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1. 법우 스님
남북조시대 불도징(佛圖澄)스님의 수제자 도안(道安)스님은 전란을 피해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떠돌아다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얼굴은 못생겼지만, 언행(言行)은 부드럽고 맑았다. 항산(恒山)에 사탑을 건립하고 머물자, 수많은 학인들이 찾아왔다. 그곳에 머문 지 14년이 되는 해에 전란이 닥쳐오자, 양양(襄陽)으로 떠나면서 400여명의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은 이제 내 곁을 떠나라. 새가 두 날개만으로 자유롭게 허공을 떠돌 듯, 인연 따라 세상을 돌아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
그 가운데 법태 스님은 양주로 떠나고, 법화 스님은 촉으로 떠나고, 법우(法遇) 스님은 강릉으로 가서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법우 스님이 경전을 강설하는 자리를 마련하자, 400여명의 학인이 몰려들었다. 오직 한 가지 사명이 있었으니, 증오와 파괴의 삶을 벗어나 평화롭고 온화하게 살아가는 승가를 구축하겠다는 것이었다.
스승께서 말씀하신 “강물이 바다에 드는 순간 만 가지 이름을 버리고 ‘바다’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듯, 불법의 바다로 들어오면 모두 부처님의 아들이 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제자들의 성씨를 ‘석(釋)’씨로 통일했다. 생각을 통일하고, 말을 통일하고, 몸가짐을 통일하고, 같은 계율을 수지하고, 같은 견해를 지니고, 이익을 공유해 서로 화합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육화경(六和敬)’을 승단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예불, 좌선, 강의, 공양, 포살, 자자 등 승가에서 행해지는 일상의 예법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실행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제자 가운데는 깎고 다듬기보단 쌓고 뽐내기에 익숙하고, 스승의 덕행을 흠모하기보단 스승의 지식과 명성을 탐내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 제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풍습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예의를 차림에 있어 술만큼 좋은 것이 없다”면서 공공연히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가 결국 한 제자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법우 스님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킨 제자를 꾸짖었다.
“한 잔 두 잔엔 서로 형 아우라 칭하면서 화기애애하다가 석 잔 넉 잔엔 원수가 되는 것이 술이다. 공자 같은 성인이 아니고야 누가 감히 낙이불음(樂而不淫)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자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겠다고 출가한 승려가 아닌가. 욕망을 벗어나 열반의 안온한 삶을 살겠다는 사람이 못된 근성을 부추기는 술과 고기를 즐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법우 스님은 행여 불연(佛緣)이 끊어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워 그 제자를 내치지 않았는데, 풍습이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스승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학인이 새로 들어오거나 오랜 시간 함께한 학인이 떠날 때마다 우의를 다진다는 핑계로 몰래몰래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발 없는 소문은 멀리 양양까지 전해졌다.
어느 날, 도안 스님으로부터 대나무 통이 하나 도착했다. 대나무 통엔 한 줄의 서신도 없고, 가시가 촘촘히 박힌 굵은 나뭇가지 하나만 들어있었다. 한참 가시회초리만 바라보던 법우 스님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시자에게 말했다.
“종을 울리고 북을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라. 한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
대중이 위의를 갖추고 엄숙히 모이자, 법우 스님은 대나무 통을 앞에 놓고 향을 사른 후에 스승이 계신 양양을 향해 절을 올리며 통곡했다.
“제가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여 멀리 계신 스승님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법우 스님의 통곡에 대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러자 눈물을 거두고, 통 속의 가시회초리를 꺼내 사원의 기강을 잡는 유나(維那)에게 건네며 명했다.
“회초리로 나를 때려라. 호되게 치지 않으면 너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법우 스님은 대중을 향해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 감히 스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유나는 눈물을 머금고 가시회초리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가시가 살점에 박히고, 가사와 장삼을 뚫고 핏물이 튀었다. 대중들의 작은 흐느낌이 이어지고 나서야 유나의 매질은 멈췄다. 땅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비는 400명의 대중 앞에서 법우 스님은 참담한 얼굴로 참회했다.
“모든 허물이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그날 이후 장사사의 대중은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없었고, 강릉 사람치고 장사사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2. 쌍운 스님
조선 영조 때, 직지사에서 수행하신 쌍운(雙運) 스님은 온화한 분으로 모든 제자들을 평등하게 대했다. 말수가 적었고, 크게 소리 내어 웃거나 노기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성질을 잘 내는 사람이 스님을 마주하면 절로 너그러워지고, 원한을 품고 싸우던 사람도 스님이 나타나면 싸움을 멈추었다. 제 잘난 맛에 목청을 돋워 열변을 토하던 사람이나 세상사 나 몰라라 뒹굴 거리던 사람도 입을 닫고 옷깃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직지사 강당은 학인들의 대밭이었고, 거처인 방장(方丈)은 동자승들의 놀이터였다. 정월 어느 날도 점심 공양을 마친 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한 동자가 엽전 두 냥을 손에 꼭 쥐고 한쪽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밖에서 찾는 소리에 놀라 화들짝 눈을 떴다. 엽전을 얼른 책상에 올려놓더니, “예” 하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모여 있던 동자들이 빠져나가는데, 한 사미가 눈치를 살피더니 책상 위의 엽전을 슬그머니 집어 들고 나갔다. 스님은 지켜볼 뿐,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 한 동자가 뛰어와서 책상 바닥까지 뒤져도 엽전이 보이지 않자, 금세 주먹만 한 눈물이 맺혔다. 스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스님, 제 돈이 없어졌어요.”
“돈을 어디다 두었는데?”
“방금 전에 이 책상에다 올려놓았거든요.”
“돈이 뭐 그리 소중하다고 사내가 눈물까지 흘리고 난리냐?”
“돈이 소중하지요, 아님 뭐가 더 소중합니까?”
“그렇게 소중하면 스스로 잘 간직했어야지.”
“급해서 그랬지요. 찾을 때 빨리 가지 않으면 원주스님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곳에다 덜렁 돈을 던져두는 사람이 어디 있냐?”
“……”
“가져간 사람보다 잃어버린 네가 잘못이 크다. 길거리에다 돈을 던져두고 가져가지 않기를 바라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덤벙대다 돈을 흘린 사람이 잘못이냐, 그 돈을 주워간 사람이 잘못이냐?”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손짓으로 동자를 다가오게 하더니, 엽전 두 냥을 꺼내 주었다.
“그 버릇 고쳐주려고 내가 일부러 그랬다, 요놈아,”
“큰스님이 장난치신 거예요? 난 또.”
“다음부터는 잘 간수하거라.”
동자는 언제 울었냐는 얼굴로 생글거리며 방장을 나갔다. 동자의 입을 통해 소문이 온 절에 퍼졌다. 다음날 아침 공양시간이었다. 발우를 거둘 무렵, 한 사미가 앞으로 나와 방장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큰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거라.”
뜻밖의 일에 대중이 깜짝 놀랐다. 죽비를 잡은 유나가 사미를 다그쳤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대중 앞에서 사실을 밝혀라.”
사미는 품에서 엽전 두 냥을 꺼낸 후, 어제의 잘못을 숨김없이 말했다. 유나의 노한 음성이 큰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출가자가 도둑질했으니 바라이죄로 다스리겠다. 사미는 당장 옷을 벗고 이 절을 떠나라.”
그러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다섯 냥은 훔쳐야 바라이죄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구도 아닌 사미지 않은가? 행업을 충분히 숙달하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크게 벌주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네. 스스로 자수했으니, 유나도 너그럽게 처분하시길 바라네.”
유나는 방장스님의 뜻을 받들어 사미에게 보름간 참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중공사를 마치고 방장까지 따라간 유나가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관대하신 것 아닙니까?”
“아직 철모를 나이지 않은가? 잃어버린 돈은 다시 얻으면 되고, 잘못된 버릇은 앞으로 고치면 되는 걸세. 엽전 두 냥 때문에 평생 도둑놈이란 낙인을 지고 살게 할 수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