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北 尙州 승장사지(勝長寺址)
고려 충렬왕 머문 천태도량, 석조유구 자리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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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장사는 상주 사장(四長)의 한 곳으로, 규모가 컸던 천태도량이다.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충렬왕이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천태종 사찰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
경북 상주에는 명산으로 손꼽히는 갑장산이 있다. 갑장산은 아름다움이 으뜸(甲)이요, 사장(四長)을 이룬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은 고려 충렬왕이 지었다. 원래는 연악산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상직(金尙直, 1661~ 1721)이 쓴 ‘승장사 중창기’에 따르면 충렬왕이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산의 경치에 반해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사장(四長)은 갑장사, 남장사, 북장사, 승장사 등 장(長)자가 들어간 네 곳의 명찰을 일컫는다.
네 곳 중 한 곳이 사장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지만, 현재는 이 사찰들을 상주의 사장으로 부른다. 명확한 것은 천태가람이었던 승장사가 사장의 한 곳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는 점이다. 조선 태종이 승장사를 천태종 17자복사 중 한 곳으로 지정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승장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현재로선 유일한 자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불우’조에는 ‘승장사, 장천부곡에 있다. 김상직의 중창기에 고려 충렬왕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동으로 왜구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에 거동하여 전송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에 붙였다(勝長寺 在長川部曲 金尙直重創記曰高麗忠烈王受中朝之命上洛公金方慶東征倭寇率金海府以餞之及其還駕駐于玆遂履于天台宗)’는 기록이 있다.
이외의 어떠한 사료에서도 승장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지명을 통해 승장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장사는 상주의 명산 갑장산 뒷자락에 자리하고 있지만, 위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0월 27일 상주문화원 사무국장을 지낸 강경모 경북고도읍연구회 회장의 도움을 받아 승장사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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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대좌로 추정되는 팔각형의 석조 유구. |
승장사지는 경북 상주군 낙동면 승곡리에 있다. 이곳이 승장사임을 알 수 있는 건 승장사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 덕분이다. 천태종 17자복사 중 폐사가 된 곳들 중 마을 이름을 통해 존재를 알게 된 사례는 흔하다. 다음에 찾아갈 김천 진흥사터도 마을 이름이 사찰명을 따 지은 진흥마을이어서 진흥사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승곡리에는 승장골, 상승장, 하승장, 절골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승장골 마을의 지명은 승곡리와 같이 승장사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졌다. 상승장 마을은 승장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하승장 마을은 승장골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다. 절골 마을은 절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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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장사 석축의 일부분. 잘 다듬어진 큰 돌이 농로를 지탱하고 있다. |
상승장 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를 따라 걸어 오르니 왼쪽에 작은산, 오른쪽에 계단식의 논과 과수원이 있었다. 작은 산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개천 바로 옆에서 흙에 묻힌 석조 유구 하나를 발견했다.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귀부형태의 유구였다. 여기서 50여 미터를 다시 오르면 탁 트인 광경이 펼쳐진다. 사찰이 있었음직한 산세와 평지가 드러났다. 왼쪽에는 묘 몇기가 있다. 이곳은 사찰의 주불전인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곳곳에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과수원과 논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사찰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구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와편들이 무더기로 흙속에 묻혀 있고, 불대좌로 쓰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팔각형의 대좌가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또 사찰의 축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잘 다듬은 큰 돌이 농로의 아랫부분을 지탱하고 있었다.
강경모 회장에 따르면 농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길 곳곳에 석조 유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포장이 된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세월의 무상함보다도 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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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편(위)과 귀부 모양의 석조 유구. |
사지의 곳곳에 유구들이 존재해 발굴을 하면 사찰의 규모와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자체와 주민들의 관심 밖에 있다. 단 한 번의 지표조사도 이뤄지지 않아 몇몇 남아있는 석조 유구들도 언제 자취를 감출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상직의 ‘승장사 중창기’가 쓰여진 연대를 참고하면 승장사는 조선 후기에 폐사됐을 가능성이 크다. 폐사 이후 사유지로 전락해 명맥이 끊겼다. 상주 지역의 사장이었던 북장사, 남장사, 갑장사는 여전히 불법을 전승하고 있지만, 오직 승장사만이 흙 속에 묻혀있다.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 속에 하루빨리 정비돼 상주의 사장이 완성되길 기대한다.
상주=이강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