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산늑약을 반대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날에 목 놓아 통곡하노라)과 달리, 장지연의또 다른 논설 ‘대호척필’(大呼擲筆)(황성신문, 1903. 2. 5)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크게 소리 지르며 붓을 던진다’는 이 논설은 신문 경영의 어려움을 탄식하면서 더 이상 신문을 계속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
장지연은 1902년 8월 황성신문의 사장을 맡아 여러 방법으로 경영난을 타개해 보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감연히 붓을 던지고 신문발간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경영이 어려웠던 가장 큰 원인은 독자들이 구독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항성신문이 폐간 지경이라는 논설이 나가자 구출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영공사 민영돈이 영국 돈 20파운드(한화로는 191월 40전, 황성신문 1903. 3. 11, 4. 2)를 보내왔고, 각지에서 신문발간에 보태쓰도록 10원, 20원, 또는 200원까지 동봉한 성금과 신문 발간을 격려하는 글이 신문사에 답지했다.
이리하여 황성신문은 근근이 이어갈 수 있었으나 구독료 수금은 여전히 부진했다. 1년 후인 1904년 1월 25일 황성신문은 자진 휴간에 들어가면서 또 한번 독자들의 무성의를 질타하는 사설을 실었다. “기생집, 골패·화투판에는 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신문 값을 독촉하면 미루기만 하니 어찌 문명국가의 독자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했다.
경영난은 만성적이었다. 황성신문은 1909년 11월 11일부터 12월 16일까지 한 달 이상 1면 머리에 구독료의 납부를 호소하는 ‘사고’를 실었다.
“본사 신문을 구독하는 제씨여, 지루하게 청구하는 자가 싫겠습니까, 청구를 독촉받는 사람이 싫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청구를 받는 자가 싫겠지만 실정은 오히려 청구하는 자가 훨씬 힘들다’는 것이었다.
‘읍소’ 투의 이 ‘사고’는 한국 독자들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일본인 발행 ‘경성신보’(일어)가 비아냥거렸을 정도였다.
‘경성일보’ 기자 우스다는
“한국에서 구독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관행”이라고 당시의 실정을 묘사했다. 지방장관인 관찰사가 상경하면 “관찰사가 서울에 출장 중이므로 돌려보낸다”는 쪽지를 붙여 신문을 본사로 반송하는 일이 잦았다. 일반 독자는 물론 관찰사, 군수도 구독료를 지불하지 않으니 신문사가 경영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합병 후 황성신문이 폐간될 당시 구독료 미수금은 3만여원에 달했다. 총독부는 황성신문(합병 후 ‘한성신문’으로 개제)의 제호를 매수하는 조건으로 6000원을 지급하고 폐간했다.
조선어 신문은 매일신보(대한매일신보 시절의 인쇄공들) 하나만 남기고 모두 없애는 총독 사이토의 이른바 ‘신문통일정책’의 일환이었다. 총독부는 6000원과 별도로 연수비(宴需費) 명목으로 100원을 추가 지급했다.
합쳐서 6100원이었는데 신문사의 기옥, 기계, 활자 등 유체자산은 매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성신문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황성신문은 6100원 가운데 3000원은 밀린 직원 급료와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주주들에게 배당하기로 했지만 그 결말은 알 수 없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