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양력 설날입니다. 우리는 양력설을 새지 않고 음력설을 새
니까 오늘은 보통날 같았지만 특별한 재미있는 것은 라듸오 어린이
시간에서 아주 여러 가지 우스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읍니
다. 또 한번 재미있게 라디오를 들을려면 음력설이 돌아오면 좋겠
읍니다.
1968년 1월2일 화요일 (흐림)
저녁이 되었을 때 춘택이 형님이 오셨습니다. 나는 춘택이 형님의
얼굴을 처음 보아서 몰라보았지만 외할머니께서 "춘택아" 그런 말
을 꺼내시기에 알았읍니다. 춘택이형님 얼굴에는 여드름이 나있어
서 참 보기 흉했읍니다. 그러나 늘씬한 모습이기에 내 마음에 들었
습니다.
1968년 1월3일 수요일 (맑음)
오늘이 장날입니다. 아침을 먹고 동생과 함께 장보러 간다고 돈10
원을 가지고 5원짜리 치솔두개를 사서 동생과 하나씩 나눠 가졌읍
니다. 동생은 기뻐서 어쩔줄 모르고 있어서 나도 기쁘긴 하였지만,
우리들이 장보러 간다는 것은 좀 어리석은 것 같읍니다.
1968년 1월4일 목요일 (맑음)
오후에 춘택이 형님이 무슨 종이를 주시면서 "아나. 너희 연습장이
나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기에 동생과 나는 좋아라 하며 받아가지
고 공평하게 나눠가졌읍니다.
그때 할머니께서 긴 됫떡과 누룽지를 주시기에, 마음속으로 "고맙습
니다"라고 말하며 맛있게 씹어 먹었읍니다.
1968년 1월5일 금요일 (맑음)
동생과 함께 놀러 간다고 정처없이 걷고 있었는데 저쪽 골목에서
"통,통,통,통"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서 그 쪽으로 가 보았더니
방앗간 굴뚝에서 "통,통,통,통"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요
란스러운 소리가 이 일기를 쓸 때도 들리는 것 같읍니다.
1968년 1월6일 토요일 (흐림)
그림을 그리다 잘 못하여 크레용을 온 방바닥에 칠하여 버렸읍니
다. "어쩔까"하는 동시에 "온매, 요 방바닥 좀 보소. 아이고"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뒤를 보니까 외할머니께서 화를 내시는 낯으로 주
먹을 쥐시고 뛰어 들어오셨읍니다. 이 때 나는 "아이고매, 오늘은
나 죽는 날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뛰어 나갔읍니다.
"이제부터는 외할머니를 귀찮게 안해야 되겠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옷을 보았더니 옷은 온 크레용 천지로 묻어 있었읍니다.
1968년 1월7일 일요일 (맑음)
내 양말은 신기 어려운거구, 동생 양말은 신기도 쉽구 좋은 양말입
니다. 그래서 내가 동생에게 양말 좀 신어보자구 하니까 동생은 "뭐
어." 하구 거절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니 더욱 신고 싶었읍니다.
"좀 신자." "안돼." "좀 신자." 안돼" 이런 소리를 여러번 되풀이 하
다 이윽고 싸움이 벌어졌읍니다. 이 때 삼촌이 오셔서 싸움을 하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싸움했자 돈 버나?" 나도 싸움을 끝내고 이렇
게 후회했읍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동생과 싸움을 안하겠읍니
다.
1968년 1월8일 월요일 (맑음)
오늘도 장날입니다. 동생과 함께 방에서 밖으로 나와 보니 여러 사
람들이 많은 물건을 사고 팔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동생과 여러 가
지 옷감 일용품을 구경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양말을 팔고 있기에
가보니 좋은 양말들이 많이 있었읍니다. 나도 양말 하나 사주면 좋
겠읍니다.
1968년 1월9일 화요일 (맑음)
아침에 동생이 동화책을 보면서, "이보다 더 재미있는 동화책 십원
짜리 팔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기에 "네가 10원짜리나 있간?" 얼처
구니 없다는 듯이 내가 말했더니 동생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러
믄" 하고 대답했읍니다. 나는 다시 "어디?"하니, "자" 동생도 자신
있게 10원짜리 돈을 펴보였읍니다. "어디서 났어?"하고 뻘떡 일어
나면서 물으니, "어제 장터에서 주었다고." 하였읍니다. 그래서 "응,
그럼 만화 보자." 하는 동생을 꾀어 가면서 말하니까, 동생은 "에헤,
사학년이면서도 만화..."라고 대답하니, 부끄러웠읍니다. 조그마한 것
에 지다니 쯪쯪...
1968년 1월10일 수요일 (맑음)
오후에 진흙 있는데서 놀다, 흙을 묻힌채 샘에 가니까 외할머니께
서 꾸중을 하셨읍니다. "저렇게 하면 샘이 뭐가 될꼬?" 하시기에 신
이 나서 더 자갈에 흙을 묻히기도 하였읍니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저 버릇없는 놈!"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덜컹. 아버지께서 이 말
씀을 들으셨으면 어떨까? 가슴은 두근, 후회는 자꾸만 되었읍니다.
1968년 1월11일 목요일 (맑음)
협동조합(농협)으로 일본 쌸람이 오시는 날이 오늘입니다. 2시쯤
되었을 때 이윽고 일본쌸람이 오셨읍니다. 아주 늙으셔서, 하이얀
수염이 30센티미터 정도 길으신 분도 계셨읍니다. 나는 일본 쌸람
의 얼굴을 처음 보아서 무척 기뻤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기쁜 건 처
음 본 것..
1968년 1월12일 금요일 (맑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동생이 제 연필 안깎아 주었다고 막 욕을 합
니다. "개 ××의 ××" 이 말을 들은 나는 무척 화가 나서 막 때려
주었읍니다. 동생은 때렸다고 울면서 대듭니다. 이때 나는 생각했읍
니다. "저 놈 자식이 욕한 것을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욕이라고는 무엇인지도 모르
던 것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읍니다.
1968년 1월13일 토요일 (눈)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 새벽에 땅 위에 비가 많이 떨어졌는데 또
그게 얼었기 때문에 땅에서도 미끄럼을 탈 수 있었읍니다. 안성 소
식은 이러하지만, 광주 날씨는 어쩐지 궁금합니다.
1968년 1월15일 월요일 (맑음)
잠을 잘 때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형의 얼굴이 희미희미하
게 보여서 눈을 떠보았더니, 보고 싶던 작은 형이 뜻밖에도 와 있
었습니다. 무척 기뻐한 것은 동생입니다. 동생은 작은형과 제일 친
합니다. 나는 그리 사이가 안좋았기 때문에 기쁘지는 않았읍니다.
1968년 1월16일 금요일 (맑음)
형이 방을 한바퀴 둘러 보더니, "와, 저기 화토 있다." 하고 좋아하
였읍니다. 그 때문에 화토를 칠 것은 뻔합니다. 소견없는 우리들이
화투를 보고도 가만 있을성 싶을까?
1968년 1월17일 수요일 (맑음)
형하고 싸움을 하였읍니다. 어째서 싸운지는 일기로는 이유를 못붙
힙니다. 하여튼 간에 싸움을 하기 했습니다. 나는 셀 수 없을만큼
분합니다. 형도 분할 겁니다. 내일 엄마 오시면 일를래요.
1968년 1월18일 목요일
동네 애들이 썰매타러 간다고 야단법석. 나도 가고 싶어서 따라가
보았읍니다. 그런데 버릇없는 녀석들이 담배를 피우잖아요? 나는
돌처럼 단단하게 결심을 하였읍니다. 다시는 이 동네 애들과 상대
암하겠다고...
1968년 1월19일 금요일
아침 새벽에 이모께서 서울로 가신다고 하셨읍니다. 나는 속이 후
려언하였읍니다. 이모께서 계시는 동안 무척 꾸중을 많이 하셨지만
이제는 싫증이 나도록 듣던 꾸중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68년 1월21일 일요일
어젯밤에 오셨던 근택이 사촌형과 놀게 되었읍니다. 내가 어려서
단 한번밖에 보지 못했던 근택이 사촌형을 이 기회에 보고도 못마
땅하여 놀게 되었다니... (신난다.)
1968년 1월22일 월요일
아침을 먹을 때 라듸오 뉴우스를 들었읍니다. 그런데, 32명의 간첩
이 넘어 와서 민간 5명과..." 이렇게 어나운서가 말을 할 때 나는 무
서워서 어쩔줄을 몰랐읍니다. 어쩌면 간첩들이 내가 있는 경기도
안성군까지 내려와 나쁜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1968년 1월23일 화요일
간첩들이 난폭한 나쁜 짓을 한다고 오늘도 라듸오에서 나왔읍니다.
나는 라듸오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공산 괴로군이
미워졌읍니다. 죄없는 백성을 죽도록 고생시키고 그것도 못마땅한
지 간첩훈련까지 시키다니...
1968년 1월24일 수요일 (눈)
어젯밤 사이에 눈이 많이 와서 오후에 형과 썰매를 탄다고 방죽에
나와 보니, 논에도 눈이 많이 와서 형과 잡아내기를 하기로 했읍니
다. 그래서 한참동안이나 논에서 하다 보니 옷이 흙천지로 되어 있
었읍니다. "어쩔까" 이렇게 생각하고 집을 향하여 걸어가는 동안 집
에 다다랐어도 집에를 못들어갔습니다. 외할머니께 꾸중 들으면 어
쩔까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1968년 1월25일 목요일
안성군에서 평택역까지 걸어갔다 오기로 형과 동생과 셋이서 굳게
약속을
(이하 공책의 몇 페이지가 유실됨 : [빈함지] 주)
말씀을 들어보면, "야! 니기들 속이 있느냐, 없느냐. 속이 있다면 안
놀테고 속이 없어야 논단 말이야!" 만약 어머니께서 돌아 가시면
우리는 부모없는 고아같은 형편이 된다. 알았지?" .... 어디서 잘까
요? "옳지! 형 친구인 금* 누나 집에서 자거라!" 어머니의 말씀이었
습니다. 작은형과 동생은 딱 거절하는 것입니다. 나는 맹세하였읍니
다. 금* 누나께 재워달라고 말하려고요. 이리하여 결국 누나께 승낙
을 받았읍니다. 나는 누나가 퍽 고마왔읍니다. 세상에 셋도 없는 훌
륭한 누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1968년 1월29일 월요일(맑음)
어제 어머니께서 방을 구해 놓으셨는지 오늘은 주인 아저씨 모르게
이사를 했읍니다. 그 이유는 방세를 안줬기 때문입니다. 아침 식전
의 일입니다. 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우리 어머니가 아니신 작은 어
머니께 졸라댑니다. 이 모양을 본 나는 기가 막혔읍니다. "오죽 배
가 고팠으면 우리 친어머니가 아니시니 분에게 조를까?"라고 생각
하니 아버지께서 살아 계셔서 무진장 부자였을때의 생각이 머리에
간절합니다.
1968년 1월30일 화요일(흐림)
여러 사람들은 오늘이 음력 설이라고 그럽니다. 아마 음력 새해인
모양이죠. 날이 새어 할머니, 어머니께 새배를 하여 20원을 탔읍니
다. 그것도 어머니나 할머니 쓰시라고 안받으려 했지만, 올해는 형
제간에 우애있게 살아라고 나에게 주시는, 그러니까 선물과 같겠지
요. 작년 설날에는 우리 가족이 다 모였지만 이제는 모두가 흩어져
있어야 했읍니다. 오늘은 즐거운 설날은 커녕 쓸쓸하고 서운한 설
날입니다.
1968년 1월31일 수요일(맑음)
내일 방학을 마치고 개학합니다. 아마 마지막 방학날인 모양이겠죠.
나는 무척 기뻤읍니다. 방학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동무들의 얼
굴, 뵙지도 못했던 선생님. 내일 만나게 되겠군요. 퍽이나 기뻤읍니
다. 잠자리에 가 누어지지 않았읍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일,이,
삼,사,오분단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구, [광주중앙국민학교]라는
벽돌집이 가고만 싶었읍니다.
1968년 2월1일 월요일 (흐림)
어젯밤에 가스 중독이 되어 오늘은 학교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어
지로운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려고 하니 어머니께서 학교에서 아파
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나의 몸을 꽉 붙잡으시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집에 있게 된 것이었읍니다. 나는 어서 빨리
내일이 되기를 기다렸읍니다.
1968년 2월2일 월요일 (흐림)
어제 내지 못한 방학과제를 오늘 아침에 선생님께 갖다 드렸읍니
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설옷을 입은 동무들의 얼굴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4분단 중간에 앉은 형석이가 "야! 정호 오
래간만인데" 이 소리를 들으니, 무척 반가웠지만, 또한 부끄러운 마
음이 들기까지 했읍니다. 공부를 마치고 층층대를 내려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정호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 직접 들리기에
소리 나는 쪽으로 가 보았더니 동생과 어머니의 친구분이신 담뱃집
아주머니[*주1: 당시 어머니는 아버님 병환으로 진 빚더미 속에서
도피 중이었는데, 이 아주머니가 도주한 우리집을 알기 위해 우리
학교에 찾아 옴. 그 날 철없이 집을 가르쳐 드렸다고 작은 형에게
코 피가 나도록 맞은 기억이 난다. -빈함지-]께서 와 계셨습니다.
그 아주머니께서 우리 학교로 오신 이유는 우리가 이사간 상무동집
을 모르셔서 우리보다 가르쳐주라고 오셨기 땜에 친절히 가르쳐 드
리며 상무동으로 가기 위하여 시내뻐스를 탔읍니다.
1968년 2월3일 월요일 (흐림)
공부를 끝마치고 나가보니 동생이 마찬가지로 기다리고 있었읍니
다. 그래서 시내뻐스를 타기 위하여 시민관 앞에서 송정리 가는 버
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더니 상무동 가는 천일뻐스가 나타나서, "옳
지! 이 차다" 나는 동생과 사이좋게 손잡게 올라탔읍니다. 현대극장
을 지나 월산동을 지나 돌고개를 지나 신학대학 앞에서 내렸더니,
마침 저기서 어머니께서 오시면서 반가이 맞아주셨읍니다. 나느 무
척 기뻤읍니다. 이것만으로 기쁜 것이 아니었읍니다. 이사할 때 우
리 짐을 시내버스 타고 하나 두 보따리씩 날라다 주신 큰 형 친구
들께서 오셨기에 더욱 기뻤읍니다. 이러고 나서 보니 아버지 사진
이 직접 내 눈에 띄었읍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사주신 짐이 모
두 없어져 간답니다. 즉 우리 살림이 망해간다는 뜻이겠죠." 이 생
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읍니다. 나는 이 생각이 자
꾸만 머리에 떠오릅니다.
1968년 2월4일 일요일 (맑음)
어머니께서 시내에 나가시더니 저녁 5시 정도 되니 들어오셨읍니
다. 밤에 자려니 심심해서 발을 씻었읍니다. 그러고 일기를 쓰면서
낮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읍니다. 근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내일
우물가에 가지 마라" 만이 우물에 가서 물을 뜨면 여름에 그 우물
에서 뱀 나온다" 나는 이 말을 들으니 몹시 이상했읍니다.
1968년 2월5일 월요일 (맑음)
큰 형! 붙어요. 깨엿 사 잡수셨어요? 만화책에서 깨엿 먹으면 붙은
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가짜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엿 잡수시고, 간
첩 붙잡듯이 수석이라는 곳에 놓치지 말고 붙들어요. 꼭 붙들어라
니까요. 놓치면 할 수 없지만요. 오늘이 서울대 발표날인데. 소식이
깜깜해요. 형! 안녕.
한편, 오후가 막 시작됐읍니다. 12시가 사이렌 불며 "오후가 되거
라"(당시에는 정오에 광주시내 한 복판에서 사이렌을 불었음 -빈함
지 주-)하고 허락해 줬는지 모릅니다. 12시 15분이 허락해 줬는지
조회 시간이 되었읍니다. 조회 하러 나가니 동생이 운동장에 서있
었읍니다. 나는 기뻤읍니다. 동생이 어떻게 학교까지 버스 타고 왔
을까 생각하니 더욱 기뻤읍니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의 일입니다.
나는 우리집에 가고 싶지 않고 아주머니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
래서 가니 웅이 형이 만화를 빌려 놔서 나는 만화에 환장해서 만화
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걱정은 1학년 동생이 어떻게 우리집
을 찾아갈까 이런 걱정이었읍니다.
1968년 2월6일 화요일 (맑음)
금* 누나집엘 갔읍니다. 공부 끝내고... 가니 마침 금*누나가 있었읍
니다. 누나는 "정호 너 오랜만이다"하고 말하면서 반가이 맞아주었
읍니다. 그러고는 향나무 연필 두자루도 주었읍니다. 내가 가게 되
었을 때, "애, 정호야, 여기서 차타지 말고 시민관까지 걸어 가면서
이야기나 하자꾸나"하고 누나가 말해서 나도 누나와 헤어지기가 싫
기 때문에 거기까지 걸어가기로 했읍니다. 어느덧 시민관 앞 노벨
과자점에 이르렀을 때 "너 배고프지"하고 금* 누나가 말하면서 호
화스럽게 지어진 노벨 과자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읍니다. 나도 배
가 고팠기 땜에 거절을 하지 않고 들어섰읍니다. "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여기저기 맛있는 빵과 과자가 산더미처럼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언제나 이런집 주인이 되나." 싫도록 그 허술한 판
자집에서 살다 이 곳에 오니 보는 것마다 탐이 나곤 하였읍니다.
이제 생각하니 빵을 사준 금* 누나가 여간 고맙지 않았읍니다.
1968년 2월 7일 수요일
새벽 꿈에 아버지를 보았읍니다. 아버지는 왜 우리를 버리고 가셨
을까. 지난 어느 날, "내일 일제고사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나의
가슴은 조마조마 하였읍니다. 그러구 조금 지나서 일제고사 시험지
를 받아 점수를 보니 나는 실망밖에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최고점수도 몇점인지 궁금했읍니다. 나는 이 점수를 받자 아버지께
거짓말을 하려고 했지만,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읍니다. "사람은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 할 수 없이 나는 아버지께 사실대로 말씀드
렸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께서 숨지셨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것도 아니겠지요. 아마 병에 앓다가 그러셨을겁니다.
1968년 2월 8일 목요일(맑음)
공부를 끝내고 동생과 같이 가려고 기다렸읍니다. 마침 저기서 동
생이 저희 교실에서 공부를 끝냈다는 듯이 가방을 메고 나오고 있
어서 나는 무척 기뻤읍니다. 동생이 무사히 학교에 도착한 것이 다
행이었읍니다. 그동안 무척 배가 고팠읍니다. 아침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왔는데 점심도 못먹었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나는 차비로 군것질을 하게 됐읍니다. 그 때 "정호야, 무어
하냐?" 하고 누군지 모르게 운동장에서 소리를 지르기 땜에 그 쪽
으로 뛰어 갔더니 동생이었읍니다. 그러구 나서 동생이 "정호야, 엄
마가 이모할머니댁에 오락 했다." 하여서 동생이랑 이모할머니 집에
갔더니 고모께서 "배 고팠겠다."하시면서 맛있게 차린 밥을 주셔서
나는 무척 기뻤읍니다.
1968년 2월 9일 금요일
날마다 아침마다 내가 통학하는 버스를 태워 주시는 어머니! "오늘
도 조심히 학교 가서 잘 배우고 오너라"하고 말씀은 안하시지만 마
음은 이것과 같겠죠. "엄마, 오늘을 나오지마" 해도 "오냐" 하시면
서 차부에 나오시는 어머니! 무엇보다도 자식들을 따뜻스럽게 정답
게 대하시는 어머니가 나는 부럽습니다.
1968년 2월 12일 월요일
오늘이 우리학교 제23회 졸업식 날입니다. 나는 작은형 생각이 문
득 떠올랐읍니다. 작은형은 6학년인데 졸업식에 못나갔기 때문입니
다. 엄마 아빠 손잡고 학교 가는 어린이들을 보며는 얼마나 부러운
지 모릅니다.
1968년 2월 13일 화요일(맑음)
오늘이 보름날이라고 모든 사람들께서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찰밥을 했읍니다. 그렇게도 먹고 싶던 찰밥이 이제는 별로 맛이 나
지 않았읍니다. 학교에 나갈 시간이 됐을 때 어머니께서 영광으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 산소에 들러 영광 이모집에 가신다고요.
그래서 오늘 밤은 할머니 집에서 자라고 하십니다. 오늘 밤에는 정
말 할머니 집에서 자게 될 것이지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탈 때부터
걱정이 됐읍니다.
1968년 2월 14일 수요일(맑음)
공부가 끝나고 우리집으로는 가지 않고 이모 할머니 집에서 자기로
했읍니다. 학교에서 할머니 집에 와보니 할머니께서 친절히 맞아주
시며 "배고팠겠다. 어서 밥먹어라."하시고는 점심도 먹은 나에게 밥
을 주시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았지만 할머
니께 고맙다고 인사하는 뜻으로 찰밥을 맛있게 먹었읍니다.
1968년 2월 15일 목요일(맑음)
기분이 우울한 마음으로 학교엘 갔읍니다. 동무들은 모두 새 마음
을 얻은 듯 재미있게 뛰놉니다. 아침 조회시간에 홍석이가 "우리 분
단 헤리콥터 살 돈 안 낸 사람 손들어!" 나는 안냈기 땜에 할 수
없이 손을 들었읍니다. "너,너,너,너 안 낸 사람 모두 가져와" 나는
홍석이에게 우리가 이사했다는 사실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부끄
러워 내 차비 5원을 가지고 상무동까지 가는 버스를 눈물을 흘리며
탔읍니다. 상무동 집 앞에서 내려 집에 들어가니 영광에 가신 어머
니와 동생이 안오셨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방만이 쇠통에 잠겨
서 서있는 것입니다.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읍니다. 돈을 타러 온
나는 할 수 없이 옆방 아주머니께 20원을 뀌었읍니다. 나는 지금도
이 일이 눈에 간절합니다.
1968년 2월 16일 금요일(맑음)
어머니께선 어째서 안오실까? 날 버리고 가신걸까? 설마... 무척 궁
금합니다. 나는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루속히 어머니께
서 오셨으면 좋겠읍니다.
1968년 2월 17일 토요일
참다 참다 못해 이모할머니 집에서 모르게 집에 와버렸읍니다. 그
리운 어머니께서 오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왔던 것입니다.
"아! 안계시......"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읍니다.
1968년 2월 18일 일요일
아침 일찍 이러나 내 동생이 보고 싶어 눈을 떠보았읍니다. "아!"
이게 뭡니까? 어머니와 동생이 오기는 커녕 방의 불이 꺼져서 찬
방에서 자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내가 혼자 잔 셈도 됩니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이 더욱 그리워지었읍니다. 언제나 오게 될까? 오늘?
내일? 아니, 오래 있다? 이 때 나는 무척 분하면서도 궁금하였읍니
다.
1968년 2월 19일 토요일
점심 시간 때 동생이 우리 교실에 찾아 왔읍니다. 나는 무척 기뻤
읍니다. 무엇보다도 기쁜건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 보았기 때문입니
다. 저 사랑하는 동생에게 나의 좋은 물건은 죄다 주고도 싶었읍니
다.
[빈함지 주] 이로부터 며칠 후, 어머니는 빚쟁이들에 쫓겨 다니는
처지가 견딜 수가 없었던 데다가 생활비가 막막했으므로, 서울
봉천동에 사시던 이모네 집으로 동생과 함께 무작정 상경을 하셨다.
동생은 그 해 3월에 2학년으로 진급을 해야 했으나, 학교를 더 이상
못다니게 되었다. 광주에서 그리움과 배고픔으로 일년을 버티다가
나도 결국 서울 봉천동 이모네 집으로 합류하게 되었으며 그 봉천동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이 전에 썼던 빈함지의 [봉천동의 추억]이라는
글이다. 일년 후 2학년은 못다닌채 3학년으로 억지 전학을 했던 동생
은 봉천동의 은천국민학교를 수석 졸업했고(빈함지는 수석 못했지만...)
그 봉천동에 있는 대학에 나보다 먼저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