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라고 하며 어머니는 유오(劉?)이다. 유오는 큰 연못가에서 쉬고 있다가 설핏 잠이 들어 신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태공이 달려가 보니 교룡(蛟龍)이 유오의 몸에 올라가 있었다. 얼마 후 유오가 임신을 하여 유방을 낳게 되었다.
유방은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와서 용을 닮았으며 수염을 길렀다. 왼쪽 넓적다리에는 검은 점이 72개가 있었다. 사람됨이 어질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도량이 넓었다.
유방은 나이가 들자 시험을 쳐서 사수정(泗水亭)을 지키는 정장(亭長)이 되었다. 그러나 유방은 관청의 관리들을 깔보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주점에 자주 갔다. 유방이 술에 취해 드러누우면 유방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주모가 기이하게 생각했다. 유방이 술을 마시러 오는 날이면 술이 평소보다 몇 배씩이나 팔렸다. 그래서 주점에서는 유방에게 술값을 받지 않았다.
일찍이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진시황의 행차를 구경하게 되었다. 유방은 그 광경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아! 사내 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야 되는데.”
선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은 패현 현령과 친했다. 여공은 원수진 사람을 피해 현령의 빈객이 되어 패현에 살았다. 패현의 호걸과 향리들은 현령에게 귀빈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공을 방문하여 예물을 바치며 인사하였다. 당시 주리(主吏)였던 소하(蕭何)가 그들이 바치는 예물을 관리하였다.
“진상한 예물이 천 냥이 못 되는 사람들은 당하에 앉으시오.”
유방은 하례금 만냥을 내겠다고 종이에 써냈으나 사실은 한 푼도 가진 게 없었다. 그 종이가 전해지자 여공은 놀라 유방을 문 앞에서 맞았다. 여공은 관상을 좀 보는 사람이었는데, 유방을 보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러자 소하가 말했다.
“유방은 허풍이 심하니 믿지 마십시오.”
유방은 사람들의 눈을 무시하고 상석에 앉았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 여공은 눈짓으로 유방에게 남아 있으라 하였다. 연회가 끝나 모두들 가고 유방만 혼자 남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관상 보기를 좋아하였소. 많은 사람들의 관상을 보았으나 당신만한 관상은 없었소. 그러니 부디 자중하시오. 그리고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당신에게 시집을 보내었으면 하오.”
유방이 떠난 후 여공의 아내가 화를 내었다.
“언제는 우리 딸이 비범하다면서 귀인한테 시집을 보내겠다고 안 하셨습니까? 패현 현령이 딸을 달라고 할 때도 안 된다 하시더니 어찌 유방 같은 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십니까?”
“허허. 그 일은 아녀자가 알 바 아니오.”
여공은 잘라 말하고 딸을 유방에게 시집 보냈다. 여공의 이 딸이 나중에 혜제(惠帝)가 되는 유영과 노원공주를 낳은 여후(呂后)이다.
몇 년 후 유방은 휴가를 내어 시골집에 다니러 왔다. 여후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이 여후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다. 여후가 먹을 것을 주니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부인은 이 남자 아이 때문에 귀하게 되겠구려.”
그리고 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역시 귀한 상이라고 하였다. 노인이 떠난 후 유방이 방에서 나왔다. 여후는 노인이 한 얘기를 유방에게 들려주었다. 유방은 급히 노인의 뒤를 쫓아가서 자기 관상이 어떤가 물었다.
“부인과 아이들 관상 모두 당신을 닮았더이다. 당신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상을 가졌소.”
정장으로 있던 유방은 명을 받아 부역 가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산(驪山)으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 도망가 버렸다. 여산에 도착하면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유방은 풍읍 서쪽 늪지에 이르러 가던 길을 멈추고 술을 마셨다. 밤이 되자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모두 도망가시오. 나도 도망가야겠소.”
그런데 유방을 따르려는 장사가 10여 명이 되었다. 유방은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늪지의 좁은 길을 지나갔다. 앞서 가던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앞에 큰 뱀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술에 취한 유방이 말했다.
“사나이 앞길에 무엇이 두려우리?”
유방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검을 휘둘렀다. 뱀은 두 동강이 났고 길이 열렸다. 다시 몇 리 길을 더 가다가 유방은 취해서 길에 누워 버렸다. 뒤 처져 오던 사람이 뱀이 죽은 곳에 이르렀는데 한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노파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내 아들은 백제(百帝)의 아들이라오. 뱀으로 변신해서 쉬고 있는데 적제(赤帝)의 아들이 죽여 버렸다우.”
그 말을 남기고 노파는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람이 얼마 후에 유방을 만나 그 이야기를 전했다. 유방은 우쭐하였다.
진나라 이세황제 원년, 진승(陳勝)이 기현(?懸)에서 봉기하여 진현(陳縣)에서 왕위에 오르며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하였다.
여러 군현에서 군수나 현령을 죽이고 진승에게 호응하였다. 패현 현령도 두려워 패현 백성들을 동원하여 진승에게 호응하고자 하였다. 주리인 소하와 옥리(獄吏)인 조참(曹參)이 현령에게 말하였다.
“나리는 진나라 관리인지라 백성들이 나리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친 패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이십시오. 수백 명에 이르는 그들을 이용해서 백성들을 위협하면 모두 복종할 것입니다.”
현령은 번쾌(樊?)를 시켜 유방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방은 이미 백여 명에 가까운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현령은 유방의 무리를 보고 후회하였다. 그들이 모반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하였다. 겁이 난 소하와 조참은 성벽을 넘어서 유방에게 항복하였다. 유방은 마을 원로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화살에 묶어 성 안으로 쏘았다.
“천하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렸소. 원로들께서 진나라 관리인 현령을 위해 성을 수비하고 있으나 봉기한 제후들이 패현에 들이닥칠 것이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현령을 처형하고 대표를 뽑아 제후들과 호응한다면 가족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오.”
원로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었다. 그들은 유방을 새 현령으로 세우려고 했다. 유방은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그 일을 맡고자 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유방은 패공(沛公)이 되었다.
유방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군대의 깃발은 붉은 색으로 하였다. 유방은 소하, 조참, 번쾌 같은 젊은 현리(縣吏)들과 함께 병사 이삼천 명을 모아서 호릉과 방여를 공략하고 돌아와 풍읍을 수비하였다.
다음해 진승의 부장(副將)인 주장(周章)이 거느린 군대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희수(戱水)까지 쳐들어갔다가 대패했다. 이때 연(燕), 조(趙), 제(齊), 위(魏)나라가 왕을 옹립하였고 항량, 항우도 오(吳)에서 봉기하였다.
진나라의 사천군수가 풍읍을 포위하자 유방이 출전하여 크게 무찔렀다.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을 맡기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하였다. 사천군수는 설현에서 패하여 척현(戚縣)으로 도망갔으나 조무상에게 잡혀 죽였다.
이때 진승이 주불(周?)에게 풍읍을 공격하게 하였다. 주불은 옹치에게 사람을 보냈다.
“풍읍은 예전에 위왕(魏王)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오. 이미 위나라에서 평정한 땅이 수십 성에 이르오. 지금 위나라에 항복하면 그대를 봉하여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나 항복하지 않으면 풍읍을 공격할 것이오.”
옹치는 평소 유방 밑에 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던 터라 위나라에 항복한 후 성을 지켰다. 그 소식을 들은 유방은 풍읍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도리어 병이 들어 패현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옹치 때문에 대단히 화가 난 유방은 마침 진승이 죽어 임시로 왕에 추대된 경구(景駒)가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경구 밑으로 들어갔다.
이때 진나라 부장 사마니(司馬尼)가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을 함락시킨 뒤 탕현(?縣)으로 돌아갔다. 동양 사람 영군(寧君)과 유방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소현(蕭縣) 근처에서 사마니와 교전했으나 패하였다. 두 사람은 유현으로 퇴각하였다가 병사를 모아 탕현을 공격하여 삼일만에 함락시켰다.
유방은 탕현에서 투항한 병사를 합쳐 오륙 천명의 군사를 얻게 되었다. 이에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풍읍으로 군사를 몰았다. 도중에 항량이 설현(薛縣)에 있다는 소식을 들려왔다. 유방은 100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항량은 병사 5,000명과 장수 10명을 내 주었다. 유방은 지체하지 않고 풍읍을 공격하였다.
항량은 각지의 장군들을 설현으로 소집하였다. 죽은 진승을 대신하여 초나라 후손인 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초나라 왕으로 세우고 우이를 도읍으로 삼았다.
몇 개월 후 항량은 항보를 취하고 제나라를 위하여 동아(東阿)를 구했다. 그리고는 패주하는 진나라 군대를 단독으로 추격하였다. 유방과 항우에게 성양(城陽)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복양(?陽) 동쪽에 진을 친 유방과 항우는 진나라 군대와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옹구(雍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진나라 장군 이유(李由)를 죽였다. 이후 외황을 공격하였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연승을 거둔 항량은 교만해지기 시작하였다. 송의가 간언하였으나 항량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장함의 군대에 습격을 받아 항량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유방과 항우는 진류를 공격하고 있었다.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신과 함께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여신의 군대는 팽성 동쪽, 항우의 군대는 팽성 서쪽, 유방의 군대는 탕현에 진을 쳤다.
항량을 죽인 장함은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쳐서 크게 무찔렀다. 조왕(趙王) 조헐은 거록성(鉅鹿城)으로 숨었다. 장군 왕리가 거록성을 포위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항량이 패한 후 도읍을 우이에서 팽성으로 옮기고 여신과 항우의 군대를 합쳐 통솔하였다. 유방은 탕군의 군장(軍長)으로 삼아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조나라에서 누차 구원을 요청해 오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를 부장, 범증을 말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한편 유방에게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곡관에 진입하게 하였다. 이때 회왕은 제일 먼저 함곡관에 진입하여 관중(關中)을 평정하는 장수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고 여러 장수들 앞에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해도 진나라 군대가 강성하여 패주하는 적군을 끝까지 추격하곤 하였다. 초나라 장수들은 함곡관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다만 항우만이 항량의 원한을 갚기 위해 유방과 함께 함곡관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러 원로 장수들이 회왕에게 간언하였다.
“항우는 성급하고 사나워 남을 잘 해치옵니다. 지난번에 양성(襄城)을 함락시켰을 때, 양성 백성들을 모조리 생매장해 버렸사옵니다. 차라리 덕망이 있고 관대한 자로 하여금 인의를 베풀면서 서쪽으로 진격하게 하시면 폭정에 시달려 온 백성들의 마음을 쉽게 얻어 관중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항우는 보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회왕은 항우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유방만 보냈다. 유방은 흩어져 있던 진승과 항량의 병사를 모으며 서쪽으로 진격하다가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합류했다.
유방이 고양을 지날 때의 일이다. 고양 사람 역이기(?食其)가 유방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역이기가 유방을 만나러 갔을 때, 유방은 침상에 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게 하고 있었다. 역이기는 절을 올리는 대신 허리를 굽히며 말하였다.
“패공께서 진나라를 토벌하실 의향이 있다면 걸터앉은 채로 어른을 접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방은 일어나서 사죄하고 역이기를 상석에 앉게 했다. 역이기는 유방에게 진류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유방은 진류를 습격하여 진나라의 비축 식량을 얻었다. 유방은 역이기를 광야군으로 삼고 역상(?商)을 장수로 삼아 개봉(開封)을 공격하였다. 개봉이 함락되지 않자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백마(白馬)와 곡우(曲遇)에서 진나라 장군 양웅(楊熊)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양웅이 형양으로 도망치자 이세황제는 그를 참수하였다. 유방은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격하여 취하고, 장량의 계책에 따라 한(韓)나라의 환원(?轅)을 공략하였다.
이 무렵 조나라의 장군 사마앙(司馬?)이 황하를 건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하였다. 이에 유방은 평음(平陰)을 공략하고 황하를 건너 낙양(洛陽) 동쪽에서 진나라 군대와 맞붙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방은 양성(陽城)으로 퇴각하였다가 기병을 모아 남양(南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남양 태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쳐 성을 굳게 지켰다. 유방이 완성을 지나쳐 가려고 하자 장량이 간언하였다.
“지금은 급하게 함곡관으로 들어가려고 할 계제가 아닙니다. 함곡관에 주둔하고 있는 진나라 병력은 많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형의 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완성을 함락시키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함곡관의 군대와 맞서게 되었을 때 뒤에서 완성의 군대가 공격해 올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되면 협공을 받아 위태로와질 것입니다.”
장량의 계책에 따라 유방은 밤중에 군사를 돌려 동이 틀 무렵 완성을 삼중으로 포위하였다. 남양 태수가 자결하려고 하자 그의 빈객인 진회가 죽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대신 유방을 만났다. 진회는 유방을 설득하였다.
“신이 듣건데 먼저 함양에 진입하는 사람이 관중왕이 된다 하였는데, 공께서는 완성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완성은 수십 개의 성이 이어져 있어 백성은 많고 식량도 풍부합니다. 또한 관리나 백성 모두가 항복하면 죽게 될 것으로 알고 있어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공께서 완성을 공격하게 되면 죽거나 부상당하는 병사가 속출할 것이며, 공께서 완성을 떠나면 완성의 군대가 추격하여 타격을 줄 것입니다. 어느 경우나 공께 불리합니다. 그러나 남양 태수를 그대로 봉해서 완성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그리고 서쪽으로 진격하면 나머지 성들도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성문을 열 것입니다.”
유방은 남양 태수를 은후에 봉하고 진회를 천호후에 봉하였다. 그런 후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가니 모두 항복하였다.
당초 항우는 송의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명을 받았는데,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이 되자 경포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항우에게 귀속되었다. 항우가 거록성을 포위하고 있던 진나라 왕리를 무찌르고 장함을 항복시키자 제후들이 항우에게 귀속되었다.
조고(趙高)가 이세황제를 죽인 후 유방에게 사신을 보내 관중을 나눠 각자 왕이 되자고 제의하였으나 유방은 이를 믿지 않았다. 대신 장량의 계책을 써서 역이기와 육고(陸賈)를 보내 진나라 장수들을 설득하는 한편 뇌물로 회유하였다. 유방은 무관(武關)을 습격하여 함락시킨 후 남전(藍田) 남쪽에서 전투를 치뤘다. 유방은 마을을 지나칠 때 병사들에게 약탈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 진나라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남전 북쪽에서 진나라와 전투를 벌여 역시 대파하고 여세를 몰아 마침내 진나라 군대를 섬멸하였다.
유방의 군대가 제후들보다 먼저 패상(?上)에 이르렀다. 진나라 마지막 황제 자영(子?)이 흰 수레에 흰 말을 타고 목에 줄을 매고 옥새와 부절을 가지고 나와 지도정(?道亭)에서 항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자영을 죽이자고 하였으나 유방은 관리에게 자영을 넘겼다.
“회왕이 나를 보낸 것은 내가 덕을 베풀 것이라고 여겨서다. 게다가 항복한 자를 죽이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유방이 함양으로 가서 궁궐에 머물려고 하자, 번쾌와 장량이 그러지 말기를 간언하였다. 유방은 그들의 말에 따라 진나라의 보물과 재물 창고를 봉한 후 패상으로 돌아갔다. 또한 여러 현의 원로들을 불러 말하였다.
“원로들께서는 오랫동안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시달려 왔소. 가장 먼저 관중에 들어오는 자가 관중왕이 된다는 약조가 있었으니 마땅히 내가 관중왕이 될 것이오. 이 사람은 지금 원로들에게 법을 가볍게 하겠다고 약속하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자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것이오. 이것 말고 다른 진나라 법은 모두 폐지하겠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다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니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러자 진나라 백성들이 다투어 고기와 술 등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사양하였다.
“창고에 양식이 많아 부족함이 없는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소.”
이 말을 전해들은 진나라 백성들은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유방을 찾아와 유세하였다.
“관중의 재산은 천하의 열 배가 되며 지형은 견고합니다. 항우가 항복해 온 장함을 옹왕(雍王)으로 봉하여 관중의 왕이 되게 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지금 온다면 패공께서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군사를 보내 함곡관을 지키게 하십시오. 제후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에 군사를 징발하여 관중을 굳게 지키십시오.”
유방은 그 계책에 따랐다. 항우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관문이 열리지 않았다. 크게 노한 항우는 경포 등으로 함곡관을 공격하여 접수하게 하였다. 항우가 함곡관을 지나 희수에 이르렀을 때,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은 유방이 패할 것이라 생각하여 항우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패공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독차지하려고 하옵니다.”
범증은 유방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항우는 다음날 유방을 치기로 하고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때 항우의 군대는 40만인데 100만이라 불렸고, 유방의 군대는 10만인데 20만이라 불렸다. 병력으로만 따진다면 승부는 이미 판가름 나 있는 상황이었다.
항우의 숙부 항백이 패상에 가서 장량을 만나고 돌아와서 항우를 설득하자, 항우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유방은 100여 명의 기병을 데리고 홍문(鴻門)으로 가서 항우에게 사과하였다. 유방은 범증의 계략에 빠져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무사히 패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온 즉시 조무상을 죽였다.
항우는 함양으로 들어가 살육을 일삼고 궁궐을 불살랐다. 항우가 지나가는 곳은 모두 무참히 파괴되었다. 진나라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으나 항우가 두려워 복종하였다.
항우는 사신을 보내 초나라 회왕에게 경과를 보고하였다. 회왕은 약조대로 하라고 하였다. 항우는 회왕이 함곡관으로 가는 대신 조나라를 구원하라 한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기는 하였으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항우는 스스로를 서초패왕이라 칭하며 양나라와 초나라에 걸쳐 있는 구군(九郡)의 왕이 되어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약조를 어기고 유방을 파, 촉, 한중을 다스리는 한왕(漢王)에 봉하고 남정(南鄭)에 도읍을 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중을 셋으로 나눠 세 명의 진나라 출신 장군들을 왕으로 봉하였다. 장함은 옹왕(雍王)으로, 사마흔은 새왕(塞王)으로, 동예는 적왕(翟王)으로 봉하였던 것이다.
초나라 장군 하구신양(瑕丘申陽)을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고, 조나라 장군 사마앙을 은왕(殷王)으로 봉하고, 조왕(趙王) 조헐을 대(代) 땅으로 옮기는 한편 조나라 승상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으로 봉하였다.
경포(?布)를 구강왕(九江王)으로, 공오(共敖)를 임강왕(臨江王)으로, 오예(吳芮)를 형산왕(衡山王)으로, 연나라 장군 장도(臧?)를 연왕(燕王)으로 봉하였다. 연왕이었던 한광(韓廣)을 요동으로 옮겨 그곳의 왕이 되게 하였으나 한광이 거부하자 장도가 공격하여 죽였다. 그리고 진여(陳餘)에게 세 현을 식읍으로 내리며 남피(南皮)에 머물게 하였고 매현(梅?)에게는 10만호를 식읍으로 내렸다.
제후들은 각자 봉국으로 돌아갔다. 유방이 봉국으로 떠날 때 항우는 3만 명의 군사만 내주었다. 그러나 유방을 흠모하여 따르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방은 한중 땅으로 들어가면서 관중과 한중 사이의 깊은 골짜기 사이에 놓인 다리를 끊어 버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제후들의 습격을 대비하는 한편 관중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항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유방이 남정(南鄭)에 도착하니 동쪽 산동(山東) 지방에 고향을 둔 장수와 병사들 중 도망친 자가 많았으며 남은 병사 중에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가 많았다.
한신(韓信)이 유방에게 간언하였다.
“항우가 유독 왕을 남정에 머물게 한 것은 유배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우리 병사들은 모두 산동 사람들이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사옵니다. 한 마음으로 병사들이 동쪽으로 가고 싶어하는 이때를 이용하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시간이 흘러 천하가 평정되고 나면 그럴 기회가 오지 않으니 지금 계책을 세워 동진하시어 천하의 패권을 잡으시오소서.”
항우는 함곡관을 나선 후 의제에게 침현(?縣)으로 천도하도록 재촉하였다.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신하들이 의제를 배반하자 항우는 형산왕과 임강왕에게 명령하여 의제를 죽였다.
전영(田榮)에게 원한이 있던 항우는 제나라 장군 전도(田都)를 제왕(齊王)으로 세웠다. 화가 난 전영이 전도를 죽인 후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전영은 팽월을 장군으로 삼으며 양나라에서 초나라에 모반을 일으키게 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소공 각을 내보내 팽월을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대패하였다.
진여는 항우가 자기를 왕으로 봉해 주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전영에게 군사를 얻어서 상산왕 장이를 공격하였다. 대패한 장이는 유방에게로 도망쳤다. 진여가 조왕(趙王) 조헐을 대(代)에서 맞아들여 다시 조왕으로 세우니, 조왕은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이에 격분한 항우는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유방은 한신의 계략에 써서 고도(故道)로 우회하여 옹왕 장함을 습격하였다. 장함은 진창(陳倉)에서 한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지만 패하여 도망쳤다. 호치(好?)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싸웠지만 역시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 마침내 유방은 함양에 이르렀다. 폐구에 있는 장함을 포위하는 한편 장수들을 보내어 농서(?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유방은 장군 설구(薛歐), 왕흡(王吸)에게 남양에 주둔하고 있는 왕릉(王陵) 군대의 협조를 얻어 태공과 여후를 패현에서 데려오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군대를 보내 양하에서 이를 저지하였다. 또한 오현(吳縣) 현령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봉하여 한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한나라의 기세에 눌려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 하남왕 신양이 모두 항복했다. 유방을 한신에게 군사를 주어 한왕 정창을 무찌르게 한 후 한태위(韓太尉) 신(信)을 한왕(韓王)으로 삼았다.
유방은 제후의 장수들을 회유하고 백성을 다독이면서 민심을 얻어 갔다. 유방이 임진관(臨晉關)을 통해 황하를 건너자 위왕(魏王) 위표가 군대를 거느리고 귀순하였다. 곧이어 하내를 함락시켜 은왕(殷王)을 포로로 잡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낙양에 이르렀다.
신성(新城)에 이르렀을 때 동공(董公)이라는 관리가 유방을 가로막고 의제가 피살된 상황을 아뢰자 유방은 통곡하였다. 유방은 의제를 위해 발상한 후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천하가 의제를 천자로 섬겼으나 대역무도한 항우는 의제를 강남으로 쫓아내어 죽였다. 과인이 친히 발상하니 제후들은 모두 상복을 입을 것이다. 관중의 모든 병마를 일으키고 하남, 하동, 하내의 군사를 소집하여 제후들과 함께 의제를 시해한 초나라 항우를 토벌하고자 하노라.”
이때 항우는 제나라의 성양에서 전영과 싸우고 있었다. 전영이 패하여 평원으로 도망가자 그곳 백성들이 전영을 죽였다. 제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였으나, 초나라 군대는 제나라 성과 마을을 불사르고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자 제나라 백성들은 초나라에 등을 돌렸다. 전영의 아우 전횡은 전영의 아들 전광을 제나라 왕으로 옹립하였다. 제왕 전광은 성양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항우는 한나라가 동쪽으로 진군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제나라를 완전히 제압한 후에 한나라를 공격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 사이 유방은 상산왕 장이, 하남왕 신양, 한왕 정창, 위왕 위표, 은왕 사마앙의 군대를 징발하여 팽성으로 쳐들어갔다. 항우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유방과 항우는 팽성 동쪽의 수수(?水) 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항우는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러 수많은 병사를 죽였다. 한나라 병사들의 시체 때문에 수수 강물이 막혀서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유방의 부모와 처를 패현에서 잡아와 볼모로 삼았다. 제후들은 한나라가 패하자 모두 초나라에 투항하였다. 새왕 사마흔도 초나라로 도망쳐 왔다.
유방은 하읍에 머무르고 있던 주여후에게 가서 병사를 모은 후 탕현에 주둔하였다. 유방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우현(虞縣)에 이르게 되자 수하(隨何)를 구강왕 경포에게 보내며 일렀다.
“그대는 경포를 설득하라. 경포가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면 항우는 틀림없이 경포를 공격할 것이다. 경포가 항우를 몇 개월만 붙잡고 있어 주기만 한다면 천하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수하가 경포를 찾아가 설득하니 경포는 초나라를 배반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용저를 보내 경포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사이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던 유방은 태자 유영(劉盈) 찾게 되어 태자로 세우고 역양(?陽)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물을 끌어들여서 폐구성을 잠기게 하여 함락시켰다. 폐구가 함락되자 장함은 자살하였다. 유방은 관중의 병사를 징발하여 변방 지역을 수비하게 단단하게 하였다.
한편 구강왕 경포는 용저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수하와 함께 몰래 한나라로 도망쳐 왔다. 경포가 시간을 버는 동안 유방은 많은 군사를 모아 다시 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한나라는 경현(京縣)과 삭성(索城) 사이에서 초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위왕 위표가 부모의 병을 핑계로 휴가를 청해서 위나라로 돌아갔다. 위표는 위나라에 도착하자마자 황하 포구를 폐쇄하고 한나라에 등을 돌렸다. 유방은 역이기를 보내 위표를 설득하였으나 위표는 듣지 않았다.
유방은 장군 한신을 보내 위표를 치게 하였다. 한신은 위나라를 대파하고 위표를 사로잡았다. 한나라는 위나라를 평정한 후, 하동군(河東郡), 태원군(太原郡), 상당군(上黨郡)을 설치하였다.
연이어 장이와 한신에게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조나라를 평정하고 진여와 조왕 조헐을 죽였다. 다음 해에 장이를 조왕에 봉하였다.
유방은 형양(滎陽) 남쪽에 주둔하여 황하로 통하는 보급로를 구축하고 오창의 식량을 차지하였다. 유방은 이러한 상태로 1년 가까이 항우와 대치하였다. 항우가 자주 보급로를 공격하여 한나라 군대의 군량을 부족하게 하더니 결국 유방을 포위하였다.
유방은 강화를 요청하였으나 항우는 응하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범증은 항우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팽성으로 돌아가는 도중 병으로 죽었다.
한나라는 군량이 바닥나자 밤에 갑옷을 입은 궁녀 이천 명을 동문으로 나가게 하고, 장군 기신(紀信)이 거짓으로 유방인 척 하여 초나라 병사들을 속였다. 그 사이 유방은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서문으로 빠져나갔다.
유방은 주가, 위표, 종공에게 형양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주가와 종공이 위표를 죽였다. 위표가 이미 한나라를 배반한 적이 있어서 언제 다시 배반할 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관중으로 돌아간 유방은 군사를 모아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원생(袁生)이 유방에게 간언하였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형양에서 몇 년 동안 대치하였으나 늘 한나라가 불리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무관으로 나가시옵소서. 그러면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할 것이옵니다. 왕께서는 보루를 높이 쌓고 굳게 수비만 하시면서 시간을 끌어 형양과 성고의 병사들을 쉬게 하시옵소서. 그런 후에 다시 형양으로 가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이렇게 초나라를 바쁘게 하면서 병력을 분산시키고 우리 군사들은 쉬게 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옵니다.”
유방은 경포와 함께 병사를 모으면서 행군하였다. 유방이 완(宛) 땅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남하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싸우지 않고 수비만 견고히 하였다. 이 틈을 타서 팽월이 수수를 건너서 항성(項聲), 설공(薛公)과 하비(下?)에서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팽월을 공격하자 유방도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성고에 주둔하였다.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가서 형양을 함락시킨 뒤 주가와 종공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성고를 포위하였다.
유방은 등공(謄公)과 함께 수레를 타고 성고 북문으로 달아났다. 유방은 자신을 사신이라고 속여 장이와 한신의 군영으로 들어가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장이를 북쪽 조나라에 보내 병사를 모아 오게 하는 한편, 한신에게 동쪽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군사를 얻게 된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소수무(小修武) 남쪽에 있는 초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정충(鄭忠)이 나서 유방에게 보루를 높이고 참호를 깊게 파서 수비만 하라고 간언하였다. 유방은 정충의 계책을 사서 노관, 유고에게 병사 2만 명과 기병 수백 명을 주어 초나라 땅으로 공격해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팽월과 함께 연현(燕縣) 성 서쪽에서 초나라 군대를 무찌르게 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는 양나라 땅의 성 10여 개를 얻었다.
한편 한신은 유방의 명을 받고 동쪽으로 진격하였으나 평원(平原)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유방의 명을 받은 역이기는 제왕(齊王) 전광을 설득하여 항우를 공격하게 하였다.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나라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한나라에 속았다고 생각한 전광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도망갔다.
항우는 한신이 제나라와 조나라를 평정하고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저와 주란(周蘭)을 내보냈다. 한신이 그들과 싸우는 동안 장군 관영이 출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다.
제왕 전광은 팽월에게로 도망쳤다. 이 무렵 팽월은 양나라에서 항우 군대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등 수 차례 타격을 가하였다.
항우는 조구(曹咎)에게 성고를 단단히 지키고 있으면 보름 내로 양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항우는 진류, 외황, 수양을 공격하여 차례로 함락시켰다.
한나라가 성고의 조구에게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초나라 군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나라에서는 병사들을 시켜 5-6일 동안 초나라를 욕하게 하였다. 화가 난 조구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사수(?水)를 건넜다. 초나라 병사들이 사수를 반쯤 건너자 한나라는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초나라 군대는 대패하였고, 조구와 사마흔은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회군하였다. 한나라 군대는 형양 동쪽에서 종리매(鍾離昧)를 포위하고 있다가 항우가 도착하자 도망쳤다.
한신은 제나라를 평정한 후 사신을 유방에게 보냈다.
“제나라는 초나라에 근접해 있사옵니다. 신을 임시로 제왕(齊王)에 봉해 주시옵소서. 신의 권력이 미미하다면 제나라를 복종시킬 수 없사옵니다.”
유방이 노하여 한신을 공격하려고 하자 장량이 말렸다.
“차라리 한신을 제왕으로 봉해주시옵소서. 그러면 한신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나라를 지킬 것이옵니다.”
유방은 장량에게 인수를 주며 한신을 제왕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용저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에 두려워진 항우는 무섭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였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초나라와 한나라 간의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유방과 항우는 광무산(廣武山)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항우는 유방과 단독으로 자웅을 가리고자 하였다. 유방은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꾸짖었다.
“당초에 회왕의 명을 받들어 먼저 관중에 진입하는 자가 관중왕이 되기로 하였거늘, 너는 그 약속을 어기고 나를 촉한(蜀漢)의 왕으로 봉하였다.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다. 너는 왕명을 사칭하여 송의를 죽였다. 이것이 두 번째 죄다. 조나라를 구원한 후 마땅히 회왕께 보고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을 위협하여 관중에 진입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죄다. 회왕께서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라고 하셨거늘 너는 함양 궁궐에 불을 지르고 시황제의 묘를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였다. 이것이 네 번째 죄다. 또 항복한 진왕(秦王) 자영을 이유 없이 죽였다. 이것이 다섯 번째 죄다.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명을 신안에서 생매장하고 그들의 장수인 장함과 사마흔을 왕으로 봉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죄다. 제후들의 장수는 중요한 지방의 왕으로 삼고 원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 그들의 신하들이 다투어 모반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일곱 번째 죄다. 의제를 팽성으로 쫓아내고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한왕(韓王)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 초나라 땅을 네 땅으로 하였다. 이것이 여덟 번째 죄다. 그뿐이랴? 사람을 보내 의제를 강남에서 암살한 것은 네 놈의 아홉 번째 죄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정사를 공정하게 행하지 않고 약속을 어겨 신의를 저버린 것은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이것이 네 놈의 열 번째 죄이다. 나는 의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제후들과 함께 포악한 도적을 토벌하러 왔다. 죄인들이나 상대해 할 마땅할 너를 죽이려고 어찌 내 손을 더럽히겠느냐?”
항우는 화가 나서 숨기고 있던 쇠뇌를 쏘았다. 화살은 유방의 가슴에 맞았다. 유방은 가슴에 상처를 입고서 발을 더듬었다.
“저 도적놈이 내 발가락을 맞혔구나.”
그러나 유방이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량은 유방에게 고통스럽더라도 일어나 군대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다독이도록 하였다. 초나라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병사들의 마음은 잡았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성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상처가 아물자 관중으로 들어갔다. 역양에서 나흘간 머문 후 다시 전쟁터로 돌아왔다. 관중에서 온 지원 병력을 광무(廣武)에 있던 군대와 합류시켰다.
팽월은 여전히 양나라에서 초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유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신이 스스로 제왕(齊王)에 오르자 제나라 승상이었던 전횡이 팽월에게 도망쳐 왔다.
항우는 팽월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데다가 한신까지 공격해 오자 두려워졌다. 그래서 항우는 유방과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가 다스리고 동쪽은 초나라가 다스리기로 협정을 맺었다. 또한 억류 중이던 유방의 부모와 처를 돌려보냈다. 두 나라의 병사들 모두 만세를 부르며 그 협정을 반겼다.
항우가 군대를 동쪽으로 철수하자 유방도 협정에 따라 철군하려고 하였다. 장량과 진평이 초나라 군대가 지쳤으니 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유방은 그 계책에 따라 항우를 추격하였다.
양하(陽夏) 남쪽에 이르러 한신과 팽월에게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라 하였다. 유방이 고릉(固陵)에 도착하였는데도 한신과 팽월의 군대는 오지 않았다. 유방은 오히려 초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유방은 후퇴하여 참호를 깊게 판 채 수비를 두텁게 하였다.
유방은 한신과 팽월에게 더 많은 영지를 나눠주라는 장량이 계책을 썼다. 과연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 유고가 초나라로 쳐들어가 수춘(壽春)을 포위했으나 유방은 고릉에서 패하였다.
유방은 항우의 부장인 주은(周殷)을 회유하였다. 주은은 구강군의 군사를 일으켜 경포와 회동하였다. 이들은 유고와 한신, 팽월의 군대와 함께 해하(垓下)로 집결하였다.
유방은 제후군과 거느리고 해하에서 항우와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30만 군사를 거느린 한신이 선봉에 서고 공희(孔熙)는 그 좌측에, 진가(陣嘉)는 그 우측에 진을 쳤다. 유방은 후방에 서고, 유방의 뒤에 주발(周勃)과 시무(柴武)가 진을 쳤다.
한신이 먼저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퇴각하였다. 공희와 진가가 좌우에서 협공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한신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반격에 나서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항우는 한나라 군사들이 부르는 초나라 노래 소리를 듣고 초나라가 완전히 점령당했다고 생각했다. 항우가 도망가자 초나라 군대는 와해되었다. 유방은 관영에게 항우를 추격하게 하였는데, 항우는 자결하였다. 이로써 초나라는 평정되었다.
유방은 정도(定陶)로 돌아오자마자 한신의 군영으로 쳐들어가서 병권을 빼앗아 버렸다.
유방은 제후와 장상들의 권유로 황제에 올랐다. 황제 유방은 한신을 초나라 왕으로 삼고, 팽월을 양나라 왕으로 삼고, 한(韓)왕 신을 한(韓)나라 왕으로 삼았으며 형산왕 오예를 장사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회남왕 경포, 연나라 왕 장도, 조나라 왕 장오(張敖)는 예전과 같았다.
유방은 낙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런데 임강왕 공환이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노관과 유고에게 공환을 치도록 하였다. 몇 개월 후 공환은 항복하였고 낙양에서 죽였다.
황제로 즉위한 후 유방은 낙양의 남궁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제후들과 장군들은 짐을 두려워 말고 솔직하게 내 물음에 대답해 보라. 짐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고기와 왕릉이 대답하였다.
“폐하는 오만하여 신하를 업신여기나 항우는 어질어 신하를 아끼옵니다. 그러나 폐하는 장수를 보내 전쟁에서 이기면 그 장수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더불어 이익을 나누었사옵니다. 반면 항우는 장수들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이익을 나누지 않았사옵니다. 이것이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까닭이옵니다.”
유방은 한바탕 웃고는 말하였다.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계책을 짜내어 천리 밖 전투에서 승리를 엮는 일에서는 짐이 장량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돌보며 군량을 공급하고 보급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일에서는 짐이 소하만 못하다. 또한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움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짐이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의 걸출한 인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항우에게도 범증이 있었으나 그나마 끝까지 믿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이다.”
유방은 낙양에 도읍을 정하기로 하였으나 제나라 사람 유경(劉敬)과 장량의 말을 듣고 그날 즉시 관중으로 돌아가 도읍을 정하였다.
연왕 장도가 모반을 꾀하여 대나라를 함락시켰다. 유방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장도를 사로잡았다. 노관(盧?)을 연왕으로 세우고 번쾌에게 대나라를 평정하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초왕 한신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유방이 좌우 대신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한신을 토벌하자고 하였다. 유방은 진평의 계책에 따라 운몽(雲夢)을 돌아보는 척하면서 진현(陳縣)으로 제후들을 불러모았다. 한신이 도착하자 즉시 포박하도록 하였다.
십여 일이 지난 후 유방은 한신을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한신의 봉지를 둘로 나누었다. 장군 유고를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하(淮河) 동쪽을 다스리게 하고 아우 유교(劉交)를 초왕으로 삼아 회하 서쪽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제나라는 강성한 나라이니 친자식이 아니면 제왕으로 봉하지 말라는 전긍(田肯)의 간언에 따라 아들 유비(劉肥)를 제왕으로 삼았다. 또한 한왕(韓王) 신을 태원으로 옮기게 하였다.
흉노가 마읍에서 한왕(韓王) 신을 공격해 왔다. 이를 계기로 한왕 신은 흉노와 손을 잡고 태원에서 모반을 꾀하였다. 그러자 한왕 신의 부장이었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도 옛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옹립하며 모반을 일으켰다. 유방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하였기 때문에 평성(平城)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러자 흉노가 평성을 포위했다. 흉노는 칠일 후에야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유방은 번쾌에게 대나라에 남아서 반란군을 평정하도록 하고, 형 유중(劉仲)을 대나라 왕으로 세웠다.
유방은 평성에서 조나라와 낙양을 거쳐 새로 건설한 도읍인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자 승상 이하의 모든 관료들이 장안으로 옮겨와 정무를 보게 되었다.
소하가 미앙궁(未央宮)을 축조하였다. 유방은 화려하고 웅장한 미앙궁을 보고 노하여 소하를 꾸짖었다.
“천하가 아직도 혼란스러운데 어찌 지나치게 화려한 궁궐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궁궐을 지을 수 있었사옵니다. 또한 천자는 천하를 집으로 삼으니 궁궐이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이 궁궐을 기준으로 하여 후세에는 이보다 더 화려한 궁궐을 지을 수 없게 하심이 옳은 듯 하옵니다.”
소하의 말에 유방은 흡족해 했다.
유방이 동원(東垣)으로 행차하는 길에 백인(柏人)을 들렀다. 조나라 승상 관고(貫高) 등이 유방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유방은 왠지 불안하여 백인에서 하루 머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나쳐 버렸다.
얼마 후 관고의 음모 사건이 발각되었다. 그 사건에 가담한 자들의 삼족을 멸하고 조왕(趙王) 장오를 폐위하였다.
진희(陳?)가 대나라에서 모반을 일으켰다. 유방은 이를 안타까워 하였다.
“진희는 짐의 부하로 매우 신용하는 자였다. 당초 대나라가 요충지라 여겼기 때문에 진희를 상국의 신분으로 대나라를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진희가 왕황 등과 함께 대나라를 차지하려 한다는 건 너무도 뜻밖이다.”
유방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진희를 공격하였다. 한단(邯鄲)에 도착한 유방은 형세를 살펴보고 기뻐하였다.
“한단을 근거지로 삼지 않고 장수(?水)에 기대 있는 걸 보니 진희도 능력이 다 했나 보다.”
진희의 부장들이 모두 장사꾼 출신이라는 얘기를 듣고 유방이 말했다.
“짐은 그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겠다.”
그리고 진희의 부장들에게 황금을 주어 회유하도록 하니 투항해 오는 자가 많았다.
유방이 한단에서 진희를 토벌하기도 전에 진희의 부장인 후창(侯敞)이 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왔다. 왕황은 곡역(曲逆)에 진을 쳤고 장춘(張春)은 황하를 건너 요성을 공격하였다. 한나라는 장군 곽몽(郭蒙)을 내보내 이들을 무찌르게 하였다.
태위 주발은 대나라를 평정하고 마읍에 이르렀다. 마읍이 항복하지 않자 그곳을 함락시킨 후 살육하였다.
진희의 부장 조리가 동원에 버티고 있었는데 유방은 한 달여 동안 공격을 하고도 동원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조리의 병사들이 유방을 욕하자 화가 난 유방은 동원을 함락시킨 후, 자기에게 욕한 자를 찾아 목을 베고 아닌 자는 사면해 주었다. 그리고 아들 유항(劉恒)을 대나라 왕에 봉하였다.
회음후 한신이 관중에서 모반을 꾀해 삼족을 멸하였다. 양왕 팽월이 모반을 일으켜 팽월을 잡아 촉으로 쫓아 보냈으나 다시 모반하려고 하여 삼족을 멸하였다. 회남왕 경포가 모반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왕 유고의 봉지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회하를 건너자 초왕 유교가 설현으로 도망쳤다. 유방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세웠다. 경포의 군대는 회추(會?)에서 대패하였다. 유방은 달아난 경포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유방은 장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패현을 들러 패궁(沛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옛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청해서 술을 마시며, 패현의 아이 120명을 뽑아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유방은 축을 타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따라 부르게 하더니 일어나 춤을 추면서 눈물을 흘렀다.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짐이 비록 장안에 머무르고 있지만 만년이 지나도 내 혼백은 고향 패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짐이 패공일 때부터 포학무도한 자들을 정벌하여 천하를 얻게 되었으니 어찌 패현을 잊을 수 있겠나? 짐은 패현을 탕목읍으로 삼을 것이다. 패현 백성들의 부역을 면제해 대대로 납세와 복역을 하지 않게 해 주겠노라.”
십여 일이 지나서 유방이 패현을 떠나려 하자 패현 백성들이 한사코 머물기를 청하였다.
“짐의 수행원들이 많아 머물수록 그대들에게 부담스럽다.”
패현 백성들은 마을 서쪽으로 가서 유방을 배웅하며 예물을 바쳤다. 그러자 유방은 천막을 치라 하고 사흘을 더 머물렀다. 패현 백성들이 풍읍의 부역 또한 면제해 줄 것을 청하자 유방은 망설였다.
“풍읍은 짐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나 옛날 풍읍 백성들이 짐을 배반하고 옹치를 따라 위나라를 도왔다.”
패현의 백성들이 간청을 하자 유방은 풍읍도 패현과 마찬가지로 부역을 면제해 주라 하였다.
그 사이 한나라 장수들은 경포를 조수(?水) 남북쪽에서 협공하여 대파하고 도망가는 경포를 추격하여 파양(?陽)에서 죽였다. 주발은 대나라를 평정하고 진희를 당성(當城)에서 죽였다.
장안으로 돌아온 유방은 항복한 진희의 부장이 진희가 연왕 노관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는 말을 들었다. 유방은 즉시 심이기를 보내 노관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노관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심이기가 돌아와 노관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는 보고를 올리자 유방은 번쾌와 주발을 보내 노관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아들 유건(劉建)을 연왕으로 세웠다.
유방은 경포와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났다. 병세가 악화되자 여후가 명의를 수소문해 불러 들였다.
유방이 의원에게 병세를 물었다.
“폐하의 병은 치료될 수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의원을 나무랐다.
“짐은 평민으로 세 자 길이의 검을 들고 천하를 손에 넣었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 편작이 온다한들 짐의 운명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유방은 치료를 받지 않고 의원을 물렸다.
여후가 유방에게 물었다.
“만일 상국 소하가 죽으면 누구를 상국으로 삼으리까?”
“왕릉이면 되지 않겠소? 하지만 왕릉은 고지식하니 진평에게 돕도록 하는 것이 좋소. 진평은 머리가 뛰어나지만 대사를 혼자 처리하는데는 문제가 있소. 주발은 중후하나 문재(文才)가 부족하오. 그러나 유씨(劉氏)의 한나라를 평안케 할 자는 주발 말고 없으니 태위로 삼을만 하오.”
“그 다음으로는 누가 좋겠사옵니까?”
“그 다음 일은 당신이 알 바 아니오.”
노관이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변경에서 유방에게 사죄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방은 장락궁에서 서거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나도록 발상을 하지 않았다. 여후는 심이기와 의논하였다.
“폐하와 같은 평민 신분이었던 여러 장수들이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야. 하물며 이제 어린 군주를 섬기게 되었으니 모반을 꾀하지 않겠나? 그들을 멸족시키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럽게 될 것 같아 걱정이야.”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장군 역상에게 알리자, 역상이 심이기를 찾아갔다.
“폐하께서 서거하신 지 나흘이 지났으나 발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장수들을 죽이려 한다니 천하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이오. 진평과 관영은 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번쾌와 주발은 이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있소. 그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연합하여 장안으로 쳐들어 올 것이오. 그리 되면 이 나라가 망하는 건 순식간이올시다.”
심이기가 여후에게 이 말을 전하자, 여후는 발상을 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노관은 유방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흉노에게 도망쳤다.
유방을 안장한 후 고황제(高皇帝)라 높여 불렀다. 그리고 태자 유영(劉盈)을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혜제(惠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