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81/200530]어느 문상問喪 유감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셨다. 판교집 올라오는 길에 전주 장례식장을 들러 문상을 했다. 향년 90세. 아버지보다 4살, 어머니보다 1살 아래. 옛날로 치면 극노인極老人이지만, 요즘에야 ‘100세 시대’이니, 유족들은 슬프지 않겠는가. 얼마 전 친구가 보내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현재 90세인 어른이 전국에 16019명, 94세 5177명, 99세 648명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5177명 중의 한 분이다.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하겠지만, 치매에 시달리고, 벽화를 그린다든지, 걷지 못하거나 누워만 계시면 그것처럼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터. 당사자는 물론 자식들도 못할 일임이 분명하다.
그 어르신만 생각하면, 초등학교 시절 방학책에 나오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이야기(형님네는 식구가 많으니까 더 많아야지, 동생네는 돈쓸 데가 많으니 더 많아야지, 서로의 노적가리에 나락다발을 갖다얹어주다가 달빛에 논 가운데에서 딱 마주쳤다는)가 떠오를 정도로, 한 동네에 사는 형님과 아우의 사이가 유난히 좋았다. 논농사든 밭농사든 항상 형님네 일이 먼저이고, 당신네 일은 나중이었다. 그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참 보기 좋았다. 요즘말로 하면 '빅 브라더스Big Brothers'였다. 反面敎師반면교사라고, 나도 나중에 크면 형님네와 그렇게 살아야지, 마음을 먹기도 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어림 반푼어피도 없는 얘기인 것을. 쯧쯧쯧.
그래도 어제 그 어르신은 ‘이 시대 최고의 효자’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신지 채 한 달이 안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큰딸이 나와 초등학교 동창인데, 두어 달쯤에 암으로 유명을 달리 했지만, 알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도 그나마 다행일 터. 할머니와 두 분은, 말 그대로 평생을 흙에만 파묻혀 사셨다. 4남3녀(손주가 15명이다)를 낳아 키우고 가르치느라, 뼛골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하신 걸 동네사람 모두가 다 안다. 그러고는, 조금 일을 덜해도 되련만, 몸에 밴 농삿일이라 얼마 전까지 놓을 줄을, 놓을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으셨던 분들이다.
내 여자동창은 효녀였다. 친정부모를 못잊어 시도때도 없이 내려와 고구마도 캐고 참깨도 털던, 가장 믿음직한 딸이었건만, 부모보다 앞서 갔다.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가끔씩 마주치면, 나와도 몇 마디 못나누고 ‘내외하던’ 음전한 친구였는데. 참 안타까웠다. 벌써 죽은 시골동창들이 10명은 된다. 교통사고로, 몹쓸 놈의 암으로. 하늘은 그들의 목숨을 왜 그리 빨리 거둬가는 것일까.
상가집 문상 풍경이 이제 완전히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식장 식탁이 모두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뀐 것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이제 어느 상가집에든 고스톱이나 카드하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 어제는 한 팀이 한켠에서 카드를 하는데, 차라리 반가웠다. 또한 문상을 하려면 주로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고, 부의금 봉투도 미리 준비해 왔건만, 원색의복들도 많다. 등산복 차림으로 문상을 해도 이제 흉이 안된다. 부의금 봉투도 현장에서 넣기 일쑤다. 당연히 봉투 속종이에 고인의 명복을 비는 한두 마디 글을 쓸 턱이 없다. 덜렁 배춧잎 몇 장, 아니면 사임당 한두 장 넣은 부조금 봉투나 ‘영혼이 없는 듯한’ 애도가 ‘형식’에 불과하기에 조금은 슬프다. 성인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산다지만, 그래도 조금 격식을 갖출 수는 없을까. 한마디로, 갈수록 문상풍경이 '인간미人間美'가 없이 삭막하게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 어느 마을에서는 발인 전날 새벽 3시쯤 ‘빈 꽃상여’를 상둣꾼들이 메고 상가집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풍악을 울리고 유족들을 위로하던 ‘빈 상여놀이’를 했었다. 1986년 7월, 장인어른이 누워 가실 상여를 메고 1시간여 하던 ‘빈 상여놀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미풍양속이라 했다. 그 시간, 얼마나 슬프던지, 막내사위 주제에 얼마나 많이 울었던지, 주위에서 말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담이지만, 장인어른은 췌장암 투병 6개월만에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의 통일’을 걱정했었다. 나야말로 ‘통일의 일꾼’이 되어 이 한 몸을 바쳤어야 했는데, 이렇게 반거들충이로 ‘6학년’이 되다니, 못난 이가 따로 없고, 지극히 한심스런 일이다.
지금도 어디에서 꽃상여로 망자를 모시는 곳이 있을까? 우리 소싯적엔 오수장에서도 상여를 파는 곳이 있었고, 동네마다 상여집이 있어 상여틀이 있었는데 말이다. ‘북망산이 어디메뇨, 어여-어여’ 요령잽이의 노랫소리가 구슬퍼, 동네앞을 지나갈 때면 닫힌 대문 사이로 구경을 하곤 했는데(할머니는 흉한 것이라고 보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도 79세(85년 그때만 해도 장수인 셈이다)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산으로 영원히 주무시러 가셨다. 27세에 홀로 되어 8살, 2살 두 아들만 데리고 고단한 한 생을 마친 분이, 안방에서 주무시는 듯 가셨는데, 어머니도 그 길을 그대로 따라 안방에서 자식 품에서 주무시듯 가셨으니, 복이라면 큰 복일 것이다.
두어 달 전에 들은 얘기다. 충남 논산의 막내매제 마을에서 상이 있었는데, 공주 어디에선가 꽃상여를 사와 장례를 치르는데, 상둣꾼이 없어 동네 60대 청년들이 상여를 메었다는 것이다. 매제도 상여를 멨는데, 모두 상주喪主를 욕하기 바빴다는 것이다. 고인 생전에 불효자로 소문난 상주가 아버지 ‘살아서 잘 모셔야지’ 죽고나서야 꽃상여로 보내드리면 무슨 소양(소용)이냐는 것이고, 무단시 동네사람들 고생만 바가지로 시켰다는 것이다. 씁쓸한 얘기를 들었지만, 아직껏 꽃상여가 있다는게 마냥 신기했다. 이것은 한 친구로부터 들은 믿기지 않는 얘기다(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 서울 어느 장례식장에 밤 12시쯤 문상을 갔는데 '상주 퇴근함'이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태世態가 변한다한들, 이것은 아니지 않을까. 흐흐
문상을 하고 육개장 두 그릇를 해치우고 고속버스로 상경하면서, 새삼스레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斷想이 들었다. 동네는 물론이고(85세 이상 할아버지는 한 분도 안계신다) 오수면에서도 아마 최고령일 우리 아버지는 언제, 어떻게 돌아가실까? 부디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안방에서 하루이틀 아프시다 돌아가시면 얼마나 좋을까? “원도 한도 없다, 이제 가야겠다”며 열이틀 동안 온갖 노환약도 끊고 식음을 전폐한 어머니처럼 가신다면야, 보내드리는 우리도 ‘당신의 죽음복’으로 알고 위안이 되지 않을까?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 걱정없다. 100% 100수壽 하실 건 무조건 ‘따논 당상’일테니 말이다.
첫댓글 효심가득한 효자의 지극정성과 함께하시니 100수가 무슨 문제가 되리오!
노후를 자식과 함께하는 행복과
부모를 모시고 지낼수 있는 홍복은
지금시대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행운이라 생각됩니다.
우천의 효성으로 가능하게 된
보기드문 귀거래사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모습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상장례 풍습은 지역이 아니라 동네마다 틀려서 흉보기도 지적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장례봉사를 30여년 해왔지만
기본적인 예절도 많이 무너졌어도 세월의 흐름을 탓해야지 개인을 탓하는 시절은 지났거늘 여깁니다.
그래도 호상이라고 웃고 떠드는곳을 들르면 마음한곳이 아파옵니다.
우리 엄마 94세에 일주일 아프고 돌아가셨는데 이웃에서는 정말 호상이라고 떠들고 웃고 잔치분위기 비슷했는데
막내 아들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장례식장에서 웃지는 맙시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