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1일
인천을 출발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친구집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산만을 지나 천안방향으로 가다 풍새로 틀어 1번국도로 진입하여 얼마 가다보면
우측으로 공주가는 길이 나오고 한참가다 논산에서 강경방향 도로로 하여
함열 황등 그리도 도착지인 익산이 나오는데
강경지나 성당이라는 동내는
저와는 이상한 인연이 있는 동내입니다.
1945년8월15일
원숭이나라 원숭이대왕이란자는
항복을 선언하여 우리 대한민국도 해방이 되는 기쁨도 잠시
이승만정부는 친일파들을 도려내지 못하고
되려 그 친일파들을 등용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한 것인데요.
일제시절 당시 일본군 하사관으로 근무했던 김종원
자칭인지 타칭인진 모르나 백두산 호랑이소릴 들으며
경상도에서 수많은 양민을 빨갱이니 공산당이니 하며 재판도 없이
엄청난 양민을 구덩이를 파고 학살하여 구덩이로 떨어지면 묻기를 반복하였고
다시금 전라도로 넘어와
또다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는데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조국이 일본놈들에게 당하는 것이 원통하여
독립운동을 하시다 붙잡혀
전주교도소에 투옥되어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 나오셨는데
당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으셨다 합니다.
하여 해방이 되자 당시 성당이라는 동내에서 큰 농장을 하던 일본인 고깽이라는자가
할아버님께 찾아와 논문서 밭문서 모두 드릴태니
자기가족 일본으로 갈수 있게만 해다오! 라 하여
당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동료들과 협의하여 그렇게 하자 로 결정되어
할아버님께서 그 문서들을 보관하여 되었는데
당시 저희 가문은 상당한 재산이 있었고
아버님께서는 공부를 상당히 잘 하셨는데
보모가 있어 보살피실 정도 였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김종원이는 그런 저희 집안을 가만둘리가 없었고
수차 태러를 일삼았으나
제 할아버님께서 거부하다가 급기야
익산역 광장에 수많은 군중이 모인자리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일본놈들이 두고간 것이라면
숫가락뭉뎅이 하나라도 국민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옳거늘
친일파였다가 처벌 받지 아니하고 줄을타 다시금 국록을 먹는자가
어찌하여 그 재산을 탐하는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자
군중들은 우래와 같은 함성으로 호응을 하였는데
그 며칠후 할아버님을 끌고가 옥구군 바닷가에서 김종원은 흉탄을 쏘아
할아버님을 다른 시신들과 함께 버려둔 것이며
김종원은 당시16세 소년이신 아버님을 끌고가 공산당 대위라며
빠따를 얼마나 치고 죽인다고 끌고가자 놀라신 할머님께서
모든재산 다 줄태니 우리아들 살려다오!라고 애원하여
겨우 살려 대려오셨는데
그 때 맞은 상처가 낫지않아 돌아가실 때 까지 고름이 나와
짜고 닦아드리며 소독해 드리곤 했답니다.
성당에서 큰농장을 하던 고깽이가 두고간 재산을 빼았으려
김종원이 쏜 그 흉탄을 2010년 장손인 제가
할아버님과 할머님 산소를 이장하려 파묘하는데
할아버님 가슴부근에서 발견하여 지금도 제 서랍에 고이 보관 중 입니다.
그런 연유와 서두에 쓴 2008년2월1일
아래 사진으로 보시시피 1톤 트럭의 신호위반으로 사고를 당하여
바이크는 문론 1톤트럭이 폐차하는 사고를 당한 곳도 성당앞이었던 것인데
정말 가끔 지나다보면 상당이 바로 인근에 보이고
할아버님의 역사와 제가 당한 사고 연관성은 없으나
이상항 인연으로 생각되어 긴글 써봤습니다.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2년 후 촬영
첫댓글 지금도 청산되지 못한 역사라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내시는지 상상도 못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후꾸시마 오염수 얘기만 나오면
속이 불이나 매우 힘든시간을 보냅니다.
오늘은 눈이 이상하여 내일 안과에
가보려하네요.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왠말이냐 앞잡이가왠말이냐
천공인지 천치인지 저따위 사이비 교주에
놀아나는 정권이 답답합니다.
법무부장관이란자는 깐죽거리기나하고 어줍잖은 말장난이나
어휴 아무래도 저 열받아 눈병이 도지나 보네요.
그래요.
롯데는 일본기업입니다.
난 롯데는 안갑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