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맞서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코로나 사태로 몸이 피곤해 질대로 피로해졌다.
입맛도 가버렸다. 구미(口味)에 맞는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을 해보지만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으로 피폐한 몸 원상 복귀하는데 굴비가 으뜸이 아닌가.
나 소년 시절 찢은 굴비살과 열무김치 한 보시기 그리고 찬밥 한 공기, 맹물 한 그릇 소반(小盤) 받아 마루
끝자락에서 밥 먹던 생각이 난다. 뛰어놀다 들어와서 먹는 밥이니 또 밥 먹은 후 금방 다시 밖으로 놀러 나가야 하니
마루 끝이 여간 좋지 않다. 뛰어나가기 위함이다.
산란을 위해 영광 법성포 칠산 앞바다를 지나는 참조기를 말린 것이 영광굴비이다.
고려 17대 인종 때, 난을 일으킨 이자겸이 정주(지금의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이 뛰어나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그는 말린 조기를 보내며 자기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의미의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說)이 있다. 이때부터 영광굴비는 수라상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굴비의 참맛은 찬물에 밥을 마른 다음 그 위에 굴비 살을 먹는 것이다. 굴비가 짭쪼름해서 그냥 밥에 얹어
먹어도 좋다. 굴비가 밥도둑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봄 쑥갓 나올 때면 마포나루에 도착한 조기를 구르마
행상(行商)이 가마니에 넣고 팔러 다녔다. 그때 집 집마다 접으로 들여놓았다. 하나엔 하나, 둘엔 둘 세는 행상의 노랫소리가
구성지다. 덤을 달라면 3~4마리 아무 말 없이 던져주었다. 두둑한 인심이 엿보인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채반에 넣어 장독대에 두고 새끼줄에 매달아 담장에 널어놓고 햇볕에 말려 굴비를 장만했다.
조기를 절이고 말리는 일이 봄 한철 행사이다. 찬물에 밥 마른 굴비 얹어 먹던 옛 추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물에 먹으면 비린내 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보리에 저장하면 짠맛도 적어지려니와
비린내가 제거된다고 한다. 그래서 보리굴비라는 이름이 얻어진 것이다. 적당히 찢어 놓은 굴비 살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드려 그 고소한 맛이란! 아, 그 담백한 맛이란! 엄지 척이다. 입맛이 없을 때 보약이다.
무더위에 지친 나의 무기력을 한 방에 날려버린다. 그리고 활력을 되찾게 만든다.
요즈음 보리굴비를 좀처럼 대하기 힘들다. 조기가 전처럼 많이 안 잡히는 것도 아니다.
냉동 창고업자들이 수급을 조절한다며 야금야금 내놓기 때문이다. 매점매석하는 까닭이다.
값을 높여 놓고 명절 때 선물용으로 씨알 좋은 굴비 한 두름에 100~200만원 호가(呼價)한다.
이러니 어디 서민들 근접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나의 굴비 찬양론도 생각하면 헛수고 헛발질에 불과하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굴비가 ‘그림의 떡’인데 그 떡을 아무리 좋게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탁번 시인의 유머스러운 ‘굴비’를 본다. 허허허, 그것 참... 헛수고에 은근히 심기가 불편하다.
집 곁에 있는 ‘세계평화의 숲’공원이나 한 바퀴 돌다 오련다. 그곳에 매미 울음소리가 한참 시끄러울 것이다.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 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굴비/오탁번)
첫댓글 김윤권 선생님, 선생님의 장점은 나이와 성별,들어오시는 날, 모든 것을 오픈 한 것입니다. 그 점이 저는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칭찬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숨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열심히 살겠습니다.