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지성·허세로 살던 흑인 아들, 성년 이후 찾아온 공허·부끄러움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 집어들며 “난 혹시 쿨한 척만 했던 게 아닐까”
배움의 기쁨
✺ 배움의 기쁨(Losing my cool)|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지음(Thomas Chatterton Williams)|김고명 옮김|다산책방|312쪽|
올해 연말은 특별하다. 코로나 거리 두기의 긴 시간을 보낸 끝에 드디어 거리낌 없이 송년회를 즐길 수 있게 된 3년 만의 연말인 것이다. 친구들과 소식을 나누다 보면 우리의 안부는 곧 부모 안부와 이어진다. 우뚝한 어른이었던 부모는 우리 손길이 필요한 노인이 되었고, 그분들이 져온 한 생애의 결산은 중년을 맞이한 우리 삶과 촘촘하게 얽혀 있다.
나에게 2022년은 아버지를 새로 만나는 시간이었다.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가정을 안온하게 지켰지만 아버지는 자식과 소소하게 친밀한 시간을 보내는 기술이 서툰 사람이었다. 늦은 저녁 은은한 술기운과 함께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같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질 때 아버지는 오래 집을 떠나 있다 방금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주 최근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근면한 삶과 은은한 사랑이 나에게 준 고마운 안정감을 깨달았다.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Thomas Chatterton Williams)의 ‘배움의 기쁨(Losing my cool)’을 읽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생각했다. 토머스의 아버지 클래런스는 ‘열성 아빠’의 모델과도 같다. 그는 흑백 분리 정책을 실시하던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 싱글맘의 아들로 태어나 박사 학위를 가진 엘리트가 되기까지 일생을 건 투쟁을 벌여야 했다. 한평생 책을 1만여 권 탐독하며 장벽을 하나하나 부숴 나가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좀 더 나은 삶 누리기를 소망하며 일찍부터 아들의 교육과 독서를 열성적으로 챙긴다.
그러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토머스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인종적 정체성을 의심받을 일 없는 순수한 흑인 남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기란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힙합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욕설과 완력으로 백인들을 위압하기, 여자를 거칠게 대하기, 금목걸이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기 같은 것이었다.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쿨하게 살기, 이는 흑인이 위선적 백인 중심 미국 사회에 저항하고 선명한 차별화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단호한 허무주의의 강령이다. 흑인의 한계를 뚫기 위해 발버둥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은 흑인의 바운더리로 돌아가기 위해 역방향으로, 무지성과 미혹의 방향으로 전력 질주한다.
그 누구보다 자식 교육에 열성이었던 아버지 클래런스의 ‘공들여 키운 귀한 말이 진흙탕에서 당나귀와 노새와 나뒹구는 모습을 보는 심정’을 한탄한다. “하지만 그 말을 평생 가둬둘 순 없겠지. 계속 가둬두는 건 별로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잖아?” 이것이 클래런스와 우리 아버지의 공통적 자식 사랑법인 듯하다. 아버지는 자식의 선택을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 노릇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저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지켰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허풍과 불성실의 교리를 따르며 ‘진짜 흑인의 쿨한 삶’을 살아가던 토머스는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공허와 부끄러움을 느끼며 마치 어떤 자석에 이끌리듯이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집어 들기 시작했는데, 나는 한 사람의 진실했던 삶이 그의 자식에게 영원한 집이 되어주는 이런 장면을 눈물 없이 넘기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장서 1만권과 박사 학위가 아니었더라도, 나의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자라나 건강한 자기 생각을 가진 성인으로 일어서기까지 항상 내 곁에 함께했다. 그리고 내가 뒤늦게 아버지 식의 말없는 사랑을 깨닫고 갑자기 수줍게 고마운 마음을 느낀 것은 이 책을 읽은 다음의 어느 날이었다.
가장 흑인답지 않은 분야인 철학과 문학이라는 진로를 선택한 토머스는 어느 날 서재로 들어와 체스 한판을 청하더니 아버지가 정말로 자랑스럽다고 쑥스럽게 고백한다. 내가 과연 토머스만큼 커다란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나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한평생 어색한 사이였다. 하얗게 쌓인 눈처럼 내 아버지의 머리도 새하얗다. 아버지가 주신 모든 믿음과 사랑에 감사한다는 말씀을 늦기 전에 꼭 드려야겠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께 드리는 2023년 새해 선물이 될 것이다.
✵ 저자 :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Thomas Chatterton Williams)
인종 문제에 관하여 동시대에서 가장 신선하고 섬세하고 도발적이고 진보적인 비평가.(『더 크리틱』)
1981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났다.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난 혼혈이지만, 세상의 기준에서 자신은 흑인임을 일찍이 알았다. 힙합이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아버지의 훈육에 따라 공부에 파묻히는 이중생활을 했다. 경제학을 배워 월가에 입성하려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철학을 전공했고 이후 뉴욕 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화비평가이자 『뉴욕타임스매거진』의 기고 작가로써, 프랑스에서 가족과 거주하며 미국과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한다. 2019년에는 인종 정체성을 다룬 도발적인 회고록 『흑과 백의 자화상(Self-Portrait in Black and White)』을 출간했다.
이 책은 석사과정 과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자유 주제를 골라 강경하게 논평하라는 과제를 받은 그는 힙합 시대 흑인 문화의 타락에 관한 글을 단숨에 써냈고, 『워싱턴포스트』에 실려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이 논평을 책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회고록이 탄생했다.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타락한 힙합 문화에 취한 또래 집단을 향한 절연장이자, 주변의 어리석음에서 나를 지킨 아버지에게 바치는 감사 편지이자, 상상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독창적이고 강력하고 매력적인 문화를 쌓아올린 이전 세대 흑인들을 향한 헌사다."
✵ 역자 : 김고명
‘책 좋아하고 영어 좀 하니까 번역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만약 번역가가 못 되면 회사에 취업할 생각으로 경영학도 함께 전공했다. 졸업을 앞두고 지원했던 대기업 인턴에서 미끄러진 다음, 미련 없이 번역가의 길을 택했다.
글밥 아카데미에서 번역을 배웠고, 영문학과 경영학의 양다리 덕분인지 경제경영서 번역 의뢰를 가장 먼저 받았다. 내친김에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더 했다. 현재 바른번역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원문의 뜻과 멋을 살리면서도 한국어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번역을 추구한다.《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를 직접 쓰고, 《직장이 없는 시대가 온다》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등 40여 종의 책을 번역했다.
출처: 조선일보 2022년 12월 31일(토) 문화·라이프>책(심윤경 · 소설가)/ Naver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