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리 시 모음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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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정두리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에 자운영 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 눈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품
덜어내고도 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
이파리도 되고 실팍한 줄기도 되고
아, 한 몫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 남고 싶습니다
허물없이 맨발인 넉넉한 저녁입니다
뜨거운 목젖까지 알아내고도 코 끝으로까지 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 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 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 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 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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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보리밥
정두리
보리밥보다
더 어두운 밥
'꽁'
그 말 하나가 보태는
먹어도 고픈
듣기만 해도
먼저 허기지는
남루한 음식
그래도 입 속에서
머물대다 넘어가는 것이
과욕을 누르고
과식을 용서해 줄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낮아지는
꽁보리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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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자
정두리
알맞게
키도 다리도
알맞게
그래야 편안해
큰 의자 깊숙한 자리
욕심내지 말 것
두 개의 자리도
탐내지 말아
등을 곧추세우고
앞을 바라봐
거기에 반듯함이 보인다면
바로 앉은
내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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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정두리
햇빛이 불씨를 묻어놓고
바람은 부채질하고
이웃은 모여서 손뼉쳐주고
걱정 없이 신나는 가을날의 불구경
오래도록 불타는 단풍나무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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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정두리
가지마다 숨겨진
작은 향기 주머니
이름 석자 뒤에도
묻어나는 냄새
향기로만
나무가 되려는 나무
소올솔
작은 주머니가
올을 풀어서
봄 하늘을
향긋하니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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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자리
정두리
먼지는 어디에건
주저앉으려고 든다
살금살금
가볍게
무엇보다 사람들의
무관심 위에 앉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몰래
숨어 만든 자리
그 자리 엄청 넓어서
나중엔 먼지가 먼저 놀라
풀석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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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울음
정두리
아기 소나무를 보며
바람이 매를 듭니다.
쑤 - 욱
가슴을 펴!
매를 맞으며 우는 것은
소나무가 아닙니다.
회초리 내던지고
긁힌 자국 만져주며
오래도록
바람은 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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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정두리
이른 봄
햇살이 씨앗을 뿌렸다
산수유나무
품었던 씨앗을 틔운다
차조알 같이 자잘한 노란 꽃
아직 뺨이 시려
깨알만큼 얼굴을 내민
그래도 촘촘히 달린 산수유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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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정두리
나이테를 보지 않고
눈어림으로 알 수 있는 버젓한 어깨
튼튼한 다리가
보기 좋다.
꽃보다 더 나은
푸른 솔이 좋다.
이런 거구나
이래야 하는구나.
냄새도 빛깔도
이름과 닮은
의젓한 나무.
네 모습을 보면서
소나무야
꿈까지 푸르게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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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정두리
씨앗은 크지 않아도 된다
까만 점 하나가 만든 나무숲
그 숲에 둥지 튼 비비새 한 마리
까만 씨앗 한 개가 하는 일은
작은 점 하나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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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똥 풀 꽃
정두리
아기가 기저귀 벗고
들에다 똥을 누었다네
아기 똥은 이쁘기도 하지
노랑 노랑 노랑 꽃
아기는 온종일 혼자 놀았네
여기 저기 조오기
애기똥풀꽃은 그렇게 자꾸자꾸 피어났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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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눈물
정두리
회초리를 들었지만 차마
못 때리신다.
아픈 매보다 더 무서운
무서운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어머니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어머니의 굵은 눈물에 내가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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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플 때
정두리
조용하다
빈 집 같다
강아지 밥도 챙겨 먹이고
바람이 떨군
빨래도 개켜 놓아두고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나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철드는 아이가 된다
철든 만큼 기운 없는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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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정두리
나란히 나란히 누가 불렀나
들길에 나란한 코스모스
외로운 들길이 얼마나 환한지
그 길 지나면서 그냥 가긴 싫어
바람도 꽃잎 속에 숨었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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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정두리
밭에서 김매던 할머니
호미 던지고
혼잣말 한다
"에구, 무섭게 자라네."
누구도 기운 내라고
물 한 모금 뿌려 주거나
응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업신여기며
이름이 없이
풀, 풀 불렀다는데~
풀은 자기가
힘이 센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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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꽁보리밥
먹어도 고픈
듣기만 해도
먼저 허기지는
남루한 음식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초라했어도
지금은 건강식으로 먹는
꽁보리밥
열무김치에
쓱쓱 비벼먹으면
최고입니다
정두리 시인님의
심성을 들여다보게
하는글 잘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