도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야, 셰익스, 이런 기분 좋은 연극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거 아니겄나? 하기야 새삼스레 시비를 가려 뭘 하겠는가. 다희가 진정한 내 씨이든 아니든, 이미 옛날에 접은 상태 아니던가?
“챠트를 찾는 것보다는 지금 검사를 해보는 편이 훨씬 빠를 것 같은데요, 해보시겠습니까?”
나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젓는다. 선생이라 불렸으니만큼 최대한으로 교양 있게 굴어야 하므로…….
“이제서 새삼시럽그로 자식이 필요한 것도 아이고……,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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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내 교양 있는 태도에 걸맞게 아주 간단하다는 ‘정자유무확인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가 아주 건강한 씨의 보유자란 것을 알아냈다. 어안이 벙벙하다.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대가리를 거꾸로 처박고 발버둥칠 일이다. 그 많은 세월을 다 어쩌라고? 아이고 억울해! 내 인생 돌려 도……. 나는 선생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쳤다. 단연코 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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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생을 통들이 말아 묵어도 유분수재, 아니, 그놈의 의사새끼는 그래, 나하고 전생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석류속 맨치 빽빽한 데를 야자열매 겉이 텅 비었다고 공갈로 쳤단 말고, 그놈하고 이놈 중에, 누가 공갈재이고, 다섯 자도 안 돼는 꼴사나운 시체가 대리석 바닥에 피칠하는 꼬라지를 안 볼라카모 퍼뜩 이실직고해라 고마!”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내게 담배를 권한 의사는 더듬더듬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여주면서야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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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가 거북하군요. 사실 그 분은 제 부친이십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신 분께 원망을 듣게 한다는 건, 다 알면서도 방치해둔다는 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는데요, 화를 좀 가라앉히시고 들어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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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원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 싶어 잠시 엉뚱한 혼란 속을 헤매던 끝에 의사가 자기 진료실에서 담배를 권하는데 뭐 어떠냐하는 결론을 내렸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담배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었더니, 정말 마음이 가라앉는다.
“제가 선생님의 이야길 알고 있는 건, 아버지가 이 병원을 제 명의로 해주시던 그날에 한 가지 사례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고모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요즘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립니다……. 선생님이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찾아오셔서 수술을 해 달라고 그러셨을 때, 아버지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답니다. 고모님이 바로 선생님처럼 척추장애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그건 전염병이 아닙니다.”
“아이지. 기라카모는, 내가 이날 이때껏 살아있지도 안 한다꼬.”
93
“유전도 아니고요.”
“아이재, 여동생들이나 누나나 모두 미끈미끈한 미인인그로 보몬 알쪼재.”
“근데 고모님은 유전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당신께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었다는데, 그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이불을 덮어씌워 죽였습니다. 자기처럼 그렇게 될 거라고 걱정하던 끝에……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 터무니없는 진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수술을 거부했더라면 선생님께서 다른 병원으로 가서 수술해버리실 것이 두려우셨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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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한 것이 또한 사람이라던가? 다희를 내 친딸이라고 자기최면을 걸기까지 하여 슬픔을 가슴 깊이 꼭꼭 다지면서 그런대로 딸을 무사히 키워왔던 내 몸에선, 일시에 힘이 빠져 달아난다. 주저앉고만 싶다. 아니다. 온 몸이 독감에라도 걸린 듯이 와들와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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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가 열여섯이나 나이를 먹어서야, 그 애가 무슨 복잡한 심경에 못 이겨 가출한 지경에 와서야, 무슨 선물처럼 느닷없이, 그 애가 내 친딸이라는 확인을 받다니. 이 기쁨, 이 환희를 도대체 무엇에 비교하면 좋으랴. 1등으로 복권 당첨된 기분이 이럴 것인가? 그럼 나리는? 나리는 그럼 2등 당첨된 아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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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에다 오토바이를 단 듯이 달렸다.
옛 처가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동동거리며 달렸다. 내가 옛날에 미연을 납치하려고 웅크렸던 그 돌담을 지나고, 마당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데, 뒤뜰 박우물에서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킨 것 같은 정겨운 냄새로, 장모님이 다가오신다. 나를 알아보자마자 몸서리를 치신다.
“이 사람아! 이, 무심한 사람아!”
기어이 울음 터뜨리더니 나를 평상에 앉히시는 우리 장모님.
97
“자네 처가 뜬금없이 얼라를 가져서…… 노몬 좋겄나, 안 노몬 좋겄나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이네. 몰랐재?”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
“아이고, 입덧이 심해서 여간 고생을 안 했다카는데, 그래도 몰랐는가?”
“참말입니꺼? 말로 해야 알지요.”
“예가 공기가 그저 그만 아이가. 그래서 입덧이 인자 고마 달아난 모양일세. 우쨌든간에, 입덧이 유별났다는 걸 보이 단단히 한 몫 할 아들인상 싶은데, 축하하네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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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놀란 부엉이 꼴을 하고 있는 나를 놀리듯,
다희가 제 어미하고 대문을 들어서며 방글방글 웃는 것이, 그러고 보니 모녀가 닮은 것도 같다. 계모든 생모든 같이 살면 닮기 마련인가보다. 갑자기 나의 머리가 팽이 돌 듯 하고, 입술이 봇물 터뜨릴 듯 벌어진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3등이다 고마마!”
-끝-
주영숙 간단 약력
국문학박사이며,
경기대학교, 강남대학교, 가천대학교에 외래교수 역임.
시집5권. 장편소설6권. 소설집2권. 시조집2권,
그 외 인문 교양도서로
《사설시조조 한국소설》(2009, 고요아침 총서(6))
《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소설편(2012 문광부선정우수교양도서)》,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작품으로 읽는 연암박지원 산문, 시편)》가 있음.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았음<한국소설에 드러나는 사설시조 형식>(2013).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국무총리상)을 받았음(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