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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랴는 뜻으로, 남을 원망하거나 꾸짖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誰 : 누구 수(言/8)
怨 : 원망할 원(心/5)
誰 : 누구 수(言/8)
咎 : 허물 구(口/5)
(유의어)
수원숙우(誰怨孰尤)
막감수하(莫敢誰何)
(상대어)
구인비기(咎人非己)
책인면기(責人免己)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라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타인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사자성어입니다.
과거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실수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보던 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처한 곤경은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타인을 원망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아라."
이 일화에서 수원수구(誰怨誰咎)라는 말이 탄생했습니다. 이 사자성어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개인의 반성과 성찰을 통해 더 나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전가하기보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는 특정 유래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로 개인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특히 타인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책임을 먼저 인정해야 할 때 적합한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팀 프로젝트에서 부족한 결과가 나왔을 때, 팀원 중 한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팀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개선 방향을 논의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의 자세로 이번 결과를 돌아봅시다”라는 식으로 활용됩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유의어입니다. 수원숙우(誰怨孰尤)는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더욱 탓하겠는가”라는 뜻으로, 수원수구와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막감수하(莫敢誰何)는 “감히 누구도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책임 전가를 피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와 반대 의미를 가진 상대어입니다. 구인비기(咎人非己)는 “남의 허물을 탓하고 자기 책임을 부인한다”는 뜻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을 탓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책인면기(責人免己)는 “남을 꾸짖으며 스스로를 면제한다”는 뜻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수원수구는 유의어와 반대말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결론적으로 수원수구(誰怨誰咎)는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스스로 돌아보며 남을 원망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이를 통해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보다 자신의 책임을 돌아보고, 성찰을 통해 개선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뿐 아니라 팀워크를 이루는 데에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수원수구(誰怨誰咎)
이 성어는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랴는 뜻으로, 곧 남을 원망하거나 꾸짖을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카톨릭 신자들은 미사에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라는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자기 허물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남 탓, 네 탓’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 말의 뜻을 보면,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자는 잘못됐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모두가 내 탓임을 아는 자이고, 소인은 잘 되면 자기 공이고 못되면 남에게 탓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반구저기(反求諸己) 즉, 나에게서 그 허물을 찾는 것도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반성이다.
문제를 풀어가는데는 두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외적인 요소, 그리고 또 하나는 내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내 탓이요’ 하면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고, ‘네 탓이오’ 하면 이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내탓이오’가 많은면 많을수록 내 의지에 따라 변화 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이는 결국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꾸려가는 범위가 더 넓어져, 자신의 삶이 외적인 요인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남이 잘 해주기를 기다리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삶의 형태가 결정되는 이러한 피동적인 부분이 줄어 들고,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능동적인 부분이 넓혀진다는게 된다. 즉, 자신의 삶의 참다운 주인이 되어 가게 된다.
우리 인간의 삶은 모두 다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모두 다 조물주로 부터 부여받은 유한한 정열과 유한한 시간속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 각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한정된 삶의 시간과 정열을 소중히, 성실히 쓰고 있는 건가를 항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실성은 능동성으로 구현된다.
‘네 탓이오’ 하고 나면 일단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이는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 문제가 내 능력밖의 것이 되고 그 부분에 대해서 난 타인에게 내 삶을 맡기는게 된다. 그리고 ‘네 탓이오’를 하는 경우 통상 불평이 따르게 됨을 본다. 그리고 그 불평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 연유하기에, 불평의 대상은 자연히 자신에게 의미를 지니는 자신 주위의 존재이다.
자신의 주위 사람은 자신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들에게 감사의 마음대신 불평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이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 아닌가. 그 대상을 품어야 한다. 이 품는게 안 된다면 자신의 삶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 시키는게 필요하다.
또한 객관적으로도 ‘내 탓이오’를 해야 할 것을 ‘네 탓이오’ 하면, 정작 조치를 취해야 할, 변화하여야 할 당사자는 자신이기에 자신이 움직여야 문제가 풀리는데도 당사자인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되기에 문제가 풀리지 않게 된다. 마찬기지로, ‘네 탓이오’ 할 일을 ‘내 탓이오’ 하는 것도 잘못이자 문제를 풀리지 않게 한다.
‘내 탓이오’ 할 부분과 ‘네 탓이오’ 할 부분을 구별하는게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들은 단 한가지의 잘못으로 일이 발생되는 게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들이 내재되어 발생하게 된다. 그 여러가지 요인들 중에 한 가지만 제대로 됐었도 벌어지지 않을 일들이 그러지 않았기에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신이 관심을 갖게 되는 일에는 비록 많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기여분 또는 책임분은 있기 마련이고, 또 자신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바라볼 수록 그러한 책임분은 더 커지게 된다. 그리고 ‘내 탓이오’가 많은면 많을수록 자신은 더욱 더 자신의 삶의 주체가, 주인이 되어 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먼저 의지가, 세상을 능동적으로 바라 보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 ‘내 탓’과 ‘네 탓’을 객관적으로 구별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내 탓’의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일들 중에서 흔히 표현하게 되는 말 중 하나가 잘 되는 일은 내가 잘한 때문이고, 잘 풀리지 않는 일에 대해선 무언가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는 속된말로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사람의 본연일진대 일의 성패에 따라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말은 왜 그리도 다르던지요. “그때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 줬더라면...” “그때 당신이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모든게 네 잘못이야. 너 때문에...” 등등... 열린 입술이라고 생각없이 무작정 내뱉는 말이 때론 듣는 상대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이라는 것이 워낙 간사스러운 영물이라 어떤 일에 당면하거나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쉴새없이 지략을 만들어 낸다. “당신이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당신도 같이 했으니 책임이 있다” “왜 내게만 잘못이 있느냐”는 표현들이다. ‘내 탓이오’ 라는 말은 너무도 잘 알려진 말이지만 무심코 흘려버리기 쉬운 말이다.
어떤 일들을 매듭짓고 나면 항상 두 가닥의 결과가 나온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것이다. 요행히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그것은 노력의 결과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실패를 했다면 누군가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았나 하는 마음을 갖는 여유.
예전의 말씀들 가운데 유독 가슴에 남는 말이 있다. “손을 들어 '너 때문이야'라고 해 보아라. 네가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뻗은 손가락은 하나지만 널 비난하기 위해 뻗은 손가락은 세개란다. 엄지는 널 비난하는 손가락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꼭 붙들어 매고 있단다.”
한번씩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화가 날 때 마음을 다스리기에 더없이 좋은 채근질이 되어 버렸다. ‘내 탓이오’ 라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 아직은 세상이 참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일의 근원은 나에게서 부터 비롯된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남의 탓으로 돌리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먼저 돌아봄이 옳은 듯 하다. 하다못해 남들의 오해마저도 나의 일상속에 숨어 있는 그 어떤 암시로 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자. 또한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나 자신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자.
내가 한 작은 행동하나 말 한마디가 내가 하였을 때에 나는 알지 못하지만 상대의 기분 상태에 따라 또는 주변의 상황에 따라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게 다가 올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떠한 일도 결코 남을 탓하기 전에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자.
모든 일들이 내가 던진 그 무엇으로 하여금 시작되고 다시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 온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가자. 떠나 간 것들은 언제나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싸늘한 한 마디는 다시 나에게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다가오고 따스한 말 한 마디는 다시 나에게 행복한 미소로 다가 온다.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친절한 나의 행동이 세상에 전염되도록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어 가야 하겠다. 그리하여 하루를 살아도 평생을 산 것처럼 늘 일정한 속도로 인생을 걸어가야 하겠다.
젊은 날의 하루와 나이를 먹고 나서의 하루는 결코 같지가 않다. 젊어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많은 것들 건강, 지식, 학문적, 예술적 또는 직업적 성취, 가정적인 안정, 취미 생활의 다양화, 등등, 그 일들을 이루어 가다보면 시기와 질시도 있겠고 어려움도 있겠지만, 우리가 청년정신과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일들도 성취해 낼 수 있다.
내 삶의 게으름을 털어 내고 하루를 성실하게 살다보면 ‘내 탓이오’ 하는 일들도 줄어들겠지요. 산을 바라보면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에 따라서 산의 모습이 달라진다.
우리네 인생도 어느 한 가지 만으로 설명하긴 힘든 그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자. 아옹다옹 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가슴 아픈 일들을 만들지 말고 세상을 향하여 따스한 눈길을 보내며 그렇게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면 되는 것을. 이제는 남을 인정하고 그가 가진 재능을 인정해 주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겠다.
웰빙 시대라고들 한다. 이제는 웰빙을 넘어서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대비가 필요하고 늘어난 수명으로 인한 건강한 노년을 보내기 위한 우리들의 전략을 지금부터 세워 나가야 하겠다. 늘 때 늦은 후회로 가득한 생활보다는 미리미리 준비하여 미래를 가꾸어 가는 지혜가 필요한 지금이다. 늦은 것은 없다. 바로 지금부터의 실천만이 중요할 뿐이다.
항상 즐겁고 명랑하게 살아라. 비록 생활이 어렵고 괴롭더라도 행복의 그림을 그려라. 그린 것 처럼 현실로 다가오리라. 인생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곤란은 그림자 같이 따르는 것. 참고 견디면 복이 된다.
오늘 네가 가난하거든 베풀지 않았음을 알며, 네가 병들었거든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음을 알며, 네가 외롭거든 덕행이 없었음을 알며, 너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가 있거든 업신여기고 괴로움을 주었음을 알며, 지금 이 고통은 네가 스스로 지어서 받는 것,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 밝은 내일을 바라거든 좋은 씨앗을 심어라.
입은 화(禍)의 문이니 지극히 조심하며 몸으론 바른 행동만 하라. 사람은 모름지기 계율을 생명처럼 여기고 부정한 것은 원수처럼 대하고 청렴하고 결백하여 대쪽같이 살아야 하느니라.
품행은 방정하고 인격은 고상하여 한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느니라. 애욕(愛慾)보다 더한 불길이 없고, 성냄보다 더한 독이 없으며, 어리석음보다 더한 파멸이 없느니라. 사람을 대하되 자비와 친절로 예의를 갖추고 신의와 겸손을 잃지 마라.
생활은 검소와 절약을 신조로 삼고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인색하지만 남에게는 희생과 봉사의 미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봉사하는 것 만큼 즐거운 일이 없으며 기쁨을 주는 것 만큼 보람된 일이 없으며 용서하는 것 만큼 아름다운 일이 없는 줄 알라.
성공을 바라거든 근면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일하라.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념으로 살아가라. 인생은 노력한 만큼 가치가 있느니라. 오늘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 백년을 부끄럽게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후회없이 살아라.
옛날 어떤 농부가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었다. 농부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아들을 배불리 먹이거나 좋은 옷을 입혀서 기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농부는 아들의 성품만은 휼륭하게 기르겠다고 마음 먹었다. 농부의 그런 정성 덕분에 아들은 성실하고 마음씨 착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웃 마을에 사는 얌전한 아가씨를 맞아 결혼을 하였다. 농부의 가족들은 새 며느리를 매우 사랑했다. 며느리 역시 친정은 가난했으나 가정교육 만큼은 휼륭하게 받은 처녀였으므로, 시댁 어른들을 아주 극진히 모셨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눈이 오는 날은 입이 심심하구나. 찰떡이나 좀 해먹었으면 좋겠군” 시아버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며느리는 얼른 광에 가서 찹쌀 항아리를 열어 보았다. 다행이도 찹쌀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떡을 만들어 드려야겠네”
며느리는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친정에 있을때 워낙 가난하게 살았던 탓으로 찰떡 만드는 법을 배워 두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님, 찹쌀이 조금 있는데 찰떡을 좀 만들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솥에 물을 조금 붓고 그 위에 시루를 얹으렴 그리고, 시루에다 찹쌀을 넣고 불을 때면 되느니라.”
시어머니는 마침 허리가 아파서 아랫목에 몸을 눕힌채 며느리에게 일렀다. 며느리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불을 얼마나 때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때 아내를 도울 일이 없을까 해서 부엌을 들여다 본 남편이 지게를 지고 나서며 말했다. “여보, 내가 나무를 한짐 져오리다.”
남편은 부엌에 나무를 넉넉하게 쌓아두어 자기 아내가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는데, 며느리는 찰떡을 찌기에는 부엌에 있는 나무가 모자라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가을에 많이 해서 산밑에 쌓아 두었으므로, 밑에 있는 잘 마른 것을 한단 져오기만 하면 되었다. 며느리는 자꾸만 불을 땠다.
부엌에 있는 나무를 다 땔 때까지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헛간에 있는 나무 부스러기까지 모두 긁어서 땠다. 더 땔 나무가 거의 없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에 이어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너무나 세게 땐 나머지 솥과 시루가 깨지고 만 것이다. 며느리는 앞이 캄캄했다.
찰떡은 고사하고 집안의 귀중한 살림살이를 깨 버렸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아, 어쩌면 좋아” 며느리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집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솥과 시루를 깨 버렸으니, 지금까지 귀여워 해 주시던 시부모님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남편마저도 자기를 한심하게 여기며 미워할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며느리는 찰떡 한번 해먹지 못했던 가난이 서러워서 훌쩍훌쩍 울었다. 그때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얘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 며느리를 울면서 말했다. “어머님, 제가 불을 너무 많이 때어 솥과 시루를 깨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쯧쯧! 아가야, 얼마나 놀랐겠니? 내가 곧 내다본다는 것이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구나 모두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금방 얼음같은 호령을 내리리라고 생각했던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따뜻한 말에 감동하여 더욱 흐느껴 울었다.
그때, 나무를 한 짐 지고 들어오던 남편이 울고 있는 아내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저 사람이 왜 우는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불을 너무 때서 솥과 시루를 깼다는구나.” “저런! 내가 나무를 진작 넉넉하게 져다 놓았으면 오늘 같은 날 집을 비우지 않고 불 때는 것을 도와 줄 수 있었을텐데 어머니, 제 잘못이예요.”
남편은 진심으로 미안해 하며 말했다. 그때, 사랑방에 있던 시아버지가 나와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허허, 내가 공연히 찰떡이 먹고 싶다고 해서 너를 고생시켰구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며느리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마저 쑥 들어갔다. 온 가족이 자기를 위해 준다는 것을 안 며느리는 몸둘 바를 모르며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며느리의 말에 늙은 시부모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여보 우리집의 가훈이 화목(和睦)이라고 말해 준 것을 잊었소? 한번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너무 걱정 마오. 앞으로 부모님을 더 잘 모십시다.” 남편은 귀엣말로 속삭였다. 비록 형편은 넉넉치 않으나 서로 위하는 마음,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고귀한 마음을 가진 이 가족은 그 후 더욱 화목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위의 이야기에 합당한 범충선공(范忠宣公)의 글이다.
范忠宣公, 戒子弟曰 :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범충선공이 자식들을 가르치어 말하기를, “비록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남의 잘못을 꾸짖는 데는 밝은 법이요,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잘못을 깨닫는 데는 어두운 법이다.
爾曹, 但當以責人之心, 責己恕己之心, 恕人則不患不到聖賢地位也.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을 것이며,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성현의 지위에 오르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범충선공은 중국 북송(北宋)때의 재상으로 이름은 순인(純仁),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충선(忠宣)으로 범중엄(范仲淹)의 아들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냐는 뜻으로,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흔히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데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 자신을 탓해야 한다. 수원숙우(誰怨孰尤)도 같은 의미의 성어다. 수(誰)·숙(孰)은 누구의 의문사(疑問詞)로 쓰이는 한자며, 원(怨)은 원망하다. 의 한자며 구(咎)·우(尤)는 허물·재앙(災殃)·원망(怨望)을 의미한 한자다.
보원이덕(報怨以德)은 원망하는 사람에게 덕으로 갚는다는 말로 나를 원망하는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덕을 베풀어 줌으로써 나의 삶에 대한 여유(餘裕)를 만들고 사랑이 넘치고 풍족함을 느끼게 한다. 곧 안분지족(安分知足)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진정 보람 있는 삶이다.
조선 명종 때 상진(尙震) 선생은 종명(終命)에 앞서 오멸(五滅)로 멸재(滅財)· 멸채(滅債)· 멸원(滅怨)· 멸정(滅情)· 멸망(滅亡)을 제시했는데 여기에 멸원(滅怨)으로 남에게 크고 작은 원한을 풀어주는 노력을 하라고 주장했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新中)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다섯가지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오계론(五計論)을 펼쳤다. 오계(五計)는 ❶생계(生計) ❷신계(身計) ❸가계(家計) ❹ 노계(老計) ❺사계(死計)이다. 특별히 다섯째인 사계(死計)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가지 인연과 작별하는 일이며 이를 오멸(五滅)이라고 하였다.
오멸(五滅)은 ❶멸재(滅財)로 재물과 헤어지는 일이다. 살아서 마련한 재산에 미련을 두고서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이 멸재(滅財)이다. ❷멸원(滅怨)은 남과 맺은 원한을 없애는 일이다. 살아서 겪었던 남과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씻어내야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남과의 다툼이 있었다면 그 다툼에서 비롯된 원한을 씻어내는 일이 멸원(滅怨)이다. ❸멸채(滅債)는 남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빚이란 꼭 돈을 꾸어 쓴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도 빚입니다 살아있을 때 남에게 받았던 도움을 깔끔하게 갚는 일이 멸채(滅債)입니다. ❹멸정(滅情)은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의 작별하는 일이다. 아무리 정들어도 함께 갈 수가 없고 가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 멸정(滅情) 이다. ❺멸망(滅亡)은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신념이 멸망(滅亡)이다.
명종(明宗) 때 홍계관(洪繼寬)이라는 소문난 점쟁이가 있었다. 그가 사람이 죽는 해 죽는 달까지 맞힌다 하여 상류사회 가마들이 그 문전에 줄지어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상진(尙震) 정승도 이 점쟁이로부터 죽는 연월을 점쳐두고는 그 3년 전부터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끔 사계(死計)를 세워 챙겨나갔다. 당시 지식층에서는 어떻게 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하느냐 라는 사계(死計) 문화가 번져 있었다.
이는 송나라 학자 주신중(朱新仲)의 오계론(五計論) 영향을 받아 오멸(五滅)이라는 노후 철학이 팽배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진 대감은 이렇게 오멸 철학을 실천하며 죽음을 겸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죽는다는 연월이 지나도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홍계관을 불러 맞지 않은 점괘를 두고 따지자 “죽을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오로지 남에게 알리지 않고 베푼 음덕(陰德)뿐입니다”라며 생각나는 음덕 베푼 일이 없는지 물었다.
생각해보니 임금님 수라간에서 금 밥그릇을 훔쳤다가 들킨 별감(別監)에게 장물은 현장에 갖다 놓게 하고 은밀히 사형을 면하게 해 준 일이 있었다. 상진 대감은 그 음덕으로 15년간 더 살았다고 하는데 음덕 덕분이라기 보다는 오멸(五滅) 철학을 실천한 정신적 안정 때문에 오래 살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수원수구(誰怨誰咎)
요즈음 우리나라의 돌아가는 정세를 보면 너무나도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도대체 종을 잡을 수가 없는 지경이다.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은 묻혀 버리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큰소리치는 사람만이 똑똑하고 낯이 서는 세상이 된 것 같아 입맛이 매우 씁쓸함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라고 선뜻 나서서 인정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니,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무언가 잘한 것이나 자랑스러운 것도 있을 텐데, 큰 박수를 치거나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칭찬하는 모습은 찾아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만 존재하는 나라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대한민국 호라는 거함이 어떻게 건재(?)하고 있단 말인가?
명심보감에 나오는 '행유부득 반구제기'(行有不得 反求諸己)라는 말이 있다. '행함에 얻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구한다'라는 뜻인데, 지금의 세태에서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 두고 먼저 실천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원래 사람은 일이 잘되면 내 탓인데, 잘못되면 네 탓이고 조상 탓이고 세상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많다고 하지만, 분명 일이 잘못된 것에 대한 원인은 대부분 나에게 있음을 알고, 나부터 반성한 후 잘못을 고치고 변화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좀 더 확대 해석해 적용한다면, 지금의 불행하고 통탄할 사건들에 대해, 온 국민이 나부터 반성하고 나부터 변화하여 온 세상을 변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굳건하게 갖고 앞장서서 실천할 때, 우리가 바라는 밝고 따뜻한 세상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지도자 대열에 서 있는 분들이 세대·이념·여야·정파·종교 등의 각종 벽을 뛰어 넘어,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나부터 반성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하며, 진정 국민을 위한 양보와 겸양의 미덕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호통을 치면서 나무라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보다는, 나를 먼저 돌아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합리적인 태도를 가질 때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인들이나 각종 모임에서 술 한잔하면서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적하는 사항은 우리나라의 기초질서가 바로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굳이 외국의 예를 들어보면,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을 조금 넘어선 지도급 인사를 그 자리에서 경찰이 수갑을 채워 호송하는 장면을 언론을 통해서 봤는데, 과연 우리나라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될까?
그러한 경우도 못 봤지만, 그런 사례가 있다면 '탄압한다' '무시한다' '민주주의가 무너졌다'는 등의 주장을 앞세우며, 안하무인 식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런 기초질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지도자라고 나설 수 있으며, 남의 잘못에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미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자타(自他)가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조상들이 해왔던 '밥상머리 교육'은 물론 '사도(師道) 존경' 전인교육을 각 가정에서부터 실천하고 '국민의 4대 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할 때 우리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다시 한번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매사에 수원수구(誰怨誰咎)하는 자세를 갖자고. 즉,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느냐?'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없다'는 자세가 생활화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사랑과 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세상이 바뀌길 원하면, 너 자신을 먼저 바꾸어라”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겨울바람이 봄바람 보고 춥다고 한다'는 속담처럼 자기는 되돌아 보지도 않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나도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는 어느 시인의 외침처럼 나부터 변해야 한다.
▶️ 誰(누구 수)는 형성문자로 谁(수)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隹(추)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誰(수)는 ①누구 ②무엇 ③옛날 ④발어사(發語辭) ⑤묻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누구 숙(孰)이다. 용례로는 어떤 사람이나 어느 누구 또는 누구냐고 불러서 물어 보는 일을 수하(誰何), 아무개를 수모(誰某), 어두워서 상대편의 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경계하는 자세로 상대편의 정체나 아군끼리 약속한 암호를 확인하는 사람을 수하자(誰何者), 아무아무를 문어적으로 이르는 말을 수모수모(誰某誰某),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랴 라는 뜻으로 남을 원망하거나 꾸짖을 것이 없다는 말을 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구도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수왈불가(誰曰不可), 얻고 잃음이 확실하지 못한 형편을 이르는 말을 수득수실(誰得誰失),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녹사수수(鹿死誰手), 어느 누구도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는 말을 막감수하(莫敢誰何), 누구들이라고 드러내지 않고 가리키는 말을 모야수야(某也誰也) 등에 쓰인다.
▶️ 怨(원망할 원, 쌓을 온)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夗(원)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怨자는 ‘원망하다’나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怨자는 夗(누워 뒹굴 원)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夗자는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뒹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누워 뒹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怨자는 이렇게 누워 뒹군다는 뜻을 가진 夗자에 心자를 결합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바닥을 뒹굴 정도(夗)의 심정(心)이라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怨(원, 온)은 (1)원한(怨恨) (2)원망(怨望) 등의 뜻으로 ①원망(怨望)하다 ②고깝게 여기다 ③책망(責望)하다 ④나무라다 ⑤미워하다 ⑥슬퍼하다 ⑦위배(違背)되다 ⑧어긋나다 ⑨헤어지다 ⑩풍자(諷刺)하다 ⑪원수(怨讐) ⑫원한(怨恨) ⑬원망(怨望) 그리고 ⓐ쌓다(온) ⓑ축적(蓄積)하다(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원망할 앙(怏), 한 한(恨), 근심할 담(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은혜 은(恩), 은혜 혜(惠)이다. 용례로는 원통하고 한되는 생각을 원한(怨恨), 남이 한 일을 억울하게 또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함을 원망(怨望), 자기 또는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怨讐), 원망하는 소리를 원성(怨聲), 자기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원가(怨家), 남편이 없음을 원망하는 여자를 원녀(怨女), 원한을 품은 여자를 원부(怨婦), 원망하고 꾸짖음을 원구(怨咎), 무정한 것을 원망하면서도 오히려 사모함을 원모(怨慕), 원한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불화를 원구(怨溝), 원한을 품고 악한 짓을 저지름을 원특(怨慝), 원한을 품음을 구원(構怨), 남이 저에게 해를 주었을 때에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일로 앙갚음을 보원(報怨), 노여움과 원한으로 노하여 원망함을 노원(怒怨), 원수를 맺거나 원한을 품음을 결원(結怨), 어떤 일로 말미암아 남의 원한을 삼을 매원(買怨), 털끝만큼 하찮은 원망이나 원한을 발원(髮怨), 깊이 원망함 또는 깊은 원망을 심원(深怨),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원망을 적원(積怨), 몹시 분하여 생기는 원망을 분원(忿怨),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나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을 원친평등(怨親平等),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깊어 잊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원철골수(怨徹骨髓),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말을 원천우인(怨天尤人),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도에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을 사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은심원생(恩甚怨生),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자원자애(自怨自艾),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원망이 쌓이고 쌓여 노염이 깊어짐을 이르는 말을 적원심노(積怨深怒), 원망을 사면서도 꿋꿋하게 일을 진행함을 이르는 말을 임원감위(任怨敢爲),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묵은 원한을 잊어 버린다는 말을 배주해원(杯酒解怨),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등에 쓰인다.
▶️ 咎(허물 구, 큰북 고)는 회의문자로 人(인)과 各(각; 다름)의 합자(合字)이다. 만사가 뒤틀림의 뜻이 전(轉)하여 허물, 재앙(災殃)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咎(구, 고)는 ①허물, 저지른 잘못, 죄과 ②재앙(災殃), 근심거리 ③미움, 증오(憎惡) ④종족(種族)의 이름 ⑤꾸짖다 ⑥미워하다, 증오(憎惡)하다 ⑦책망하다, 비난하다, 벌(罰)하다, 그리고 ⓐ큰북(대형의 북)(고) ⓑ사람의 이름(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허물 건(愆), 허물 하(瑕), 허물 자(疵), 허물 죄(罪), 허물 고(辜)이다. 용례로는 재앙의 징조를 구징(咎徵), 재앙이나 요사스런 기운을 구려(咎沴), 잘못을 들어 나무람을 구책(咎責), 남의 꾸지람을 듣고 스스로 뉘우침을 구회(咎悔), 큰 북을 이르는 말을 구고(咎鼓), 길吉한 것과 흉凶한 것을 휴구(休咎), 원망하고 꾸짖음을 원구(怨咎), 재앙과 허물을 재구(災咎), 재앙과 허물을 화구(禍咎), 흠이나 허물을 이르는 말을 흔구(痕咎), 남에게 허물을 돌려 씌움을 귀구(歸咎), 스스로 책임을 짐을 인구(引咎),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천구(天咎), 지나간 뒤에 옛날의 허물을 나무람을 추구(追咎),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탓하랴 라는 뜻으로 남을 원망하거나 꾸짖을 것이 없다는 말을 수원수구(誰怨誰咎),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고 오직 장래의 일만 잘 삼가야 한다는 말을 기왕불구(旣往不咎), 가득 차면 기울고 넘친다는 뜻으로 만사가 다 이루어지면 도리어 화를 가져오게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을 영만지구(盈滿之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